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12. 보장왕 대당전 시대

자연정화 2013. 8. 5. 01:35

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12. 보장왕 대당전 시대

 

12-1. 영류왕의 천리장성ad618~ad642
12-2. 보장왕 대당전 시대ad642~ad650

 

12-1. 영류왕의 천리장성ad618(영강)~ad642

 

영류왕(榮留王)은 이름이 건무(建武)<또는 성(成)이라고도 하였다.>이며,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죽었으므로, 즉위하였다.
고무高武라고도 했다.
연호는 영강
永康과 함화咸和로 추정된다.

영강명 금동불상(永康銘 金銅佛像)은 평양시 평천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이며 영강(永康)이라는 연호가 표시되어 있다.

영강7년 세차 갑 위망모 조 미륵존상   永康七年 歲次 甲 爲亡母 造 彌勒尊像 
복원령망자신승각 자씨 삼회지초      
福願令 亡者神 昇覺   玆氏三會之初
오무생념구경필과 제약유죄우원시소멸 
悟无生念 究竟必果    堤若有罪 右願時 消滅
수희자 등동 차원                    
隨喜者 等同 此願 
중국의 영강(永康) 연호는 서기 300년 단 일년뿐이었다. 북한에서는 영강을 고구려 연호로서 평원왕 7년으로 주장하나 [한단고기]에서 평원왕의 즉위연호는 태덕(太德)이다. 고구려왕 즉위 7년이 갑해인 경우는 영류왕이다.

 

황해도 신천군에서 출토된 함화(咸和) 10년의 명전(銘磚)이 있다.

함화 10년 태세 을미 손씨조 咸和 十年 大歲乙未 孫氏造
중국 동진(東晋)의 성제 연호 함화 10년은 335년으로서 역시 을미년이다.

그러나 백제 땅에서는 칠지도나 근구수왕의 함령을 보면 379년까지도 태세를 기록하지 않았다.
395년은 아신왕(阿莘王) 5년이라 불가하고, 455년 개로왕 2년이라서 불가하다. 백제 무령왕이나 창왕 등은 연호가 없었던 사실이 무령왕묘와 사리불탑으로 증명된다.
따라서 함화는 고구려 연호로 추정되는데 515년은 백제 무령왕이 평안도까지 장악하여 고구려 연호 발굴이 불가능하다.

575년은 고구려 평원왕의 태덕(大德) 연호(559년 이후)를 이은 평원왕 후반부 연호로서 가능하지만 559년에 등극한 평원왕이 7년만인 566년에 별 이유없이 개원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반면에 635년 을미년은 영류왕이 당나라 역서를 수입하여 고구려에 적용한 해가 626년이 되므로서, 역법으로 바꾸는 것을 계기로 다시 개원하였을 수 있다.따라서 함화는 영류왕의 즉위 연호 영강에 이어지는 후기 연호(626-642)로 추정한다.

 

2년(619) 봄 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은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5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왔다.
4년(621) 가을 7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년(622)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고조(高祖)가 수나라 말기에 전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많이 사로잡힌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짐은 삼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온 땅에 군림하여, 3령에 공손히 순종하고 모든 나라를 불러 쓰다듬으며, 넓은 하늘 아래를 골고루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을 모두 평안케 하였다. 왕은 요동을 다스리며 세세토록 번복(藩服)에 머물면서, 정삭(正朔)을 받들고, 멀리서도 조공을 바치려고 사신을 보내 산천을 넘어 정성을 나타내었으니, 짐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제 천지 사방이 평안하고 사해(四海)가 잘 다스려져서, 옥백(玉帛)이 통하고 도로가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화목함을 펴서 오랫동안 교분(交分)과 우의(友誼)를 두텁게 하고 각기 강토를 유지하면, 어찌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나라 말년에 전쟁이 계속되고 난이 일어나, 싸우는 곳에서 각각 그 백성을 잃어,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가족이 나뉘고, 여러해 지나도록 홀어미와 홀아비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지금 두 나라가 화통하여 의리에 막힘이 없게 되었으므로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모아서 곧 보내려고 한다. 왕은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놓아주어 편안히 기르는 방도를 힘써 다하고, 어질고 딱하게 여기는 도리를 함께 넓혀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중국사람을 모아서 보냈는데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6년(623)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624) 봄 2월에 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책력을 반포해 줄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보내 왕을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 고구려국왕으로 책봉하고,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상(天尊像) 및 도법(道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년(625)에 왕은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워오기를 구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9년(626)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입조하지 못하게 하고 또 거듭 침략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절부를 가지고 화친을 권하게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사죄하고 두 나라와 화평할 것을 청하였다.
11년(628) 가을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극한(
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 12년(629) 가을 8월에 신라 장군 김유신이 동쪽 변경으로 쳐들어 와서 낭비성(娘臂城)을 깨뜨렸다.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4년(631)에 당나라가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 수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데에 와서 제사지내고, 당시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전요지全遼志>에서 경관(京觀)은 요양시 수산首山 남 7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수양제 침공 때에 평양 외라성에 들어왔던 수나라 전사자들의 해골탑이었고 당나라 사자가 허물고 돌아갔다. 중국은 요양시 경관을 진제 사마선이 요동국 정벌 후에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허문 기록도 없고 요양시 경관은 분명히 당나라인들이 허문 것이다.

