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10. 장수왕의 평양 시대(고구려)

자연정화 2013. 7. 31. 18:38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10. 장수왕의 평양 시대

 

 

 

10-1. 장수왕의 평양 시대ad412~ad491

 

10-2. 문자왕시대ad491~ad519

10-3. 안장왕시대ad519~ad531

10-4. 안원왕시대ad531~ad545

10-5. 양원왕시대ad545~ad559

 

10-1. 장수왕의 평양 시대ad412(건흥)~ad491

 

장수왕(長壽王)의 이름은 거련(巨連)<또는 연(璉)이라고도 썼다.>이고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신체가 크고 기개가 호탕하고 뛰어났다. 광개토왕이 [재위] 18년에 태자로 삼았고, 22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장수왕의 최초 연호는 건흥(建興)이다.

 

원년(413)에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진(晉)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리고, 붉은 무늬있는 흰 말을 바쳤다. 안제(安帝)가 왕을 고구려왕(高句麗王) 낙랑군공(樂浪郡公)으로 봉하였다.

 

2년(414) 가을 8월에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들었다. 겨울 10월에 왕은 사천(蛇川)의 들로 사냥나가서 흰 노루를 잡았다. 12월에 서울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장수왕의 사천 사냥은 황성에서 사천(蛇川)의 평양성(훗날 구도성이라고 부른다.)으로 천도하기 위한 전조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에 평양성을 침공하여 고국원왕을 죽였고 아신왕 때에도 왜군과 함께 평양을 침공하였다.
따라서 장수왕은 평양 지방에서도 가장 북쪽에 도읍하여 백제로부터나 중국으로부터 침공에 대비하였다.

장수왕 평양성의 위치를 본다.

장수왕이 세운 평양성의 구획은 아래와 같다.

평양성(구도성)을 남쪽에서 본 모습


평양구도성을 북쪽에서 본 모습. 북쪽에 댐이 생기기 전에는 절벽 아래로 호성하가 흘렀을 것이다.

평양구도성의 서쪽에서 본 모습. 내성은 동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평양성은 남북으로 호성하가 각각 흐른다.

백성들이 거주하는 외라성이 환호로 둘러 싸인 것이 장수왕 평양성의 특징이다. 이 지역은 수당전의 피해를 보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잘 살아왔다.

 

7년(419) 여름 5월에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서, 왕은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12년(424)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하였다. 왕은 그들을 특별히 후하게 위로하였다. 가을 9월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왕은 왕궁에서 군신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3년(425)에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5년(427)에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
패수는 법고시이고 패하는 요양시다. 평원왕이 571년에 요양시 패하에 사냥 나갔는데 무려 50일이 걸렸다.
따라서 이때에 평원왕은 552년에 쌓았던 장안성으로 사냥나갔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는데 50일이 걸린 것이니 장수왕의 평양성은 아직도 법고시이다.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천도한 것은 586년이다. 평원왕 이후로 요양시 장안성을 평양성으로 부르게 된다. 

 

23년(435) 여름 6월에 왕은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또 그 나라의 휘(諱)를 알려줄 것을 청하였다.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황실의 계보와 휘를 적어서 주게 하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삼았다. 가을에 왕은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은하였다. 위나라 사람들이 연(燕)나라를 자주 쳤으므로, 연나라가 날로 위급해지게 되자, 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만약 사태가 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지하다가 후에 일어나기를 도모하겠다.”고 하고,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몰래 보내 우리에게 맞이해 줄 것을 청하였다.

 

24년(436)에 연나라 왕이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시자(侍子)를 보내겠다고 청하였으나, 위나라 왕이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토벌하려 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그 뜻을 통고하였다. 여름 4월에 위나라가 연나라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왕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으로 가서 연나라 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헤진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 창고에서 예리한 무기를 가져다가 나누어 주었으며, 성 안을 많이 약탈하였다. 5월에 연나라 왕이 용성(龍城)에 거주하는 가호(家戶)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웠는데, 불은 열흘이 되도록 꺼지지 않았다. 부인들은 갑옷을 입고 가운데 있게 하고, 양이 등은 정예군을 통솔하며 바깥에 서게 하고,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대열의 맨 뒤에 섰다. 그들은 벌린 대열을 하고 나아갔는데 앞뒤가 80여 리나 되었다. 위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보내 연나라 왕을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려서, 마땅히 풍홍과 함께 왕의 가르침을 받들 것이라고 핑계하였다. 위나라 왕이 명령을 어겼다고 해서 공격할 것을 의논하여, 농우의 기병을 보내려고 하였는데, 유결과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간하자 그만두었다.

