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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揆園史話 / 檀君紀 - 4

자연정화 2013. 8. 18. 11:39

揆 園 史 話 (규원사화)

 

 

 

檀  君  紀 (4) 

壬子歲, (王)[壬]儉魯乙元年. 始作유, 養畜外之獸. 在位二十三歲, 崩. 子, 道奚立.

임자년은 노을 임금의 원년이다. 처음으로 우리를 만들어 바깥의 짐승들을 길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도해(道奚)가 임금이 되었다.

乙亥歲, (王)[壬]儉道奚元年. 夫餘侯견兪之難, 熊加句麗.眞番侯, 助平之. 在位三十六歲, 崩. 子, 阿漢立.

을해년은 도해 임금의 원년이다. 부여후가 설유 때문에 어려움을 치르자 웅가와 구려후 및 진번후 등이 도와서 이를 평정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한(阿漢)이 임금이 되었다.

辛亥歲, (王)[壬]儉阿漢元年. 在位二十七歲, 崩. 子, 屹達立.

신해년은 아한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흘달(屹達)이 임금이 되었다.

戊寅歲, (王)[壬]儉屹達元年. 有武勇, 國人畏愛之. 得奚門爲龍加. 人來至, (王)[壬]儉優禮之. 時, 德旣衰, 使人往觀其政, 又送舞樂而試之. 及後, 使奚門藍侯率諸兵, 進征.之間. 後與王和. 在位四十三歲, 崩. 子, 古弗立.

무인년은 흘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무예에 용맹이 있음에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하였다. 해문(奚門)을 얻어 용가로 삼았다. 하나라 사람이 건너오자 임금이 그를 예절로서 대우하였다. 이 때 하나라의 덕이 이미 쇠퇴하니 사람을 시켜 가서 그 정치를 살펴보게 하고는, 또 춤과 노래를 보내어 그를 시험하게67) 한 후에, 해문과 남후로 하여금 모든 병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엄(奄)에서 빈(빈)·기(岐) 사이의 지역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 후 하나라 왕과 서로 화해하였다.68) 임금자리에 있은 지 4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고불(古弗)이 임금이 되었다.

 

 

辛酉歲, (王)[壬]儉古弗元年. 繼父志而修戎事, 然而終世無事. 루진侯獻赤玉之瑞. 在位二十九歲, 崩. 子, 伐音立.

신유년은 고불 임금의 원년이다. 부왕의 뜻을 이어 군사 일을 잘 다스렸으나 오랫동안 그 군사를 쓸 일이 없었다. 속진후가 상스러운 붉은 옥을 바쳤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벌음(伐音)이 임금이 되었다.

庚寅歲, (王)[壬]儉伐音元年. 種薰華於階下, 以爲亭. 使末良爲龍加. 曰: 「孩提, 亦歸于寵者. 保民之道, 不可暫弛.」 遂, 廣施德政, 於是兆民久懷. 時, 王遣使請援, 乃[使]末良興兵進救. 後, 王復請兵, (王)[壬]儉以其無道, 却而不許. 及湯王.大修仁政, (王)[壬]儉曰: 「有德之君也, 不可相侵.」 乃집其兵, 後和. 使民, 八十稅一. 在位三十三歲, 崩. 子, 尉那立.

경인년은 벌음 임금의 원년이다. 훈화(薰華)를 섬돌 아래 심어서 이를 길렀다.69) 말량(末良)을 용가로 삼았다. 이르기를 「어린아이도 그를 귀여워해 주는 사람에게 끌려 돌아가기 마련이니, 백성을 보살피는 도리는 잠시라도 소흘히 할 수 없다」 하며 마침내 널리 덕스러운 정치를 펼치니, 이로서 모든 백성이 그 덕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다. 이 때 하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와서 구원을 청하므로 말량에게 군사를 일으켜 나아가 구원하게 하였다. 뒤에 하나라 왕이 또다시 병사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그의 무도함을 들어 청을 물리치고 허락하지 않았다.70) 탕(湯)왕이 상(商)나라를 일으키고 크게 어진 정치를 닦으니 임금이 이르기를 「덕이 있는 군주로다. 서로 침범할 수 없도다」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들인 뒤 화해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80분의 1의 세금을 내게 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위나(尉那)가 임금이 되었다.

