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글은 <삼국사기> 기록이다. 갈색 글은 다른 글의 원문 기록이다. 파란색 글은 저자의 해석이다.
13. 보장왕 한성평양 시대ad650(개화)~ad668
13-1. 보장왕 한성평양 시대ad650~ad668
13-3. 고덕무 후고구려 시대ad699~ad819
13-1. 보장왕 한성평양 시대ad650~ad668
9년(650) 여름 6월에 반룡사(盤龍寺)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나라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믿지 않았으므로, 남쪽으로 옮겨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갔다.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11년(65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50년에 고구려가 대동강 평양의 반룡사를 뺏은 것으로 고려되므로 대동강 한성(평양)으로 천도하였다고 추론된다.
먼저 한성의 역사를 보면 당시에는 한수라고 부르던 대동강에 백제 온조왕이 먼저 들어왔었다.
온조왕은 처음에 미추성에 상륙했는데 지금의 평원군 미두산성이다. 뒤에는 비류백제 후손이 들어와 살았다.
온조왕은 부아악(자모산성)에 올라보고 정도하였는데 부아악은 자모산성이다.
온조왕은 마한 동북 100리에 도래하여 터를 잡았다. 지금 성천이다. 성천 상리가 온조왕의 첫 도읍지다.
백제 근초고왕은 북포산으로 천도하였다. 이는 <삼국유사> 기록이다.
개루왕 4년 서기 131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는데 바로 대성산성이다. 고구려 대성산성 안에 백제 토산성이 있다.
근초고왕은 북포에 안학궁을 짓고 천도한 것이다.
근초고왕의 북한산성은 대성산성의 안학궁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남평양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지리지]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371년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 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남평양은 본래 백제 것이고 광개토왕 때에 처음 고구려에 빼앗긴 것이다.
고구려는 한성을 쌓았다. 지금의 평양성이다. 평양성의 중성은 고구려인이 쌓았다. 이는 4개의 성벽 축조 기록에서 고구려 관직 이름으로 증명된다.
당시 고구려인은 한성이라 불렀고, 훗날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산의 묘지명에서도 한성을 지키지 못해 잡혀왔다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평양 외성은 당나라 장안성을 본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양원왕이나 평원왕 때 만들어진 것이 당나라 장안성을 모방할 수는 없다.
즉, 후고구려나 발해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 한성인 평양성
[일본서기]에서 성명대왕聖明大王이 550년경에 평양平壤=南平壤과 한성漢城=平山 漢城을 되찾았으나 한성은 신라에게 내주었다고 하였다. 평양은 고구려에게 내주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거칠부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 때 전투 기록에 보면 고구려왕은 동성산으로 도망갔다고하였다. 대성산성을 의미한다.
백제 무령왕의 2왕자인 일본의 흠명천황 기록을 보면 성명왕의 아들 여창(위덕왕)이 550년에 고려를 쳤다. 백합야에서 쉬다가 고구려 습격을 받았으나 다음날 고구려장수가 누구냐고 물으니 백제 한솔 29세라고 했다. 고구려장수를 죽이고 동성산의 고려왕을 추격하였다.
冬十月,庚寅朔己酉,百濟王子余昌,明王子,威德王也.悉發國中兵,向高麗國,築百合野塞,眠食軍士.是夕觀覽,鉅野墳腴,平原瀰迤,人跡罕見,犬聲蔑聞.俄而儵忽之際,聞鼓吹之聲.余昌乃大驚,打鼓相應,通夜固守.凌晨起見,曠野之中,覆如青山,旌旗充滿.
會明,有著頸鎧者一騎,插鐃者二騎,鐃字未詳.珥豹尾者二騎,并五騎,連轡到來問曰:「少兒等言:『於吾野中,客人有在.』何得不迎禮也.今欲早知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余昌對曰:「姓是同姓,位是杆率,年二十九矣.」百濟反問.亦如前法而對答焉.遂乃立標而合戰.
於是,百濟以鉾,刺嶞高麗勇士於馬,斬首.仍刺拳頭於鉾末,還入示眾.高麗軍將,憤怒益甚.是時百濟歡叫之聲,可裂天地.復其偏將,打鼓疾鬥,追卻高麗王於東聖山之上.
이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是歲,百濟棄漢城與平壤.
신라인이 한성에 들어갔는데 지금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地名,未詳.