 

25년(437)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6년(438) 봄 3월. 이전에 연나라 왕 풍홍이 요동으로 왔을 때 왕은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이 벌판으로 행차하느라고 군사와 말이 피곤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풍홍은 부끄럽고 화가 나서 천자를 칭하면서 왕을 꾸짖었다. 왕은 그를 평곽(平郭)에 두었다가 곧 북풍(北豊)으로 옮겼다. 풍홍이 평소 우리 나라를 업신여겼는데, 여전히 정형(政刑)과 상벌을 마치 제 나라에서 하듯이 하였으므로, 왕은 그의 시자를 빼앗아 버리고 그 태자 왕인(王仁)을 잡아와 인질로 삼았다. 풍홍이 이것을 원망해서 송(宋)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표(表)를 올려 맞이해 줄 것을 구하였다. 송나라 태조(太祖)가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고, 아울러 우리에게 명령하여 연나라 왕에게 노자(路資)를 마련해 주어서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풍홍이 남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장수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을 보내 풍홍을 북풍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 자손 10여 명도 죽였다. 왕백구 등은 자신이 거느리고 온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를 습격하여,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왕은 왕백구 등이 제멋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사신을 시켜 그를 잡아 송나라로 보내었다. 태조는 고구려가 멀리 있는 나라이므로 그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왕백구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후에 풀어주었다.

 

27년(439) 겨울 11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8년(450)에 신라사람들이 변경의 장수를 습격해서 죽였다. 왕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신라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연수(延壽)명 경주 서봉총 은합우에 의하면 장수왕은 40년(451년)에 연수로 개원하였다. 

 

42년(454)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43년(455)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0년(462)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년(463)에 송나라 세조(世祖) 효무황제(孝武皇帝)가 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책봉하였다.

53년(465)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4년(466)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위나라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딸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아우의 딸로써 응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후가 허락하고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 상서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여 말하였다. “위(魏)나라는 예전에 연나라와 혼인하고도 얼마 안 되어 연나라를 정벌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신을 통해서 그 나라 지형의 평탄하고 험함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전례가 멀지 않으니, 적당한 구실로 거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왕은 마침내 글을 올려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핑계하였다. 위나라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심히 꾸짖으며 “아우의 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종실의 딸을 다시 뽑아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만약 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명령을 받들어 따르겠습니다.”고 하였으나, 마침 현조가 죽자 중지하였다.

 

55년(467)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6년(468) 봄 2월에 왕은 말갈(靺鞨) 군사 1만 명으로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쳐서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7년(469)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백제군이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 왔다.

58년(470)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9년(471)에 백성 노구(奴久) 등이 위나라로 달아나 항복하였다. 위나라가 이들에게 각각 전택(田宅)을 주었다. 이 때가 위나라 고조(高祖) 연흥(延興) 원년이었다.

 

60년(472)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이후로 공물 바치는 것이 이전의 배가 되었고, 그 보답으로 위나라가 주는 것도 또한 조금 늘어났다.

61년(473) 봄 2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연가(延嘉)명 금동여래상에 의하면 장수왕 61년에 장수왕은 연가(延嘉)로 개원하였다.

 

62년(474)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3년(475)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개로왕의 한성은 광개토왕이 차지했던 대동강의 고구려 한성이다. 다시 백제가 한성을 수복했던 것인데 고구려가 되찾은 것이다. 64년(476)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5년(477)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6년(478)에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의 연신(燕信)이 항복해 왔다.

67년(479)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8년(480) 여름 4월에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남제에 조빙하게 하였는데, 위나라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나라] 대궐로 보냈다. 위나라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책망하였다.『[소]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황제의] 칭호를 도용하였다. 짐은 망한 나라를 옛땅에서 다시 일으켜, 끊긴 대를 유씨(劉氏)에게 잇게 하려 한다. [그런데] 경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하고,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교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蕃臣)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하고 하겠느냐? 이제 한번의 잘못으로 경의 이전의 정성을 덮을 수 없어 사신을 돌려 보내니, 그 용서함에 감사하고 잘못을 새겨 법도를 받들어 지킬 것이며, 그대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동정을 보고하라.』

 

69년(481)에 사신을 남제(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73년(485)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4년(486)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5년(487)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6년(488)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윤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7년(489)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6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고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8년(490) 가을 7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9년(491)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나이 98세였으며, 왕호를 장수왕이라고 하였다. 위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이것을 듣고,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했으며, 알자(謁者) 복야(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왕을] 거기대장군 태부(太傅)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추증 책봉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고 하였다.