癸亥歲, (王)[壬]儉尉那元年. 國內靜謐. 在位十八歲, 崩. 子, 余乙立.

계해년은 위나 임금의 원년이다. 나라 안은 고요하고 평온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여을(余乙)이 임금이 되었다.

辛巳歲, (王)[壬]儉余乙元年. 有異獸出于太白之陽, 九尾白毛, 似狼而不害物. 是年, 大[諸會侯](會諸侯), 賞眞番侯. 在位六十三歲, 崩. 子, 冬奄立.

신사년은 여을 임금의 원년이다. 태백산의 남쪽에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는데, 꼬리는 아홉에 흰 털을 지니고서 흡사 늑대 같았으나 사물을 해치지는 않았다. 이 해에 제후들을 크게 모으고 진번후에게 상을 주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6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동엄(冬奄)이 임금이 되었다.

甲申歲, (王)[壬]儉冬奄元年. 루진侯獻巨獸, 其大如屋. 時, 諸侯有相攻者, 牛首州復有앙骨者, 與其弟長骨作亂, 西鄙之民, 皆被其虐. 夫餘侯不能安집, 乃使熊加充達率師西征, 濊侯루진侯, 亦以兵來助, 앙骨悖惡無倫, 장害庶民, 凡五年而始定. 充達曰: 「豈有飮全海之水, 而始覺其함者耶. 皇祖肇基, 今垂七百歲, 而앙骨之衆, 恣意橫暴, 貽毒于黎民, 此聖道之攸衰也. 君其修德乎!」 冬奄, 乃大修先君之德, 使充達往撫西鄙之民, 居數年, 民有, 擢髮곤구以報其德者. 在位二十歲, 崩. 子, 구牟蘇立.

갑신년은 동엄 임금의 원년이다. 속진후가 커다란 짐승을 바쳤는데 그 크기가 집채만하였다. 이 때 제후들 가운데 서로 공격하는 자가 있었다. 우수주(牛首州)에 또 다시 앙골(앙骨)이라는 자가 있어 그의 동생 장골(長骨)과 함께 난을 일으키니 서쪽 지방의 백성들이 모두 그에게 괴롭힘을 당하였다. 부여후가 쉽사리 평정할 수 없어서 웅가인 충달(充達)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케 하니 예후와 속진후 역시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왔는데, 앙골이 패악무도하게도 많은 백성을 해치기를 무릇 다섯 해 만에야 비로소 평정되었다. 충달이 아뢰기를 「어찌 바다의 모든 물을 다 마시고서야 그 짠 맛을 깨닫겠습니까! 임금님의 조상께서 나라의 터전을 닦은지 이제 7백년에 이르렀는데, 앙골의 무리가 제 멋대로 횡포를 부려 그 독이 백성들에게 미치니 이는 성인의 도가 시든 것입니다. 임금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였다. 동엄은 이에 선대 임금의 덕을 크게 닦고는 충달로 하여금 서쪽 지방에 가서 백성들을 보살피게 하니, 그 지방에 머물기를 몇 년만에 백성 가운데 머리카락을 뽑아 그것으로 신을 삼아 덕에 보답하는 자가 있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구모소(구牟蘇)가 임금이 되었다.

甲辰歲, (王)[壬]儉구牟蘇元年. 南巡至樂浪忽, 修城郭. 孟冬月, 靑丘民군聚舞天, 散而爲獵, 有人至山陂, 爲大蛇所卷, 靑丘侯使구强搜捕曰: 「蛇大如何.」 구强曰: 「穴中藏蛇, 安知其修短耶. 今, 孟冬而蛇出卷人, 爲재非常, 只可搜斬, 以除民害.」 乃使猛士, 毁陂而求之, 蛇大如樑, 以巨斧破其頭殺之, 蛇害遂絶, 重賞구强. 在位二十五歲, 崩. 子, 固忽立.