13년(654) 여름 4월에 사람들이 혹 말하였다. “마령(馬嶺) 위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너희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함이 한도가 없으니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장수 안고(安固)를 보내 고구려 군대와 말갈 군사를 출동시켜 함께 거란을 쳤는데,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막아서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크게 패퇴시켰다.
14년(655) 봄 정월. 이에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33성을 빼앗았으므로,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조를 구하였다. 2월에 고종(高宗)이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5월에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마주 싸웠다. 정명진 등이 분발하여 우리 군사를 공격해서 크게 이기고 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그 외곽과 촌락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15년(656) 여름 5월에 서울에 비가 쇠처럼 떨어졌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였다.
17년(658) 여름 6월에 당나라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으나 우리에게 이기지 못하였다.
[통감]658 夏,五月,癸未,徙安西都護府於龜茲,以舊安西夏為西州都督府,鎮高昌故地。 六月,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右領軍中郎將薛仁貴將兵攻高麗之赤烽鎮,拔之,斬首四百餘級,捕虜百餘人。高麗遣其大將豆方婁帥眾三萬拒之,名振以契丹逆擊,大破之,斬首二千五百級。
이 전투는 적봉진에서 일어났다. 정명진이 거란군으로 반격하였으니 지금 내몽고 적봉시로 고려된다.
18년(659) 가을 9월에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으로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붙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당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워서 이를 깨뜨렸다.
[통감] 659 右領軍中郎將薛仁貴等與高麗將溫沙門戰於橫山,破之。(與高麗大將溫沙門戰於橫山。當時,薛仁貴手持弓箭,一馬當先,衝入敵陣,所射者無不應弦倒地。接著,又與高麗軍戰於石城,遇善射敵將,殺唐軍十餘人,無人敢當。薛仁貴見狀大怒,單騎突入,直取敵將)
이 전투는 횡산과 석성인데 복주진(復州鎭) 남쪽에 근원을 알 수 없는 횡산현(橫山縣)이 남아있다. 백제, 고구려의 횡산현으로 고려된다.
횡산현과 석성
19년(660) 가을 7월에 평양의 강물이 무릇 3일 동안이나 핏빛이었다. 겨울 11월에 당나라가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을 누방도(鏤方道)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역사에 이제 처음 등장하는 패강(浿江)이 바로 대동강이다. 고구려가 대동강 한성으로 수도를 옮겨간 것을 알았던 것이다.
20년(661) 봄 정월에 당나라가 하남·하북·회남의 67주의 군사를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누방 군영으로 나아가고, 또 홍려경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글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 및 여러 오랑캐 군사와 함께 무릇 35군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일제히 전진하게 하였다. 황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려 하였으나 울주(蔚州) 자사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였다.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힘을 기울일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할 터인데, 적게 내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터이니, 이것은 천하 백성들이 옮겨다니며 수자리 사는 일로 피로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한 마침 무후(武后)도 간하였으므로 황제는 그제야 그만두었다.
661년 4월에 당나라는 35만 군대로 출병하였다. 이중 임아상은 패강도(대동강)로 가고 글필하력은 요동도로 가고 소정방은 (백제로부터) 평양도로 가고 소사업은 부여도로 가고 정명진은 루방도로 가고, 방효태는 옥저도로 고구려에 들어갔다.
그 결과 백제로부터 먼저 대동강 평양에 도착한 소정방이 8월에 패퇴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다음해 2월에 패강도로 진격하던 임아상이 죽고,
사수에 도착한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전멸하였는데 이 사수는 장수왕의 구도 평양 사산성으로 고려된다. 그곳이 고주몽 때에 옥저라고도 하던 곳이다.
四月庚辰,任雅相為浿江道行軍總管,契苾何力為遼東道行軍總管,蘇定方為平壤道行軍總管,蕭嗣業為扶餘道行軍總管,右驍위將軍程名振為鏤方道行軍總管,左驍위將軍龐孝泰為沃沮道行軍總管,率三十五軍以伐高麗.
八月甲戌,蘇定方及高麗戰于浿江,敗之
二年二月甲子,大易官名.甲戌,任雅相薨.戊寅,龐孝泰及高麗戰于蛇水,死之
8월에 대동강 평양에서 패퇴한 소정방은 패강도총관 임아상을 따라서 다시 평양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병부상서 임아상은 이듬해 군중에서 죽었는데, 소정방이 군대를 지휘하여 다시 대동강 평양성을 포위했다가 물러간 것이다.
