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원(軒轅)이 배달제국(倍達帝國)의 황제 벼슬을 받게 됨으로써 신농이 다스렸던 유웅국(有熊國)과 복희국(伏羲國)의 통일세력은 황제 헌원의 아들이며 염제 신농(赤帝神農)의 외손자인 소호 금천(少?金天, B. C 2474~2468년)1)에게 이어진다. 중국의 옛 기록에 의하면 소호 금천이 황제 위에 오를 때 궁전에 한 마리의 봉황이 날아들었다고 했다. 새족으로 상징되고 있는 동이가 황권을 장악했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다. 소호 금천의 조정은 새의 이름을 빌려 백관신료를 정하였는데 제비[燕子], 백로(白鷺), 청조(靑鳥), 금계(錦鷄)2) 등으로 일년 4계를 관장하게 하고 봉황(鳳凰)으로 총수상이 되게 하였다.
천황의 전후(戰後) 처리-청구국
천황은 본국으로 개선하기에 앞서 동아시아의 질서를 정리하는 몇 가지의 개편작업을 하였는데, 이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탁록(?鹿)을 포함한 지금의 산동일대[卞朝鮮]에 청구국(靑丘國)3)을 세우고 천황의 일족 치우씨(蚩尤氏)로 하여금 다스리게 한다.
당시는 배달한국(倍達桓國)의 천도(天都)인 신시(神市) 아사달(阿斯達), 동경(東京) 펴라[平壤, 遼陽] 그리고 남경(南京)인 청구(靑丘)가 있었다. 천황이 서울로 옮긴 사실은 『삼성기(三聖紀)』 하권의 「신시역사기(神市歷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이번 전쟁에서 천황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고 총력을 다한 남방의 묘족(苗族)들에게는 그동안 식민지역의 지위를 격상시켜 자치권을 인정하고 치우씨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하는 한편, 견융(犬戎)의 오(吳)장군으로 고신(高辛)을 정복하도록 하였다. 고신은 황제의 증손이며 극(極)의 아들인데, 이때 반란의 뜻을 세우고 수덕(水德)의 박(뛰)에 도읍하고 연호를 기서(己西)라 하였으나, 치우천황의 천하 질서회복의 계획에 따라 결국 멸망되었다.
본시 청구(靑丘)는 치우천황의 나라다. 청구의 청(靑)은 동방을 의미하고, 구(丘)는 땅을 뜻하므로 곧 ‘동방의 세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중국인들의 시각으로 보아 청구(산동반도)가 그들의 동쪽에 있으므로 사서에 청구로 기록하고 있다. 본래 청구는 지금의 산동반도와 요동반도에 걸쳐 있었는데 이들 두 반도를 연결하는 묘도열도가 옛날에는 섬도 더 크고 많았기 때문에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배로 하루내에 만주와 산동을 연결하는 효율적인 교통로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최근에 와서 많은 이곳의 섬들이 가라앉았음이 밝혀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