揆 園 史 話 (규원사화)
檀 君 紀 (2)
乃復祭天而薦新居, 築城郭, 建宮室, 浚溝혁, 開田陌, 勸農桑, 治漁獵, 使諸民進用餘之物, 以補國用, 民皆熙熙而樂之. 時有, 蒼鹿遊郊外, 靑龍見朝天池. 檀君乃出巡, 至南海, 登甲比古次之山, 設壇祭天. 還至海上, 赤龍呈祥, 神女奉합, 有一童子, 衣緋衣, 從합中出謁, 檀君愛之, 因姓曰緋, 名曰天生, 遂爲南海上長. 及還至平壤, 有三異人, 自東方渡浿水而至, 首曰仙羅, 次曰道羅, 又其次曰東武. 於是因二龍之祥, 改虎加曰龍加, 使仙羅主之, 道羅爲鶴加, 東武爲狗加. 又因蒼鹿之瑞, 改鷺加曰鹿加, 依前, 使夫虞主之, 制治比前更完矣.
이에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거처로 옮겨 성곽을 짓고 궁실을 세우며, 봇도랑을 준설하고 밭두둑 길을 열어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장하였으며, 어로와 수렵을 가르치고 모든 백성들에게 쓰고 남은 물자를 진상하게 하여 이로서 나라의 살림에 보태게 하니, 백성들은 모두 화합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때 푸른 사슴이 교외에서 뛰어 놀았으며, 푸른 용이 조천지(朝天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군은 이에 순행을 나가서, 남해에 이르러 갑비고차산(甲比古次山)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이르니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신녀가 함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단군에게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
돌아와 평양에 이르니 3명의 비범한 사람이 동방으로부터 패수를 건너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선라(仙羅)라 하였고, 다음은 도라(道羅)라 하였으며, 또 그 다음은 동무(東武)라 하였다. 이에 두마리 용의 상서러움이 있었다고 하여 호가(虎加)를 고쳐 용가(龍加)라 이름하고 선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도라는 학가(鶴加)로 삼고 동무는 구가(狗加)로 삼았다. 또 푸른 사슴의 길함으로 인해 노가(鷺加)를 녹가(鹿加)로 고쳐 부르고 예전처럼 부우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니, 제도의 다스려짐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기大荒, 西率알견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정碧, 曰藍國, 宅奄慮忽. 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 河嶽(鹿병)[추莊], 風氣勁雄, 曰루진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治肅愼忽.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封[周](周)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穢)[濊]君. 夫蘇.夫虞及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眞番.夫餘諸國, 是也. 其後, 夫婁又封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卒本.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通檀氏之世,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29)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루진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30)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31)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32)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徒)[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神誌氏受封於루진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추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 漢曰읍婁, 元魏曰勿吉, 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 金.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양, 五穀豊肥. 民皆, 衣輕(暖)[煖]而食肥양,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夫, 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 故《管子》曰: 「倉름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若使民, 終歲견견以絲粟爲慮, 則復奚暇言禮義哉! 雖然, 天覆地載, 區隅各殊, 於是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是! 三家者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異, 而其果應亦自不同者也.
치우씨는 남국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岱)33)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한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신지씨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흑수(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하고도 억세어 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한(漢)나라는 읍루(읍婁)34)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35) 때는 물길(勿吉)36)이라 하였으며, 수와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금나라와 여진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무릇 음식이 풍족하고 물자의 유통이 원활한 연후에야 나라가 견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관자(管子)》에서 이르기를 「곳간이 가득하고 서야 예절을 알 수 있으며,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서야 영광됨과 수치스러움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평생을 곁눈짓이나 하며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게 한다면 곧 누가 다시 한가롭게 예의며 의리를 말하려 들겠는가.
비록 다 같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으나 거처하는 구석은 각기 다르기에, 기후는 찬 곳과 따뜻한 곳이 있고 토양은 비옥한 곳과 척박한 곳이 있으니, 마치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이를 어찌하겠는가! 세 집안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그러한 까닭으로 각기 다르기에 그 결과 또한 응당 같지 않은 것이다.
