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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揆園史話 / 檀君紀 - 5

자연정화 2013. 8. 18. 11:41

揆 園 史 話 (규원사화)

 

 

 

檀  君  紀 (5) 

 

 

1.【震域遺紀】: 고려 공민왕 때 학자인 이명(李茗)이 쓴 역사서. 이명은 이암(李암) 및 범장(范樟)과 함께 천보산(天寶山) 태소암(太素庵)에 비장 되어 있던 고서를 바탕으로, 이명은《진역유기를, 이암은《단군세기(檀君世紀)와《태백진훈(太白眞訓)을, 범장은《북부여기(北夫餘記)를 각각 저술했다고 한다.

 

2.【朝代記】: 고구려를 이어 나라를 세운 발해의 비장서(秘藏書)이다. 조선 세조 3년의 '구서(求書)의 유시(諭示)' 목록에도 이 책명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사서는 적어도 조선조 초기까지는 줄곧 보존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3.【震域】: 우리나라를 이르는 또 다른 이름으로서 혹은 진단(震檀)이라고도 한다. '진(震)'은 팔괘에서 동쪽을 뜻하는 것이기에 이름한 것이다.

 

4. 본서에 따르면 환검신인의 재위년수는 93년이고 제2세 단군 부루의 즉위 원년이 '辛丑'이라 하였으므로 신축년을 기점으로 하여 93년을 소급하여 역산하면 제1세 단군인 환검신인의 즉위년대는 바로 '戊辰'이 된다. 경세력(經世曆)에 따라 환산하여 보면 이 해는 기원전 2333년이며 또한 당요(唐堯) 23년 무진년이 되니, 아래에서 밝힌 "요(堯)와 아울러 함께 일어났다"라고 하는 말에 부합한다. 이 해가 곧 '단군기원(檀君紀元) 원년(元年)'이다.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5.【임금성】: '임금성'의 위치는 발해 장령부(長嶺府) 하주(瑕州) 근교로 비정된다. 그러나 아래 글에서 이명은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라 하였으니, 곧 발해 현덕부(顯德府) 현주(顯州)를 말하고 있으므로 임금성의 위치를 말함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①북애노인이 임금성의 위치를 말하며 '우수하(牛首河 즉 涑末水)의 너른 들판'이라 하였으니, 곧 하주 근교를 말하는 것이지 홀한하(忽汗河)에 위치한 현주는 임금성이 될 수 없다.

②패수의 북쪽인 평양성으로의 천도를 설명하며 "(임금성이 위치한) 속말의 물줄기는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흘러들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으니, 이는 임금성이 속말수의 상류(하주 근교)에 위치하였음을 말하는 것이지 홀한하의 상류(현주)에 위치하지 않았음을 거듭 확인하는 것이 된다.

③임금성인 소밀성(蘇密城)에서 상경(上京) 용천부(龍泉府)까지가 600리요 또한 요양(遼陽)까지가 600리 라고 앞뒤의 문장에서 말하고 있으니, 지리적으로 보아 임금성은 요양과 상경과의 중간에 위치한 하주 근교를 말하는 것이지 상경에 훨씬 치우친 현주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위의 설명은 하주.현주와 상경 및 요양 등의 위치를 현재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위치가 옳다고 보았을 경우에 한정된다. 따라서 역(逆)으로, 비교적 현실적인 자료에 근거한 이명(李茗) 및 북애노인의 말에 근거하여 상기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가 재확인되어야 할 필요성도 있다.

 

6.【靺鞨】: 靺鞨이란 原音이 Moxo, 또는 Moho로서 滿洲의 女眞語의 물(水)을 뜻하는 Muke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Greben..ikov에 의하면 말갈(Moxo)이라는 명칭은 물(水)을 나타내는 만주어의 Muke에서 나오고, 읍婁(Yelou)라는 명칭은 그 어원이 巢窟이나 洞穴을 뜻하는 만주어인 Jeru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靺鞨이란 말은 "물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勿吉(Wu-tsi)이란 말이 "森林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과 서로 대비된다. 다시 말하면 만주의 자연환경과 기후구분에 따른다면, 북쪽 寒冷帶 濕潤氣候(Dwb)의 삼림지역(Taiga)에서 수렵을 위주로 생활하던 사람들을 勿吉(We-tsi)이라고 한 데 비하여, 남쪽 寒冷帶 亞濕潤氣候(Dwa)의 강가·평야지역에서 농경생활을 하거나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移行하는 과정에 있었던 사람들을 靺鞨(Moxo)이라고 한 듯하다. 말갈의 7部가 산재한 지역은 대체로 북쪽으로 黑龍江에서 남쪽으로 豆滿江 일대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는데, 그 남쪽에 있었던 諸部는 상당히 농경생활로 移行하였으나 그 북쪽에 있었던 諸部는 고대의 肅愼·읍婁와 마찬가지로 미개한 원시적 수렵과 어로생활을 하였으리라 추측된다. 그 까닭은 만주에 있어서의 생활양식과 그 문화 정도는 바로 이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흑룡강 유역에 있었던 黑水靺鞨이 가장 肅愼·읍婁·勿吉과 유사하였기 때문에 三上次男은 이들을 한 단위로 묶어 古아시아族으로 보고, 그 나머지 6部는 퉁구스系로 보고 있다. ▶S. M. Shirokogoroff에 의하면 勿吉(Wu-tsi)을 靺鞨(Moxo)에 직접 관련시키는 것은 곤란하니 말갈이 물길에 대하여 그 정치적 지배를 미쳤는지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이러한 명칭이 하나의 독립된 호칭으로서는 만주족에 흡수되었던 몇 개의 종족단위 가운데 우연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정치관계의 용어에서는 그 모습이 사라졌을지도 알 수 없다고 하고, 이미 논한 바와 같이 勿吉(Wu-tsi) 후예들의 언어는 靺鞨(Moxo)의 언어와는 다르므로 靺鞨의 지도적 단위의 언어라고 이해해야 할는지 모르겠다. 靺鞨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광대한 지역을 지배하였고, 하나의 종족단위는 아니었으나 渤海나 女眞 등과 같이 하나의 정치조직이었다고 하여, 勿吉과 靺鞨은 언어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직접 연관관계가 없으며, 靺鞨이란 종족의 명칭이 아니라 정치세력을 형성한 집단에 대해 붙여진 호칭이었다고 하였다. 그는《金史에 의하여 7세기 隋의 황제가 粟末靺鞨 등의 7部 명칭을 붙인 것을 예로 들면서, 靺鞨(Moxo)이라는 명칭은 중국인들이 그렇게 불렀던 주민들에 의하여 우연히 滿洲라는 이름이 나타났던 것처럼 새로 채택된 이름이거나, 혹은 이러한 주민들에 의하여 이미 사용되던 것을 중국인들에 의해 채택된 이름이었음이 분명하며, 하여튼 그것은 極東 지방에서 보통 흔한 바와 같이 하나의 정치조직의 이름이었다고 하여, 靺鞨이라는 명칭은 중국과 말갈 사이에 있었던 南方 Tungus 집단들에 의하여 中國에 전하여졌던 것이 틀림없다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중국인은 이러한 南方 Tungus 집단에 의해 勿吉·靺鞨 세력과 격리되어 있었다고 추측된다. 읍婁·勿吉·靺鞨 자신들이 스스로를 일컬어 '물(河川)에 사는 사람'·'숲(森林)에 사는 사람' 또는 '洞窟에 사는 사람'이라고 부르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며, 南方 Tungus族, 즉 滿洲族의 조상들이 이러한 명칭을 붙였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靺鞨과 勿吉의 명칭은 특수한 어떤 종족을 일컫던 것이 아니라, 그 자연환경에 따라 다른 생활양식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던 南方 Tungus 집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대에 따라 비록 그 명칭은 달랐으나, 17세기 淸나라 Nurhaci(努兒哈赤)가 만주족을 통일할 때까지 寒冷帶 濕潤氣候(Dwb)에서 수렵생활을 하던 사람들과 寒冷帶 亞濕潤氣候(Dwa)에서 농경생활을 하던 사람을 대비하여 일컬어 온 사실을 알 수 있다. 隋唐時代: 勿吉 ― 靺鞨, 遼代: 生女眞 ― 熟女眞, 明代: 兀狄哈 ― 兀良哈, 明末淸初: 新滿洲族(ice mandu) ― 舊滿洲族(fe mandu). 이처럼 만주의 역사에 있어서 종족계통은 복잡하고도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그 자연환경에 의한 구분은 시대마다 일정한 대비현상을 보여 주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勿吉과 靺鞨이 중국과 관계를 가졌던 사실을《魏書》·《北齊書》·《冊府元龜》등을 통해 조사해 보면, 勿吉은 北魏의 延興 5년(475)부터 중국에 國貢을 시작하여 東魏의 武定 5년(547)에 이르기까지 北魏·東魏 時代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엽까지 약 1세기가량 조공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北齊時代에는 勿吉은 사라지고 그 대신 靺鞨이 등장한다. ▶北齊시대의 조공관계를 간추려 보면 靺鞨의 조공은 北齊의 河淸 2년(563)에 시작하여 武平 6년(575)까지 여러 차례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北魏·東魏 시대와는 달리 北齊 시대에는 肅愼도 天保 5년(554)에 조공하고, 또 勿吉도 武平 3년(572)에 조공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肅愼·勿吉·靺鞨이 동일한 계통의 종족이라고 가정한다면, 그 史書의 편찬자가 그 명칭을 바꾸어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처럼 勿吉·靺鞨 이전의 肅愼까지 함부로 바꾸어 쓸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勿吉을 Muki로 본다면, 勿吉의 轉音으로 靺鞨을 볼 수 있기 때문에 勿吉·靺鞨을 혼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津田左右吉이나 池內宏에 의하면 이러한 勿吉·靺鞨과 肅愼의 종족 갈래를 동일한 계통으로 보지 않고 서로 다른 정치세력으로 해석하였다. 즉, 魏代에는 勿吉部落 아래에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하였으나 隋代에 와서 이러한 諸部落이 분열하여 그 사이에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게 되자 그 세력에 큰 변화를 가져와 물길부락은 그 세력이 쇠퇴하고, 그 대신에 새로운 靺鞨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大莫婁 같은 이웃 종족이 중국에 조공할 수 있었던 것도 勿吉이 세력을 잃자 그 壓制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말하자면 조공의 중단은 세력의 실추를 뜻한다고 보아야 하므로,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까지 약 1세기가량은 물길의 세력이 강성하였으나, 北魏·東魏 시대가 끝나자 北齊 時代에는 勿吉이 쇠퇴하고 그 대신에 말갈의 7部가 등장하여 그 세력을 떨쳤던 것으로 간주된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金九鎭 注.