여름 5월에 왕은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보내 말갈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열흘이 되도록 풀어주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식량길이 끊겨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 진영에 떨어지고 또 비가 오고 천둥이 쳤으므로, 뇌음신 등은 의심하고 놀라서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가을 8월에 소정방이 우리 군사를 패강에서 깨뜨려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에 연개소문은 그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 정예군 수만 명으로써 압록수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건너 올 수 없었다.
압록수는 압록강이 아니다. 국내성으로부터 내려오는 지금의 유하(柳河)를 의미하는 것이다.
글필하력이 이르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으므로, 글필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진격하니, 우리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글필하력이 수십 리를 뒤쫓아 우리 군사 3만 명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고 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져 이리하여 그들은 돌아갔다.
21년(662) 봄 정월에 좌효위장군 백주(白州)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가에서 연개소문과 싸웠는데, 전군이 몰락하고 그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연개소문이 구도성에서 방효태군을 무찌르고 군대를 돌려서 대동강으로 남하하고 있으므로 구원군이 없어진 소정방은 포위를 풀고 물러난 것이다.
무릇 전후에 걸친 행군에서 모두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25년(666) 왕은 태자 복남(福男)<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고 하였다.>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태산(泰山) 제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연개소문이 죽자 장자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어 처음 국정을 맡으면서 여러 성으로 순행하면서, 그 아우인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남생이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있으니 먼저 계략을 세우는 것이 낫겠습니다.”고 하였다. 두 아우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고하기를 “두 아우는 형이 그 권력을 도로 빼앗을까 두려워, 형에게 거역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고 하였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몰래 평양으로 보내 그들을 살피게 하였는데, 두 아우가 그를 덮쳐 붙잡았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남생을 불러들였으나,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그를 토벌하니,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獻誠)을 시켜 당나라에 가서 애걸하였다.
당나라 기록에는 국내고도성이라고 하였다. 또한 천남생을 현도군개국공으로 봉하였으니 국내성과 현도성은 가까운 것이다.
국내 위나암성
6월에 당나라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에 응하여 맞이하게 하니, 남생이 몸을 빼어 당나라로 달아났다. 가을 8월에 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9월에 황제가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특진(特進)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겨울 12월에 고종이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사열(司列) 소상백(少常伯) 안륙(安陸)의 학처준(處俊)을 그 부장으로 삼았으며, 방동선(龐同善)과 글필하력을 함께 요동도 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수륙제군총관(水陸諸軍摠管) 병 전량사(轉糧使) 두의적(竇義積)·독고경운(獨孤卿雲)·곽대봉(郭待封) 등은 모두 이적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또 하북 여러 주의 조부(租賦)를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용으로 공급하게 하였다.
26년(667) 가을 9월에 이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글필하력을 시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적이 처음 요하를 건널 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방의 요해지이니 먼저 그곳을 빼앗지 않고는 나머지 성들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마침내 공격하니 성 사람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항복하였던 것이다. 이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방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연남건(淵男建)이 군사를 보내 그 진영을 습격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이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고간이 나와 금산(金山)에 이르러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패하자, 우리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패주시켰으나,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에서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 여 명을 죽이고, 남소성·목저성·창암성의 세 성을 함락시키고 연남생 군사와 합하였다.
곽대봉이 수군을 데리고 다른 길로부터 평양으로 달려왔다.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장기를 싣고 가 공급하게 하였는데, 풍사본의 배가 부서져서 시기를 놓쳐 곽대봉의 군사들이 굶주리고 군핍하였다. 곽대봉이 글을 지어서 이적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적이 빼앗아 보고 그 허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여,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적에게 주었다. 이적이 노하여 “군의 사정이 급한데 무슨 시냐? 꼭 목을 베겠다.”고 말하였다. 행군관기통사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풀어주니 이적이 그제야 다시 군량과 병장기를 보내 주었다. 원만경이 격문을 지어 “압록강의 험한 곳을 지킬 줄 모른다.”고 하니, 연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을 받들겠다.”고 하고는 곧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서 웅거하니, 당나라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고종이 듣고 원만경을 영남(嶺南)으로 귀양보냈다.
