揆 園 史 話 (규원사화)
二 太始紀
神市氏旣爲君長, 以神設敎, 存其彛性, 周護飽養, 聽其繁衍, 天下民物, 於是漸盛.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蚩尤氏, 實爲萬古强勇之(租)[祖], 有旋乾轉坤之力, 驅使風.雷.雲.霧之能, 又造刀.戟.大弩.巨斧.長槍, 以之而治草木.禽獸.蟲魚之屬. 於是草木開除, 禽獸蟲魚, 僻處深山大澤, 不復爲民生之害矣. 是以, 蚩尤氏世掌兵戎制作之職, 時常鎭國討敵, 未嘗少懈.
太始紀
신시씨가 임금이 되어 신(神)으로서 가르침을 베풀며,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보존케하고 두루 보살펴 배불리 먹이고 양육하며 무성하게 불어남을 모두 받아들이니, 천하의 백성과 사물은 이로서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기에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번개·구름·안개를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칼·창·큰도끼·긴창 등을 만들어 이로서 초목과 금수며 벌레와 물고기의 무리를 다스렸다. 이에 초목이 차츰 걷히고 금수와 벌레며 물고기들이 깊은 산 속이나 큰 못 속으로 피하여 달아나 숨어 버려서 다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해악이 되지 않았다. 이로서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神市氏, 見人居已完.蠢物各得其所, 乃使高矢氏, 專掌궤養之務, 是爲主穀. 而時, 稼穡之道不備, 又無火種, 民皆就食草蔬木實, 철鮮血, 茹生肉, 殆不堪其苦. 高矢[乃氏](氏, 乃)漸敎稼穡之方, 猶以無火爲憂. 一日, 偶入深山, 只看喬林荒落, 但遺骨骸老幹枯枝, 交織亂叉. 立住多時, 沈吟無語, 忽然大風吹林, 萬竅怒號, 老幹相逼, (揆)[擦]起火光, 閃閃삭삭, 乍起旋消乃猛然, 省悟曰: 「是哉! 是哉! 是乃取火之法也.」 歸取老槐枝, (揆)[擦]而爲火, 功猶不完. 明日, 復至喬林處, 徘徊尋思, 忽然一個條紋大虎, 咆哮躍來, 高矢氏大叱一聲, 飛石猛打, 誤中巖角, 炳然生火. 乃大喜而歸, 復擊石取火. 從此, 民得火食, 鑄冶之術始興, 而制作之功, 亦漸進矣.
신시씨는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물들 또한 각기 그 마땅한 처소를 얻었음을 보고, 이에 고시씨(高矢氏)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곡식을 주관하는 일이다. 이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불씨 또한 없던 때라, 백성들은 모두 풀의 푸성귀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선한 피를 마시며 날고기를 먹었으니, 그 고초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고시씨가 이에 점차 곡식을 심고 거두는 방법은 가르쳤으나, 여전히 불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높이 우뚝 솟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것이 온 사방으로 보였는데, 앙상하고 말라버린 체로 메마른 가지들만이 남아서 서로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려니, 갑자기 숲으로 큰 바람이 불어와 모든 구멍들이 성난 목소리를 내뱉고 앙상한 가지들은 서로 밀치며 비벼대었는데, 마찰되어 일어나는 불길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 언뜻 일어나다가는 도리어 사글어드는듯 하더니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지라, 깨달음이 있어 이르기를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로구나」 하였다. 돌아와서 마른 홰나무 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못하였다. 다음 날 다시 숲속으로 가서 생각에 잠겨 배회하고 있으려니, 홀연히 한 마리의 줄무늬 범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기에, 고시씨가 벽력과 같은 소리로 꾸짖으며 돌을 날려 호되게 내려치니 바위 모서리에 빗맞으며 번쩍이면서 불길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 다시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주조하는 기술이 비로소 흥성하게 되었으며, 제작의 능률 또한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又使神誌氏作書契. 盖神誌氏, 世掌主命之職, 專管出納獻替之務, 而只憑唯舌, 曾無文字記存之法. 一日, 出行狩獵, 忽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跡)[踪]. 乃四處搜探, 遍過山野, 至平沙處,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 旋復猛省曰: 「記存之法, 惟如斯而已夫! 如斯而已夫!」 是日, 罷獵卽歸, 反復審思, 廣察萬象, 不多日, 悟得창成文字, 是爲太古文字之始矣. 但後世年代邈遠, 而太古文字泯沒不存, 抑亦其組成也, 猶有不完而然歟. 嘗聞, 六鎭之地及先春以外岩石之間, 時或發見雕刻文字, 非梵非篆, 人莫能曉, 豈神誌氏所作古字歟.