 

봄 2월에 왕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으로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 천여 리나 되었다. 무릇 16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장성(長城)은 부여성에서 동남쪽 바다까지라고 하였다. 서쪽 부여에서 동남쪽 바다까지로 고려하면 북부여의 천산에서 안시성까지일 것이다. 적봉시 북부에 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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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장성도

 

21년(638) 겨울 10월에 신라의 북쪽 변경의 칠중성(七重城)을 침략하였다. 신라의 장군 알천(閼川)이 막으므로 칠중성 밖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졌다.
23년(640) 봄 2월에 세자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위로하고 선물을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왕은 자제를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할 것을 청하였다. 가을 9월에 해가 빛이 없다가 3일이 지난 뒤 다시 밝아졌다.

24년(641)에 황제는 우리 태자가 입조하였으므로,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노고에 보답하였다. 진대덕이 국경으로 들어와서 이르는 성읍마다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내가 산수를 좋아하는데 이곳에 경치가 뛰어난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관리들은 기꺼이 그를 인도하여 놀러 돌아다니며 가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세세한 곳을 다 알게 되었다. 중국사람으로 수나라 말년에 군대에 나갔다가 숨어서 남게 된 사람들을 보면, 친척들의 생사를 말해주어 사람들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남녀가 좌우에서 그를 보았으며 왕은 군대의 호위를 성대하게 하여 사신을 맞이하였다. 진대덕이 사신으로 온 것을 기회로 나라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진대덕이 돌아가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진대덕이 황제에게 “그 나라가 고창(高昌)이 망한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객사에서 접대하는 것이 평상시보다 더 은근합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사군(四郡)의 땅이다. 내가 군사 수만 명을 내어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필시 나라의 모든 힘을 들여 구하려고 할 것이다. 따로 수군을 보내 동래(東萊)에서 출병하여 바닷길로 평양으로 가서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면, 그 나라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산동의 주현(州縣)이 피폐하여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려 할 뿐이다.”

25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왕은 서부대인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연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에 태종은 왕이 죽은 것을 듣고, 동산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명령을 내려 물건 300단(段)을 주고, 사신을 보내 절부를 가지고 조위하게 하였다.

 

 

2. 보장왕대당전시대ad642(개화)~ad650

 

보장왕(寶臧王)은 이름이 장(臧)<혹은 보장(寶臧)이라고도 하였다.>이고, 나라를 잃었으므로 시호가 없다. 건무왕의 아우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 건무왕이 재위 25년에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장(臧)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할 것을 꾀하여 김춘추(金春秋)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보장왕의 연호는 개화(開化)였다.

2년(643) 봄 정월에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연개소문이 왕에게 고하였다. "삼교(三敎)는 비유하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하는데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십시오.”

대왕(大王)은 매우 지당하다고 여겨서 당나라에 글을 올려서 청하니, 태종(太宗)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 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 주었다. 왕은 기뻐하고 절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게 하였다.
윤 6월에 당나라 태종이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국정(國政)을 제멋대로 하니 진실로 참을 수 없다. 지금의 병력으로도 고구려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고, 나는 거란과 말갈을 시켜 그들의 버릇을 길들이려고 하는데, 어떤가?”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고 대국이 토벌할 것을 두려워하여 수비를 엄하게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아직 그 계획을 나타내지 않고 참고 계시면, 저들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고 반드시 다시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 악을 더욱 멋대로 행할 것이므로, 그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좋다고 하였다. 황제가 부절을 가진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어 책봉하고 조서를 내렸다. “먼 나라를 위로하는 것은 전대 제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대를 잇는 의리는 여러 왕대의 옛 규례이다. 고구려 국왕 장(臧)은 재능과 생각이 아름답고 민첩하고, 식견과 도량이 치밀하고 바르며, 일찍이 예교(禮敎)를 익혀 덕망과 의로움이 알려졌다. 처음 번방(藩邦)의 왕업을 계승하여 정성을 먼저 드러냈으므로, 마땅히 작위를 더하여 예전의 사실을 인정하여 상주국 요동군왕 고구려왕을 준다.”