檀君旣封諸侯, 天下淸靜. 居十年, 有南夷之患, 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 乃遣夫餘, 率兵定之. 後益遣夫蘇.夫虞, 築城於甲比古次, 以備南巡, 今江華.三郞城, 是也. 摩利山又有塹城壇, 此卽檀君設壇祭天之頭嶽也. 盖水行藉舟, 陸行藉車, 泥行乘취, 山行則국, 此乃上古交通之具. 而陸行不如水行之易, 是以, 上古建都, 必擇37)臨水之地. 凡人居之稱美者, 必曰阻山帶水, 或依山傍水.背山臨流者, 其所從來尙矣. 故檀君之世, 必使依山臨水而結居, 耕農漁獵, 隨便可行.《山海經》所謂: 「北海有國, 名曰朝鮮, 天毒育也其人, 水居외(受)[愛]也人」者, 非但, 其聲敎之澤, 洽被四린, 亦可窺見, 其結居之風矣. 夫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在海濱, 通航容易, 則南巡之際, 必致祭於壇所也. 황, 其地孤絶靜謐, 山岳淨潔, 海天收霽, 則정深晶瑩之氣, 使人自感, 神明之陟降者耶. 余嘗(遊)[游]觀其地, 祭壇疊石, 爲之上圓下方, 而太多頹이, 仁祖十七年改築云. 噫! 平壤故城, (王)[壬]儉舊闕, 今不留敗石殘礎, 獨一壘天壇, 得保其形骸, 豈僻處海외, 人跡稀到故耶! 余實不勝, 追遠之悲矣.
단군이 제후들을 모두 봉하니 천하는 맑고도 고요하였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후에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하여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38)
대저 물로 다닐 때는 배에 의지하고, 뭍으로 다닐 때는 수레에 의지하며, 진흙 위를 다닐 때는 썰매를 타고, 산으로 다닐 때는 징나막신을 신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랜 옛적 교통의 도구이다. 그러나 뭍으로 다니는 것이 물로 다니는 것 보다 쉽지 않았던 까닭에 옛날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물에 잇대어 있는 땅을 택하였다. 무릇 사람이 거처하는 곳 가운데 좋은 곳이라 일컫는 곳은 반드시 '산을 막아서며 물을 두르고 있다'거나, '산에 의지하고 물을 곁에 두고 있다'거나,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있는데, 그러한 장소는 예로부터 바라던 곳이었다. 때문에 단군의 시대에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물을 끼고 있는 곳에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여서 농사짓고 어로와 수렵을 함에 편히 행할 수 있게 하였다.《산해경(山海經)》39)에 이른바 「북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이름한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毒은 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40) 물가에 살면서 남을 아끼고 사랑(외는 사랑함을 의미한다)한다」41)고 한 것은, 비단 그 덕스러운 교화의 은택이 사방에 흡족히 두루 미친 것 뿐만이 아니라 집을 지어 거처하는 기풍 또한 엿볼 수 있게 한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 나가면 곧 태백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두악에서 제사를 지냈다. 갑비고차는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항차 그 땅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고요하고 평온하며 산악은 정결하고 바다와 하늘은 가든히 개어 있으니, 곧 안존하고 깊으며 밝게 빛나는 기운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명이 오르내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 내가 그 땅을 유람하며 살펴보니 제단은 돌을 포개어 위는 둥글고 아래로는 네모지게 하였는데, 아주 많이 무너져 있던 것을 인조(仁祖) 17년에 다시 고쳐서 쌓았다고 한다. 오호라! 평양의 옛 읍성과 임금성의 옛 궁궐은 이제 부서진 초석의 조각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유독 한 채의 천단(天壇)만이 그 모습의 골격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편벽된 바다의 후미진 곳이기에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닿은 까닭이 어찌 아니겠는가. 