또한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그러나 후세에 세월이 까마득히 오래되어서 태고 문자는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그 꾸밈새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한다. 듣건대, 육진(六鎭)1)의 땅이나 선춘(先春) 등지의 암벽 사이에 때때로 문자를 조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범자(梵字)도 아니요 전자(篆字)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능히 알아먹지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신지씨가 지은 옛문자가 아닌가 한다.
高矢氏, 亦世掌主穀之職, 而後世蚩尤.高矢.神誌之苗裔, 繁衍最盛.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神誌氏之族, 則繁殖於北東之地; 獨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 皆其孫也. 三氏苗裔, 又細分九派, 卽견夷.우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暘夷之屬, 皆異支同祖, 不甚相遠. 夷之爲言, 大弓之稱也. 盖自蚩尤氏作刀.戟.大弩以後, 狩獵征戰, 賴以爲武, 中土諸族, 甚畏大弓之用, 聞風膽寒者久矣. 故謂我族曰夷.《說文》所謂: 「夷, [人人大]人人弓, 東方之人」者, 是也. 乃至仲尼《春秋》之作, 而夷之名, 遂與戎狄幷爲腥조之稱, 憤哉! 後世견夷,風夷, 分遷西南, 恒與中土諸族, 互相힐항,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고시씨 역시 대대로 곡식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하게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견夷)·우이(우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2)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 것이다.《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3)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4)
先是, 蚩尤氏, 雖然驅除鳥獸충魚之屬, 而人民猶在土穴之中, 下濕之氣逼人成疾. 且禽獸一經窘逐, 漸自退避藏匿, 不便於屠食. 神市氏, 乃使蚩尤氏, 營造人居; 高矢[氏], 生致牛.馬.狗.豚.雕.虎之獸而牧畜; 又得朱因氏, 使定男女婚娶之法焉. 盖今之人謂匠師曰智爲者, 蚩尤氏之訛也; 耕農樵牧者, 臨飯而祝高矢者, 高矢氏之稱也; 婚娶之主媒者曰朱因者, 亦朱因氏之遺稱也.
이 보다 앞서, 치우씨가 비록 그렇게 날짐승과 들짐승 및 벌레와 물고기 등의 무리를 몰아내긴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흙굴에서 사는 까닭에 아래로부터의 습한 기운이 사람에게 해를 끼쳐 질병을 일으켰다. 게다가 짐승들을 한차례 휘몰아 내쫓으니, 점차 스스로 물러나 피하고 숨어 버린 까닭에 잡아먹기에 불편하였다. 신시씨가 이에 치우씨로 하여금 사람이 거처할 만한 것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또 주인씨(朱因氏)를 신임하여 그에게 남녀간에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 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此時, 神市氏之降世, 已數千載, 而民物益衆, 地域愈博. 於是, 復置主刑.主病.主善惡及監董人民之職, 以獸畜名官, 有虎加.牛加.馬加.鷹加.鷺加之稱. 盖牛.馬.狗.豚之屬, 皆當時民衆養生之料, 而賴以爲業者也; 虎與鷹.鷺者, 境內棲息之鳥獸, 而以表官職之[性也. 後世夫餘國, 猶傳此俗, 亦以獸畜名官, 此不可탄述焉.
이때는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온지 이미 수천 년이 되었으니, 백성과 사물들은 더욱 많아졌고 땅의 경계는 더욱 넓어졌다. 이에 다시 형벌과 질병 및 선악을 주관하고 백성들을 보살펴 이끌 수 있는 직책을 설치하고,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이름하였으니, 호가(虎加)·우가(牛加)·마가(馬加)·응가(鷹加)·노가(鷺加)5) 등의 명칭이 있게 되었다. 무릇 소와 말 그리고 개와 돼지 등의 무리는 모두 당시에 백성들이 기르는 것으로서, 이에 의지하여 생업을 삼았던 것이며, 범과 매 및 해오라기 등은 나라안에 서식하는 새와 짐승들이니, 이로서 관직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후세 부여국(夫餘國)에도 여전히 이러한 풍속이 전해져 역시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일컬었다 하는데, 이를 모두 빠짐없이 적을 수는 없다.
