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8. 고국원왕, 소수림왕의 황성 시대(고구려)

자연정화 2013. 7. 31. 18:07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8. 고국원왕, 소수림왕의 황성 시대

 

 

 

8-1. 고국원왕 황성 시대ad331~ad370

8-2. 소수림왕 황성 시대ad370~ad384

8-3. 고국양왕 황성 시대ad383~ad391

 

8-1. 고국원왕 황성 시대ad331~ad370

 

고국원왕(故國原王)<또는 국강상왕(國岡上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사유(斯由)<혹은 쇠(釗)라고도 썼다.>이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2년(332) 봄 2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백성들 중 노인, 병자들을 두루 위문하고 먹을 것을 주었다. 3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왔다.

 

4년(334) 가을 8월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겨울 12월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평양성은 철법시 서남성이다.

 

5년(335) 봄 정월에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새로운 신성인데 철법시 서북쪽 사산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고려된다. 쇄룡구 평양성의 방어성이 된다.

 

6년(336) 봄 3월에 큰 별이 서북쪽으로 흘러갔다. 진(晉)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9년(339)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쳐들어 와서 그 군사들이 신성에까지 미치게 되자, 왕이 맹약을 요구하니 그제야 돌아갔다.

 

10년(340)에 왕은 세자를 연나라 왕 모용황에게 보내 조회(朝會)하였다.

 

12년(342) 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마자수 압록강의 국내성은 서북 유하 상류에 있다.
가을 8월에 왕은 환도성으로 옮겨서 거처하였다.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용성은 대릉하의 조양시朝陽市이다. 요서군 유성이라고도 했는데 전한시대 요서군이 아니라 요동국의 요서군 유성이다.

 

건위장군(建威將軍) 모용한이,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후에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는데 북도(北道)는 평탄하고 넓은데 남도南道는 험하고 좁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북도로 가려고 하였다.

모용한이 말하였다. “적은 상식으로 헤아려 반드시 대군이 북도로 올 것이라 여겨서, 당연히 북쪽을 중히 여기고 남쪽은 소홀히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남도로 가 그들을 쳐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환도(丸都)는 족히 취할 것도 못됩니다. 따로 적은 군사를 북도로 보내면 비록 차질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몸체가 이미 무너지면 사지(四肢)는 쓸 수 없는 것입니다.”

모용황이 그 말을 따랐다. 11월에 모용황이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도로 나와서,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 등을 보내 군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북도(北道)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 명을 거느리고 북도를막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도(南道)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모용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 왔다.

 


 

왕은 말 한 필을 몰고 도망가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연나라 장군 모여니(慕輿니)가 쫓아가 왕의 어머니 주씨(周氏)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이때,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 이로 인해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쫓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다. 모용황이 장차 돌아가려 할 때 한수가 말하였다.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이 도망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있으나,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나머지 무리를 모아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 어머니를 잡아가십시다. 그가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단웅곡(斷熊谷)은 평양성을 의미한다.

 

모용황이 그 말을 좇아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는 돌아갔다.

 

13년(343) 봄 2월에 왕은 그의 아우를 연(燕)나라에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고, 진기한 물건 천여 점을 바쳤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이에 따라 그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주었으나, 그 어머니는 여전히 남겨두어 인질로 삼았다. 가을 7월에 왕은 평양 동 황성(黃城)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성은 지금 고려의 서경(西京)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에 있다.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동황성(東黃城)은 졸본성이다.
 

졸본성과 황성

 

15년(345) 겨울 10월에 연나라 왕 모용황이 모용각(慕容恪)을 시켜 쳐들어와서 남소南蘇를 함락시키고 수자리 군사를 두고 돌아갔다.

19년(349)에 왕은 전 동이호군(東夷護軍) 송황(宋晃)을 연나라로 보냈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그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活)이라 바꾸고 중위(中尉)로 임명하였다.