가을 9월에 신라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백제가 우리 나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입조(入朝)하는 길을 끊으려 합니다." 라고 말하고,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15일에 밤에 밝았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다. 많은 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3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내렸다. “신라는 우리 왕조에 충성을 다짐하여 조공을 그치지 않으니,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명년에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상리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두 성을 깨뜨렸는데, 왕은 사람을 시켜 불러들여서 연개소문이 돌아왔다. 상리현장이 신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개소문은 상리현장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신라와 원한으로 틈이 벌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전에 수나라 사람이 쳐들어 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고,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 신라가 스스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아마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상리현장이 말하였다. “기왕의 일을 어찌 추구하여 논의하겠느냐?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은 오히려 이것을 말하지 않는데, 고구려만 어찌 옛땅을 반드시 찾을 수 있겠느냐?”
막리지는 마침내 듣지 않았다. 상리현장이 돌아가 그 실상을 갖추어 말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치고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지금은 또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7월에 황제가 장차 군사를 출동시키려고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 3주에 명령을 내려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張儉) 등을 보내 유주(幽州)·영주(營州) 2주 도독의 병사와 거란·해(奚)·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하였다.
또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궤수사로 삼았는데, 하북에서부터 여러 주가 모두 위정의 지휘를 받게 하여, 위정이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소경(少卿) 소예(蕭銳)에게 명하여 하남의 여러 주의 양식을 싣고 바다로 가게 하였다. 9월에 막리지는 백금을 당나라에 바쳤다.
저수량이 말하였다.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구이(九夷)가 용납할 수 없어 이제 그를 치려고 하는데, 그가 금을 바치니 이것은 곡정(
鼎)과 같은 것입니다. 신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사신이 또 말하였다. 막리지는 관인 50명을 들여 보내 숙위하게 할 것입니다.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하였다. 너희 무리는 모두 고무(高武)를 섬겨 관작을 얻었는데, 막리지가 왕을 죽였는데도 너희들은 복수를 하지 않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하며 대국을 속이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느냐?

황제는 그들을 모두 처벌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평양에 내린 눈 빛이 붉은색이었다. 황제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려고, 장안(長安)의 노인들을 불러 위로하며 말하였다. "요동은 예전에 중국 땅이었고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서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근심할 것 없다."

황제는 곧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황제가 대답하였다.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달리는 일,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는 일, 가까운 것을 두고 먼 것을 택하는 일, 이 세 가지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고구려를 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살륙하고는 만족해 하므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구원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살피지 못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북쪽으로 영주(營州)로 곡식을 나르고, 동쪽으로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곡식을 저장하였다. 11월에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宜州)자사 정천숙(鄭天璹)이 이미 벼슬을 그만 두었으나, 황제는 그가 일찍이 수나라 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행재소로 불러서 물으니, “그가 요동도는 멀어서 군량을 옮기는 것이 어렵고, 동이(東夷)는 성을 잘 지키므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지금은 수나라 때에 비할 것이 아니다. 공은 다만 따르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아서, 강회(江淮)와 영협의 군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과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오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좌위솔(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하주(河州) 2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여, 양군이 합세하여 유주(幽州)에서 다 모이게 하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감(少監) 구행엄(丘行淹)을 보내 먼저 중공(衆工)을 독려하여 안라산(安羅山= 唐山市)에서 사다리와 충차(衝車)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응모한 원근의 용사들과 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황제가 모든 것을 친히 가감하여 편이한 것을 취하였다. 또 친필 조서로써 천하에 알렸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그 실정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느냐? 이제 유주와 계주(州)를 순행하고 요동과 갈석으로 가서 그 죄를 물으려고 하니, 지나는 곳의 군영과 숙사에서 노력과 경비가 들지 않도록 하라.”

황제가 또 말하였다. “예전에 수나라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는데, 고구려 왕은 그 백성들을 인자하게 사랑하였다. 반란을 생각하는 군사로써, 편안하고 화목한 백성들을 쳤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지금 대략 말해서, 필승의 길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치는 것이고, 둘째는 순리로써 반역을 치는 것이고, 셋째는 다스려진 형세로써 어지러운 틈을 타는 것이고, 넷째는 편안함으로써 피로한 것에 대적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기쁨으로 원망에 맞서는 것이다.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냐? 백성들에게 포고하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로써 무릇 숙사, 공급, 설비의 기구를 줄인 것이 태반이었다. 여러 군대와 신라, 백제, 해(奚), 거란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치게 하였다.

4년(645) 봄 정월에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幽州)에 이르렀다. 3월에 당나라 황제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시중하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출병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짐이 지금 동쪽으로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고, 고구려를 위해서는 임금의 치욕을 씻어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또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들의 남은 힘으로써 이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황제가 정주를 출발할 때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자기 손으로 안장 뒤에 비옷을 매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유성(柳城)을 출발하여 형세를 과시하며 마치 회원진(懷遠鎭)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고는, 군사를 몰래 용도성으로 나왔다.
용도성은 태조5년에 만들었다. 대략 금주시 북쪽 부근으로 추정된다.