갑진년은 구모소 임금의 원년이다. 남쪽으로 순행하다 낙랑홀에 이르러 성곽을 수리하였다. 10월에 청구의 백성들이 무리를 지어 모여서 축제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는 흩어져 사냥을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산비탈에 이르러 큰 뱀에게 감겨 버렸다. 청구후가 구강(구强)을 시켜 그 뱀을 잡게 하고는 묻기를 「뱀의 크기가 얼마 만 한가.」 하니 구강이 말하기를 「구멍 속에 숨어 있는 뱀인데 그 길고 짧음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마는, 지금이 벌써 10월인데도 뱀이 나와서 사람을 감는다는 것은 그 재난이 범상하지 않으니 오로지 뱀을 찾아내어 베어 버려서 이로서 백성의 해로움을 없앰이 옳은가 합니다」라 하고는 곧 날랜 장사들을 시켜 비탈을 허물고 찾아내니 뱀의 크기가 대들보만 하였다. 큰 도끼로 뱀의 머리를 깨서 죽이니 마침내 뱀의 해악이 없어졌다. 구강에게 큰 상을 내렸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고홀(固忽)이 임금이 되었다.

 

己巳歲, (王)[壬]儉固忽元年. 루진侯獻貂구, 使藏之而待有功者. 在位十一歲[而]崩. 子, 蘇台立.

기사년은 고홀 임금의 원년이다. 속진후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옷을 바치니 이를 잘 보관하여 두게 하고는 공덕이 있는 자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소태(蘇台)가 임금이 되었다.

庚辰歲, (王)[壬]儉蘇台元年. 西巡諸地, 觀藍侯之政, 尋陳兵于地. 在位三十三歲, 崩. 子, 索弗婁立.

경진년은 소태 임금의 원년이다. 서쪽의 여러 지역을 순행하고 남후의 정치를 살펴 본 뒤 얼마 후에 상나라 땅에 군대를 들여놓았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색불루(索弗婁)가 임금이 되었다.

癸丑歲, (王)[壬]儉索弗婁元年. 與戰破之, 尋和. 後, 復大戰破之, 進入其境, 遂屯海上, 庶民復漸遷徙. 在位十七歲, 崩. 子, 阿勿立.

계축년은 색불루 임금의 원년이다. 상나라와 싸워 이긴 후 얼마 있지 않아 화해하였다. 뒤에 다시 크게 싸워 상나라를 깨트리고 그 국경 안까지 들어가서71) 마침내 해대(海岱)의 위에 주둔하니 많은 백성들이 다시 점차 옮겨갔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물(阿勿)이 임금이 되었다.

庚午歲, (王)[壬]儉阿勿元年, 令弟固弗加樂浪忽. 遣熊加乙孫, 觀南征之兵, 立邑地. 後, 人互爭不和, 乃進兵攻之, 尋罷. 蓋馬侯獻九尾獸. 在位十九歲, 崩. 子, 延那立.

경오년은 아물 임금의 원년이다. 아우 고불가(固弗加)에게 영을 내려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였다. 웅가 을손(乙孫)을 보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간 군사들을 살펴보게 하고는 상나라 땅에 고을을 세웠다. 뒤에 상나라 사람들이 서로 싸우며 화해하지 않으니 병사를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고는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왔다. 개마후가 꼬리가 아홉 달린 짐승을 바쳤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연나(延那)가 임금이 되었다.

己丑歲, (王)[壬]儉延那元年. 叔父固弗加攝政. 翌年, 人攻我, 師至南界, 藍侯率諸軍, 戰克. 後, 互相戰.和. 國內, 增設壇所, 使諸侯, 承命禱天, 凡國中大事及風雨.災異.有求, 則祈于主神, 以遍于諸神也. 有大蛇現루진之地, 靑質黃頭, 能呑大鹿, 民有趨拜者, 乃使巨屈支斷戮之. 在位十三歲, 崩. 弟, 率那立.