참고자료 1. 건흥명 금동불상 광배(建興銘 金銅佛像 光背)
충청북도 중원군 노은면에서 발견된 불상의 광배에 건흥이라는 연호가 기록되어 있다.

 

건흥5년 세재 병진         建興五年 歲在 丙辰        
불제자 청신녀 상 부아암   佛弟子 淸信女 上 部兒庵  
조 석가문상[]             造 釋迦文像[]          
원 생생세세 치불문        願生生世世値佛聞     
법일절 중생동 차원        法一切衆生同此願

불교가 한반도에 도입된 4세기 이후에 중국에는 건흥이라는 연호가 없었다. 또한 고구려나 백제 왕 즉위 5년의 병진년은 고구려 장수왕이 유일하다. 게다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즉위 연호가 건흥(建興)이라고 [한단고기]에 적혀 있기까지 하다. 따라서 광개토왕이 412년 10월에 돌아가셔서 장수왕은 그 해 412년에 즉위 연호를 세웠다는 것이 확실시되는 것이며, 이에 따르면 고구려 건흥 5년은 병진년 416년이 된다. 중원군에서는 <중원고구려비>도 발견되었다. 

 

참고자료 2. 연수명 은합우(延壽銘 銀盒盂)
신라 서봉총에서 발굴된 은합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연수원년태세재신 삼월중    延壽元年 太歲在辛 三月中
태왕경조합우 삼근              太王 敬造合木于   三斤                  
연수원년태세재묘 삼월중  
延壽元年 太歲在卯 三月中
태왕경조합우 용삼근육량 
  太王 敬造合木于 用三斤六兩

여기서 연수(延壽) 원년은 신묘년이다. 중국의 연수라는 연호는 신묘년이 없다. 본문 중의 태왕은 거의 고구려왕의 호칭이 틀림없으며 그것도 광개토왕 이후의 고구려 왕이다. 451년 신묘년은 고구려 장수왕(長壽王) 40년이다. 신라 눌지왕 35년이며 눌지왕은 458년에 붕어하였다. 눌지왕 34년에 신라와 고구려의 충돌 및 교류가 있었다. 장수왕(長壽王)은 412년 즉위하여 건흥(建興)으로 연호를 세웠지만, 장수왕 40년에 연수로 개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수왕 39년 신라가 고구려 변방의 장수를 죽여서 전면전의 위기가 있었는데 신라가 고구려에 사죄하여 위기를 넘겼다.

511년 신묘년은 고구려 문자왕 20년이자 신라 지증왕 12년인데 지증왕은 514년에 붕어하였다. 문자왕은 명치로 즉위 연호를 세웠다고 하나 20년에는 개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511년은 백제 무령왕 11년으로서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571년 신묘년은 고구려 평원왕 13년이자 신라 진흥왕 32년이며 진흥왕 연호 대창(大昌) 4년이고, 진흥왕은 576년에 붕어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은 일찌기 549년에 고구려성 도살성을 빼앗아 서로 교류하기 어렵다. 631년은 고구려 영류왕 14년이고 신라 진평왕 53년으로 진평왕은 632년에 붕어하였는데 이 무렵, 612년에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였고 신라는 그 틈에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며 양국간의 교류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연수원년은 장수왕(長壽王) 40년 신묘년으로 추정한다. 
이 무렵에 고구려에서 장수왕을 위한 진상품으로 은합우를 만들었으나 신라왕에게 하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서봉총은 신라 눌지왕묘일 것이다.

 

참고자료3. 연가명 금동여래상(延嘉銘 金銅如來像)
연가(延嘉)라는 연호를 기록한 금동여래상은 경상북도 의령군에서 출토되었으며 그 명문은 다음과 같다.

연가 7년 세재 기미 고려국  延嘉七年 歲在 己未 高麗國
낙량동사주 경 제자승 연     樂良 東寺主 敬 弟子僧 演
사도 40인                          師徒 四十人
공조 현겁천불 류포            共造 賢劫千佛 流布
제29 인현의불                   第二十九 因現義佛
차구 초영소 공양               此丘 招穎所 供養

이 연가(延嘉) 7년 기미년은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되어 민간에 퍼진 서기 400년 이후로 고려하지만 고구려 왕 즉위 7년 중에는 기미년이 없다.