 

25년(355) 봄 정월에 왕자 구부(丘夫)를 왕태자로 세웠다. 겨울 12월에 왕은 사신을 연나라에 보내 인질과 조공을 바치면서 어머니를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나라 왕 모용준이 이것을 허락하고 전중장군(殿中將軍) 조감(조龕)을 보내 왕의 어머니 주씨를 본국으로 돌려보내고, 왕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 영주자사(營州刺史)로 삼고, 낙랑공(樂浪公)으로 봉하고, 왕호는 예전과 같게 하였다.

고구려 왕을 영주營州자사 혹은 영주평주 이주자사라고 하였는데 평주는 평양에 대응하지만 영주는 알 수 없다. 환도성을 영주라고 하고 그래서 요나라 영안주가 환주가 망한 후에 그 부근에 세워졌을 수도 있다.

 

39년(369) 가을 9월에 왕은 군사 2만 명으로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치양(雉壤)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치양은 삼국이 쟁패하던 곳으로서 함경도 요덕군 동쪽 평주진이다. 비류하가 흐른다. 역시 패수라고도 했다.

 

40년(370)에 진(秦)나라의 왕맹(王猛)이 연나라를 정벌하여 깨뜨렸다. 연나라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도망쳐 왔는데, 왕은 그를 붙잡아 진나라로 보냈다.
이때 고구려는 용성을 지나 도망쳐오는 모용평을 잡아서 단 하룻만에 돌려보낸다. 고구려가 대릉하의 요동성에 진출해 있었던 것이 된다.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법고시 쇄룡구가 고국원왕이 전사한 평양성이다.

고국원왕은 이전에 서천왕묘와 미천왕묘가 선비족에 의해 차례로 파헤쳐 졌으므로 36기의 선왕릉을 집안으로 옮겼다.
이를 국동대혈이라고 불렀던 것이 고국원왕 비문에 나타난다.

 

이 시대의 주요한 고구려의 풍습에 국동대혈國東大穴에서 신神을 모시는 행사가 있었다.
그 동굴을 신수혈神隧穴이라고 했다.
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隧于神坐

 

고구려 환도성에서 343년에 연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 후예 중에 선비족 북연천왕北燕天王이 된 고운高雲이 있다.

 

북제北齊(550-577) 황제가 된 고환高歡의 가문은 6대조가 현도태수였다고 하는데, 모용선비족 전연국前燕國에 투항했고, 연나라가 망하기 전에 탁발선비족 북위北魏에 옮겨가서 장수를 지내다가 북제北齊를 일으켰다.

 

 

8-2. 소수림왕 황성 시대ad370(태녕)~ad384

 

소수림왕(小獸林王)<또는 소해주류왕(小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구부(丘夫)이고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 고국원왕이 [재위] 25년에 태자로 삼았고, 41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소수림왕 3년에 율령을 반포하고 소수림왕 4년 374년에 태녕(太寧)으로 연호를 세웠다.  

 

2년(372) 여름 6월에 진(秦)나라 왕 부견(符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經文)을 보내왔다. 왕은 사신을 보내 답례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대학(大學)을 세우고 자제들을 교육시켰다.

 

3년(373)에 율령(律令)을 처음으로 반포하였다.

4년(374)에 중 아도(阿道)가 왔다.

 

5년(375) 봄 2월에 처음으로 초문사(肖門寺)를 세우고 그곳에 순도를 두었다.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우고 그곳에 아도(阿道)를 두었다. 이것은 우리 나라 불교의 시작이다.
가을 7월에 백제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수곡성은 쇠고성이 있던 백제 초고성, 즉 초고왕의 성일 것이다. 함흥 남쪽 정평부 금야강에 있으며 그 서쪽에는 치양성이 있다.

 

6년(376) 겨울 11월에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7년(377) 겨울 10월에 눈은 내리지 않고 천둥이 쳤다. 백성들이 전염병에 걸렸다.
백제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침공해 왔다. 11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였다.
사신을 부(符)씨의 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년(378)에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었다.
가을 9월에 거란(契丹)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여덟 부락을 빼앗았다.
거란은 선비족의 후손이다. 역시 예맥인의 후손이다.

