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환단고기·한민족역사

제4장 탁록대첩-청구국(靑丘國) ③

자연정화 2012. 8. 13. 17:36

출처 : 다물넷


제4장 탁록대첩-청구국(靑丘國) ③



치우사(蚩尤祠)와 치우천황 능(蚩尤天皇陵)

2001년 3월, 산동성(山東省) 문상현(汶上縣) 박물관 팀은 진귀한 비각(碑刻) ‘치우총’과 ‘치우사’를 발견했다. 최근 문상현 남왕진(南旺鎭)에서 논밭수리공사 도중 우연하게 이 비각들을 발견하였는데 현재 문상현 박물관에서 이 귀중한 보물들을 관리하고 있다.

비석‘치우사(蚩尤祠)’에는 비문이 전서체로 ‘치우총(蚩尤塚)’석자가 새겨져 있는데 글자의 크기는 길이 110Cm, 넓이 55Cm, 폭 15Cm이다. 비석의 뒷면에는 역시 예서체로 ‘원화(元和)’라고 쓰여 있다. 원화는 당나라 헌종(憲宗 李純)의 연호로써 비석의 제조시기를 알 수 있게 한다. 이들 비석들의 서체나 필치는 모두 필법이 세련되고 깊이가 있어 속세를 벗어났다는 느낌을 준다.

치우사는 당(唐) 시대와 근세의 우리 만주족(滿洲族)이 중국을 식민통치하던 대청제국(大淸帝國) 시절까지도 당당하게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곳 문상현에 치우총이 있다는 기록은 여러 고문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는데, 우선 이 지방의 『문상현지(汶上縣志)』 「고적편」에 이르기를 치우총이 “남왕호중(南旺湖中)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 『황람(皇覽)』에 “‘치우총’은 동군 수장현 감향성 안에 있는데 무덤의 높이가 7척이었다. 사람들은 매년 10월에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그때 무덤에서 붉은 기운이 하늘로 솟아오른다 하여 이를‘치우기’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비석 ‘치우총’은 길이 238Cm, 넓이 83Cm, 두께 31Cm로 된석회암석이다. 비석의 이마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문양과 ‘대청(大淸)’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석의 양변에는 모두 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태시기(太始記)』에는, “『한지리지(漢地理志)』에 ‘치우가 헌원에게 패하여 회대기연지지(淮岱冀찐之地)로 퇴각하였다.’고 하나 역사 기재에 의하면 서울을 탁록에 두고 몸은 회대에 있으면서 천하를 호령하였다.”라고 하였다.
위의 문장 중 대(垈)는 오늘날의 태산(泰山)이고, 연(찐)은 고지연주(古指찐州)이므로 연주시(찐州市)다.

이번 남왕진에서 ‘치우총’, ‘치우사’ 두 비석이 동시에 발굴됨으로써 우리 한민족이 배출한 불세출의 대영웅 치우천황(蚩尤天皇)의 역사적 실체(實體)가 드러났고 아울러 『한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한 수많은 우리의 옛 기록들을 막무가내로 부정하던 식민사관 추종자들의 기승을 잠재울 수 있게 되어 통쾌하기 그지없다.