기축년은 연나 임금의 원년이다. 숙부 고불가(固弗加)가 섭정을 하였다. 이듬해 상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여 그 군사가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렀는데72) 남후가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싸워 이겼으며, 뒤에는 서로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였다. 나라 안에 제단을 증설하고 제후들로 하여금 명을 받들어 하늘에 기도하게 하였으니, 무릇 나라안에 큰 일이나 비바람 등 별스런 재난이 있거나 구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곧 주신에게 빌어 이로서 뭇 신들에게 두루 미치게 하였다. 큰 뱀이 속진의 땅에 나타났는데 몸은 푸르고 머리는 누런 것이 능히 큰 사슴을 삼키니, 백성들 가운데 이를 좇아 숭배하는 자가 있기에 거굴지(巨屈支)를 시켜 끊어 죽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우 솔나(率那)가 임금이 되었다.

壬寅歲, (王)[壬]儉率那元年. 出巡北鄙, 見小民艱苦爲生, 歎曰: 「蝸牛有室, 蜂채有餌, 安使我民有或流離耶.」 乃勸民貿遷, 以廣其用. 於是南北之民, 舟車相通. 在位十六歲, 崩. 子, 鄒盧立.

임인년은 솔나 임금의 원년이다. 북쪽 궁벽한 곳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아랫백성들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달팽이도 집이 있고 벌과 전갈에게도 먹이가 있는데 어찌 나의 백성을 유랑하게만 하겠는가」라고 하며, 백성들에게 권하여 물자를 서로 교환하고 옮기게 하여 그 쓰임새를 더욱 넓히게 하였다. 따라서 남북의 백성들이 배와 수레를 사용하여 서로 교통하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추로(鄒盧)가 임금이 되었다.

 

 

戊午歲, (王)[壬]儉鄒盧元年. 在位九歲, 崩. 子, 豆密立.

무오년은 추로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두밀(豆密)이 임금이 되었다.

丁卯歲, (王)[壬]儉豆密元年. 使人記桓儉以來列聖之詞, 掛於宮門內側, 使出入朝覲者閱之. 遣兵伐. 루진侯.多忽遣兵入東海伐鬼洲, 平其地. 在位四十五歲, 崩. 子, 奚牟立.

정묘년은 두밀 임금의 원년이다. 사람을 시켜 단검이래 열성조(列聖祖)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여 궁문의 안쪽에 걸어 두고는 출입하는 신하들에게 이를 읽도록 하였다. 병사를 보내 상나라를 정벌하였다. 속진후 다홀(多忽)이 병사를 보내 동해(東海)로 들어가 귀주(鬼州)를 쳐서 그 땅을 평정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4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해모(奚牟)가 임금이 되었다.

壬子歲, (王)[壬]儉奚牟元年. 使藍侯沸流侯.靑丘侯, 共聚소泥水. (王)[壬]儉有疾, 使人白衣禱天, 尋愈. 卒本侯獻靈草, 能除人萬病. 在位二十二歲, 崩. 子, 摩休立.

임자년은 해모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로 하여금 비류후 및 청구후와 더불어 소니수(소泥水)에 모이게 하였다. 임금이 병을 얻으니 사람을 시켜 흰 옷을 입고 하늘에 빌도록 하였더니 얼마지 않아 완쾌되었다. 졸본후가 신령스러운 풀을 바쳤는데 능히 사람의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마휴(摩休)가 임금이 되었다.

甲戌歲, (王)[壬]儉摩休元年. 人來朝. 靑丘侯報, 南夷海中出泥山, 火出水中, 泥合爲石. 在位九歲, 崩. 弟, 奈休立.

갑술년은 마휴 임금의 원년이다. 상나라 사람이 와서 임금을 알현하였다. 청구후가 남이(南夷)의 바다 가운데에서 진흙산이 솟아 나오고 불이 물 가운데에서 솟더니 진흙이 굳어져서 돌이 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우 나휴(奈休)가 임금이 되었다.

癸未歲, (王)[壬]儉奈休元年, 句麗侯.于타入爲龍加. (王)[壬]儉南巡而觀靑丘之政, 至阿斯達. 復西巡而至(盧)[慮]忽, 大會諸侯, 尋還. 與人和. 在位五十三歲, 崩. 子, 登올立.