나는 실로 옛일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之(時)[野], 浿水漲溢平壤沈潛.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有莊莊坪, 卽其地也. 余嘗觀其地, 方數百里無大河, 而水勢東走, 原土高燥, 可避西來之水矣. 乃結廬阿斯達下, 使夫婁, 盡濟平壤之民, 復治平水土屢年(以)[而]後功完, 唐莊之民, 亦已安土而樂居矣. 今俗士或云: 「檀君遭洪水, 使彭吳治山川, 奠民居…」云云, 而《漢書·食貨志》明書: 「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백)[貊].朝鮮」等句, 則是乃, 東西有兩個彭吳, 相前後而同掌朝鮮水土之役也, 史上豈有, 如此奇巧事耶. 盖, 夫婁[與]弗虞同音, 且漢音.虞.吳相(同)[通], 而彭.弗兩字之初聲, 皆與夫音相近, 則後人忘夫婁字而只記其音, 又訛而只記彭吳也. 今, 人家有夫婁壇地者, 籬落淨潔處, 築土爲壇, 土器盛禾穀, 置於壇上, 編(緝)[葺]藁艸掩之, 每十月, 必薦之以新穀, 或稱業主嘉利, 卽報賽夫婁氏治水奠居之義, 賴爲鎭護之神[也].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내가 그 땅을 살펴보니, 사방 수백리에 큰 물줄기가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녘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아사달 아래에 띠풀집을 짓고 부루로 하여금 평양의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게 하고, 다시 물과 흙을 다스리기를 몇 년 한 후에 그 일을 온전하게 하니, 당장(唐莊)의 백성 또한 그 땅에서 편안하게 기거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다.
지금의 세속 선비들이 혹 이르기를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彭吳)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라고 하는데,《한서·식화지》에 「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만에 팽오가 예맥 및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는 등의 문구가 분명히 적혀 있으니, 이는 곧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팽오가 연이어 앞뒤로 있으면서 조선의 물과 흙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인데, 역사에 어찌 이와 같이 기이하고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부루(夫婁)'와 '불우(弗虞)'는 음이 같고, 또한 한나라 소리로 '우(憂)'와 '오(吳)'는 서로 통하며 '팽(彭)'과 '불(弗)' 두 글자의 초성이 모두 '부(夫)'의 음과 서로 가까우므로, 훗날의 사람들이 '부루(夫婁)'라는 글자는 잊어버리고 단지 그 소리만을 기록하면서, 또한 잘못 전하여져 단지 '팽오(彭吳)'라고 만 기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집에는 '부루단지(夫婁壇地)'라는 것이 있는데,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는 것으로서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곧 부루씨가 물을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여 준 것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미이니, 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누르고 백성을 보호하는 신이 된 것이다.
夫婁旣平水土仍舊而奠民居, 萬民咸懷其德. 及至粗定宅宇而, 濕汚之氣蒸成려疫, 罹病死者甚多, 夫虞幷醫藥而治之. 又値猛獸毒충乘間滋殖, 殆將橫行民間, 夫蘇乃演高矢舊法, 以乾艾爲料, 金石相擊, 因此廣造火種, 燻燒山澤, 於是獸충遠遁而其害漸除. 今人, 多携取火之物, 有金.石.艾三種, 必冠之以夫蘇之名, 如夫蘇鐵.夫蘇石.夫蘇羽者, 皆原於夫蘇氏之完其功也. 夫婁, 又使民帶劒戟而行, 及至關嶺협액, 必積石爲堆, 行逢猛獸則用以爲備, 後世所謂石子軍者, (爲)[謂]東國用武之一目, 而實原於此也. 今遺俗尙存而, 野수村氓, 以此謂石城隍, 頗懷畏敬之意. 何後俗之陵夷, 如此其甚耶!