여름 4월에 이세적이 통정(通定)으로부터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들은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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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하에서 시작된 고당전


고구려 국경성도

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자,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기병 10여 명을 이끌고 곧바로 성문으로 압박해 오니, 성 안에서는 놀라 소란해져서 감히 나가는 자가 없었다.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가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수천 명을 죽였다.

건안성(建安城)은 <신당서>에서 안동도호부 서쪽 3백리면서 한 평(중)곽현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안동도호부는 요양으로 해석된다.
故漢襄平城。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裡海口六百里;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
대략 안시성 동남방이면서 주요 고성을 찾으면 고승진(高升鎭) 고성이 건안성으로 유력하다. 서남에 평안보성도 있는데 이 평안보성이 고대 평곽성이었을 수도 있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盖牟城)을 쳐서 함락시켜, 1만 명을 사로잡고 양곡 10만 석을 빼앗았으며, 그 땅을 개주(盖州)로 삼았다.
고구려 서북부전선의 핵은 신성이었다.
[한원]에서 신성은 남소의 70리 남쪽이라 하였는데 남소수는 본래 교래하(敎來河)였다. 선비족 침입 때에 동남쪽으로 남소성이 후퇴된 것으로 보인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서 1118년 1월, 금나라 아골타가 칭제한 그 해에, 요국장수 연왕 순이 요나라토벌군을 이끌고 휘주徽州(=부신시阜新市 구묘향舊廟鄕) 동쪽에서 금나라 군대를 만났는데,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궤멸되었다. 연왕은 휘하 오백기로 장백, 어무로 물러났고 이는 의무려산 아래다.
이때 금나라군대는 신주(新州)로 쳐들어갔는데 절도사 왕종보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금나라 여진족은 신주를 약탈하고 돌아서서 성주成州(=부신시 홍모자향紅帽子鄕), 의주懿州(=탑영자고성塔影子古城), 호주豪州(=서남와고성西南窪古城), 위주衛州 등 항복한 4주를 약탈했다.
따라서 신주는 구묘향 서쪽이 되는데 고구려 신성과 같은 위치이다.

신성
이는 지금 내몽고의 나만기(奈漫旗)에 있는 신진(新鎭)이 된다.
신진에 있는 신성 역시 험준한 성이다. 성의 남북 길이가 6km다.
 현재 구하(구河)가 흐르는데 신성은 본래 고구려 구차홀(仇次忽)이었다고 했고, 개모성의 개물은 한자어로 구하(狗河)로 바뀔 수 있다.

신성의 전투 소리가 항복한 개모성에서 들을 수 있었으므로 개모성은 신성에서 매우 가깝다.

신성과 개모성

신성 남쪽에 훌륭한 고성이 있다. 개모성은 본래 정읍병열(井邑倂列)이라하였으니 쌍읍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지명은 서애(西涯), 동애(東涯)이다. 두 성의 동서 길이를 합치면 5km를 넘는다.
개모성 사람들은 당나라에 끌려가서 요녕성 금서시 동북에 개주를 만들기도 했다.
발해는 본래 개모성을 진주(辰州)라고 고쳤는데 요나라가 이를 요동반도로 옮겼다.
 
발해 진주 개모성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성은 4면이 깎은 듯하고 다만 서문만이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다.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5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요양시 사령 비사성

이세적이 요동성 밑에 이르고, 황제가 요택(遼澤)에 이르렀으나, 진흙이 200여 리나 되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군대가 머무르지 않고 요택의 동쪽으로 건너왔다. 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구원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맞이했는데, 군중에서는 모두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이 현저하게 다르므로, 도랑을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아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도종이 말하였다.

“적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깔보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멀리 와서 피곤할 터이니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마땅히 길을 깨끗이 치우고 황제를 맞이할 일인데 적을 임금께 남겨두려고 하느냐?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장사임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와 치니 향하는 곳마다 다 쓰러졌으므로, 여러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맞붙어 싸우게 되자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후퇴하여 도망하였으므로 당나라 군대가 패하였다. 도종(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군진이 어지러우므로, 날랜 기병 수천 명과 함께 돌격하고, 이세적도 군사를 이끌고 그를 도왔으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황제가 요수를 건너자 다리를 걷어치워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 그리고] 강하왕(江夏王) 도종에게 위로하여 선물을 내리고, 마문거는 승진시켜 중랑장을 삼았으며, 장군예는 목을 베었다. 황제가 몸소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가장 무거운 짐을 나누어 말 위에 얹으니, 시종관들이 다투어 흙을 져다 성 밑에 놓았다.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12일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황제가 정예군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여 그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니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朱蒙祠]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前燕)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여신으로 만들어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꼭 안전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세적이 포차를 벌려놓고 큰 돌을 날리니 300보 넘게 날아가 맞는 것마다 이내 부서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밧줄로 만든 그물을 쳤으나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충차(衝車)로 성가퀴를 쳐서 부수었다. 이때 백제가 검붉게 칠한 쇠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만들어 바치니, 당나라 군사들이 이것을 입고 따랐다. 황제가 이세적과 만나니 갑옷 빛이 햇빛에 빛났다.

