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지학협회 조선전도(東京地學協會 朝鮮全圖)
東京地學協會,1894年,74.7×48.3cm.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보급된 수많은 조선지도들 중에는 이웃 나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를 제공하던 전문적 단체들이 간행된 것들이 보인다. <동경지학협회 조선전도>역시 그러한 지도들 중의 하나다. 육군 참모본부의 첩보 활동이 군사적인 것이었다면 이러한 단체들의 활동은 보다 종합적인 목적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동경지학협회는 나중에 '東洋學'을 발전시키는 데에 토대를 마련한 지역 연구단체들 중 가장 이른 1879년에 설립되었다.
최초의 爪大學 총장을 역임한 渡邊洪基가 『朝鮮事情』을 번역해 낸 ?本武場과 조선 공사를 지낸 바 있는 花房義質의 힘을 얻어 설립된 이 단체는 '地學에 있어 경제·軍務, 기타에 관한 유익한 사건의 발명이나 本會의 見聞에 관계되는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간편한 방법으로 이를 편찬·출판하여 사원의 강구(講究)에 제공하고 아울러 공중에 보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地學이란 오늘날 말하는 地誌, 또는 지리학을 뜻하는 것이다. 사할린과 중국에 관한 각종 보고서를 내는 한편 『東京地學協會報告』를 간행하여 많은 자료를 제공한 이 협회는 구성원이 주로 군인·관료·정치가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학술적인 것보다 학문 외적인 실용성을 추구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동학군이 전주성에서 물러나고 일본 해군이 청국의 고승호(高陞號)를 격침시켜 조선을 둘러싼 청일전쟁이 시작된 7월에 이 단체는 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관심에 때 맞추어 이 지도를 간행하였다. 유명한 환선(丸善) 서점을 통해 정가 25전에 판매한 이 동판 지도는 널리 보급된 2절지 판형의 대표적인 예가 된다. 이 크기의 조선지도는 대체로 각 도의 경계와 산맥·하천·도로, 그리고 고을들의 위치를 보여주는 데에 그치는 것이다.
3색도로 인쇄된 이 지도에는 仁川 부근을 보여주는 삽도(揷圖)가 있으며 신화적인 임진왜란 古戰場은 무시되어 있다. 한반도의 모습이 오늘날의 지도에 나타나는 것과 매우 가깝게 된 것은 1875년에 처음 나온 앞의 <參謀局 朝鮮全圖>(圖 264)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刊記에 의하면 당시까지 실측된 지도가 없어 기존의 몇 가지 지도를 절충하고 이미 수행한 바 있는 조사 결과를 반영하고, 아울러 내륙을 여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참고하여 이 규격에 맞추어 편집한 것인 만큼 아쉬운 대로 쓸만한 지도가 되었을 것이라 하였다. 해안선은 각국의 해도에 의거하고 지명은 <朝鮮官版八道圖>를 따랐다고 하였다. 이용한 조사자료와 내륙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확인하는 데에는 단서가 될 만한 사례가 있다. 앞에 이야기한 이 단체의 기관지에는 조선 관계 보고서들이 실린 바 있으며, 이 기관지가 1897년 4월에 제18권 4호로써 종간되자 이를 흡수한 『地學?誌』는 일찍이 1884년에 부록으로서 조선을 방문하여 조사한 바 있는 고트셰(C. Gotsche)·西化田久學·石井八萬次郞의 <朝鮮地質槪圖>를 간행된 바 있는 것이다.
이 단체와 동시대에 조직되어 활동한 東邦協會·植民協會, 그리고 東亞同文會 등은 모두가 경쟁하면서 비슷한 작업을 진행시켰다. 동방협회는 1890년에 조직되어 동북 아시아, 동남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등을 조사 영역으로 포함시키고 있었는데 조선에 대한 관심도 커서, 1891년 金田栖太郞으로 하여금 조선 내륙을 답사케 하였는데, 기관지 『東邦協會報告』에 실린 그의 보고서와 더불어 조선 관계 자료들을 엮어 동방총서 조선휘보『東邦叢書 朝鮮彙報(1893)를 간행하기도 하였는데 거기에도 조선지도(39.3×23.2cm)가 실려 있었다. 그 지도는 1년 뒤에 간행된 東京地學協會의 지도보다 훨씬 정확도가 떨어지는 지도였다. 이는 참모국의 지도를 이용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