 

13년(383) 가을 9월에 살별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14년(384) 겨울 11월에 왕이 죽었다. 소수림(小獸林)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소수림왕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의 불교 전래는 동천왕 이전이다. 관구검의 침략 때에 위나라 사자와 고구려 여인의 후손으로 아도가 태어났는데 그의 행적을 기록한 아도화상축봉문이 남아 있다.

 

아장승 축봉문의 내용적인 가치는 다음과 같다.
1. 고구려에 240년대에 출생한 아장승이 고구려에서 불법을 전파하여 고구려 불교의 조사로 추앙되었고

2.
소수림왕 6년인 376년이 고구려 연호인 태녕 3년으로 기록되었다. 
    373년에 처음으로 율령을 반포한 소수림왕은 374년부터 건원하여 태녕으로 세운 것이다.

3. 소수림왕 6년에 중국 승 도안이 입국하여 설법을 하였고

3. 도안은 고구려에서 범어 불경을 한자로 번역하였고

4. 아장승이 신라와 백제에 포교하여서 371년경에 강화도 전등사(당시 진종사)를 창건한 것이 전등사의 전설이 아니라 사실로 판명됨.

<아장승 열반축봉문阿丈僧涅槃築封文>

1. 축봉문 해석

0. 函蓋部     (함뚜껑)

 

晉 太元丙子 七年                    동진 태원병자(376년) 7년(382년)

國甄內城 肖門寺                      국견내성의 초문사(=절이름)

十方金輪廣善 唪                      시방금륜광선봉선하고

禪 冊東罡宮禮司                      동강궁(=절이름) 예사를 임명받은

阿丈僧 涅槃築封                      아장승이 열반하여 봉축함


1.

廣善金輪            광선 금륜 아장승은


2.

國之聖物           국가의 성인이다


3.

眞佛祖 創東國聖穴。         진불조(아장승의 경칭)가 동국에 성혈을 열고

納五部衆生 廣轉佛。         고구려 오부의 중생을 끌어안아 불법을 전하고

視經文。天下萬物 存         불경을 가르쳤다.

                                         천하만물 생명의 태어남이 다 존귀하니

其生。無離造。存世誠。    모든 생명이 차별이 없다고 하시고,

                                         세상만사에 정성을 다하여 살라고 가르쳤으니

造定衆生 存誠 讀經。       (아장승은) 중생들이 정성을 다하여存誠

                                        불경을 읽도록 만들었다.

4.

太寧三年 國佛法盛 崇        376년(소수림왕 6년, 고구려 태녕 3년) 나라에 불법이 성하여,

佛 聚衆 弘道。問阿丈道    부처를 숭배하는 중생들을 모아 불도를 크게 펼쳐 가는데 (소수림왕이) 아장도에게 불리의 대가深理重가 누구인지 묻고,

深理重之 請耳。則信奉     초빙하도록 하니 (아장도는) 즉시로 왕명을 받들어서

擧 爲法師 經律論 皆称。   경,률,론에 정통했다는 법사를 찾아갔다.

道安 東渡峴峽 拜參王       도안道安이 동쪽으로 산길을 넘어와 소수림왕을 배알했다. (도안은 북조의 유명한 고승이다.)

 

집안에서 발견된 기와에 새겨진 "태녕太寧4년 윤월 6일 기사일" 기록이 있는데,  중국은 326년 태녕3년 윤8월 6일이 기사일이다. 따라서 3년과 4년이 너무 다르므로 중국의 태녕이 아니다.
따라서 이 아장승열반축봉기의 연호 태녕은 고구려 소수림왕의 연호다.

 

서기 377년 윤3월이 갑자일이다. 이 해에 태녕 4년 윤월 기사일이 있게 된다.
그러면 374년에 소수림왕 4년에 처음으로 태녕으로 건원을 세운 것이 된다. 바로 이 전인 373년에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였는데 율령반포가 건원의 전조였다.