남풍이 세게 불자,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 충차의 장대 끝에 올라가 성의 서남쪽 다락에 불을 지르게 하고, 불이 성 안으로 번지자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으로 올라갔다. 우리 군사들은 힘껏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는 만여 명이었고, 포로된 자는 군사가 만여 명, 남녀가 4만 명이었으며, 양곡은 50만 섬을 빼앗겼다. 황제가 그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요동성과 마수산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황제가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 사신은] 성에 이르러 칼과 도끼를 내던지는 것을 신표로 삼고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당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정녕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말하였다.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그를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에서 이겼을 때에,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 후회하였으므로, 황제는 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노하여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성을 빼앗으면 반드시 그 사람과 물건들을 전부 전사들에게 상으로 줄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이세적은 황제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보고 갑옷 입은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청하였다. “사졸들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이 거의 함락되었는데 어찌 다시 그 항복을 받아들여서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황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며 말하였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이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터이니, 장군은 이 한 성과 바꾸기 바란다.”
이세적이 그제야 물러났다.
황제가 성 안의 남녀 만여 명을 붙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고 그들에게 음식을 내렸으며, 80세 이상된 자에게는 비단을 차등있게 내렸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있던 자는 모두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병장기를 주어 그들이 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요동성에서부터 당태종이 공격나갔다가 항복을 받고 돌아온 백암성은 산에 의지하고 물이 험한 곳인데 <요사지리지>에서 암주 설명은 발해 백암성을 요나라 태종이 뽑아다가 심양에 옮겼다고 하였고, 따라서 현재의 요동에 있던 것이 아니다. 
요나라가 옮기기 이전의 백암성은 1117년 요나라 연왕순의 여진족 토벌군과 여진족 전투중에 그 기록이 출현하는데,
휘주(徽州;부신시 서북 사가자 고성)에서 요나라군이 대패하고 후퇴하여 다시 전열을 정비한 팔영(八營) 중의 하나로 암주영이 있었다.

1117年. 初, 怨軍有八營, 共二萬八千餘人, 自宜州募者謂之前宜營, 再募者謂後宜營, 前錦、後錦者亦然, 有乾營、顯營, 又有乾顯大營、岩州營.

해석하면 대릉하의 의주시 앞뒤로 2개, 소릉하의 금주시 앞뒤로 두개, 안시성이 있던 북진시 앞뒤로 3개, 그리고 암주성이었다. 즉 안시성의 방어 위치이면서, 또한 당태종의 요동성-백암성-요동성-안시성의 행로를 보면 요동성과 안시성의 협곡 길에서 살짝 비켜있다.


백암성 암주성의 모습

 


백암성을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이에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 성사(省事)가 그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하였다. 황제는 그가 의리가 있는 것을 어여삐 여겨 비단 5필을 내리고, 장사를 위하여 상여를 만들어 주고 평양으로 돌려 보냈다. [황제는] 백암성을 암주(巖州)라 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이전에 막리지는 가시성(加尸城) 사람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은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가 필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서 한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황제는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내고 개모성을 개주라고 하였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북부(北部) 욕살(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우리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고연수에게는 책략이 세 가지 있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와 안시성을 연결하여 보루로 삼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며 말갈 군사를 풀어 우리의 소와 말을 빼앗으면, 우리가 공격해도 갑자기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요, 돌아가려 하면 진흙으로 막혀,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 안의 군사를 뽑아 함께 밤에 도망치는 것은 중책이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나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그들은 필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내 눈 앞에 있다.”

그때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는 연로하여 일을 익히 잘 알았는데 고연수에게 말하였다. “진왕(秦王)이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 사람은 일세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그가 천하의 무리를 데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티면서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 그 군량길을 끊는 것이 낫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할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그제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고연수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황제는 그가 머뭇거리면서 오지 않을까 염려해서 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령하여, 돌궐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유인하고 첫교전에 거짓으로 달아났다. 고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 하고 다투어 나아가 그들을 이기고, 안시성 동남쪽 8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기대어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모아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가 대답하였다.