학처준이 안시성 밑에 있으면서 미처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우리 군사 3만이 갑자기 닥치니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다. 학처준이 호상(胡床) 위에 걸터 앉아서 막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뽑아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27년(668) 봄 정월에 당나라가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 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김인문(金仁問)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2월에 이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설인귀가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서 3천 명을 거느리고 장차 부여성을 공격하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적은 것을 이유로 말렸다. 설인귀가 “군사는 꼭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고, 마침내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우리 군사와 싸워 이겨서 우리 군사들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마침내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주(扶餘州) 안의 40여 성이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사신으로 왔다가 요동으로부터 돌아가니 황제가 “군대 안은 어떠한가?” 하고 물으므로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께서 죄를 물을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적이 아직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 중매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남생의 형제가 다투어 우리의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적의 진실과 허위를 우리가 모두 알고, 장수는 충성되며 군사는 힘을 다하기 때문에, 신이 ‘반드시 이긴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에 900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팔십(八十) 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다.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은 거듭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빼앗아 팔고,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가며,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인심이 위태하여 놀라니, 이번 걸음으로 다시 거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연남건이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하려고,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 어울려서 싸우다가 패하니 죽은 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적이 대행성(大行城)으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부여성은 천산의 부여성을 의미한다. 설하수는 서요하, 즉 시라무렌강의 이름이 된다.
여름 4월에 살별[彗星]이 필성(畢星)과 묘성(卯星) 사이에 나타났다. 당나라 허경종(許敬宗)이 “살별이 동북방에서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가 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합쳐 진격하여 압록책(鴨록柵)에 다달았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00여 리를 쫓아와서 욕이성(辱夷城)을 함락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들이 이어졌다.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밑에 이르니, 이적의 군대가 뒤를 이어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접대하였다.
연남건은 오히려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연남건은 군사의 일을 중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小將)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과 함께 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이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지르며 성을 불질렀다. 연남건은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나라 군사가 왕과 연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겨울 10월에 이적이 돌아가려 할 때, 고종이 명령하여 왕 등을 먼저 소릉(昭陵)에 바치고, 다시 군대의 위용을 갖추고 개선가를 연주하면서 수도로 들어가 대묘(大廟)에 바치게 하였다.
12월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서 포로를 받았는데, 왕의 정사가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용서하고, 왕을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원외동정(員外同正)으로 삼고, 연남산을 사재소경(司宰少卿)으로 삼고, 중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고, 연남생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았으며, 이적 이하의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관직과 상을 내리고, 연남건은 검주(黔州)로 귀양보냈다.
고구려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 사람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檢校)안동도호로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總章) 원년 무진년(668)이었다.
[총장] 2년 기사년(669) 2월에 왕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안승의 한성이 바로 황해도 재녕의 장수산성이다.
여름 4월에 고종이 3만 8천3백 호를 강회(江淮)의 남쪽과 산남(山南)·경서(京西) 여러 주의 빈 땅으로 옮겼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년(670) 여름 4월에 이르러 검모잠(劍牟岑)이 나라를 부흥하려고 당나라에 배반하여, 왕의 외손 안순(安舜)<[순(舜)을] 신라기(新羅紀)에는 승(勝)이라고 썼다.>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그를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2년 신미년(671) 가을 7월에 고간이 안시성에서 남은 무리를 깨뜨렸다.
3년 임신년(672) 12월에 고간이 우리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으나, 고간이 쳐서 이기고 2천 명을 사로잡았다.
4년 계유년(673) 여름 윤5월에 연산도(燕山道) 총관 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이 호로하(瓠濾河)에서 우리나라 군사들을 깨뜨리고 수천 명을 사로잡으니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
호로하는 홀골산성이 있는 성천군으로 고려된다.
676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였다. 대동강 평양의 안동도호부는 궤멸되어서 요동 고성으로 후퇴한다.
이는 요양시 평원왕의 장안성이다.
의봉(儀鳳) 2년 정축년(677) 봄 2월에 황제가 항복한 왕을 요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어 나머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였는데, 동쪽나라 사람으로서 먼저 여러 주에 와 있던 자들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게 하였다.
677년 안동도호부를 요동신성으로 옮겼다.