神市氏, 旣立敎御民, 民皆協洽. 乃登太白之전, 臨大荒之野, 觀天地寂然而氣機無息, 日月奔馳而貞明不易, 春秋代序而萬物循回, 乃推天地玄妙之理, 倚數觀變而創成人民依從之則, 是乃易理之原也. 當是之時, 遼瀋.幽燕之地, 已爲我族耕農游牧之所. 伏犧氏, 適以是時, 生於風族之間, 熟知倚數觀變之道, 乃西進中土, 代燧人之世而爲帝, 又得史皇之輔.河圖之瑞, 畵成八卦, 爲中土易理之元祖. 盖陰陽消長之理, 發源於我而卒爲彼國之用, 近世禹倬, 以傳《易》之故, 反爲偉功, 造翁難測之意, 盖亦怪哉! 伏犧氏, 自能馴伏犧牲, 威降豺豹, 伏犧之名, 因於是也, 生於風族, 以風爲故姓也. 以龍紀官者, 亦原於虎加.馬加之類也.
신시씨가 이미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니 백성들은 모두 서로 도우며 흡족히 여겼다. 이에 태백(太白)의 꼭대기에 오르고 대황(大荒)의 들녘에 이르러 천지를 바라보니 쓸쓸하고 고요할지언정 그 기운의 틀은 쉼이 없었다. 해와 달은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면서도 곧고 밝음은 변하지 않았으며, 봄과 가을은 차례대로 잇대어 가고 만물은 쉬지 않고 자꾸만 쫓아 돌아갔다. 이에 천지의 깊고도 묘한 이치는 숫자에 의지하여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음을 미루어 깨닫고, 사람들이 의지하여 따를 만한 법칙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곧 역리(易理)의 근원이다.
당시에는 요동의 심양 및 유연(幽燕)6)의 땅이 이미 우리 민족들이 농사짓고 유목하던 곳이었다. 복희씨(伏犧氏)7)가 마침 이때에 풍족(風族)에서 태어나서 숫자에 의지하여 변화를 바라보는 이치에 대하여 자세히 익힌 뒤, 서쪽으로 중토로 나아가 수인씨(燧人氏)의 세상을 이어 황제가 되어 사황(史皇)의 도움과 하도(河圖)의 상서러움을 얻어서 팔괘(八卦)를 그리니, 중토 역리(易理)의 원조가 되었다. 무릇 음과 양이 줄고 늚에 대한 이치는
우리로부터 발원하였으나 마침내 저들 나라의 쓰임이 되었는데, 근세에 와서 우탁(禹倬)8)이《역(易)》을 전한 까닭으로 도리어 위대한 공로자가 되었다 하니, 조물주의 헤아리기 어려운 뜻은 또한 괴이하다 할 것이다. 복희씨는 스스로 능히 희생(犧牲)을 잘 길들이고 복종케 하여 그 위엄이 승냥이와 표범에까지 이르렀기에 '복희(伏犧)'라는 이름이 그로 연유한 것이며, 풍족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풍'을 성씨로 삼았다. 용(龍)으로 벼슬을 기록한 것 또한 호가(虎加)나 마가(馬加)라고 일컬음과 같은 유형에서 근원한 것이다.
神市氏御世愈遠, 而蚩尤.高矢.神..朱因諸氏, 幷治人間三百六十六事, 男女.父子.君臣.衣服.飮食.宮室.編髮.盖首之制, 次第成俗, 普天之下, 悉化其沾. 制治漸敷, 而政敎禮儀逐漸稍備, 初之于于휴휴草衣木食者, 始入人道之倫矣. 嗚呼偉哉!]9)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더욱 오래되니, 치우·고시·신지·주인씨 등이 모두 같이 사람간의 삼백 예순 여섯 가지 일을 다스려, 남녀와 부자 및 군신간의 일이며, 의복과 음식 및 궁실의 일은 물론, 머리카락을 땋고 머리를 덮는 일에 관한 법도를 차례차례 풍속으로 이뤄가게 하였기에 하늘이 덮고 있는 곳이면 모두 그 교화에 물들어 갔다.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치고 다스림과 가르침이며 예절과 의례 등도 점차 따라서 조금씩 갖추어져 가니, 처음에는 아는 바가 없이 제 멋대로 날뛰며 풀로서 몸을 가리고 나무 열매를 먹던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된 도리로서의 윤리에 접어들게 되었다. 오호라 그 위대함이여!