계미년은 나휴 임금의 원년이다. 구려후인 우타(于타)가 들어와서 용가가 되었다. 임금이 남쪽으로 순행하여 청구의 정치를 살피고 아사달에 이르렀으며, 다시 서쪽으로 순행하여 엄려홀에 이르러 제후들을 크게 모이게 하고는 얼마지 않아 돌아왔다. 은나라 사람과 화목하게 지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53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등올(登올)이 임금이 되었다.

丙子歲, (王)[壬]儉登올元年. 在位六歲, 崩. 子, 鄒密(五)[立].

병자년은 등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6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추밀(鄒密)이 임금이 되었다.

壬午歲, 壬儉鄒密元年. 濊侯.知莫婁入爲龍加. (王)[壬]儉出巡, 至牛首忽, [諸會侯](會諸侯). 遂崩于其地, 在位八歲. 子, 甘勿立.

임오년은 추밀 임금의 원년이다. 예후인 지막루(知莫婁)가 들어와서 용가가 되었다. 임금이 순행을 나가 우수홀에 이르러 제후들을 모이게 하였다. 마침내 그 땅에서 세상을 떠나니 임금자리에 있은 지 8년만 이었다. 아들 감물(甘勿)이 임금이 되었다.

庚寅歲, (王)[壬]儉甘勿元年. 在位九歲, 崩. 子, 奧婁門立.

경인년은 감물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오루문(奧婁門)이 임금이 되었다.

乙亥歲, (王)[壬]儉奧婁門元年. 遷都樂浪忽, 使眞番侯監舊都. 民有取人物者, 鷹加治之曰: 「小蛇能濁全海之水. 今不敎斯人, 世德以衰, 國其亂乎!」 (王)[壬]儉聞之曰: 「民之行, 如水就于決, 且源淸而下流自淸, 此吾凉德(耶)[所]致也. 吾皇祖肇基, 已千載, 國無大難, 民無大대, 今有此犯, 吾恐, 先祖之業, 因我而廢.」 乃大修先君之德. 於是犯者以化, 民無染惡者. 在位二十歲, 崩. 子, 沙伐立.

을해년은 오루문 임금의 원년이다. 도읍을 낙랑홀로 옮기고 진번후를 시켜 옛 도읍을 감독하게 하였다. 백성 가운데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지는 자가 있기에 응가가 이를 다스려 말하기를 「작은 뱀이 능히 모든 바다물을 흐리게 할 수 있듯이, 지금 그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면 세상의 덕은 이로써 쇠퇴하게 되고 나라는 그로 혼란하게 되리라」 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듣고 이르기를 「백성의 행실은 마치 물줄기가 터진 틈새를 따라 흐르는 것과 같으며, 또한 그 근원이 맑으면 아랫물은 자연히 맑은 것과 같은 것이니, 이는 내가 덕이 두텁지 못한 소치이다. 우리 황조(皇祖)께서 나라의 기틀을 잡은지 이미 천년이 되었으나 나라에는 커다란 어려움이 없었고 백성들은 큰 원망이 없었는데 지금에 이러한 범법이 있게 되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선조의 위업이 나로 인해 무너질까 해서다」 하고는 이내 선대 임금을 본 받아 크게 덕을 닦았다. 이로 인해 범법한 자가 교화되니 백성 중에는 악에 물드는 자가 없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0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사벌(沙伐)이 임금이 되었다.

己未歲, (王)[壬]儉沙伐元年. 在位十一歲, 崩. 子, 買勒立.

기미년은 사벌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매륵(買勒)이 임금이 되었다.

庚午歲, (王)[壬]儉買勒元年. 在位十八歲, 崩. 子, 麻勿立.

경오년은 매륵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마물(麻勿)이 임금이 되었다.

戊子歲, (王)[壬]儉麻勿元年. 眞番侯.鄒돌入爲龍加. 南巡至唐莊京, 遂崩于阿斯達, 在位八歲. 眞番侯立, (王)[壬]儉弟多勿.