<삼국사기>에서 소수림왕 4년(374)에 중 아도(阿道)가 왔다고 하였고, 375년에 이불란사를 세워서 아도를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소수림왕은 아도를 다시 보내서 도안(道安312~385)을 고구려에 초청했던 것이다. 도안은 365년부터 379년까지 양양에 있다가 부견에게 잡혀서 장안 오중사에서 원적하였다. 따라서 아장승 비문에 기록된 376년(태녕 3년)에서 379년 사이에 고구려 방문이 가능하다.  

                        

5.

王聞其榮 出都迎之。封      왕이 그 영광스런 소식을 듣고, 도성밖으로 마중나와서,

爲 高句麗國 太丈法師。     고구려국 태장법사로 봉하고, 

二寺 持。宮東大 日誦     두 절을 주지하게 하였다. 궁성 동쪽 대비에서 (도안이) 하루에 천게(千偈)를 외우니,

千偈 凡二萬六千言 通        대략 26000자인데 스스로 뜻을 깨우친다. 

意。王曰供奉 則說佛道。  왕이 공봉하여 대하니 (도안이) 불도를 가르쳤다.


6.

漢秦曰 中天也。故輩人      진秦나라(351-)를 중천이라 하므로, 불교를 따르는 이들은

曰 佛東來也。方爲大顯      부처가 동방으로 왔다고 하였다.  이 나라方에 큰 일을 하러

非凡人也。慾世太平。心     비범한 분이 오셨다고도 하였다. 세상을 태평하게 하고

善與佛法也。明矣冊法。     불법을 펴고 불경책의 뜻을 밝히러 오셨다고 하였다.

義三空 融二諦 永無相        삼공三空과 이제二諦, 무상無相을 가르쳤다.


7.

儀咏貴偈頌。 大殊別築      영귀계송咏貴偈頌의 의례를 가르쳤다. 大殊은 따로 (궁내에) 왕사를 지어서

寺舍 弘大法淨世之耶。      불법을 크게 하고 세상을 맑게 하였다.

何不言之 義圓滿。故國      그러니 궁극적인 원만圓滿의 도까지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佛者多。道安譯冊 復宣。    그리하여 고구려에 불자가 많아지니 도안은 책을 번역하여 다시 펴내서,

國人漸通。多人知[理佛]     고구려인들이 더욱 불도에 통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불]과


8.

[經論][洞其秘奧]。言之眞   [경론] 과 [동기비오]를 알게 하고, (도안은) 진불이

佛何現 王喜。道安 涉諸     어떻게 실현될지를 가르쳐서 왕을 기쁘게 하였다. 도안은 (고구려 전국의) 여러 읍을 다니며

邑傳之。衆跪座側。言無     불법을 전하였고, 중생들이 무릎 꿇고 들었는데

不驗 光始異之。圓道示      말씀마다 영험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머리에 광채가 나는 기적이 있었다. 완전한 도圓道로서

因果之理。王贊德。王立     인과의 원리를 가르쳤다. 왕이 도안의 덕을 칭찬하였다. 소수림왕이


9.

創佛地 築內城 肖門寺。     불지를 새로 만들어 내성에 초문사를 지엇고

傳經佛法 善護後世衆          불경과 불법을 모든 후세 중생에 전하도록 하여

生。至取正果 入無主民。    마침내 정과正果를 얻었다. (임금이) 백성을 주재하지 않는 무주민의 경지에 들었으니

可入 無佛門。績經文。取    (왕은) 불문이 없는 무불문의 경지에 이르렀다. 불경을 만들어 펴내는 공적을 쌓으며

聖滅惡 念世 沮度救苁。     성인의 행적을 따르고 악을 멸하고 오로지 세상을 위하여 멸도(滅度,沮=滅 同意)하고 무리從들을 구하였다.

 

10.