夫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 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 鴻몽肇判而萬物滋生, 則余聞諸耆老,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而政)敎始成, 則余徵諸斷簡破編. 夫六合之外, 洪荒之世, 聖人曾不詳辨區區, 後生安得以窺其一斑哉! 至如唐虞三代.秦.漢.隋.唐者, 中國歷代之謂也; 험윤.훈죽.荊蠻.越裳之屬, 則上古戎狄之稱也. 漢武之世, 始通西域, 月氏,安息.奄蔡.焉嗜.于전.계賓諸國, 始現於載籍中; 多民, 隨畜牧, 逐水草往來者, 及被髮裸身之類. 及若大秦之國, 遠在西海之西, 地方數千里, 領四百餘城, 小國役屬者數十, 以石爲城郭, 列置郵亭, 人皆곤頸而衣(文)[紋]繡, 乘輜병出入所居, 城邑周(圍)[환]百餘里, 宮室皆以水精爲柱, 以至殊俗珍風.奇寶異貨之産, 不可탄述, 盖想見其殷富盛(疆)[彊]之風矣. 漢.章和中, 班超遣甘英, 由條支欲通大秦而不果, 及至桓帝.延熹中, 其主安敦遣使始通. 降至唐代, 又有당項.吐蕃.波斯.大食之國, 或交侵.洛, 或航通商舶, 而赤髮綠睛.巨幹長軀之徒, 罕至出入宮庭. 宋代, 有提擧市舶司之職, 專管西域買遷之業. 近代, 明.萬曆中, 有利瑪竇者, 自廣東轉入北京, 有數理曆法之書, 使行之從燕還者, 或傳其說. 盖其國, 與古之大秦同在西域之西, 與古來諸國逈殊云. 噫! 天下廣矣, 生民之來久矣. 未知, 後世果有巨人一目之國, 復自東南來, 通於此世否.
무릇 우주의 밖은 성인이 그대로 간직해 둘 뿐 의론하진 않고, 우주의 안은 성인이 대체의 강령만 의론할 뿐 그 근원까지는 논의하지 않는다 하였다.《춘추》의 <경세편>에, 앞선 성군의 뜻은 성인이 명분품절만 의론할 뿐 그에 대한 자세한 시비를 논변하진 않았다 하였다. 천지자연의 원기가 처음으로 나눠지고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난 것은, 곧 내가 뭇 노인네들에게 듣기로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옴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 번성하고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쳐서 사물을 다스리는 일과 가르쳐 육성하는 일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하였으니, 이것을 내가 어찌 쪼개고 나누어 밝힐 수 있을 것인가. 무릇 우주 밖의 아주 오랫적 세상에 대해서는 성인들도 아직 하나하나 상세히 나누어 놓지 않았는데, 후손이 어찌 그 일부분일지언정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당요(唐堯)10)와 우순(虞舜)11) 및 하(夏)·은(殷)·주(周)의 삼대 및 진(秦)·한(漢)·수(隋)·당(唐)과 같은 것은 중토의 역대를 말하는 것이며, 험윤(험윤)과 훈육(훈죽) 및 형만(荊蠻)과 월상(越裳) 등의 무리는 상고 시대의 중국 변방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나라 무제 때 처음으로 서역과 통하여 월지(月氏)12)·안식(安息)·엄채(奄蔡)·언기(焉嗜)·우전(于전)13)·계빈(계賓) 등의 나라들이 비로소 서적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많은 민족들은 목축을 하며 물과 풀을 좇아 오가고 머리를 풀어 늘어트리거나 벌거숭이 몸을 한 부류들이다. 대진(大秦)과 같은 나라는 멀리 서해의 서쪽에 있으면서 영토는 사방 수천 리에 사백여 성을 거느리고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수십 개나 된다고 한다. 돌로 성곽을 쌓고 역말의 객사를 열지어 설치하였으며, 사람들은 모두 목덜미까지만 머리를 기르고, 수놓은 옷을 입으며, 덮개가 있는 수레를 타고 거처하는 곳을 출입하며, 성읍은 그 주위가 백여 리로 궁실은 모두 수정으로 기둥을 하는 등, 별스럽고 진귀한 풍속과 기이한 보물과 재화의 산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세히 말할 수가 없다고 하니, 그 번성하고 부강한 기풍은 그저 미루어 볼뿐이다.14)