 

7. 인종은 우리나라 학자가 자국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사실을 한탄하였으며,《삼국사기》는  그러한 인종의 명령으로 김부식에 의해 편찬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우리의 역사를 기록한 서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니,《삼국사기》의  주요 저본이 된《구삼국사류가 그것이다. 그러나《구삼국사》는  유교적인 체계 아래 정리된 책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내용으로 설화류와 기담류의 내용들이 사실(史實)과 혼재 되어 있는, 역사서라기보다는 민담집의 성격에 가까웠을 것이기에 고려의 학자들에 의해 배척 당하여 읽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새로운 역사 서적의 편찬이 명령되었으며, 김부식이《구삼국사》를  위주로 중국 사서에 수록된 삼국의 관련 내용을 다량 전재하여 한 편의 중국 사서와도 같은 형태로 정리한 것이《삼국사기이다. 그렇다면《삼국사기》에  고조선 등 삼국 이전의 역사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는《삼국사기가《구삼국사》에  기초하여 쓰여졌다는 사실에서 찾아 볼 수 있다.《구삼국사》는  신라인에 의해 쓰여졌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신라는 자신들의 시조를 박혁거세나 김알지 및 석탈해 등에서만 찾았을 것이 분명한 반면,《삼국사기》의  처음에 등장하는 고조선 유민을 조상으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관찬사서의 성격이라면 그러한 의미에서 고조선의 역사는 부여의 그것과 함께 신라의 역사를 서술하는 대상에서 당연히 배제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사실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계통을 인정함으로서 스스로를 서자로 간주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한 자구적인 행위로도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서 고조선 유민의 지도자인 6촌장들은 6두품 세력을 형성하여 그들 스스로는 고조선의 후예임을 간직하고 있다가, 그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한 고려조에 들어오면서 단군이 한민족의 시조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내게 되었음을 함께 가정해 볼 수 있다. 결국은《구삼국사》에 서 삼국 이전의 역사가 배제된 사실이《삼국사기의 편찬에 영향을 미쳤으며, 아직까지는 설화류로 치부되었을 고조선의 역사를 김부식이 무리하여 정사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 「在野史書의 비판」 중에서 - 이문영(nymphal), Hitel 한국사동호회.

 

8.【神人王儉】:《삼국사기》정덕본(正德本) 등에는 모두 '仙人王儉'으로 되어 있다.

 

9.《신단실기에 인용된 각 실록(實錄)의 '求書 諭示'(실록의 원 내용과 책의 이름 등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 世祖三年丁丑五月,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安含老.元董仲三聖記.道證記.動天錄.通天錄.地華錄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其廣諭公私及寺社.」(세조 3년 정축 5월에 팔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고조선비사·대변설·조대기·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안함로.원동중의 삼성기·도증기·동천록·통천록·지화록 등의 문서는 사사로운 곳에 간직해 둠이 마땅치 않기에, 만약 간직하고 있는 자는 영으로 허락하여 바쳐 올리도록 할 것이니, 널리 공공이나 개인의 집 그리고 사찰이나 사당에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세조실록》

* 睿宗己丑九月, 傳于禮曹曰: 「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地華錄諸書, 家藏者, 京中, 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 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 超二階, 不納者, 許人陳告. 告者, 依上項論賞, 匿者, 處斬, 其速諭中外.」(예종 기축 9월에 예조에 전교 하기를 「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도증기·지화록 등의 뭇 서적을 집안에 간직하고 있는 자로서 서울에 있는 자는 시월 그믐까지 승정원에 바치고, 바깥 지방으로서 도(道)에 가까이 있는 자는 11월 그믐까지, 그리고 멀리 있는 자는 12월 그믐까지 살고 있는 고을에 바치게 하라. 바친 자는 두 계급을 올려 주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을 시켜 고발하게 할 것이다. 고발한 자는 위의 조항에 의거해 상을 주고, 숨긴 자는 참형에 처할 것이니 속히 안팎에 알리도록 하라」 하였다.) ..《예종실록》

* 成宗卽位己丑十二月, 下書諭諸道觀察使曰: 「前者, 誌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地華錄諸書, 無遺搜覓, 上送事, 曾已下諭矣. 其已收冊者, 依前諭, 上送, 餘書, 勿更收納.」(성종 즉위 기축 12월에 글을 내려 각도 관찰사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지공기·표훈천사·삼성밀기·도증기·지화록 등의 뭇 서적을 빠짐없이 찾아 올리도록 이미 유시하였었다. 이미 거두어들인 책은 먼저 유시에 의거하여 올려 보내고, 여타 서적은 다시 거두어들이지 말라」 하였다.) ..《성종실록》

 

10. 손필본에 '矣∼事者'의 18자가 빠져 있다.

 

11.【秦越】: 소원(疏遠)함을 말한다. 진(秦)과 월(越)은 중국 춘추시대의 두 나라 이름이다. 진나라는 서북쪽에 있었고 월나라는 동남쪽에 있어서 거리가 매우 멀기에 소원한 것의 비유로 쓰이게 되었다.