經論中百。還國往漢王。     중, 백 이론까지 가르치고  (도안이) 중국으로 돌아가서 한왕을 만났는데,

以應可 與國東立神穴         동국 고구려에 (부처님의) 신혈을 세웠으므로,

登三果。道安 大闡 震旦     삼과三果에 오른 것으로 인정되었다. 도안이 진단(중국)에 불법을 펼치며 말하기를

說之。東土高句麗 王民      동쪽나라 고구려 왕과 백성은 대반야경으로

[大般]若經 洗悟蒙俗。初,   몽속을 깨우치고 �어냈다고 하였다. 처음에(도안이 고구려에 오기 전에)


11.

國元 佛化 內城 宮側東       국가의 근원을 부처님의 감화로 하여 내성의 궁옆 동편에  절宮을 두었다.(동강궁예사)

录。王聞頌項聲沸 意開      왕은 불송이 크고 염불 소리도 크면 (책의 심오한)  뜻이 마침내 스스로 나타나서 불도를 깨닫는다고 듣고,

示悟佛道 王民之心 念        왕과 백성이 한마음으로 염불하면

佛言 世尊大悲 示。初步     석가와 관음(대비)이 나타난다고 듣고 처음 불문에 든 왕도

佛門 王求道 得正無邪        구도하면 정을 얻고 무사에 든다고 들었다.


12.

佛高國句心麗終善界          부처의 나라 고구려는 마침내 선계에 이르러서

行善義而 東戎王 天下        (외도에 빠지지 않고) 오로지 선의만 행하여 동융왕(소수림왕의 별명?)이 하늘에서 세상으로 내려왔다.

世衆生 故說 衆生有諸        그리하여 중생 모두에게 부처가 있다 하고,

佛 大般若經 阿耨多罗       대반야경야뇩타불삼막삼보리(무상의 완전한 깨달음)는

三藐三菩提 亦如日月        해와 달처럼 위대한 것이라고 가르쳤다.

 

 

8-3. 고국양왕 황성 시대ad383~ad391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이름은 이련(伊連)<혹은 어지지(於只支)라고도 하였다.>이고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소수림왕이 재위 14년만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 이련이 즉위하였다.

 2년(385) 여름 6월에 왕은 군사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垂)가 대방왕 모용좌(佐)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에 진주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군대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景)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우리 군대가 그들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겨울 11월에 연나라의 모용농(慕容農)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 와서, 요동·현도 2군을 다시 차지하였다. 처음에 유주(幽州)와 기주(冀州)의 유랑민들이 많이 투항하여 왔으므로, 모용농이 범양(范陽) 사람 방연(龐淵)을 요동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위무하게 하였다. 12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383년 비수대전에서 전진황제 부견이 동진에 참패하고서 모용수의 후연국이 다시 일어났는데, 하북성에 근거를 두고 부견의 아들과 업성에서 싸우고 있었고, 용성을 미처 점령하지 못했다. 385년 백제의 부여씨가 유주(북경시)와 영지성(하북성 영지, 난하변)을 점령하고 동시에 고국양왕의 고구려군이 요동을 차지했다. 그러나 모용수가 파견한 모용농 등에 의해 백제의 난하 영지성과 고구려의 새로운 요동이 후연으로 다시 돌아간다.  

 

3년(386) 봄 정월에 왕자 담덕(談德)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8월에 왕은 군대를 내어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소가 말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개이고 꼬리가 두 개였다.

 

5년(388) 여름 4월에 크게 가물었다. 가을 8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6년(389) 봄에 기근이 들어서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으므로, 왕은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주었다. 가을 9월에 백제가 침입해 와서 남쪽 변경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7년(390) 가을 9월에 백제가 달솔(達率) 진가모(眞嘉謨)를 보내 도압성(都押城)을 쳐부수고 200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도압성(都押城)은 함경남도 덕성군의 압파천(押波川)으로 고려된다. 주변은 고대 철산지이다.

 

8년(391) 봄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우호를 약속하니, 신라왕이 조카 실성(實聖)을 인질로 보내었다. 3월에 교서를 내려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게 하였다. 담당 관청에 명하여 나라의 사직(國社)을 세우고 종묘(宗廟)를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고국양(故國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고국양왕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