“신은 듣건대 ‘적과 대하여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은 마침 여러 군영을 지나가다가, 사졸들이 고구려군사가 왔다는 것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어 달면서 얼굴에 즐거운 빛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이길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스무 살 이전에 친히 군진에 나가 기습병을 내어 이겼으니, 그것은 모두 위로 황제의 계획을 받고 여러 장수들이 계책을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폐하께서 지휘하십시오.”

황제가 웃으며 여러분이 이와 같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헤아려 생각하겠다.고 말하고 장손무기 등 따르는 기병 수백 명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며, 산천형세가 군사를 숨길 만한 곳과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우리 군대는 말갈과 군사를 합해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나 되었으므로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천자의 군대를 막고 있으므로 평양의 수비는 필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예 군사 5천 명을 주십시요. 그 근본을 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가 듣지 않고 사신을 고연수에게 보내 말하였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죽였으므로 죄를 묻기 위하여 왔는데, 교전하기까지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국경에 들어오니 꼴과 양식이 부족하여서 몇 개의 성을 빼앗은 것이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갖추면 잃은 것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고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이 정예군 1만 1천 명을 거느려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으로부터 협곡으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거느려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령하여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 힘을 내어 공격하게 하고, 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朝堂)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설치하였다. 이날 밤 별똥별[流星]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고연수 등만은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 것을 명령하니, 여러 군대들이 북치고 소리지르며 일제히 나아왔다.

고연수 등은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군진을 함락시키니, 그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우리 군사들은 쓰러졌다. 대군이 들이치니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 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으나,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하고, 장손무기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귀로를 끊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리 3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황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황제가 갔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이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황제가 백암성에서 이기자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날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 때에도 성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불시에 나가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치라.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배 안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에는 치지 않을 곳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建安城)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安市城)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여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

황제가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느냐? 내 일을 그르치지는 말라.”고 말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안시성 사람들은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치며 소리질렀다. 황제가 노하자 이세적은 성을 빼앗는 날에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릴 것을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오랫동안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않았다. 고연수·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기었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큰 공을 빨리 이루어 저희가 처자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들의 집안을 돌보고 아껴서 사람마다 자진해서 싸우므로 쉽게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는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보고는 사기가 꺾이고 허물어졌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터질 것입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이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군사를 옮겨 그곳으로 가면 아침에 다다라서 저녁에는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을 막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위엄을 보고는 달아나고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그런 후에 물자와 양식을 거두어서 북치고 나아가면 평양도 결코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들도 역시 말하였다. “장량의 군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므로 그를 부르면 이틀 후면 올 수 있을 것이니,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모아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렸습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르려 하는데 장손무기만이 홀로 이렇게 말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하는 것은 여러 장수와는 달라서 위험한 형세를 타고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적의 무리가 10만 명이나 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그들이 우리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빼앗은 후에 군사를 멀리 몰고 나아가는 것이 나으니,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황제가 이에 멈추었다. 여러 장수가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 안에서 나는 연기가 날로 작아지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매우 시끄럽게 우니, 이것은 필시 군사들을 먹이고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땅히 군사들을 엄하게 하여 대비해야 한다.”

이날 밤에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갔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공격하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나머지 군사는 물러나서 달아났다.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고 성을 핍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혀서 이것을 막았다. 사졸들은 번(番)을 나누어 싸웠는데 하루에 예닐곱 차례 맞붙었다. 충차와 포석으로 그 누첩을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상하자 황제가 친히 침을 놓아 주었다. 산을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아 60일 동안 인력을 들인 것이 50만 명이었다. 산 꼭대기는 성에서 몇 길 떨어졌으므로 밑으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둔을 치고 적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떠나 있었는데,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흙산을 빼앗아 해자를 파고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부복애를 목베어 두루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아가 죄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의 죄는 마땅히 죽을 만하나, 다만 짐은 한(漢)나라 무제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은,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을 쓴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기며, 또 개모성과 요동성을 깨뜨린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

고구려 안시성은 당태종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대성이며 성주는 양만춘이었다.

안시성을 찾기 위해 [신당서]를 보면 대요수와 소요수, 그리고 또 압록강이 서남으로 흘러 바다로 나가는 곳이 역시 안시성이다.

<新唐書> 高麗...水有 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市城...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又西南 至安市.

대요수는 대릉하와 합쳐서 바다로 나가므로 안시성의 위치는 지금의 랴오허강(遼河) 서안이 된다. 

이보다 확실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500년대에 기록된 [수경주]에 인용된 [위토지기]기록이다. [위토지기]는 백랑수 동쪽에 안시현이 있다고 하였다. [신당서]는 이 위토지기 기록과 부합한다.《魏土地記》曰:白狼水下人遼也。又東過安市縣西,南入于海


 위성으로 찾은 안시성은 의무려산 동쪽의 북진시(北鎭市) 동북방에 있었다.