13-2. 고덕무 후고구려 시대ad699~ad819
보장왕은 요동에 이르러 배반할 것을 꾀하여 몰래 말갈과 통했으므로, 황제가 개요(開耀) 원년(681)에 공주(州)로 소환하였다.
보장왕이 영순(永淳) 초년(682)에 죽으니 황제는 왕에게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명령을 내려 당나라 수도로 옮겨 힐리(돌궐왕)의 무덤 왼쪽에 장사지내고 무덤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들은 하남(河南)·농우의 여러 주로 흩어서 나누어 옮기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성(安東城) 옆의 옛 성에 남겨 두었는데, 간혹 신라로 도망하는 자들이 있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들어가 고씨 임금은 마침내 끊어졌다.
수공(垂拱) 2년(686)에 황제가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고, 성력(聖曆) 초년(698)에 이르러 좌응양위(左鷹揚衛) 대장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고,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게 하였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698년 대조영의 발해국이 건국되었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점차 나라를 이루었다.
고덕무는 699년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요동신성에 왔다가 발해국의 묵인하에 대동강 평양으로 옮겨갔다.
고덕무의 후고구려는 태자하 남쪽에서부터 대동강까지 지배하였다.
이는 발해 초기 영역에 태자하 남쪽에서부터 대동강까지 영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덕무의 후고구려는 요동성총벽화(고덕무 고분으로 추정, 그리하여 그가 처음 안동도호부 도독이 되었던 요동 신성의 모습을 그의 고분에 남긴 것이다.)가 있는 곳에 후고구려의 도읍을 세운 것으로 고려된다. 백제 구천성이 있던 곳이다.
그러다가 후고구려가 확장하여 황해도 재녕의 장수산성을 차지하여 역시 한성이라 부르고, 다시 본래 평양성으로 내려와 평양성을 확장하게 된다.
단동의 봉황산성도 이 후고구려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716년 당나라 사자가 발해에 갈 때에 대련을 거쳐갔는데, 대련 역시 후고구려 영역이었다.
원화(元和) 13년(818)에 이르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악공(樂工)을 바쳤다.
고덕무의 후고구려는 발해 속국으로서 699년부터 819년까지 120년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역 사실은 발해에게 위협이 되었고, 발해 대인수왕이 후고구려를 병탄하였다.
그후 발해는 이 후고구려 땅에는 주현(州縣) 대신에 군현(郡縣)을 두어서 다스렸다.
사론(史論):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인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 누에치기, 옷감짜기를 가르치고 법금(法禁) 8조를 두었다. 이리하여 그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문을 닫지 않았으며, 부인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데 변두를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어진 이의 교화 덕택이다. 또 천성이 유순하여 3방(三方)과 달랐으므로, 공자(孔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건너와서 이곳에 살려고 하였던 것도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경(易經)의 효사(爻辭)에 『2는 칭찬이 많고, 4는 두려움이 많다. 가깝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고구려는 진한시대 이후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었다.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리로서, 난세에는 영웅으로 빼어나서 이름과 자리를 함부로 도둑질하였으니, 가히 두려움이 많은 땅에 거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한 뜻이 없고 중국의 봉토(封土)를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 이 때문에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거의 편안할 때가 없었다. 고구려는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통일한 때를 만나고도, 오히려 천자의 명에 거역하여 순종하지 않고, 천자의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여러번 죄를 묻는 군사를 불러들였다. 비록 혹시 기이한 계책을 세워 대군을 이긴 적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보면, 위아래가 화합하고 많은 무리들이 화목할 때는 비록 대국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는데, 나라에 대해서 불의하고 백성에게 어질지 못하여, 무리의 원망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면 무너져 스스로 떨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하였다.『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목만 같지 못하다.』
좌씨(左氏)는 이렇게 말하였다.『나라가 흥하는 것은 복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망하는 것은 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나라가 흥할 때에는 백성을 대하기를 자기가 상처를 입은 것같이 하니 이것이 그 복이요,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흙이나 풀과 같이 보니 이것이 그 화이다.』
이 말들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가진 자로서, 포악한 관리가 윽박지르고 권세가가 함부로 거두어 들이도록 내버려 두어 인심을 잃는다면, 비록 잘 다스려 어지럽지 않게 하고, 보존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 해도, 이것이 어찌 억지로 술을 먹고 취하기를 싫어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고구려 역사를 마친다.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민족혼이 발원하는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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