장수왕(長壽王) 68년, 479년 기미년으로 추정한다.
539년은 안원왕 9년인데 7년의 연호가 되기에는 부적절하다.
599년은 고구려 영양왕 때인데 [한단고기]<고구려 본기>에서 살수대첩을 홍무(弘武) 23년이라고 하였으니 영양왕의 연호는 홍무 이외에 없었다.

 

 

 

10-2. 문자왕ad491(명치)~ad519

 

문자명왕(文咨明王)<또는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나운(羅雲)이고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왕자이며 고추대가인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궁중에서 기르면서 대손(大孫)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만에 죽자 이어서 즉위하였다.
문자왕의 연호가 명치(明治)다. 따라서 생전에 명치호태왕이라고 불리운 것이다.

 

원년(492) 봄 3월에 위(魏)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使持節)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으로 임명하고, 의관·복물(服物)·거기(車旗)의 장식을 주었다. 또 왕에게 『세자를 보내 입조케 하라.』고 명하였으나, 왕은 병을 이유로 거절하고, 종숙(從叔)인 승천(升千)을 보내 사신을 따라 입궐하게 하였다. 여름 6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년(493)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3년(494) 봄 정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부여왕과 처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하여 왔다. 가을 7월에 우리 군사는 신라 사람들과 살수(薩水) 들판에서 싸웠다. 신라 사람들이 패하고 견아성(犬牙城)을 지키자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으므로 우리 군사가 후퇴하였다. 제(齊)나라 황제가 왕을 사지절 산기상시(散騎常侍) 도독영평이주(都督營平二州) 정동대장군 낙랑공으로 책봉하였다.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4년(495)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크게 가물었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남쪽으로 순수하여 바다에 제사지내고 돌아왔다. 8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라 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물러나 돌아왔다.

5년(496)에 제나라 황제가 왕을 승진시켜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았다. 사신을 제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군이 이하(泥河) 가에 나와 반격하자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문자왕은 494년 7월에 신라와 싸웠다.

....가을 7월에 우리 군사는 신라 사람들과 살수(薩水) 들판에서 싸웠다. 신라 사람들이 패하고 견아성(犬牙城)을 지키자 우리 군사가 이를 포위하였으나, 백제가 군사 3천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으므로 우리 군사가 후퇴하였다.

 

495년 8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니, 신라 왕이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물러나 돌아왔다.

여기서 국경은 신라는 덕지강과 살수다. 덕지강은 함경남도 함흥 서남쪽에 있다. 

평양과 함흥의 사이에 있는 요덕군 단응천端鷹川邊의 향봉리(香峰里) 고성이 백제 치양성이고 과거에 평주진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흐르는 강이 고대의 또다른 패수다. 문자왕비의 패수는 바로 이 함경남도 동해안의 패수다. 

이 패수는 지금 금야강이라고 한다. 금야강은 상류에 있던 고대 비류수로 비롯된다.

백제 수곡성은 수시리고성이 있던 정평군이 된다. 초고대왕의 소고성이 수곡성의 유래다. 정평군에 고구려 장곡현長谷縣, 혹은 단곡현端谷縣이 있었는데 백제 수곡성水谷城의 후신이다.
 

즉 함흥에서 원산 사이 동해안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상쟁하는 요충이었다.

 

문자왕 5년(496년)에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군이 이하(泥河) 가에 나와 반격하자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遣兵攻新羅 牛山城 新羅兵出擊泥河上 我軍敗北 

6년(497)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쇠달산(所依達山)이라고 하던 속고산이 바로 우산성으로 고려된다.
그곳에 매홀 석성이 있었다. 

이 니하가 바로 문자명왕비문의 패수다. 따라서 금야강이 된다.

 

훗날 발해와 신라의 경계라던 니하도 금야강이다. 즉 패수-니하는 용흥강-금야강이고 신라의 살수는 전탄강, 지금의 덕지강이다.

 

한편 문자왕 비문에 의풍역宜豊役이 등장한다. 의풍의 전쟁인지 의풍성 공사인지 확실하지 않다. 의풍은 나라의 창고를 의미하는 지명인데 요양시 태자하 남쪽 안평진(安平鎭)의 옛이름이다.  

 

6년(497)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 우산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7년(498) 봄 정월에 왕자 흥안(興安)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였다. 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년(499)에 백제 백성들이 굶주려 2천 명이 투항해 왔다.