무자년은 마물 임금의 원년이다. 진번후 추돌(鄒돌)을 들게 하여 용가로 삼았다. 남쪽으로 순행하다가 당장경에 이르러 마침내 아사달에서 세상을 떠나니 임금자리에 있은 지 8년 만 이었다. 진번후가 보위에 올랐는데 임금의 아우인 다물(多勿)이다.

丙申歲, (王)[壬]儉多勿元年. 견兪復侵西鄙, 眞番侯濊侯.夫餘侯擊却之, 進入其境而還. 在位十九歲, 崩. 子, 豆忽立.

병신년은 다물 임금의 원년이다. 설유가 다시 서쪽 변경을 침범하니 진번후가 예후 및 부여후와 더불어 그를 쳐서 물리치고 나아가 그 경계까지 들어갔다가는 돌아왔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두홀(豆忽)이 임금이 되었다.

乙卯歲, (王)[壬]儉豆忽元年. 沸流侯獻大鼈, 長丈餘. 루진侯爲龍加. 初, 屹達之世, 東人之進據.者甚衆. 及.之興而遂漸撤退, 然細民以耕桑爲業者, 猶散處其地, 久不失其俗. 至是藍侯頗强, 稍役率諸侯, 逐孤竹君, 南遷其都, 居奄瀆忽, 與逼近, 使黎巴達將兵, 進至.之間, 與其遺民相結, 立國曰, 治黎忽, 遂與家諸侯及西戎之人相雜處. 於是[氏](侯)之威漸盛而, (王)[壬]儉之命亦及乎恒山以南之地矣. 在位二十八歲, 崩. 子, 達音立.

을묘년은 두홀 임금의 원년이다. 비류후가 큰 자라를 바쳤는데 길이가 한 길이 넘었다. 속진후가 용가가 되었다. 처음 흘달 임금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빈(빈)·기(岐) 지역으로 나아가 거처한 자가 매우 많았는데, 상나라 탕왕이 일어나니 마침내 점차 물러나오게 되었다. 그러나 빈천한 백성으로서 농사짓고 누에치는 것을 생업으로 하던 자들은 여전히 그 땅에 흩어져 살면서 오랫동안 풍속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즈음 남후가 자못 강성하여 차츰 제후들을 부리고 거느리게 되었는데, 고죽군(孤竹君)을 몰아내고 도읍을 남쪽으로 옮겨 엄독홀(奄瀆忽)에 거처하였다. 그 곳은 은나라와 매우 가까우므로 여파달(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빈(빈)·기(岐) 사이로 나아가게 하여 그 유민들과 더불어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우고 '여(黎)'라고 이름 짓고 여홀(黎忽)에서 다스리게 하니, 이에 마침내 은나라의 제후 및 서융(西戎)의 사람들과 더불어 섞여 거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남후의 위세가 점차 번성하여 졌으며, 임금의 명령 또한 항산(恒山)73)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달음(達音)이 임금이 되었다.

癸未歲, (王)[壬]儉達音元年. 娶靑丘侯之女阿施氏爲后, 賢而有德, 國人慕之. 蓋馬侯獻靈艸. 昔, 夫餘民有遁居于견兪之地, 遂與其民雜處, 頗習其俗, 殆無恒業, 以狩獵爲生, 獸皮爲服, 人謂之. (後)[復]漸遷徙, 處於奄慮北西之地, 遂爲藍氏之民. 在位十四歲, 崩. 子, 音次立.

계미년은 달음 임금의 원년이다. 청구후의 여식 아시씨(阿施氏)를 취하여 황후로 삼으니, 어질며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그를 흠모하였다. 개마후가 신령스러운 풀을 바쳤다. 옛적에 부여의 백성 가운데 몸을 피하여 설유의 땅에 사는 자가 있었는데, 마침내 그 땅의 백성들과 섞여서 거처하게 되니 자못 그 풍속을 익히게 되었으며, 거의 고정된 생업이 없이 수렵으로 생활을 하며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맥(貊)'이라 하였다. 다시 점차 옮겨와서 엄려(奄慮)의 북서쪽 땅에서 살게 되어 마침내 남후의 백성이 되었다.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14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음차(音次)가 임금이 되었다.