안시성위치도

 

북진시는 발해 후기 현덕부 현주(顯州)였다.
<연행일기(燕行日記) 제9권>에 의하면 북진시 성 서쪽 이도구(二到溝)에 가면 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고려왕의 무덤이 있는데, 달자(韃子; 몽고인)들이 무덤을 부수고 수 길이나 깊이 파 놓았기 때문에 관틀[棺材]은 물에 잠겨 버리고, 곽(槨)만이 드러나 있는데, 벽돌로 쌓아 내부[室]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가 보니까 비석이 있는데 고려왕 무덤이라고 써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이 있게 되었습니다.”하였다.
고려왕 무덤은 이름으로 보아서 안장왕(安臧王)으로 고려된다.

북진시 서남에도 고구려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 오늘날 북진시 서쪽 의무려산 홍보사이트 중에서 영산풍경구(醫巫閭山靈山風景區) 안내를 보면 구백년전 고구려성 유적지와 당대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발해 영봉현(靈峰縣)이 있었다가 요나라 때 영산현이 되었다.
  

 

 

북진시 북쪽 십리에는 고성산(古城山)이 있다고, 명나라 때 지은 <요동지(遼東志)> 등에 전해 온다. 위성으로 찾은 그 고성산 안쪽의 양가점(楊家店)이 바로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의 후예가 살아온 안시성이며 발해 후기 현덕부 성이다. 

 

안시성  동남쪽으로 서대(誓臺)라는 곳이 있었다. 당태종이 맹세하던 곳이라는데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맞은 당태종은 안시성을 함락하면 안시성의 모든 남자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바가 있다. 

역시 동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고려판성(高麗板城)의 고구려 성터는 본래 당태종이 머물렀던 당루(唐樓)라고 했는데, 그 위에서 행관영루(行觀營樓)하였다고 전해진다. 당태종이 올라서 진영을 살펴보던 곳이라는 뜻이다. <자치통감>에서는 당태종이 높은 곳에 올라 산천형세를 살펴보았다고 하였다.

<자치통감> 乃與無忌等從數百騎乘高望之,觀山川形勢,可以伏兵及出入之所

당태종이 철군한 뒤에 그 자리에 고구려가 성을 지어 고려판성이라고 이름이 전해오는 것이다.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은 고구려 장수 고혜진 등과 전투하여 초반에는 고구려군에게 밀리다가 후반에 주필산에서 설인귀의 맹활약으로 이겼다.  이후 고구려 군대를 포위하여 고혜진 등의 항복을 받았다. 당시 당태종이 주필산 전투를 각석기공(刻石紀功)한 주필산은 정안보진(正安堡鎭) 서쪽 기둔(紀屯)으로 고려된다. 정남보진 북쪽 건둔(蹇屯)은 주필산에서 패한 고구려군이 도주했다가 항복한 곳으로 고려된다.

이후 당태종은 안시성 동남에 3개월간 진을 치고 토산을 쌓다가 물러났다.

양만춘의 후예는 발해 때에 설치한 북주성의 주인이었던지 오늘날 북진성을 관통하는 물이름도 양랑하(楊朗河)라고 하였고, 성내 서북산은 만취산이라고 하였다.

 


북진시 동북 안시성도

 


북쪽에서 본 안시성

황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군사를 돌릴 것을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개주 2주의 호구를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황제는 그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00필을 주면서 임금 섬기는 것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後軍)이 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을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맞이하게 하였다. 무릇 고구려 정벌에서 현도·횡산(橫山)·개모·마미(磨米)·요동·백암·비사·협곡(夾谷)·은산(銀山)·후황(後黃) 10성을 함락시키고, 요주·개주·암주 3주의 호구를 옮겨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만 명이었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근심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신성·건안·주필의 세 대전에서 우리 군사와 당나라의 병마가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 황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사론(史論): 당나라 태종은 뛰어나고 총명하여 세상에 드문 임금이다. 난을 다스린 것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견줄 만하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成王)·강왕(康王)과 비슷하다. 군사를 쓰는 데 이르러서는 기이한 책략을 내는 것에 끝이 없고 향하는 곳에 적수가 없었는데,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 안시성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호걸이요 비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에서 그 성명을 전하지 않으니, 양자(楊子)가 말한 바 제나라와 노나라의 대신이 사기에 그 이름을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다름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5년(646) 봄 2월에 당나라 태종이 수도로 돌아가 이정(李靖)에게 일러 “내가 천하의 많은 무리를 가지고 작은 오랑캐에게 곤란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정이 말하기를 “이것은 도종(道宗)이 알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도종을 돌아다 보며 물으니,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빈 틈을 타서 평양을 빼앗자고 한 말을 소상히 아뢰었다. “황제가 원망하며 당시의 일은 매우 바빴으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여름 5월에 왕과 막리지 개금(蓋金)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미녀 두 명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신에게 말하였다. “여색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나 그들이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하는 것이 딱해 나는 취하지 않는다.”