부루가 물과 흙을 예전과 같이 모두 바르게 하고 백성들을 그 땅에 편안하게 살게 하니 만백성은 모두가 그 덕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대충이나마 집들을 정하고 보니 축축하고 더러운 기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병에 걸려 죽는 자가 많아서 부우가 의술과 약으로 이를 치료하였다. 또한 맹수와 독충이 그 틈을 타고 무수히 번식하여 머지않아 민간에 거리낌없이 돌아다닐 것 같기에, 부소가 이에 고시씨의 옛법을 헤아려 마른 쑥을 재료로 하고 쇠와 돌을 맞부딧쳐 이로서 불씨를 만들어 산과 못 등을 태우니, 그제야 맹수와 독충이 멀리 숨어 버리고 그 해악이 점차 제거되었다. 불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지금의 사람들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에는 쇠와 돌과 쑥의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부소(夫蘇)'라는 이름을 머리에 붙여 '부싯쇠(夫蘇鐵)'·'부싯돌(夫蘇石)'·'부싯깃(夫蘇羽)'이라 하니, 모두 부소씨가 그 공덕을 온전히 하였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부루는 또 백성들로 하여금 검과 창을 지니고 다니게 하였으며, 관문과 산꼭대기의 고갯길 등 좁고 험한 길에는 반드시 돌을 쌓아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고 지나다니다가 맹수를 만나면 곧 그것을 사용하여 위험에 대비케 하였다. 후세에 이른바 '석자군(石子軍)'이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무예의 한 종목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 그 기원을 둔다. 지금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시골의 늙은이와 들녘의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석성황(石城隍)'이라 하며 자못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으니, 뒷날에 와서 풍속의 쇠퇴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42)
初, 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탁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천織牧, 資以爲業. 且, 南鄙海島之民, 皆以빈珠魚貝,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與漢土之民, 交(遊)[游]而錯居.《尙書》所稱, 우夷.萊夷.淮夷.島夷者, 皆是也.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우夷)와 래이(萊夷) 및 회이(淮夷)와 도이(島夷)43) 등이 모두 그들이다.
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 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弁諸族, 皆是也.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왕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辰)·변(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御國四十餘載, 而有알견兪之亂. 알견兪者, 험윤之屬也, 洪水之際, 僥倖得免, 及看水土재定而州里蕭然, 乃乘흔東侵, 其勢頗猛, 卽使夫餘會集中外之兵, 討平之. 乃益封夫餘, 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王)[壬]儉城, 令夫蘇修樂浪忽, 夫虞監唐莊京,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만에 설유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 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44)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금성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於是檀君西至(王)[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令復申天下[農桑之政.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45)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西轉而至奄慮忽, 會南西諸侯, 令祭蚩尤氏之靈, 遂立廟于奄慮達. 復南巡而至甲比古次, 祭天于頭嶽之顚. 遂至樂浪忽, 會南東諸侯, 令祭高矢氏之靈, 遂立廟于蘇婁達. 乃還至平壤, 八加及衆諸侯畢集.
그리하여 단군은 서쪽으로 임금성에 이르러 모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크게 모아 명하기를, 다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천하에 널리 펴게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산악과 하천의 신을 봉하니46) 무릇 3천 곳 남짓 되었다. 우수홀을 지나 숙신홀에 이르러 북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신지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숙사달(夙沙達)에 사당을 세웠다. 서쪽으로 돌아 엄려홀에 이르러 남서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치우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엄려홀에 사당을 세웠다.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여 갑비고차에 이르러 두악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낙랑홀에 이르러 남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여 고시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소루달(蘇婁達)에 그 사당을 세우고는 평양으로 돌아오니 팔가(八加)와 뭇 제후들이 모두 모였다.
檀君乃使諸加及國內人民, 各獻祭于日月.陰陽.四時之神, 及山岳.河川.里社之主. 祭畢, 大誥于有衆, 若曰: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創天地, 主全世界, 造無量物, 蕩蕩洋洋, 無物(不)[弗]包, 昭昭靈靈, 纖塵弗漏.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用御天宮, 啓萬善, 原萬德, 群靈護侍, 大吉祥, 大光明, 處曰神鄕.
惟皇, 天帝降自天宮, 率三千團部, 爲我皇祖, 乃至功完而朝天, 歸神鄕.
咨爾有衆, 惟則天範,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 乃朝天.
天範惟一, 弗貳厥門, 爾惟純誠一爾心, 乃朝天.