丁酉歲, (王)[壬]儉音次元年. 先是, 王室頗微, 諸侯漸强, 及音次卽位, 有仁德, 國人咸慕. 於是王道復興, 而諸侯相率來朝. 在位十九歲, 崩. 子, 乙于支立.

정유년은 음차 임금의 원년이다. 이 보다 앞서 왕실이 자못 쇠약하고 제후들이 점차 강성하여 졌으나, 음차가 즉위하자 어진 덕이 있어 나라 사람들이 모두 흠모하였다. 그리하여 왕도가 부흥하게 되었으며 제후들은 서로 좇아와서 알현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을우지(乙于支)가 임금이 되었다.

丙辰歲, (王)[壬]儉乙于支元年. 在位九歲, 崩. 子, 勿理立.

병진년은 을우지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물리(勿理)가 임금이 되었다.

乙丑歲, (王)[壬]儉勿理元年. 仁而好勇. 時, 諸侯已强而猶尊(王)[壬]儉, 時常朝覲. 藍侯.儉達, 與靑丘侯.句麗侯.루진侯, 率兵伐, 遂深入其地, 淮岱之間, 莫不響應. 諸侯乃定淮岱之地, 乃立薄姑74)靑州之地曰奄國, 盈古氏淮北.徐州之地曰徐國, 互相聯盟而援結, 人莫敢當者. 盖, 海岱.江淮之地, 爲東人占居者已久, 及至道之衰, 而藍侯與諸侯進攻. 於是濱海之民, 皆以其州欣迎其師也. 自蚩尤氏撤退以後, 復見斯時之盛矣. 雖然, 諸侯亦稍輕王室, 雖外修其職, 不甚崇戴焉. 在位十五歲, 崩. 子, 丘忽立.

을축년은 물리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은 어질면서도 무도(武道)의 용맹을 좋아하였다. 이 때의 제후들은 이미 강성하였으나 여전히 임금을 존중하여 때를 맞추어 항상 알현하였다. 남후인 검달(儉達)이 청구후·구려후·속진후 등과 더불어 병사를 거느리고 은나라를 정벌하여 마침내 그 땅의 회대(淮岱) 사이로 깊이 들어가게 되니 반가이 맞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75) 제후들이 이에 회대의 땅을 평정하고 박고씨(薄姑氏)를 청주(靑州)76)의 땅에 세워 '엄국(奄國)'이라 이름하고, 영고씨(盈古氏)를 회수(淮水)의 북쪽 서주(徐州)77)의 땅에 세워 '서국(徐國)'이라 이름하고는, 서로 연맹하여 원조하고 단결하니 은나라 사람들이 감히 당해내지 못하였다.

무릇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차지하고 살아 온 지 오래되었는데, 은나라의 도가 쇠퇴해지자 남후가 제후들과 더불어 공격하여 들어간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바다를 인접한 곳의 백성들은 모두 그들의 마을을 바치며 흔쾌히 군사를 환영하였던 것이다. 치우씨가 물러난 이후 다시 이 때에 번성함을 보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제후들 역시 조금씩 왕실을 가볍게 여기게 되었으니, 비록 겉으로는 맡은 일을 처리하였지만 마음으론 받들지 않게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구홀(丘忽)이 임금이 되었다.

庚辰歲, (王)[壬]儉丘忽元年. 蓋馬侯.買올入爲龍加. 在位七歲, 崩. 子, 余婁立.

경진년은 구홀 임금의 원년이다. 개마후 매올(買올)이 들어와 용가가 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여루(余婁)가 임금이 되었다.

丁亥歲, (王)[壬]儉余婁元年. 루진侯移治達婁忽. 藍侯鮮牟國.淮南之地. 在位五歲, 崩. 子, 普乙立.

정해년은 여루 임금의 원년이다. 속진후가 달루홀(達婁忽)로 옮겨 다스렸다. 남후가 은나라 회수의 남쪽 땅에 선모국(鮮牟國)을 세웠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보을(普乙)이 임금이 되었다.

壬辰歲, (王)[壬]儉普乙元年. 藍侯遂總(師)[帥]諸侯, 朝覲者, 遂稀. 在位十一歲, 崩. 子, 古列加立.