 

12.【浿西】: 평안도 지방을 말한다.

 

13.【東丹】

* 발해가 거란의 태조 아보기에게 항복하자 거란은 발해의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을 천복성(天福城)으로 발해국(渤海國)을 동란국(東丹國)으로 그 이름을 고쳤다. ..《요사》권 2, 본기 2, 태조(太祖) 하(下), 천현(天顯) 원년 2월 병오條.

* 동란국(東丹國)이라는 국가의 명칭은 '거란'으로부터 온 것이며 동거란국(東契丹國)을 줄여서 말한 것이다. 즉 거란의 동쪽에서 건국된 제2의 거란국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거란이 뒤에 요(遼)로 바뀌어졌으므로 동란국은 일명 동요(東遼)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김육불의《渤海國志長編》권 19 총고, 발해후지 2 참조). 거란이 발해국의 옛 땅에 동란국을 설치한 것은, 대인선이 거란에 항복하여 발해국의 국통이 이미 끊어졌는데도 그 유민이 계속 번영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거란의 통치하에 묶어두려는 정책에서 계획되었다. ..《발해.발해인》서병국著, 15장 '제2의 발해국은 어떤 나라인가.'

 

14.《요사(遼史)》권 38, 지(志) 제8, 지리지(地理志) 2, 동경도(東京道)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 條.

 

15. 원대(元代) 중통(中統) 2년과 지원(至元) 원년에 모두 요(遼)와 금(金) 두 역사의 찬수를 논의하였다. 남송이 멸망하자 또 요·금·송 등 세 역사의 찬수를 논의하였다. 그 또한 '의례'가 정해지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60여 년의 세월이 우물쭈물 지나가기'에 이르렀다. '의례'에 관한 논쟁에서 주된 것으로 두 종류의 의견이 있는데, 한 종류의 주장은《진서(晉書)의 예를 모방하여 요와 금을 '재기(載記)'로 하여 송의 역사에 곁붙여 놓자는 것이며, 다른 한 종류의 주장은《남·북사의 예를 모방하여 북송을 '송사(宋史)'로 하고 남송을 '남사(南史)', 그리고 요와 금을 '북사(北史)'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 문제는 장기간의 논쟁에도 결정되지가 않았다. 곧장 원 말기 지정(至正) 3년에 이르러 탈탈(脫脫)이 세 역사 찬수의 도총재(都總裁)에 임명되어서야 요·금·송에 '각각 정통성을 부여하고 그 연호로서 각기 연결'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며, 염혜산해아(廉惠山海牙)와 왕기(王沂) 및 서병(徐昺)과 진역증(陳繹曾) 등 네 사람이 나누어《요사를 편찬하였다. 당시 계급 모순과 민족 모순이 모두 첨예하여 각지의 인민이 잇따라 봉기하여 원 정권은 비바람에 흩날리는 지경에 처하게 되었으며, 재정 또한 극도로 곤란하였기에 세 역사서 모두 황급하게 완성되었다. 그 가운데《요사의 기간이 가장 짧아 단지 11개월(지정 3년 4월에서 4년 3월까지)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 때 찬수에는 야율엄의《실록과 진대임의《요사를 기초로 하고,《자치통감과《거란국지(契丹國志)》및 각 역사서의《거란전》등을 참고하여 편집 배열에 얼마간의 수정을 가하였다. .. 중국 中華書局 교정발간《遼史의 '출판설명' 중에서.

 

16.【平壤】: '평양'은 한자로 표기되는 글자의 뜻을 따르자면 '평평하고 너른 땅(平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도읍을 정함에 있어서 비교적 너르고 고른 땅을 찾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한 땅에 도읍하며 단지 보통명사로 붙인 '너른 땅'이라는 명칭이 한문으로 옮겨지며 '平壤'으로 기록되었으며, 그것이 '도읍한 서울'로서의 의미로 정착되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처럼 '평양'이라는 이름이 처음부터 하나의 지역만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은《괄지지에서 말한 것 처럼 고구려가 도읍한 압록강변의 왕험성(지금의 集安)을 평양성이라 한 것과, 또다시 고려가 도읍한 개경(지금의 平壤)을 평양성이라 한 것 등에서 알 수 있다.

 

17.【四仲月】: 사계절의 가운데 달로써, 2월·5월·8월·11월을 말한다.

 

18. 전통 제례의식에 관해 각 사서별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섣달에 하늘에 제사 지내면서 크게 모여 연일 먹고 마시며 춤을 추는데 이름하여 '영고(迎鼓)'라 한다. ..《후한서》外 <부여전>.

* 10월에는 하늘에 제사 지내는 큰 모임이 있으니 이름하여 '동맹(東盟)'이라 한다. ..《후한서》外 <고구려전>.

* 항상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니 이름하여 '무천(舞天)'이라 한다. ..《후한서》外 <예(濊)전>.

* 항상 5월이면 밭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 지내며 밤낮으로 술자리를 열고 무리지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춤을 출 때는 번번히 수십명이 서로를 따르며 절도있게 땅을 밟는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도 다시 이와 같이 한다. ..《후한서》外 <한(韓)·마한(馬韓)전>.

 

19. 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군사행사가 있으면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소를 잡아 그 굽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치는데, 굽이 흩어지면 흉한 것으로 여기고 합쳐지면 길한 것으로 여긴다). ..《삼국지·부여전》

 

20.《한서》권 25 상(上), 교사지(郊祀志) 제 5 상(上)

* 洪範八政, 三曰祀.[祀謂祭祀也.] 祀者, 所以昭孝事祖, 通神明也. 旁及四夷, 莫不修之; 下至禽獸, 豺獺有祭. [「禮記月令: 『季秋之月, 豺祭獸』, 『孟春之月, 獺祭魚』. 豺, 摯搏之獸, 形似狗. 獺, 水居而食魚. 祭者, 謂殺之而布列, 以祭其先也.」] (홍범 8정에서 세번째를 '사'라 한다('사'는 제사를 말한다). 제사라는 것은 효행을 밝게 드러내어 조상을 섬김으로서 신명에 통하는 것을 가리킨다. 중원의 주위로 사방의 변방민족에 이르기까지 제사의 공덕을 닦지 않는 자가 없으며 아래로는 금수에 이르러 승냥이와 수달에게도 제사를 지내는 의례가 있다. [「《예기》의 월령에 이르기를 『늦가을에는 승냥이가 짐승으로써 제사지낸다』라 하였고, 『이른 봄에는 수달이 고기로써 제사지낸다』라 하였다. 승냥이는 맹수로서 모습이 흡사 개와 같다. 수달은 물에 살면서 물고기를 먹는다. 여기에서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잡아들인 먹이를 늘어놓아 그로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을 말한다.」])

 

21. 한영본에는 '遂爲'로 처리한 두 글자가 영인할 때 가려져 지워진 듯 빈칸으로 되어 있으나 '爲' 자의 아래 부분은 얼마간 남아 있어 '□爲'인 것만은 확실하다. 손필본은 '遂爲∼嶽石'까지의 14자가 빠져 있고, 대신 바로 뒤의 '修道∼渤海' 14자가 두번 중복되어 적혀 있어서 잘못 옮겨 적었음을 알 수 있다. '□爲'는 문맥상 '遂爲'가 아니면 '終爲'일 것인데, 뒤에 '終爲'가 있으므로 하나의 문장에서 동일 단어의 중복을 피하는 속성에 따라 '遂爲'를 택하였다.

 

22.【明臨答夫】: 명림답부는 고구려 사람으로서 현도태수 경임이 신대왕 8년에 쳐들어오자 국상(國相)으로 있던 그가 뭇 신하들이 건의한 강공책(强攻策)을 반대하고 지연책(遲延策)을 주청하여 실행시킴으로서 한나라 군대를 섬멸하였다. 15년에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으며, 왕이 친히 가서 조상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고, 예를 갖추어 질산(質山)에 장사 지내고 20여 가구의 묘지기를 두었다.