天範惟一, 人心惟同, 惟秉己心, 以及于人心, 人心惟化,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曰: 爾生由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國, 是乃忠孝, 爾克體, 是道. 天有崩, 必克脫免.
飛禽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毋怨.毋妬.毋淫.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毋胥, 讒互佑毋相殘, 家國以興.
爾觀于牛馬, 猶分厥추; 爾互讓毋胥奪, 共作毋相盜, 家國以殷.
爾觀于虎, 强暴不靈, 乃作얼; 爾毋桀오以장物, 毋傷人, 恒(導)[遵]爾天範, 克愛物. 爾如有越厥, 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
爾如衝火于(花)[華]田, (花)[華]將殄滅, 神人以怒; 爾扶傾, 毋凌弱, 濟恤, 毋侮卑.
爾雖, 厚包厥(杳)[香], 必漏; 爾敬持彛性, 毋懷慝, 毋隱惡, 毋藏禍. 心克, 敬于天, 親于民, 爾乃福祿無窮. 咨爾有衆, 其欽哉!
단군은 이에 뭇 가(加)와 나라안의 인민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과 음양 및 사시(四時)의 신과 산악과 하천 및 마을의 주인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를 마친 다음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한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부리고 거느리는 하늘 궁전은 모든 선함이 열리고 모든 덕화가 근원하는 곳이며, 뭇 영령들이 보호하고 모시는 크게 길하고도 크게 밝은 곳이니, 이름하여 신향(神鄕)이라 한다.
하늘의 천제(天帝)께서는 하늘 궁전으로부터 3천의 동아리를 거느리고 내려와 우리들 임금의 조상이 되더니, 공덕을 온전히 함에 이르러 하늘로 향하여 신향으로 돌아갔다.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직 같으니,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잡아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치게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교화되고 또한 하늘 본보기에 부합하게 되므로 이에 만방에 이르러 부리고 거느리리라.
말하노니, 네가 생겨난 것은 어버이로 말미암은 것이요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므로, 오로지 너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로서 나라에 미치게 하면 그것이 곧 충효이며, 네가 극복하여 체득하게 된다면 이가 곧 도(道)이니, 하늘이 무너짐이 있더라도 능히 피하여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짐승도 쌍이 있고 헤어진 신발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들은 화합할 뿐 미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지어다.
네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픔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할 뿐 너희끼리 헐뜯지 말 것이며, 서로 도울 뿐 너희끼리 죽이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일어나리라.
너희는 보아라, 소나 말도 가히 그 먹이를 나눠 먹으니, 너희는 서로 양보할 뿐 너희끼리 서로 빼앗지 말 것이며, 서로 같이 경작할 뿐 너희끼리 훔치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은성하리라.
너희는 보아라, 범은 강하고도 사나우나 신령스럽지 않기에 재앙을 일으키는 법이다. 너희는 사납고 교만해져 사물을 상하게 하지 말며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며, 항상 하늘 본보기를 존중하여 사물을 사랑하라. 너희가 만약에 그것에 지나침이 있다면 곧 영원히 신인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몸과 집안은 이로서 망하리라.
너희가 만약 꽃밭에 불을 질러 꽃이 장차 모조리 없어지게 되면 신인이 이로서 노여워할 것이다. 너희는 위태로움을 도울 뿐 약함을 업신여기지 말며, 어려움을 구제할 뿐 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가 비록 두텁게 감싼다 하더라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오는 것이니, 너희는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삼가 지닐 뿐 간사함을 품지 말고, 악함을 숨기지 말고, 재앙을 감추지 말라. 마음으로 능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가까이하면 너희는 이에 복록이 한없을 것이다.
이로서 너희 무리들은 삼갈지어다.
檀儉旣大誥于有衆, 於是神德大彰, 如此數十年, 天下復熙熙焉, 忘其災矣. 或曰, 此卽檀君八條之敎令, 可以此分八目, 或說是也. 後世, 駕洛國.房登王時, 有암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則民[自以](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何不體之.」 饋以大牢, 辭不受而去. 此道, 破先聖之訣也. 又崔孤雲.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實乃包含三敎, 接化군生. 且如入則孝於親, 出則忠於君,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孤雲, 精敏文學, 卓越諸人, 博通古今, 文名飄動, 其言可謂善採先聖垂訓之精華矣. 此外, 散見於載籍者, 及道家文集, 如《四聞錄》.《三韓拾遺記》等諸書者, 不可탄記矣.