 

9년(500) 가을 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0년(501) 봄 정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1년(502) 가을 8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나서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고 죽은 자가 있었다. 양(梁)나라 고조(高祖)가 즉위하여, 여름 4월에 왕을 승진시켜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삼았다.
겨울 11월에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1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문자명왕의 명치 11년에 제노오월(齊魯吳越)이 고구려에 속하여 강토가 넓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자왕비문에 나와 있지 않으니 문자왕이 생전에 다시 잃어버린 것으로 고려된다. 백제 무녕왕으로부터 산동반도의 식민지를 일시적으로 뺏았던 것으로 고려된다.

12년(503) 겨울 11월에 백제가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수곡성(水谷城)으로 쳐들어 왔다.

13년(504)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세종(世宗)이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동당(東堂)으로 불러들여 만나니, [예]실불은 나아가 말하였다. “저희 나라는 정성을 대국에 잇대고, 여러 대에 걸쳐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바치는 데 어김이 없었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흰 마노[珂]는 섭라(涉羅)에서 나는 것인데,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기는 바 되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습니다. 두 가지 물건이 왕의 창고에 올라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세종이 말하였다. “고구려는 세세토록 상국(上國)의 도움을 입어, 해외에서 제멋대로 다스려 구이(九夷)의 교활한 오랑캐들을 모두 정벌하였는데, 작은 술그릇이 비는 것은 큰 술병의 수치이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 이전에 조공이 어그러진 것은 책임이 고구려 왕에게 있는 것이다. 경은 짐의 뜻을 경의 임금에게 전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힘써 다해서 해로운 무리들을 없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두 읍[부여·섭라]으로 하여금 옛 터를 되찾아서 토산물을 빠짐없이 일정히 조공하게 하라.”

 

15년(506) 가을 8월에 왕은 용산의 남쪽으로 사냥하다가 5일 만에 돌아왔다.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장수를 보내 백제를 쳤으나 큰 눈이 내려 사졸들이 동상을 입고 돌아왔다.

16년(507)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왕은 장수 고노(高老)를 보내,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漢城)을 칠 것을 꾀하여, 횡악(橫岳) 밑으로 나아가 주둔하였는데, 백제가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므로 물러났다.

 

17년(508)에 양(梁)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고구려왕 낙랑군공 모(某)는 정성이 두드러지고 조공하는 길이 서로 이어졌으므로, 마땅히 관작을 후하게 주고 조정의 의전을 넓혀 무군대장군(撫軍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삼는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8년(509)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9년(510) 여름 윤6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1년(512) 봄 3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백제를 침략하여 가불(加弗)·원산(圓山)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22년(513) 봄 정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3년(514) 겨울 11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4년(515)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5년(516) 여름 4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6년(517)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7년(518)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며, 왕궁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8년(519)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문자명왕이라고 하였다. 위나라의 영태후(靈太后)가 동당(東堂)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사신을 보내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위나라 숙종(肅宗)이 나이 10세여서, 태후가 조정에 나와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10-3. 안장왕시대ad518~ad531

 

안장왕(安臧王)은 이름이 흥안(興安)이고 문자명왕의 맏아들이다. 문자명왕이 재위 7년에 태자로 삼았고, 28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2년(520) 봄 정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2월에 양(梁)나라 고조(高祖)가 왕을 영동장군(寧東將軍) 도독영평이주제군사(都督營平二州諸軍事) 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사신 강주성(江注盛)을 보내 왕에게 의관, 칼, 패물을 주었으나, 위나라 군사가 바다 가운데서 그를 붙잡아 낙양(洛陽)으로 보냈다. 위나라가 왕을 안동장군(安東將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 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봉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년(521) 여름 4월에 왕은 졸본으로 행차하여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냈다. 5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오다가, 지나는 주읍(州邑)의 가난한 자들에게 곡식을 한 사람에 1곡(斛)씩 주었다.

 

5년(523) 봄에 가물었다. 가을 8월에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략하였다. 겨울 10월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11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회하고 좋은 말 10필을 바쳤다.

8년(526) 봄 3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년(527)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1년(529) 봄 3월에 왕은 황성(黃城)의 동쪽에서 사냥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오곡(五谷)에서 백제와 싸워서 이기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황해도 중앙부인 서흥군의 옛이름이 고구려 오곡군이었다.

13년(531) 여름 5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안장왕이라고 하였다. <이 때가 양(梁)나라의 중대통(中大通) 3년이요, 위(魏)나라의 보태(普泰) 원년이다. 양서에 『안장왕이 재위 8년째인 보통(普通) 7년(526)에 죽었다.』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10-4. 안원왕시대ad531~ad544

 

안원왕(安原王)은 이름이 보연(寶延)이고 안장왕의 아우이다. 키가 일곱 자 다섯 치이고 큰 도량이 있었으므로 안장왕은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 13년에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으므로 즉위하였다. 양(梁)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려 전왕의 작위를 잇게 하였다.