* 冬十月, 椽那조衣明臨答夫, 因民不忍, 弑王(겨울 10월에 연나조의 명림답부가 백성들이 참을 수 없었다 하여 왕[차대왕]을 시해하였다.) ..《삼국사기》권 제15, <고구려본기> 제3, 차대왕 20년條.

 

23.《요사(遼史)》권 49, 志 제18, 禮志 1, 길의(吉儀)

* 祭山儀: 設天神.地祗位于木葉山, 東鄕; 中立君樹, 前植군樹, 以像朝班; 又偶植二樹, 以爲神門. 皇帝.皇后至, 夷離畢具禮儀. 牲用자白馬.玄牛.赤白羊, 皆牡. 僕臣曰旗鼓예刺, 殺牲, 體割, 懸之君樹(산신제의 의식: 목엽산에 천신과 지기의 위패를 세워 동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가운데 임금나무를 세우고 그 앞에는 무리 지어 나무를 심어 조회를 받는 반열을 상징하였으며, 또 모퉁이에 두 그루의 나무를 심어 신이 드나드는 문으로 삼았다. 황제와 황후가 도착하면 이리필[형벌의 일을 담당하던 요 때의 관직명: 역자주]이 예의를 갖춘다. 희생으로는 붉은 털과 흰 털이 섞인 말과 검은 소 및 붉은 털과 흰 털이 섞인 양 등을 쓰는데 모두 수컷으로 한다. [희생을 죽이는] 천한 일을 맡은 신하를 '기고예자'라 하는데, 희생을 죽이고 주검을 갈라 임금나무에 걸어 놓는다).

 

24.《금사(金史)》권 35, 志 제16, 禮 8: 제신잡사(諸神雜祠) '장백산(長白山)' 條

* 大定十二年, 有司言: 「長白山在興王之地, 禮合尊崇, 議封爵, 建廟宇.」 十二月, 禮部.太常.學士院奏奉勅旨興國靈應王, 卽其山北地建廟宇. … 明昌四年十月, 備袞冕.玉망.儀物, 上御大安殿, 用黃麾立仗八百人, 行仗五百人, 復冊爲開天弘聖帝(대정 12년 해당 관리가 말하기를 「장백산은 왕이 일어난 땅이니 예절에 합당히 존중하고 숭앙해야 하므로, 논의하여 작위로 책봉하고 사당을 세우시옵소서」 하였다. 12월에 예부와 태상 및 학사원이 아뢰고 칙지를 받들어 [장백산을] '흥국령응왕'에 봉하였으며, 그 산의 북쪽 땅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 명창 4년 10월에 곤룡포와 면류관 및 옥망[임금의 얼굴을 가리는 옥으로 만든 그물 - 중화서국판《금사》에는 '冊'으로 되어 있으나 '망'의 誤字로 보고 고쳐 인용한다: 역자주] 및 의물을 갖추고 상께서 대안전에 거동하여 황휘입장[대장 깃발을 세우고 나가는 군사: 역자주] 800명과 행장 500명을 사용하여 다시 [장백산을] 책봉하여 '개천홍성제'로 삼았다).

..《신단실기(神檀實記)》에서는《금사의 <예지(禮志)>를 인용한 문장이라 밝히며 「장종 명창 4년에는 태백산 북쪽에 대안전을 세우고 '단군'을 '개천홍성제'로 다시 책봉하고 그 신의 위패를 모셨다」라고 하였으나,《금사의 실제 내용에는 '단군'이라는 언급은 없이 단지 '장백산'을 처음에 '흥국령응왕'으로 책봉하였다가 후에 그 관작을 높여 '개천홍성제'로 책봉하였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25. 제 2 임금성인 '평양성'의 위치는 발해 압록부(鴨록府) 환주(桓州)로 비정된다. 그러나 아래 글에서 청평이 「단씨의 치세 때 모두 네번 솥을 옮겼는데 그 두번째가 패수의 북쪽에 도읍을 정한 것이니, 발해의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두번째의 도읍이다」 하여 환주가 아닌 신주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애노인은 「강계 만포진 강의 맞은편에 닿게 되는데…, 단군이 남으로 옮겨와서 고염난수의 동쪽이요 패수의 북쪽인 발해의 신주.신화 등지의 땅에 도읍을 정하였음은…」이라 하여 지리적으로는 환주를 지칭하다가 돌연 신주·신화라고 말하고 있어서 상호 모순을 지닌 말이 되어 버렸다. '강계 만포진 강의 맞은편', '고염난수의 동쪽', '패수의 북쪽' 등은 모두 지리적으로 환주를 설명하는 표현이지 훨씬 상류인 패수 남쪽에 위치한 신주를 지칭하는 말이 아님은 확실하다. 위의 설명은 환주와 신주 등의 위치를 현재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위치가 옳다고 보았을 경우에 한정된다. 따라서 이와는 반대로 비교적 현실적인 자료에 근거한 이명 및 북애노인의 말에 근거하여 상기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가 재확인되어야 할 필요성도 있다.

 

26. ☞ 두번째의 임금성, 즉 '평양'의 위치에 관한 국내 각 사서들의 기록.

* 時, 大國九, 小國十二, 皆檀氏也. 太白.平壤俱在遼滿之間…(이 때는 큰 나라가 아홉이요 작은 나라가 열둘이었으니 모두 단군의 나라이다. 태백과 평양은 모두 요(遼)와 만(滿) 사이에 있었으니…). ..《제왕년대력》.《조선사략》

* 二十三年庚寅, 帝移都平壤[今, 滿洲遼陽, 一云鳳凰城或蓋平縣]…(23년 경인년에 단제께서 도읍을 평양[지금의 만주 요양이며, 봉황성 혹은 개모현이라고도 한다.]으로 옮겼으니…). ..《대동사강》.《조선세가보》

* 以唐堯卽位五十年庚寅[唐堯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당요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당요가 즉위한 첫 해는 무진년이니 그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진실성 여부가 의심된다]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이다]에 도읍하며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삼국유사》

   ☞ 두번째의 임금성, 즉 '평양'으로 천도한 연대에 관한 국내 각 사서들의 기록.

* 庚寅, 移都平壤, 改國號曰朝鮮(경인년에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고쳐 불렀다). ..《제왕년대력》.《조선사략》

* 移都平壤, 定國號始稱朝鮮(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정하여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 .. 《동사년표》[古朝鮮, 檀紀23년, 庚寅, B.C.2311年條]

* 庚寅二十三年, 移都平壤, 改國號曰朝鮮(경인년인 23년에 도읍을 평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고쳐 조선이라 하였다). ..《해동춘추》

*《삼국유사》의 평양 천도 연대에 대한 기록은 원문과 주석에서 모두 잘못 말하고 있다. 즉 요임금의 즉위원년은 경세력에 의하면 갑진년이니 그 50년은 경인년이 아니라 계사년이다. 경인년이 되려면 요임금 47년이 되어야 한다.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27.【黑齒常之】: 백제의 장군으로 소정방에 항복하였다가 뒤에 반란하여 200여 성을 회복하였다. 당 고종이 그를 불러들이자 유인궤에게 항복한 뒤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대총관의 벼슬에 올랐으며, 돌궐을 격파하였다. 후에 주흥(周興) 등의 음모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28.《당서·지리지에서 각 위치 간의 거리를 말하며, 박작구에서 환도를 200리, 환도에서 신주를 200리, 신주에서 현주를 400리, 현주에서 상경·용천부를 600리 라고 하였는데, 현재 밝혀진 각 위치간의 실제 거리와는 심한 차이를 보인다.