단검이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를 내리니 이에 신인의 덕화가 크게 빛나기를 수십년, 천하는 다시 화락하여 그 재앙을 잊게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단군팔조(檀君八條)의 교령(敎令)'이라 하는데, 이것을 여덟 조목으로 나눌 수 있으니 혹은 그 예기가 맞을 것이다.
후세에 가락국 방등왕(房登王) 때 암시선인(암始仙人)이 있어, 칠점산(七點山)으로부터 내려와 초현대(招賢臺)에서 왕을 뵙고 이르기를 「임금께서 자연의 도리로서 다스림의 기본을 삼으면 곧 백성들도 자연의 도리로서 풍속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다스림의 기본이 되는 도(道)는 예로부터 그 법도가 있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이를 체득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기에, 왕이 크게 희생(犧牲)을 잡아 보내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가 말하는 도가 바로 앞선 성인의 도를 공구(窮究)할 수 있는 비결이다.
또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는 심오한 이치를 지닌 도가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뭇 삶의 무리들을 가까이에서 교화한다. 또한 들어오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서면 임금에게 충성함과 같은 것은 노나라 공자의 요지이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다스리고 말함이 없는 듯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근본 되는 생각이며, 모든 악함을 짓지 말고 모든 선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천축국 태자의 교화이다」라 하였다.47) 최고운은 문학에 정통하고 재주가 뭇 사람들 보다 뛰어나며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이 후세에 전하는 교훈의 진국을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여러 서적에 흩어져 보이는 것과《사성록(四聞錄)》및《삼한습기(三韓拾記)》같은 도가(道家) 문집에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적지 못하였다.
從此時, 常出巡, 以孟冬月祭天, 遂爲萬世之遺俗, 此乃東方特有之盛典, 而非外邦之可比也. 太白一山, 足壓崑崙之名而有餘矣. 古之三神山者, 卽太白山也. 三神, 又云三聖, 今文化.九月山有三聖祠, 卽敬祀桓因.桓雄.桓儉者也. 今檀君之敎, 雖不得健行, 而神化靈訓猶傳於後世. 擧國男女, 猶崇信於潛默之中, 卽人生生死, 必曰三神所主, (兒小)[小兒]十歲以內, 身命安危及智愚庸俊, 多托於三神帝釋. 三神者, 卽創天地.造治民物之三神也. 帝釋等語, 雖出於佛家之《法華經》, 亦天帝之意. 此則, 只因古史譯出於緇流之手也, 不可妄以爲非. 昔司馬相如謂漢.武帝曰: 「陛下謙讓而弗發, 契絶也三神之歡.」 註云: 「三神, 上帝.」 三神之說, 當時亦通于漢土矣.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예전의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다. '삼신(三神)'을 또는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에 와서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삼신'은 곧 하늘과 땅을 열고 백성과 사물을 만들어 다스린 삼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 등의 말은 비록 불가의《법화경》에서 나왔지만 역시 하늘 임금의 뜻이다. 이것은 단지 옛 역사가 승려의 손으로 옮겨진 까닭일 뿐이니, 망령되게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나라 무제에게 아뢰어 「폐하께서 겸손하게 사양만 하시고 내어 비치지 않으신다면 이는 삼신(三神)의 기쁨을 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였으니, 삼신이란 말은 당시 한나라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48)
盖, 東方諸山, 以太白名者, 頗多. 俗士, 卒以寧邊.妙香山當之, 實由於一然《三國遺事》之說, 而彼等眼孔如豆, 安足以與論哉! 今白頭山上, 有大池, 周八十里, 鴨(록)[綠]49).混同諸[江]發源於此, 曰天池, 卽上述神市氏乘雲朝[天]處也. 妙香, 曾無一小만, 其不爲桓雄肇降之太白, 不足辨也. 盖, 白頭巨岳, 盤據大荒之南, 橫..千里, 高出二百里, 雄偉山層릉완연磅박, 爲東方諸國之鎭山. 神人陟降, 實始於此, 豈區區妙香一山, 只係狼林西走之一맥, 而得참如許聖事耶! 世俗, 旣以妙香爲太白, 則其見, 只局於鴨水以南一隅之地, 便唱, 山之祖宗崑崙, 欣欣然以小中華自甘宜; 其貢使北行屢百年而不爲之恨, 僅以南漢下城之羞, 효(효)然, 自歎者也.