임진년은 보을 임금의 원년이다. 남후가 마침내 제후들을 총괄하여 거느리게 되니 임금을 알현하는 자가 드물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11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고열가(古列加)가 임금이 되었다.

癸卯歲, (王)[壬]儉古列加元年. (王)[壬]儉初立而國用不敷, 鳳加收畿內之貢, 僅得充用, 民亦有, 輸穀助用者. (王)[壬]儉與諸加謀曰: 「昔, 我皇祖肇基立業, 爲萬世後孫之範. 今, 王室衰微, 諸家浸(疆)[彊], 方外諸侯, 殆無奉命者. 雖, (坼)[坼]圻內之民, 懷列聖之化, 猶表忠虔, 惟予凉德, 不可以致化立威, 欲讓於有德, 則遍觀聖裔, 又無其人. 予欲, 避居於唐莊京, 入阿斯達, 以安奉先聖之神靈.」 諸加悽愴而從之. (王)[壬]儉乃奉祭器, 遜居于唐莊京, 遂宅于阿斯達. (坼)[坼]圻內民, 從來者甚衆, 皆宅于唐莊京. 於是國遂除, 在位三十歲.

계묘년은 고열가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이 즉위한 처음에는 나라에 쓰이는 것이 두루 충당되지 못하자 봉가(鳳加)가 기내(畿內)78)의 공물을 거두어 근근히 쓰임에 충당케 하였으며, 백성들 역시 곡식을 보내어 그 쓰임에 도움을 주는 자가 있었다. 임금이 제가와 더불어 의논하여 말하기를 「예전 우리 황조(皇祖)는 나라의 터전을 열고 위업을 세워 만세 후손의 모범이 되었다. 지금에 왕실은 쇠미하니 나라의 제후들은 점차 강성해지고, 나라 밖의 제후들 중 명을 받드는 자는 거의 없게 되었다. 비록 기내의 백성들이 열성조의 교화를 가슴에 품고 여전히 충성과 공경을 나타내고 있지만, 오로지 내가 덕이 두텁지 못한 탓으로 지극한 교화로 위엄을 세우지 못하는 까닭에, 덕이 있는 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자 열성조의 후예들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또한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나는 당장경으로 거처를 피하여 아사달에 들어가서 선성(先聖)의 신령(神靈)들을 편안히 받들어 모시고자 한다」 하였다. 제가는 슬퍼하며 뜻에 따랐다. 임금은 이에 제기를 받들고 당장경으로 피하여 거처하다가 마침내는 아사달에 자리를 잡았다. 기내의 백성들 가운데 임금을 좇아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모두 당장경에 집을 정하였다.

檀儉神人開創鴻業, 歷四十七世, 一千一百九十五年. 檀君旣徙居阿斯達而國人猶推尊之, 諸侯亦無敢逼者. 或曰, 朴氏.白氏, 皆其後裔, 而赫居世亦出於檀君之後云, 今文獻無徵, 未知其確矣. 自後, 諸侯頗以武力相競, 獨藍侯者出諸家之右, 時常役率군后, 以行國政, 是爲列國焉.

이로서 나라는 마침내 없어지니, 임금으로 있은 지 30년이요, 단검신인이 큰 위업을 처음으로 펼친 때부터 역년이 47世에 1,195년이다.79) 단군이 이미 아사달로 옮겨 거처하였으나 나라 사람들은 여전히 받들어 존중하였으며, 제후들 역시 감히 핍박하는 자가 없었다. 혹은 말하기를 박씨(朴氏)와 백씨(白氏) 등이 모두 그 후예라고 하며, 혁거세(赫居世) 역시 단군의 후손 가운데에서 나왔다고들 하지만, 지금의 문헌에는 증빙이 없어 그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그 후로 제후들은 자못 무력으로 서로 경쟁하였는데, 유독 남후(藍侯 )만이 제후들의 강성함 가운데에서도 뛰어나서 항상 모든 제후들을 거느리고 국정을 행하게 되었기에 이로서 열국(列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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