한나라 장화(章和) 연간에 반초(班超)가 감영(甘英)을 보내어 조지(條支)를 경유하여 대진과 통교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환제(桓帝) 연희(延熹) 연간에 이르러 그 나라의 주인인 안돈(安敦)이 사신을 파견하자 비로소 통교하게 되었다. 후세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또한 당항(黨項)·토번(吐蕃)·파사(波斯)·대식(大食) 등의 나라가 있어 혹은 번갈아 앙락을 침범하거나 상선을 보내와 통상을 하였는데,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큰 몸뚱이와 큰 키의 무리들로서 드물게는 궁정에까지 출입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제거시박사(提擧市舶司)15)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오로지 서역과의 교역 업무만을 전담하였다. 근대의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이마두(利瑪竇)16)라는 자가 있어 광동으로부터 북경으로 옮겨왔는데 수리(數理)와 역법(曆法)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사신으로 갔던 무리 가운데 북경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이 간혹 그 예기를 전하였다. 대저 그 나라는 옛날의 대진과 같이 서역의 서쪽에 있으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하니, 오호라! 천하는 넓고도 넓으며 사람이 생겨난 지는 오래고도 오래구나. 후세에 과연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가 있어, 다시 동남쪽으로부터 와서 이 세상과 통교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盖異風殊道之國, 星羅碁布於普天之下, 時移物換而逐漸交通. 想於神市氏之世, 坐而論之, 則安知世間有奄蔡.安息.天竺.大秦之國耶. 然則, 高辛氏之世, 所謂「執中而遍天下, 日月所照, 風雨所至, 莫不[服]從」者, 盖亦自好之(說)[言]也. 余절(蚩)[嗤]之可惜, 近世學者, 拘於漢籍, 溺於儒術, 혼혼然以外夷自甘, 動稱華夷之說.
무릇 풍속이 다르고 법도가 틀린 나라가 하늘 아래 별처럼 늘어서 있고 바둑돌처럼 퍼져 있다가 시대가 흐르고 사물이 교환되면서 점차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생각건대 신시씨의 시대에 앉아서 세상을 얘기하면서 이 세상에 엄채나 안식이며 천축이나 대식과 같은 나라가 있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한 즉 고시씨 세대에 이른바 '한가운데를 잡아 그 교화가 천하에 두루 미치니, 해와 달이 내려 비치는 곳과 비와 바람이 닿는 곳마다 복종치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훌륭하게 여긴 말일 것이다. 내가 남몰래 냉소하면서도 애석해 하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여 유교의 술수에 빠지고 흐리멍덩해져 '바깥 오랑캐(外夷)'라는 말을 스스로 달갑게 받아들여서 걸핏하면 '화이(華夷)'의 논리를 입에 올리는 일이다.
余於盛筵, 賓朋齊會, 皆雄談峻論之輩, 余因醉揚臂而呼曰: 「君等皆云華夷, 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且夷者, 從大從弓, 東人之稱, 太古我朝鮮, 以武强鳴於世, 故中原之士, 聞風懼之, 夷豈是戎狄之賤名耶! 國自上古, 人皆强勇質直, 雅好禮讓, 中土有'東方君子之國'之稱焉, 我國豈本戎狄之類哉! 鴨水以外, 縱橫萬里之地, 是乃我往聖先民, 艱苦經營之地也, 豈本是漢家物耶! 孔子之世, 周室旣衰, 外族交侵, 려王敗死於犬戎, 其他北狄.荊蠻.山戎無終之屬, 侵핍不已, 我族亦以是時, 威振中土. 故孔子, 慨王政之不敷, 恨列國之交侵, 有志而作《春秋》, 尊華攘夷之說, 於是乎始立. 若使孔子, 生於我邦, 則寧不指中土而謂戎狄之地乎!」 滿座冷笑或驚怪, 不小縱有然之者, 竟不快應, 余蹴床而起, 人皆謂淸狂殊甚, 可(難)[歎]. 前者, 滿洲之有흔, 廟議紛운斥和者, 亦以尊周爲重, 余不知其可矣. 若余復出此言於제輩, 則渠等應必, 大驚小怪, 殆將不齒, 豈怪彼輩言. 箕子之化則信, 漢武之討滅則信, 唐高之平定則信, 而殊不知, 我先民却有赫赫武勳之有足誇耀者耶! 余悲, 世俗不察其變漫, 以仲尼尊攘之意, 自誤焉.