무릇 동방의 모든 산 중에 '태백(太白)'이라 이름하는 것이 자못 많은데, 세속의 선비들이 졸지에 영변의 묘향산을 그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는 그저 일연의《삼국유사》의 이야기에서 연유한 것일 뿐이니, 저들의 눈구멍이 마치 콩알 같음에 어찌 족히 더불어 논박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백두산 위에는 큰 못이 있어 주위가 80여 리며, 압록(鴨綠)과 혼동(混同) 등의 여러 강이 여기에서 발원하기에 '천지(天池)'라 일컫는데, 곧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신시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곳이다. 묘향산에는 일찍이 작은 물줄기 하나 없었으니, 그 곳이 환웅이 처음으로 내려온 '태백'이 될 수 없음은 밝힐 필요도 없다.
무릇 백두의 웅대한 산악은 대황(大荒)의 남쪽에 굳게 자리하여 좌우로 1천리에 뻗치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웅장하면서도 층을 지은 험한 능선이 길게 이어지면서 아울러 하나가 되어 있으니, 동방의 모든 나라를 위엄으로 진압하는 명산이다. 신인의 오르내림이 실로 여기에서 처음 하였거늘, 구구하게 단지 서쪽으로 내달은 낭림의 한 줄기에 매어 달린 묘향의 산 하나가 어찌 그와 같은 많은 신성한 일들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세속에선 이미 묘향을 태백으로 여기지만, 이는 곧 그 견해가 단지 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에만 국한된 것일 뿐이다. 곧잘 산의 으뜸이 되는 우두머리는 곤륜이라 노래 부르고 기꺼이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로 마땅한 듯 달갑게 여기며, 그 조공의 사절이 북으로 다닌지가 수백년이 되었으나 이는 한스러워 하지 않다가 겨우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만을 떠들썩해 하니, 스스로 한탄스러울 뿐이다.
余嘗歷觀載籍, 白頭山之異名, 頗多.《山海經》曰: 「大荒之中, 有山, 名不咸, 有肅愼氏之國」.《後漢書》曰: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太山50)之東, 東濱大海, 北與읍婁接.」 註云: 「在平壤城西.」 此, 漢士眩學之(忘)[妄]語也. 읍婁, 乃肅愼後身, 東沃沮, 又在今咸鏡之地, 則蓋馬之(謂)[爲]太白, 可知. 且《麗史·列傳》曰: 「女眞, 本高句麗之部落, 聚居于蓋馬山東」云, 當時女眞, 明在白頭山之東北, 蓋馬之爲白頭, 明矣.《魏書·勿吉傳》曰: 「國有徒太山, 魏言太白, 有虎豹熊狼不害人, 人不得上山수溺…」云云.《北史·勿吉傳》[曰亦](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唐書》曰: 「粟末部居最南, 抵太白山, 亦曰徒太山, 與高麗接.」《括地志》曰: 「靺鞨, (古)[故]肅愼也, 其南有白山, 鳥獸艸木皆白.」《金史·高麗傳》述高句麗以來靺鞨之事曰: 「黑水末曷, 居故肅愼地, 有山曰白山, 蓋長白山, 金國之所起焉.」 葉隆禮《遼志》曰: 「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 盖白衣觀音所居, 其山內禽獸皆白, 人不敢入, 恐穢其間…」云云, 又曰: 「黑水發源于此.」《明一統志》曰: 「長白山在三萬衛東北千餘里, 故會寧府南六十里, 橫선千里, 高二百里, 其전有潭, 周八十里, 淵深莫測, 南流爲鴨綠江, 北流爲混同江, 東流爲阿也苦河」云. 然則, 不咸.蓋馬.太白.徒太(白)[白].長白等名, 皆爲同山異名, 而歷代方言之異也. 又《高麗史》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 則白頭之名, 始見於此. 而蓋字之音, 近[白於](於白)字之意; 東語, 「馬」.「頭」亦同訓, 蓋馬, 白頭之異字同意亦可明辨, 而白頭之名, 其來亦尙矣.
