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史記)』著者
사마천의 『사기(史記)』 중에 서로 모순되는 기록을 예로 들어보자. 『사기』의 「봉선서(封禪書)」에, “진(秦)나라 때 동방 8신께 제사를 지냈는데 그중 ‘병(兵)’의 신(神)은 치우였다.”라고 하였다. 또 「고조본기(高祖本紀)」에는 “한고조(漢高祖) 유방(劉系)은 패정(沛庭)의 관아에서 치우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린 후 산 제물을 희생시키고 그 제물을 잡아 피를 북(鼓)과 군기(軍旗)에 바른 후 전군이 붉은 기를 들고 출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치우는 병(兵)의 신(神)으로 추앙되었고, 중국인들에게 한족(漢族)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탄생시킨 유방은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해달라고 치우천황에게 빌었다는 것이다. 결국 패장(敗將)이 ‘병의 신(軍神)’이 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상식과 천하통일의 꿈을 안고 출정하는 장군이 승자였다는 황제를 배제하고 패장이었다는 치우에게 승리를 기원하고 있다는 간단한 내용만으로도 치우가 결코 패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금문(金文) 중에는 황제(黃帝)를 왕으로 표현한 상형문자(象形文字)가 없다. 황제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그가 사실상 배달국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믿겨지지 않는 이 사실을 우회적으로 기록하여 놓은 문헌이 있다. 『용어하도(龍魚河圖)』에 “치우가 죽은 후 천하가 다시 어지러워졌다. 이에 황제가 치우의 형상을 그려 보내어 천하의 위엄을 떨치니 팔방만방이 모두 복종하였다.”라고 쓰여 있다. 이 말은 죽은 치우가 산 황제보다 더 두렵다는 것이니 아무리 과장을 좋아하는 중국인이라도 이런 황당한 기록을 사실로 믿을 수는 없다. 이상의 기록을 좀더 합리적으로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성립된다.
① 치우가 없는 상태에서 황제가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중이다. ② 중국의 각 부족들이 중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헌원의 연합군에 능동적으로 합류하였으나 헌원은 약속한 승리 대신 치우에게 항복하고 치우의 제후로 황제의 벼슬을 받았으니 실질적으로 치우의 식민지 총독인 셈이었다. ③ 불만이 쌓인 부족들이 각처에서 헌원에게 도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④ 반란의 기세를 진압할 수 없게 되자 황제는 치우천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천황이 반란군들을 직접 징벌하겠다는 칙령(치우의 화상)을 내리자 황제가 이 뜻을 만방에 보내어 천하를 복종시켰다.
이상과 같은 상황은 치우가 죽고 없으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므로 황제가 치우를 죽였다는 기록이 거짓임이 거듭 증명된다.
※ 왕권을 빼앗긴 신농(神農)계는 무려 7년의 준비 끝에 ‘가우리의 난(九黎의 亂)’을 일으키며 대반격을 전개하여 제2대 소호 김천(少?金天, 재위 7년간)의 왕권을 다시 빼앗아 신농의 손자인 전욱 고양(?頊高陽)으로 제3대 왕위(재위 47년간, B. C 2467~2421년)를 잇게 한다. 전욱 고양(?頊 高陽)의 아버지는 신농과 임사씨(姙巳氏)의 아들 희화(羲和 : 복희, 대화, 주, 직)이고, 어머니는 고모 뉘조1)와 황제 사이의 딸 상아(펡娥)이다. 패권싸움에 지친 신농은 정치일선에서 은퇴하여 호남지방으로 내려가 옛날처럼 약초를 연구하며 조용한 노년생활을 보낸다. 이때 황제 역시 권력싸움의 무상을 느끼고 정비 뉘조를 데리고 지금의 호남성에 있는 남악 형산(衡山)으로 신농을 찾아온다. 그러나 늙은 아버지 신농의 모습을 본 뉘조는 몸져누운 후 숨을 거두어 형산 남록인 산비탈에 묻혔는데 그곳을 뇌조봉(雷祖峰, 꾸祖峰)이라 한다. 당시 황제가 쉬어 갔던 바위를 황제암이라 한다. 이 내용은 『상형계고(湘衡稽古)』에 기록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