 

29.【설유】: 고조선 시기 지금의 내몽고 지방에서 유목하던 종족. 하(夏)나라 때는 훈육(훈죽)이라 불리었고, 은(殷)나라 때는 험윤(험윤)이라 불리었다. 진(秦)·한(漢) 때는 흉노(匈奴)가 된다.

 

30.【肅愼】: 肅愼이란 용어는 周代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살던 東夷族을 일컫던 말이다. 숙신에 관한 가장 오래 된 기록은 孔子가 편찬한《春秋이다.《春秋左傳》昭公 9年條에 보면 '肅愼·燕·毫, 吾北土也'라고 하여 숙신은 燕·毫와 더불어 중국의 북방에 있다고 하였다.《史記·五帝本紀의 帝舜條에도 '南撫交趾·北發·西戎·析枝·渠庾·저·羌·北山戎·發·息愼·東長·鳥夷'라고 하였는데, 後漢 鄭玄의 주석을 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 하였다. 따라서 肅愼·息愼은 고대 중국인들이 만주 지방에 살던 東北夷를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東' 또는 '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 아닌가 추측된다. 周代에는 이처럼 막연한 개념으로 肅愼이라고 통칭하였으나, 삼국 시대에 魏 나라가 비로소 만주 지방을 정벌하자 구체적으로 이 지방의 사정을 알게 되었으며, 이때에는 만주 지방에 살던 東北夷를 肅愼이라고 부르지 않고 읍婁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池內宏은 <肅愼考>에서 중국 고전상에 유명한 古肅愼氏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삼국 시대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 들어온 읍婁가 마침 고矢와 石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古肅愼氏와 읍루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周代의 肅愼 이래 역사에 쓰이던 명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肅愼(Suk-chin) ― 周代 ② 朱申(Su-shin) ― 前漢代 ③ 읍루(Dy.r) ― 後漢·三國 時代 ④ 徹兒赤(Dzur-chi) ― 唐代 ⑤ 朱里眞(Jur-chin) ― 宋代·元代 ⑥ 女眞(Jur-chin) ― 明代 ⑦ 女直(Jur-chi) ― 明代 ⑧ 奴兒眞(Nyur-chin) ― 淸代. ▶朝鮮이란 말도 肅愼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오늘날 Tungus語에서 Sokze(n), Sokcen이나 몽고어에서 Juksen은 '禮'를 가리키는 말이다. 언어학적으로는 이러한 말들을 숙신의 對應語로 들 수 있으나, 그 직접적인 관계는 아직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만주 지역에는 일찍부터 여러 계통의 민족이 들어와서 살다가 이동하였기 때문에 고대의 肅愼 이래 女眞족이 출현하기까지 적어도 몇 차례의 민족이동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古肅愼氏와 淸王朝를 세운 女眞族을 동일한 종족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金九鎭 注.

 

31.【(高)句麗의 어원】: 高句麗의 語源에 대해 살펴보면 외몽고 Orkhon 河畔에 세워진 古突厥碑文에선 Bökli라 하였는데, 古터키語에서 B音은 M音과 換置되므로 Bökli는 Mökli로서 바로 貊句麗를 표기한 것이다.《梵語雜名에서도 고려를 畝俱里(Mokuli)로 훈을 달아 놓았다. 이로 보아서 高句麗는 원래 句麗에 해당하는 토착어의 음에서 비롯하는 단어에 '高'자가 美稱으로 덧붙여진 것이며, 때로 그 종족명에 따라 '貊'자를 冠하기도 한 것 같다. 中原高句麗碑에서는 高麗로 표기하였고,《魏書》이후《周書》·《隋書》등에서도 高麗로 기술하였다. 이는 곧 5C 이후부터는 高句麗가 국내외에서 高麗로도 칭해졌음을 말해 준다.《日本書紀》에서도 고구려를 박(고마) 또는 高麗로 표기하였다. 句麗라는 말의 어원에 대해서는 城 또는 谷·洞·邑 등을 뜻하는 고구려 말 '溝루'에서 비롯하였다는 說이 유력하다. '忽'을 이와 같은 말로 보기도 한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盧泰敦 注.

 

32.【夫餘의 어원】: 夫餘라는 명칭은 밝(神明)에서 유래하여 개발→滋蔓→平野를 의미하는 벌(伐·弗火·夫里)로 변하였다는 說과,《資治通鑑에 나오는 '初夫餘居于鹿山'의 鹿山과 만주어에서 사슴(鹿)을 Puhu, 몽고어에서 Pobgo라고 하는 것을 근거로 夫餘를 사슴의 뜻이라고 하는 說이 있는데, '벌'에서 유래되었다는 說이 유력하다. 현재로서는 그 어원의 정확한 추정은 어려우나 平野를 의미하는 夫里 등과 音同義語로 夫餘의 국가적 위치와 관련된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山海經의 '有胡不與之國'과 관련하여 濊의 漢音 '후이'에서 夫餘의 명칭이 기원했다는 說도 있으나, 이는 아직 단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부여는 일찍부터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데, 前記한《산해경의 기사를 제외하더라도 伏生의《尙書大典에는 '武王克商, 海東諸夷夫餘之屬, 皆通道焉'이라 하고,《史記·貨殖傳에는 '夫燕 ……北隣烏桓·夫餘, 東관穢맥·朝鮮·眞番之利'라 하였으며,《漢書·地理志에도 '北隙烏丸·夫餘, 東賈眞番之利'라는 기사가 보인다. 따라서 부여는 이미 先秦 時代부터 고조선과 더불어 중국에 알려질 정도의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으며, 늦어도 1세기 초의 後漢代에는 王號를 쓰는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였다고 보인다. 이와 같은 부여는 貊族이 고조선, 즉 濊人의 나라에 건국한 국가라는 說과 濊의 일부가 貊에 흡수되어 만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濊貊族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說이 있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徐榮洙 注.

 

33.【海岱】: 대산(岱山, 즉 泰山)과 황해 사이의 지역으로서, 지금의 산동성 가운데 서부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을 가리킨다.

 