◀ ‘마상(馬上) 전투도(戰鬪圖)’ 유화(油畵), 100호

공자(孔子)의 『상서(尙書)』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인문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은 “치우가 제후(諸侯)인 헌원을 벌(伐)했다.”고 명쾌하게 써놓았다. 그리고 『주서(周書)』, 『열자(列子)』, 『시자(尸子)』, 『신서(新書)』, 『태일산어람(太一産御覽)』,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귀장(歸藏)』, 『제왕세기(帝王世紀)』, 『춘추석례(春秋釋例)』, 『고금주(古今注)』 등에 나타난 선진시대(先秦時代)의 기록들도 모두 “황제(黃帝), 염제(炎帝), 치우(蚩尤)가 탁록(?鹿)에서 서로 전쟁을 한 후 이곳에서 동맹(同盟)을 맺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치우천황이 중화족을 대표한 헌원의 항복을 받고 그에게 배달한국의 황제(黃帝) 벼슬을 내려주어 회유한 것을 중국측에서는 동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므로 이 기록들이 아마도 가장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사마천은 홀로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위에 열거한 모든 책들과는 확연히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면 사마천은 어떤 근거로 이와 같은 기록을 남겨놓은 것일까? 만약 사마천이 역사를 꾸미지 않았다면 분명히 저본(底本)으로 사용한 또 다른 역사서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혼란을 야기한 주범은 누구였을까?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며 참고한 것은 공자(孔子)의 『상서(尙書)』였다. 동이족(東夷族) 은(殷)나라 출신인 공자(孔子)는 『상서(尙書)』에서 돌연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고 역으로 쓰며 중국인들에게 아첨하였고, 이를 후세의 사마천이 공자의 곡필을 기쁘게 받아 적었던 것이다. 조선인들이 그토록 존경하였던 공자는 한발 더 나아가 큰활(大弓)을 뜻하는 ‘이(夷)’자의 본뜻을 왜곡시켜 본래의 글자와는 아무 연관도 없이 제멋대로 ‘오랑캐나 도적’을 뜻하는 글로 풀이하여 놓았다.

그러면 공자 자신도 분명히 동이족 출신이었으면서 무슨 이유로 동이족을 폄하하고, 또 치우천황의 위대한 전승기록(戰勝記錄)을 뒤집어 놓았을까?
아마도 그 자신이 중국인의 정부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한평생 노력했던 사실로 보아 본래의 출신성분을 감추고 중국인 행세를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문제의 『상서』는 과연 어떤 책이었을까?
『상서(尙書)』는 약 4000년 전 하(夏)나라, 은(殷)나라의 왕실(王室) 비사(秘史)를 모은 책이다. 고대부터 내려오던 이 중요한 왕실 기록들의 일부를 공자가 100편으로 추려서 묶었는데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 대부분의 경서가 불타 없어졌다가 한(漢)나라 때 이르러 유학자 복생(伏生)이 다시 29편으로 재편집하여 놓았다. 문제는 공자와 복생이라는 두 유학자에 의하여 유교적인 입맛에 맞도록 상당 부분이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본래 『서(書)』라고만 불렸는데 ‘고대의 기록’이라는 뜻이 더하여 『상서』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후 유교인(儒敎人)들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서경』이라고도 불렀다.

그동안 세상은 공자와 복생의 의도대로 책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 왔다. 그러나 1899년에 이르러 무려 3500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던 갑골문이 발견되었고 또 1천여자의 난해한 금문이 해득됨으로써 비로소 베일 속에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은(殷)나라의 실존 모습이 드러났다. 고대의 중국 땅이 바로 동이족의 놀이터였음이 밝혀지게 되면서 공자와 복생의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그동안 사마천의 『사기(史記)』만을 중국의 정사(正史)로 인정한 수많은 중국의 학자들이 치우천황의 역사적 사실을 모조리 전설로 돌리고 황제의 최종 승리만을 역사적인 사실인 양 정리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남겨진 중국측 사서들은 존화사상에 찌들은 한국의 유학자들에게 정론으로 받아들여졌고, 이것이 기존의 강단 사학자들로 하여금 『사기(史記)』 기록과 정반대의 역사를 기록한 우리 역사서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을 모조리 위서(僞書)로 몰아붙이는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범죄란 없다. 제 아무리 『상서(尙書)』가 진실을 왜곡시켜 놓았다 해도 옛 기록들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사건기록들을 무수히 발견할 수 있다.