내가 어느 성대한 잔치 자리에서 손님이며 벗들과 함께 모였는데, 모두 뛰어난 말솜씨로 그럴싸한 말들을 하는 무리들이기에 내가 취기를 빌어 팔뚝을 걷어올리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그대들이 모두 '화이(華夷)'를 말하는데, 우리가 어찌 중화가 아닐 것이며 중원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17) 또한 '이(夷)'라 함은 '크다'는 것과 '활'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동방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랜 옛적 우리 조선이 무예가 강성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때문에 중원의 선비들이 그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이(夷)가 어찌 융(戎)이나 적(狄)과 같은 천한 이름이겠는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날래며 품성 또한 강직하고 올바르기에 평소에도 예의와 양보를 좋아하여 중원에는 '동방 군자의 나라'라는 말이 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그 근본이 융·적 등의 무리와 같다는 말인가! 압록강 바깥 사방 1만 리의 땅은 예전에 우리의 성인과 앞선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일구어 온 땅인데, 어찌 본시 한나라 놈들의 물건이겠는가! 공자의 시대에 주(周) 왕실이 이미 쇠퇴하여 바깥 민족들이 번갈아 침범하니 여왕(려王)이 견융(犬戎)에게 패하여 죽게 되었고, 그 밖에 북융(北戎)이며 형만(荊蠻)과 산융(山戎) 등 끊임없는 무리들이 침략하여 핍박하길 마지않았으며, 우리민족 또한 이때에 위엄을 중토에 떨쳤었다. 때문에 공자가 왕의 다스림이 널리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여러 나라가 번갈아 침범함을 한탄하며 뜻이 있어서《춘추》를 지었기에,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내친다는 말이 이때 비로소 쓰여지게 되었다. 만약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오히려 중토를 가리켜 오랑캐의 땅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니, 모든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고 혹은 놀랍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며 적지 않게는 사뭇 수긍하는 자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모두 쾌히 응하지 않기에 내가 상을 박차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광기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였다. 탄식할 노릇이다.
예전에 만주에 허물이 있다 하여 조정에서 화친이니 배척이니 하며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이 또한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기에 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만일 내가 또 다시 동년배들에게 이 말을 끄집어낸다면 그네들은 응당 크게 놀라긴 하여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장차 친구로 끼워 주지도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어찌 저들의 말만을 이상하다 하겠는가. 기자(箕子)가 교화를 베풀었다는 것은 믿으면서, 한무제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켰다는 것은 믿으면서, 당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였다는 것은 믿으면서, 오히려 우리의 선조들에게 충분히 자부할 만한 빛나는 무훈이 있었음은 왜 알지 못하는가. 내가 슬퍼하는 것은, 세속의 인식이 제멋대로 변한 점은 살피지 않고, 중니가 높이고 깎아 내린 것 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그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夫神市肇降之世, 山無蹊隧, 澤無舟梁, 禽獸成군, 草木遂長. 民與禽獸居, 族與萬物幷, 禽獸可係기而(遊)[游], 鳥鵲之巢可攀援而규. 飢食渴飮, 時用其血肉, 織衣耕食, 隨便自在, 是謂至德之世也. 民居不知所爲, 行不知所之, 其行塡塡, 其視顚顚, 含哺而熙, 鼓腹而(遊)[游], 日出而起, 日入而息, 盖天澤洽化, 而不知窘乏者也. 降至後世, 民物益繁, 素樸漸離, 별설제기, 勞勞孜孜, 始以生計爲慮. 於是焉, 耕者爭畝, 漁者爭區, 非爭而得之, 則將不免窘乏矣. 如是而後, 弓弩作而鳥獸遁, (綱)[網]고設而魚鰕藏, 乃至刀.戟.甲.兵, 爾我相攻, 磨牙流血, 肝腦塗地, 此亦天意之固然而不可怨者也. 余嘗觀, 夫小兒재[出胎門, 便규救我救我者, 盖求其哺也; 재]18)至行走, 便會시打시打者, 欲其求强也. 余於是乎知, 爭戰之不可免也.