34.【읍婁】: 읍婁라는 말의 뜻에 대해서《滿洲源流考에는 만주어에서 岩穴의 穴을 뜻하는 葉로·伊魯와 음이 비슷함을 들어 그 어원을 설명한 '又有站名懿路, 亦作伊魯, 當卽遼金읍婁縣之遺. 今滿洲語, 謂巖穴之穴爲葉로與伊魯, 音相近, 可知當時命名之義'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퉁구스語의 한 방언인 馴鹿을 뜻하는 Oro·Iru의 對音으로 보는 說도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읍婁人이 순록을 기른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점을 들어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읍루족의 거주지는 부여의 동쪽이자 북옥저의 북쪽으로서 대략 우수리강 유역과 연해주·송화강 및 흑룡강 하류 일대의 지역으로 여겨진다.《삼국지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거할 때, 읍루족은 비록 체형은 당시 인근에 있던 부여·고구려·옥저·동예 등의 濊貊族과 비슷하지만, 그 언어·주거·의복·습속 및 활과 같은 도구 등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반면에 후대의 勿吉·靺鞨 등의 존재 양태와 동일한 면모를 많이 보이고 있어 같은 계통의 계승관계에 있는 족속임을 알 수 있다. 이 읍루의 종족적인 계통을 古아시아族으로 규정한 說이 있다. 이는 읍루족의 습속이 穴居생활을 하고, 변소를 주거의 한가운데 두어 오줌으로 세수를 하고, 짐승의 脂肪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으며, 石鏃과 毒矢를 사용하는 점 등이 Aleuts, Chuckchee, Korvak, Giliyak 등의 이른바 古아시아族으로 분류되는 족속들의 풍속과 서로 유사한 반면에, 濊貊族에서는 보이지 않는 점을 주된 근거로 한 것이다. 이 입장에서는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의 주민을 퉁구스族人, 또는 퉁구스族에 몽고種이 일부 혼혈된 족속인 예맥족과 고아시아족으로 크게 양분하였다. 이 說은 언어학적인 면에서 가령 Primore와 Amur 지역 주민의 언어가 처음에는 고아시아語였다가 뒤에는 퉁구스-만주어를 사용하였다는 견해에 의해 뒷받침되어지고 있는 면을 보이기도 한다. 읍루족의 종족적 계통에 관한 이러한 說들은, 한반도의 有文土器 文化人의 종족적 계통과 한국어의 기원 및 계통에서의 고아시아적 요소에 대한 일부의 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한편 읍루족을 고아시아族으로 보는 說에 대해 原論的인 입장에서 穴居는 極寒지대에 사는 족속들의 주거방식으로 널리 보이며, 毒矢의 사용도 軟弓弱矢를 가진 미개인이 사냥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식으로 많이 행해졌으며, 石鏃은 철기문화가 수용되지 못한 단계의 산물일 뿐이라고 하여, 이런 습속이 읍루족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어 왔다. 즉 3세기 당시 읍루족의 문화적 낙후성과 생활환경에 따라 나타난 것으로서, 반드시 읍루족의 종족적 계통을 나타내는 고유한 특성으로 볼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읍婁·勿吉·靺鞨·女眞·滿洲族으로 이어지면서 뚜렷한 계승관계를 보이는 半農·半狩獵의 이 大族屬을 일괄해 古아시아족으로 단정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읍루족의 습속이 현존하는 소위 古아시아족계 족속들의 그것과 서로 유사한 면이 있음이 분명하고 만주 지역에 古아시아族系의 주민들이 존재하였음도 인정되고 있지만, 읍루의 후예인 女眞·滿洲族의 언어와 古아시아族의 언어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前者가 Altai語에 속함은 명백한 바이다. 古아시아族인 읍루의 요소가 퉁구스系인 말갈-여진에 약간 흡수되었다고 하기에는 史書에서 전하는 양자의 계승관계가 너무나 뚜렷하다. 한편 읍루족을 순수 퉁구스族으로 보고 濊貊族을 퉁구스族과 몽고族의 혼혈로 보는 견해도 일찍이 제기되어 왔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盧泰敦 注.

 

35.【元魏】: 삼국의 曹魏와 구분하여 後魏를 가리키는 말이다.

 

36.【勿吉】: 勿吉은 Wu-tsi라고 발음하는데, 만주의 女眞語에서 森林(숲)을 의미하는 Wdi-ji·Ve.i·Udi와 같은 말로 생각된다. Greben..ikov는 勿吉(Wu-tsi)이라는 말이 삼림을 의미하는 Ve.i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勿吉이라는 말의 원음이 Wu-tsi라면 '森林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임에 틀림없다. 만주의 생활양식과 그 문화를 논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은 그 지역환경이다. 만주의 특이한 자연환경은 이미 Martonne에 의하여 '滿洲型氣候'라는 氣候區가 제시되었다. 그의 '만주형기후구'는 독일의 유명한 지리학자인 Köppen의 학설에 의하여 만주의 기후·강우량·乾燥期관계 등을 조사하여 만든 것인데, 만주의 기후를 寒冷帶 濕潤氣候(Dwb)·寒冷帶 亞濕潤氣候(Dwa)·스텝氣候(BS) 등으로 구분하였다. 만주에서 냉한대 습윤기후 지역으로는 만주의 동·북부가 해당되는데, 內興安嶺과 長白山 山地 등의 산악 일대(Alin), 黑龍江 중하류 지역과 松花江 중하류 및 牧丹江·烏蘇里江 일대(Vla)가 모두 이 기후에 속한다. 그러므로 만주에서 이 지역 일대는 월 평균 기온이 22℃ 이하이고 일년 중 4개월 이상이 10℃ 이하이기 때문에 여름철은 기온이 그다지 높지 않으나 비가 많아서 울창한 산림지대를 이루고 있다. 열대지방의 활엽수가 우거진 삼림지대를 Jungle이라고 부르는 데 반하여 이러한 寒冷帶 지방의 침엽수가 울창한 삼림지대를 Taiga라고 부른다. 이러한 Taiga 지역에서는 농경이나 유목생활은 도저히 할 수 없고, 오로지 수렵생활밖에 할 수 없다. 수렵생활에 의하여 식생활을 해결할 수밖에 없어 보조적인 생활 수단으로서 江가에 나가서 漁撈도 하고, 또 나무의 열매나 뿌리를 캐는 채취생활도 하였다. 이 지역이 바로 勿吉이 살았던 생활 터전이었다. 이에 비하여 寒冷帶 亞濕潤氣候지역은 만주의 서부와 남부가 이에 해당하는데, 일년 중 기온이 가장 높은 달이 월 평균 22℃ 이상이고 가장 낮은 달이 월 평균 영하 3℃ 이하이며, 연평균 강우량이 500㎜ 내지 600㎜ 이상으로서 연중 강우량이 여름철에 집중하고 겨울철에 적어 건조한 편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여름철에 기온이 높고 또 강우량이 많아 농경생활에 적합한 지역이다. 중국의 漢族들이 일찍부터 차지하여 농경생활을 하였던 遼河 일대, 즉 遼東半島는 물론이요, 고구려의 근거지였던 압록강의 동佳江 일대와 渤海의 발상지였던 두만강·海蘭河·牧丹江 상류 일대가 바로 이 지역에 속하였던 사실은 곧 그 문화발생과 자연환경의 조건이 서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스텝기후에 속하는 지역은 東蒙古 지역 일대로서 이 일대에서 오늘날 Dahur族·Solon族 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으며, 한편 黑龍江 북쪽 Siberia 일대에서는 오늘날 Northern Tungus계의 Evenki 諸種族들이 馴鹿을 기르면서 원시적 생활을 하고 있다. 外山軍治는 만주 지역을 南만주의 평야지대와 만주 동부에서 한반도 북부에 연결된 森林地帶와 만주 서부 興安嶺 東麓에 전개되는 草原地帶로 구분하고, 南만주의 평야지대는 일찍이 漢族이 진출하고, 만주의 삼림지대에는 각종 狩獵民이 점거한 데 비하여 초원지대는 蒙古系의 유목민이 차지하였다고 하였다. Owen Lattimore는 만주를 농경지대·삼림지대·초원지대로 나누어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南만주의 遼東 지방은 농경지대인데 비하여, 만주의 북부와 동부는 그 자연환경과 경제조건이 삼림지대의 수렵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만주는 그 기후조건에 따라 平野地帶(Dwa)·森林地帶(Dwb)·草原地帶(BS)로 3區分되며, 이러한 자연조건에 따라 농경생활권·수렵생활권·유목생활권으로 나누어진다. 勿吉은 Dwb에 거주하면서 수렵생활을 하였던 대표적인 세력이었다. 勿吉은《魏書》와《北史의 勿吉傳에 기재된 이외의 다른 史料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北魏와 東魏에 조공한 기록들로 미루어 보면, 勿吉은 5∼6세기경 만주의 동북부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세력이었으며, 勿吉國이라고 나라(國)를 지칭하였으나, '邑落各自有長, 不相總一'의 사실로 볼 때, 國家라고 칭할 만큼 그 세력이 성장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A.D.494년에는 夫餘를 倂呑할 정도로 그 힘이 강대하였다고 하지만, 6세기 후반기에 勿吉이 사라지고 그 대신의 靺鞨 뭇 부락이 등장한다. 勿吉이 森林地帶에서 생활하던 수렵민을 일컫던 用語라고 한다면, 어느 특정한 민족명이나 종족명이 아니라는 점도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J. Klaproth는 勿吉의 古音이 'Muki'라고 하여, 말갈(Maxo)과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아무튼 만주의 역사에서 보면, 森林에서 생활하던 수렵민을 일컫던 명칭이 北魏 시대에는 勿吉(Wu-tsi), 明代에는 兀狄哈(Udike), 淸代에는 窩集(Weiji)이라고 하였으나, 그 原音은 숲을 뜻하는 Weiji 또는 Vedi에서 나온 것이다. Shirokogoroff는 Wu-tsi(勿吉)와 Udehe(兀狄哈)가 모두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凌純聲은 沃沮도 그 어원이 森林에서 온 것이라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遼代에 生女眞과 熟女眞의 2大區分에서 生女眞은 森林地帶에서 수렵생활을 하던 미개한 여진을 가리키는 말이며, 熟女眞은 수렵생활에서 벗어나 농경생활을 지향하던 여진을 가리키는 말이라 생각된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金九鎭 注.