 

2년(532) 봄 3월에 위(魏)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사지절(使持節) 산기상시(散騎常侍) 영호동이교위(領護東夷校尉)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삼고, 의관·수레·깃발의 장식을 내렸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년(533) 봄 정월에 왕자 평성(平成)을 태자로 삼았다.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4년(534)에 동위(東魏)에서 조서를 내려 왕에게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더하고, 나머지 작위는 모두 이전과 같게 하였다.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년(535) 봄 2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에 나라의 남쪽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의 집이 떠내려가고 죽은 자가 200여 명이나 되었다. 겨울 10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12월에 천둥이 치고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6년(536)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었으므로, 사신들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가을 8월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사신을 동위(東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537) 봄 3월에 백성들이 굶주려 왕은 나라 안을 두루 돌며 위무하고 구제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동위(東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9년(539) 여름 5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10년(540) 가을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니, 왕은 날랜 기병 5천 명을 보내 쳐서 쫓아보냈다. 겨울 10월에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12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11년(541) 봄 3월에 사신을 양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년(542) 봄 3월에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아갔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13년(543) 겨울 11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14년(544) 겨울 11월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15년(545)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안원왕이라고 하였다.<이 때가 양나라의 대동(大同) 11년이요, 동위의 무정(武定) 3년이었다. 양서에 안원왕이 태청(太淸) 2년(548)에 죽자 그 아들을 영동장군(寧東將軍) 고구려왕 낙랑공으로 삼았다.』고 하였으나 잘못이다.>

 

10-5. 양원왕시대ad544(태화)~ad559

 

양원왕(陽原王)<혹은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이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평성(平成)이고 안원왕의 맏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기개가 크고 호탕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안원왕이 재위 3년에 태자로 세웠고, 15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동위(東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양원왕은 544년에 즉위하여 태화(太和)로 연호를 세웠다.
신포시 금동판(新浦市 金銅版)이라는 금석문이 남아있다.
 1988년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 절터에서 금동판에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
태화3년 세차 병인 2월 26일 갑술삭  太和三年 歲次 丙寅 二月 二十六日 甲戌朔

이는 546년 2월 26일이다. 따라서 [삼국사기]로 보면 양원왕 2년이다. 그러나 <광개토왕 비문>이 <삼국사기> 기록보다 1년 빠른 것을 가르쳐 주었듯이 신포시 금동판은 양원왕의 즉위가 1년 빠른 544년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2년(546) 봄 2월에 서울의 배나무 가지가 서로 붙었다. 여름 4월에 우박이 내렸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동위(東魏)에 보내 조공하였다.

3년(547) 가을 7월에 백암성(白巖城)을 고쳐 쌓고, 신성(新城)을 수리하였다.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4년(548) 봄 정월에 예(濊)의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으나, 신라 장군 주진(朱珍)이 와서 백제를 구원하였으므로 우리 군사는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가을 9월에 환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5년(549)에 사신을 동위에 보내 조공하였다.

 

6년(550) 봄 정월에 백제가 침범해 와서 도살성(道薩城)을 함락시켰다. 3월에 백제 금현성(金峴城)을 공격하였는데, 신라 사람들이 틈을 타서 두 성을 빼앗아 갔다. 여름 6월에 사신을 북제(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북제가 왕을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7년(551) 여름 5월에 사신을 북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돌궐(突厥)이 신성으로 와서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백암성으로 옮겨 공격하였다. 왕은 장군 고흘(高紇)을 보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막아 싸워서 이기고,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신라가 공격해 와서 10성을 빼앗아 갔다.

 

8년(552)에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이 장안성이 요양시 태자하 북안의 평양성이다.

 

10년(554) 겨울에 백제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고, 얼음이 얼지 않았다.
웅천성은 임진강으로 고려된다. 고마성이 있었다.

11년(555) 겨울 10월에 호랑이가 서울에 들어왔으므로 이것을 사로잡았다. 11월에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신을 북제(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13년(557) 여름 4월에 왕자 양성(陽成)을 태자로 삼고, 마침내 내전(內殿)에서 군신(群臣)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겨울 10월에 환도성간(干) 주리(朱理)가 반역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15년(559)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양원왕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