무릇 신시씨가 처음 내려온 세상은, 산에는 길이나 굴이 없었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으며, 날짐승과 들짐승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풀과 나무는 무성히 자라났다. 백성들은 금수와 함께 거처하며 만물과 더불어 어울리니, 금수는 굴레를 매어 같이 노닐 수 있었고, 새나 까치의 보금자리는 기어올라가 엿볼 수 있었다.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심에 때에 따라 그 피와 고기로 하였으며, 옷감을 짜서 옷을 해 입고 밭을 갈아 음식을 먹으며 편함에 따라 있는 그대로 지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덕이 가득한 세상이다. 백성들은 살아가면서도 그 행하는 바를 느끼지 못하였고, 나아가면서도 그 가는 곳을 의식하지 않았으니, 그 행위는 당당하고 그 시야는 한결 같았다. 배불리 먹고 기뻐하며 배를 두드리고 노닐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니, 대저 하늘의 은혜가 널리 미쳐 궁핍함을 알지 못한 것이리라.
후세에 내려와 백성과 사물이 더욱 번창해지며 소박함에서 점차 멀어지고, 아등바등 힘쓰며 쉬지 않고 노력하게 되니 비로소 생계를 근심거리로 삼게 되었다. 밭을 가는 자는 이랑을 놓고 다투고, 고기를 잡는 자는 구역을 놓고 다투는데, 다투어 얻지 못하면 장차 궁핍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된 후에 활이며 쇠뇌를 만드니 날짐승과 들짐승은 달아나 버렸고, 그물을 만들어 설치하니 물고기와 새우들은 숨어 버렸다. 이에 칼과 창이며 갑옷과 병사가 생기게 되고,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여 이를 갈고 피를 흘리며 간과 뇌를 꺼내어 땅에 바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라면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어린아이가 막 태문(胎門)을 나서며 곧 '응애(救我), 응애(救我)'!19)라고 부르짖는 것은 대개 음식을 구하는 것이며, 막 걷게 되어 곧 서로 토닥거리며 '쎄다(시打), 쎄다(시打)'! 할 줄 아는 것은 강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내가 이로서 다투고 싸우는 것이 면하기 어려운 것인 줄 알게 되었다.
夫, 月氏.大秦之屬, 余不知其詳, 至若中國與倭, 接隣之國也, 翼在左右而我國介處其間, 從古交爭最繁, 是亦必然之勢也. 神市氏[御世之](之御世)已遠, 而民物之生愈往愈博. 民物之生愈博而, 所以彼.飮食.奉生.送死之具, 愈見其耗. 是以, 始之熙[熙]者, 漸至忙忙, 夫忙忙求索者, 豈非爭亂之(偕)[階]歟. 及夫有巢.燧人者, 西方之君也, 神市.蚩尤者, 東方之君臣也. 御世之初, 各據一方, 地域逈殊, 人烟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故狩獵採伐之外, 曾無險役.
무릇 월지나 대진의 무리에 대해서 내가 그 상세한 바를 알지 못하나, 한(漢)나라와 왜(倭) 같은 것은 인접한 나라로서 날개와 같이 좌우에 있고 우리나라는 그 가운데에 끼여 있어서 예로부터 갈마들어 다툼이 가장 빈번하였으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이미 오래되니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가면 갈수록 넓게 퍼졌다.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넓게 퍼질수록 덮고 입으며 마시고 먹는 일과 생전에 봉양하고 죽은 후에 장사지내는 일 등에서 모두 그 소비가 눈에 뛰게 늘었다. 이러한 까닭에 처음에는 화락하기만 하다가 점차 다급하게 되어 가니, 무릇 다급하게 무엇을 구하고 찾다 보면 다투고 싸우는 순서를 어찌 밟지 않겠는가. 대저 유소씨나 수인씨는 서방의 임금이요, 신시씨와 치우씨는 동방의 임금과 신하이다. 세상을 다스리던 초기에는 각각 한쪽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땅의 구역이 사뭇 다르고 인가(人家)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은 자기들만 있는 줄 알고 다른이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까닭에 수렵하고 채벌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힘든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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