 

37. 손필본에서는 '不如∼必擇'의 14자가 '背山'과 '臨流' 사이로 옮겨져 있다.

 

38. 국내 사서에 보이는 삼랑성과 참성단에 관한 기록.

* 幸穴口摩尼山, 築壇祭天.…使三子築城, 於穴口傳燈山, 名曰三郞城(혈구[강화도] 마니산에 행차하여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 세 아들에게 혈구[강화도]의 전등산에 성을 쌓게 하고는 삼랑성이라 이름하였다). ..《동사년표》[檀紀 60年 丁卯(B.C.2274) ∼ 62年 己巳(B.C.2272) 條]

* 丙寅五十九年, 帝南巡至阿斯達, 封禪祭天. 至江華, 命三子築城於甲比古次[今江華傳燈山], 名三郞城, 又設祭天壇, 名塹星臺.(병인 59년 단제께서 남쪽으로 순행하며 아사달에 이르러 봉선의 의식을 행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강화에 이르러 세 아들에게 명하여 갑비고차[지금의 강화도 전등산]에 성을 쌓게 하여 삼랑성이라 이름하였으며, 또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설치하게 하고는 참성대라 이름하였다). ..《동사년표》

* 祭天壇, 在江華摩尼山. 檀君, 於穴口之海.摩尼之邱, 塹城爲壇, 名曰祭天壇. 壇, 十七尺而石累之, 方上圓下, 四方各六尺六寸, 下各十五尺而圍之. 或云: 「摩尼, 江海之외. 地, 孤絶潔淨而정深, 神明之宅. 故立치祭上帝.」 又曰: 「天好陰而地貴陽, 故爲壇必于水中之山, 方上下圓, 地天之義, 立焉.」(제천단은 강화의 마니산에 있다. 단군께서 혈구의 바다이며 마니의 언덕에 성을 파고 단을 쌓아 제천단이라 이름하였다. 제단은 17척으로 돌을 쌓아 이루었는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며 사방이 각 6척 6촌이고 아래는 각 15척으로 둘려져 있다. 혹은 이르기를 「마니는 강화의 모퉁이이다. 그 땅은 한적하고 깨끗하며 조용하고 깊어 신명이 자리하는 곳이다. 그 까닭에 제사를 지내는 터를 세워 상제께 제를 올리는 것이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하늘은 음을 좋아하고 땅은 양을 귀히 여기는 까닭에 제단을 이룰 때는 반드시 물 가운데 있는 산에 위치하게 하는 것이며, 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글게 하는 것은 땅과 하늘의 뜻을 담아 세우는 것이다」 하였다.) ..《신단실기》에 인용된《동사(東史)와《수산집(修山集)》

* 朝鮮仁祖十七年, 改修築.(조선 인조 17년에 개축하였다.) ..《신단실기》에 인용된《문헌비고(文獻備考)》

* 朝鮮肅宗二十六年五月, 改修築, 立碑爲記曰: 「環東土數千里, 江都爲保障之重地, 環江都數百里, 摩尼爲望秩之名山. 山之西, 最高處, 累石爲臺, 卽所謂塹城壇也. 世傳, 檀君築而壇之, 爲祭天之所云. 顧, 年代형邈, 風磨雨교, 西北兩面, 太半頹비, 東偏계級, 亦多傾仄. 州之父老, 相與咨嗟歎돌者久之. 不녕, 첨도居留, 來守是邦. 是年春, 因巡審之役, 試一登覽, 慨然有重修之意. 船頭浦別將金德夏, 傳燈寺摠攝僧愼默, 主其事, 改築之, 二旬而訖工. 噫! 興壞補缺, 不廢舊觀, 有官守者之所宜勉. 황檀君生병唐堯之世, 實爲我東生民之祖, 壇之設, 又其환丘인祀之地, 而歷數千年, 흘爲遺民之所瞻敬, 則修完之擧, 烏可已乎! 愼默請記始末, 以目示後人, 書此以識之. [留守崔錫恒撰](조선 숙종 26년 5월에 고쳐 쌓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여 이르기를 「동녘 땅 수천 리를 둘러보면 강도가 바로 이 땅을 보호하여 위해가 없도록 해야 하는 중요한 땅이며, 강도 수백 리를 둘러보면 마니가 바로 섶을 태우며 멀리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명산이다. 산의 서쪽 가장 높은 곳에 돌을 쌓아 단을 이루니 곧 참성단이라 일컫는 것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께서 그것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 한다. 되돌아보건대, 연대는 아득하여 바람에 닳고 비에 씻겨 서쪽과 북쪽의 두 면은 태반이 헐어 무너지고 동쪽 가 편의 뜰 층계도 또한 많이 기울어졌다. 고을의 어른들이 서로 슬퍼하고 탄식한지 오래였다. 재주도 없는 내가 외람되게 이 지방의 유수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해 봄에 순찰하며 살피던 중 한 번 올라가 보고는 개연히 거듭 수리할 뜻을 가지게 되었다. 선두포별장 김덕하와 전등사총섭승 신묵이 그 일을 주관하여 개축하니 20일만에 공사를 마쳤다. 오호라! 무너진 것을 일으키고 결손된 것을 보충하여 옛 모습이 폐기되지 않게 함은 관리되는 자로서 마땅히 힘써야 할 바이다. 하물며 단군께서는 요임금과 같은 세대에 나셨으니 진실로 우리 동방 민족의 조상이며, 제단이 설치된 곳 또한 둥글게 에워 쌓인 언덕의 정결히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수천 년을 지내 오며 지금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우러러 공경을 받아 오는 곳이니 수리하여 보완하는 일을 어찌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일의 시말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자고 신묵이 요청하니 이렇게 글을 써서 알리노라. [유수 최석항 지음]) ..《신단실기》

 

39.《산해경은 작성연대 미상[빠르게는 B.C.12세기인 西周에서 늦게는 A.D.3∼4세기인 魏晉시대로 추정하지만 楚 나라 때 작성되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작자 미상[燕의 鄒衍이라고도 하지만 楚 나라의 실명씨일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의 신화서(神話書)적인 성격을 지닌 지리서(地理書)이다. 모두 18권. 크게는《산경(山經)과《해경(海經)으로 나뉘는데,《산경은 중국 및 그 주변을 다섯 방향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447곳의 산에 대해 형세, 산물, 동물, 신령 등을 기록한 비교적 지리서 성격이 강한 내용들이며,《해경은 해내(海內, 즉 중국)와 해외·대황(海外·大荒, 즉 중국의 주변)으로 나누어 풍속과 사물, 영웅의 행적, 신들의 계보, 괴물에 대한 묘사 등을 기록한 비교적 신화서 성격이 강한 내용들이다.《산해경에는 조선(朝鮮), 숙신국(肅愼國), 맥국(貊國), 개국(蓋國) 등 동이계 문화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심지어《산해경》자체를 동이계의 고서로 보고 있을 정도[← 중국, 孫作雲]로 동이계 상고문화에 대한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다.

 

40.《노자에서 「亭之毒之(양육하고 기른다)」라 하여 毒이 '자라다' 혹은 '기르다'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亭毒'은 '亭育(양육하다)'과 통용되어 쓰인다.