내가 일찍이 여러 서적들을 두루 살펴 보건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 자못 많았다.《산해경》에 이르기를 「대황의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불함(不咸)이라 하며 숙신씨의 나라가 있다」51) 하였으며,《후한서》에 이르기를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태산(蓋馬太山)의 동쪽에 있다. 동으로 큰 바다를 접해 있고 북으로 읍루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고는 그 주석에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한나라 선비가 잘 알지 못하고 배웠기에 생긴 망령된 말이다.
읍루는 곧 숙신의 후신이며 동옥저 또한 지금의 함경의 땅에 있었으니, '개마'가 '태백'이 됨을 알 수 있다.52) 또한《고려사·열전》에 이르기를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락이었는데 개마산의 동쪽에 모여 살았다」라 하였으니, 당시의 여진이 분명히 백두산의 동북에 있었으므로 '개마'가 '백두'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위서·물길전》에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범과 표범·곰·승냥이 등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위에 올라가서는 방뇨를 하지 않았다」53) 하였고,《북사·물길전》에도 역시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중원의 말로 '태백'이라 하며, 풍속에 그것을 매우 삼가며 공경한다」54)고 하였다.《당서》에는 「속말부가 가장 남쪽에 살고 있는데,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태백산과 맞닥뜨린 곳에서 고려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였다.《괄지지》에는 「말갈은 옛 숙신이다. 그 남쪽에 백산(白山)이 있는데 새와 짐승이며 풀과 나무가 모두 희다」라 하였고,《금사·고려전》에는 고구려 이래 말갈의 일을 기술하며 「흑수말갈이 옛 숙신의 땅에 거주하였는데, '백산(白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으니 곧 '장백산'으로서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섭융례(葉隆禮)의《요지》에는 「장백산은 냉산(冷山)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대저 백의관음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 산 안의 짐승은 모두 희다. 사람들은 그 곳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감히 들어가지 않는다」라 하였고, 또 「흑수(黑水)가 그 곳에서 발원하였다」라 하였다.《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의 1천여 리에 있으니 옛 회녕부(會寧府)의 남쪽 60리에 있다. 좌우로 1천리에 뻗어 있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그 곳의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는 80리이며 못은 깊어서 측량할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서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하였으니, 불함·개마·태백·도태·장백 등의 이름은 모두 같은 산의 다른 이름으로 역대 방언의 차이점일 뿐이다. 또《고려사》의 광종(光宗) 10년조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 하였으니,55) 곧 '백두'의 이름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보인다. '개(蓋)'의 음은 '백(白)' 자의 뜻과 가까우며, 동방의 말에 '말(馬)'과 '두(頭)'는 같은 새김이기에 글자의 뜻으로 새기면 '개마(蓋馬)'와 '백두(白頭)'가 글자는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이 분명하므로 '백두'라는 이름의 유래 또한 오래된 것이라 할 것이다.
'홍익인간·인류공영 > 배달한국(BC3898)' 카테고리의 다른 글
揆園史話 / 檀君紀 - 4 (0) | 2013.08.18 |
---|---|
揆園史話 / 檀君紀 - 3 (0) | 2013.08.18 |
揆園史話 / 檀君紀 - 1 (0) | 2013.08.18 |
揆園史話 / 太始紀 - 2 (0) | 2013.08.18 |
揆園史話 / 太始紀 - 1 (0) | 2013.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