동명왕 어머니의 소상(塑像)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이전에 황제가 돌아가려 할 때 활집을 연개소문에게 주었는데, 그는 이것을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져서, 비록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지만 그 말은 모두 괴이하고 황당하였다. 또 당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에도 거만하였고,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으며, 누차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여도, 침략하고 업신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명령하고 다시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6년(647) 봄 2월에 당나라 태종이 다시 군대를 보내려 하니 조정의 의논이 이러하였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전에 황제께서 친히 정벌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우리가 이긴 성에서도 실로 그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백성들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적은 군대를 자주 보내 번갈아서 그 강토를 어지럽혀, 그들을 명령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게 해서 피곤하게 하면, 그들은 쟁기를 놓고 보(堡)로 들어갈 것이며, 수 년 동안 천리가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떠날 것이니, 압록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이 말에 따라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만여 명을 파견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詹事)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朗)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의 군사를 앞세우고 신성도로부터 들어오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어서 잘 싸우는 자들을 골라 배치하였다.
청구도는 적봉시를 통과했을 것이다. 환웅시대 청구성이 적봉시에 있다.

여름 5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를 건너 남소 등 몇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대는 모두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이세적이 이를 격파하고 그 나성(羅城)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무릇 백여 차례나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아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만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3천 명이었다. 8월에 태종이 송주(宋州) 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하고 우리를 치려 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은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7년(648)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4월에 오호진(烏胡鎭
= 오호도, 대련과 산동의 사이)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공해 와서 우리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들을 깨뜨렸다. 그날 밤에 우리 군사 만여 명은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고신감의 복병이 나와 우리가 패하였다.

6월에 황제는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할 것으로 여기고 명년에 30만 군사를 발동하여 단번에 멸망시킬 것을 의논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대군이 동쪽으로 정벌하려면 반드시 한 해를 지낼 군량을 갖추어야 하는데, 짐승과 수레로 실어 나를 수 없으므로 마땅히 배를 갖추어 물로 운반해야 할 것입니다. 수나라 말기에 검남(劍南) 지방만이 도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근자에 요동 싸움에도 검남은 또 참여하지 않아서 그 백성들이 많고 부유하므로 그들에게 배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가을 7월에 서울에 사는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좌우부(左領左右府) 장사(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劍南道)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은 길이가 100자나 되고 넓이는 그 반이나 되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 수로로 가서 무협(巫峽)으로부터 강주(江州)·양주(楊州)에 이르러 내주로 가게 하였다.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갔는데,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가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명령하여 군량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두게 하고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8년(649)에 당나라 태종이 죽었다. 조서를 남겨 요동 전쟁을 그만두게 하였다.

사론(史論): 처음에 태종이 요동에서 사변을 일으킬 때 간하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다. 또 안시[성]에서 군대를 돌이킨 후에는 스스로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가 다시 정벌하려 할 때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병중에서 상소하여 간하였다.

“노자(老子)는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폐하는 위명과 공덕은 이미 만족하다고 할 수 있으며, 토지를 개척하고 강토를 넓혔으니 역시 그칠 만합니다. 또 폐하께서 매양 한 명의 중죄인을 판결할 때에도 반드시 세 번 되풀이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하며, 간소한 반찬을 올리게 하고 음악을 그치게 한 것은 인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제 죄없는 사졸들을 몰아 칼날 밑에 맡겨두어서 비참하게 죽게 하니, 그들만은 불쌍히 여길 만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예전에 고구려가 신하의 절개를 어겼다면 죽이는 것이 마땅하고, 백성을 억압하고 못살게 했다면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며, 후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 가지 죄목이 없는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 앞 시대의 부끄러움을 씻고 밖으로 신라를 위해 복수한다고 하니, 어찌 보존되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착하게 되도록 허락하시고, 파도 가운데의 배를 불사르고 모집에 응한 군사를 돌려보내면, 자연히 화이(華夷)가 기뻐하여 의지할 것이며 먼 곳에서는 삼가하고 가까운 곳에서는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양공(梁公)이 죽을 때 한 말이 간곡하기가 이와 같았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고 동쪽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려 하다가 죽은 후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과장하기를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즐겨하여 먼 곳에서 싸우기에 힘썼다.』는 것이 이것을 말함이 아닐까?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이런 말이 있다. 『주필산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합하여 사방 40리에 뻗치니 태종이 그것을 보고 두려운 빛이 있었다.』 또 이런 말이 있다.『6군이 고구려에 제압되어 거의 위세를 떨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척후병이 고하기를 ‘영공(英公)의 대장기가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하자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비록 결국에는 스스로 빠져나갔지만 두려워함이 그러하였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이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자기 나라를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