조선해륙전도(朝鮮海陸全圖 )
小橋助人,1894年,136.8×91.8cm.
정가 1圓에 판매된 비교적 큰 이 지도는 1882년 壬午軍亂 때 조선 민중의 습격을 받았던 花房義質의 서문을 비롯한 각종 記文들과 삽도를 넣어 전체적으로 혼란스럽다. 그러나 이 지도가 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매우 많다. 우선 삽도를 보자면 아시아 지역에서 한반도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 주는 극소 축척의 지도가 있으며, 러시아領 포조사덕항 (浦潮斯德港)과 漢江近海·죽변만(竹邊灣), 장전동묘지(長箭洞錨地)·新浦錨地·부산포(釜山浦)·원산진(元山津) 등 조선의 포구, 그리고 京城之圖가 있다. 제목에서 보다 시피 海圖에 가까운 지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지명, 특히 바닷가의 지명들 중에는 서양의 항해자들이 붙인 서양식 지명이 많아 동해의 중북부가 朝鮮灣으로 적혀 있므며, 그 옆에 브로우튼(Broughton)을 나타내는 일본 문자를 기록해 놓았다. 본도뿐 아니라 삽도에도 수심이 표시되어 있다. 浦朝斯德 또는 浦覽斯德이라는 말은 浦潮와 浦람이 일본식으로 訓讀할 때 '우라시오'가 되고 사덕(斯德)은 음독(音讀)할 때 '스도꾸'가 되어 '울라디보스톡'을 가리키는 문자로 쓰였다.
특정 沿岸의 해도가 아니라, 이웃 나라 조선의 바다를 전체적으로 지도화 한 이 지도는 초기 水略測量의 발달 단계를 보여 준다. 20세기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제의 조선지도들은 영국 등의 해도에 크게 의존하여 참모본부의 지도들도 이 점을 밝히고 있었다. 1871년에 들어서 일본 단독의 수로측량이 시작되고 兵務省 아래 수로국이 설치되었다. 강화도조약 당시의 수로측량을 담당한 것은 이 水路局이었을 것이다. 일본 연해 측량에서 외국이 손을 뗀 것은 1882년이었다. 그러나 海圖의 圖式이 결정되는 것은 이 지도가 간행된 지 훨씬 뒤의 일이다. 이 지도에 숫자로 표시된 水深은 보통사람의 표준키 1.8m 단위로 한 것이다. 물 깊이 1, 2는 각각 한 길, 두 길(2?)을 나타낸다.
-영남대학교 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