상서(尙書)

공자(孔子)
B.C 552~479년

『사기(史記)』著者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에 서로 모순되는 기록을 예로 들어보자. 『사기』의 「봉선서(封禪書)」에, “진(秦)나라 때 동방 8신께 제사를 지냈는데 그중 ‘병(兵)’의 신(神)은 치우였다.”라고 하였다. 또 「고조본기(高祖本紀)」에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系)은 패정(沛庭)의 관아에서 치우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후 산 제물을 희생시키고 그 제물을 잡아 피를 북(鼓)과 군기(軍旗)에 바른 후 전군이 붉은 기를 들고 출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치우는 병(兵)의 신(神)으로 추앙되었고, 중국인들에게 한족(漢族)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탄생시킨 유방은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해달라고 치우천황에게 빌었다는 것이다. 결국 패장(敗將)이 ‘병의 신(軍神)’이 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상식과 천하통일의 꿈을 안고 출정하는 장군이 승자였다는 황제를 배제하고 패장이었다는 치우에게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는 간단한 내용만으로도 치우가 결코 패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금문(金文) 중에는 황제(黃帝)를 왕으로 표현한 상형문자(象形文字)가 없다. 황제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그가 사실상 배달국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믿겨지지 않는 이 사실을 우회적으로 기록하여 놓은 문헌이 있다. 『용어하도(龍魚河圖)』에 “치우가 죽은 후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졌다. 이에 황제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보내어 천하의 위엄을 떨치니 팔방만방이 모두 복종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 말은 죽은 치우가 산 황제보다 더 두렵다는 것이니 아무리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이라도 이런 황당한 기록을 사실로 믿을 수는 없다. 이상의 기록을 좀더 합리적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성립된다.

① 치우가 없는 상태에서 황제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중이다.
② 중국의 각 부족들이 중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원의 연합군에 능동적으로 합류하였으나 헌원은 약속한 승리 대신 치우에게 항복하고 치우의 제후로 황제의 벼슬을 받았으니 실질적으로 치우의 식민지 총독인 셈이었다.
③ 불만이 쌓인 부족들이 각처에서 헌원에게 도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④ 반란의 기세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황제는 치우천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천황이 반란군들을 직접 징벌하겠다는 칙령(치우의 화상)을 내리자 황제가 이 뜻을 만방에 보내어 천하를 복종시켰다.

이상과 같은 상황은 치우가 죽고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므로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는 기록이 거짓임이 거듭 증명된다.

※ 왕권을 빼앗긴 신농(神農)계는 무려 7년의 준비 끝에 ‘가우리의 난(九黎의 亂)’을 일으키며 대반격을 전개하여 제2대 소호 김천(少?金天, 재위 7년간)의 왕권을 다시 빼앗아 신농의 손자인 전욱 고양(?頊高陽)으로 제3대 왕위(재위 47년간, B. C 2467~2421년)를 잇게 한다. 전욱 고양(?頊 高陽)의 아버지는 신농과 임사씨(姙巳氏)의 아들 희화(羲和 : 복희, 대화, 주, 직)이고, 어머니는 고모 뉘조1)와 황제 사이의 딸 상아(펡娥)이다. 패권싸움에 지친 신농은 정치일선에서 은퇴하여 호남지방으로 내려가 옛날처럼 약초를 연구하며 조용한 노년생활을 보낸다. 이때 황제 역시 권력싸움의 무상을 느끼고 정비 뉘조를 데리고 지금의 호남성에 있는 남악 형산(衡山)으로 신농을 찾아온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 신농의 모습을 본 뉘조는 몸져누운 후 숨을 거두어 형산 남록인 산비탈에 묻혔는데 그곳을 뇌조봉(雷祖峰, 꾸祖峰)이라 한다. 당시 황제가 쉬어 갔던 바위를 황제암이라 한다. 이 내용은 『상형계고(湘衡稽古)』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司馬遷)
서한(西漢) 무제(武帝) 태초원년(太初元年, B.C 104년) 때 사람이다.
사마천의 사기
사마천(司馬遷)은 그가 쓴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의 첫머리에 “황제(黃帝)를 중국의 시조”로 기록하였고, 오랜 만주의 식민통치에서 독립을 선언한 1911년(辛亥革命)에는 중국의 역사 기년을 황제의 개국으로부터 계산함을 공식 기년으로 채택하였다. 이를 역산하여 보면 서기 2005년은 우리나라는 개천(開天) 5903년이 되고, 단기(檀紀)로는 4338년이며, 중국은 황제(黃帝) 기년 4701년이 된다.

1) 뉘조
뉘조는 여행중에 죽었다 하여‘로신(路神)’이라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