 

41.《산해경》권18 海內經 '東海之內' 條: 본 내용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규원사화의 그것과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 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一].天毒, 其人水居,[二] 외人愛之.[三](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조선'과 '천독'이라는 나라가 있으니 그 사람들은 물가에 기거하며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

   [一] 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珂案: 朝鮮已見海內北經(곽박이 이르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라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조선은 이미 <해내북경>에 보인다).

   [二] 郭璞云: 「天毒卽天竺國, 貴道德, 有文書.金銀.錢貨, 浮屠出此國中也. 晉大興四年, 天竺胡王獻珍寶.」 王崇慶云: 「天毒疑別有意義, 郭以爲天竺國, 天竺在西域, 漢明帝遣使迎佛骨之地, 此未知是非也.」 珂案: 天竺卽今印度, 在我國西南, 此天毒則在東北, 方位逈異, 故王氏乃有此疑. 或者中有脫文와字, 未可知也(곽박이 이르기를 「천독은 곧 천축국이니 도덕을 귀하게 여기고 문서와 금은 돈과 재물 등이 있고 불타가 그 나라에서 나왔다. 진 대흥 4년에 천축의 오랑캐 왕이 진귀한 보물을 헌납하였다」라고 하였다. 왕숭경이 이르기를 「'천독'은 아마도 별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곽박은 '천축국'이라 여겼으나, 천축은 서역에 있으면서 한 명제 때 사신을 보내 부처의 뼈를 맞아들여 온 곳인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천축은 곧 지금의 인도로서 우리 나라의 서남쪽에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천독은 곧 동북쪽에 있으니 방위가 사뭇 다르기에 왕숭경이 그러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혹은 그 문귀 가운데 탈락된 문장이 있거나 잘못 전해진 글자가 있다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三] 郭璞云: 「외亦愛也, 音隱외反.」 王念孫云: 「宗炳明佛論<弘明集卷二―珂>引作『외人而愛人』, 又引注文: 『古謂天毒卽天竺, 浮屠所興.』」 학懿行云: 「愛之, 藏經本作愛人, 是也.《列子》<黃帝篇>云: 『列姑射山, 有神人, 不외不愛, 仙聖爲之臣.』 義正與此合. 袁宏漢紀云: 『浮屠, 佛也; 天竺國有佛道, 其敎以修善慈心爲主, 不殺生.』 亦此義也, 玉篇云: 『외, 愛也.』 本此. 又云: 『北海之외, 有國曰외人.』 以『외人』爲國名, 義與此異.」 珂案: 宋本·吳寬抄本正作외人愛人(곽박이 이르기를 「'외' 역시 '愛'의 의미이다. 음은 隱외反이다」라고 하였다. 왕념손이 이르기를 「종병의 명불론(홍명집 권2 ― 원가 주석)에 『외人而愛人』으로 인용되어 있으며, 또 주석의 문장을 인용하여 『예전에 말하던 천독은 곧 천축으로 불타가 일어난 곳이다』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학의행이 이르기를 「'愛之'는《장경》에 본디 '愛人(남을 사랑한다)'으로 되어 있으니 그것이 옳다.《열자·황제편에 이르기를 『열고사산에 신인이 있어 가까이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며, 선인과 성인들이 그에게 신하 노릇을 한다』 하였는데 그 의미가 바로 여기와 부합한다. 원굉의《한기에 이르기를 『부도는 부처이다. 천축국에 불도가 있으니 그 가르침은 착하고 자비심 있는 마음을 닦는 것을 위주로 하며 살생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역시 여기서의 뜻과 같다.《옥편에 『외는 愛를 말한다』고 한 것은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북해의 모퉁이에 외인(외人)이라는 나라가 있다』라 하여 『외인』을 나라의 이름으로 여겼으니 그 의미가 여기와 다르다」라고 하였다. 원가가 생각건대 송본과 오관의 필사본에는 '외人愛人'으로 바로 되어 있다).

  .. '毒'은 본디 '기르다(育)'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상기 주석의 왕숭경도 의심하였듯이 '천독'을 '천축'으로 간주하는 것은《산해경이 일정한 방위별로 나누어 서술한 지리서임을 감안할 때 문제성을 지닌 해석이다. 그에 비해《규원사화는 '毒'의 본 뜻에 의거하여 해석하였으니 바른 것임을 알 수 있다.

 

42. 지금의 몽골에는 우리의 석성황과 비슷한 형태로서 '오보'가 있으며, 그와 관련된 축제로서 '오보제(祭)'가 있다. 현재 몽골 안에 이름난 오보만도 4천여 개가 있으며, 250만 분의 1 지도에는 이름있는 오보가 표시되어 있다.

* 사람들은 살기 위해 고비사막을 횡단해야 했으니, 광막한 곳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 언덕 위에 돌을 쌓아 「표시물」로 삼았고, 그래도 모자라 기(旗)를 세우고 더 잘 식별되게 하기 위해 기폭으로 헝겊을 매달아 바람에 펄럭이게 한 것이 오보의 시원이다. 초기의 오보의 도로표지의 기능을 지니고 있어 큰 길목, 즉 대상(隊商)과 여행자·유목민들이 이동하는 길목에는 이름난 오보가 있게 되고 지도상에 표시된 것으로 해석된다. … 오보가 우리 서낭당과 유사한 점으로는 언덕 위와 산 위 및 고갯길 또는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고, 돌을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누석단(累石壇) 또는 정성껏 쌓은 적석단(積石壇)으로 되어 있으며, 경계표·도로 표지도 되거니와 수호신으로 사람과 가축을 지키고 행인의 안전도 보호하는 복합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 밖에도 오보에는 제물을 차리고 기를 세우고 오색포를 걸고 소원을 빌며 제사 지낸 다음 오신(娛神)으로 노래와 춤과 경기로 놀이문화를 전개하고 축제를 벌이는 점 등도 우리와 같다. ..《몽골민속》

 

43.【島夷】: 일정한 지역을 차지하였던 회이(淮夷) 또는 래이(萊夷)와는 달리 도이(島夷)는 단지 '뭇 도서(島嶼)에 흩어져 살아가는, 또는 일부 해안지역으로 올라와 정착한 이족(夷族)'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이 당시만 해도 회이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의 남쪽인 장강의 하류 남부지역의 이족들을 '도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하면, 아울러 발해 연안의 뭇 섬들에 살다가 황하의 하류 북부지역에 정착한 이족 또한 '도이'라 하였다. 그리고 심지어《명사(明史)·일본전(日本傳)에서는 일본을 '도이'라고 지칭하고 있기까지 하다.

 

44. 설유의 침범과 부여가 이들을 토벌한 연대를《대동사강(大東史綱)과《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에서는 단기 59년 병인년(B.C.2275)이라 하였다. 그러나《대동사강에 의하면 단기 59년은 부여가 부소 및 부우 등과 함께 '삼랑성'을 축조하던 해로 되어 있으므로 맞지 않다. 윗글에서 단기 37년에 큰 홍수를 만나 평양이 침몰되었으며, 그 뒤 부루가 물과 흙을 정리함에 주리(州里)가 쓸쓸해진 틈을 타고 설유가 침입하였다고 하였으니, 큰 홍수로부터 22년이 지난 59년의 일로는 볼 수가 없고, 단지 몇 년이 지난 40여 년으로 기록한《규원사화의 연대가 합리적이다.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45. 손필본에 '農桑∼天下'의 18자가 빠져 있다.

 

46. 동방에서 일어난 왕조들은 산천을 책봉하여 작위를 주거나 심지어 제위(帝位)를 추존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금 왕조만 하더라도 명창 4년 10월에 장백산을 책봉하여 '개천홍성제'로 삼는 등 많은 산천의 책봉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그러한 내용이《금사의 <지(志)>에 보인다.

 

47.《삼국사기·신라본기》제4 진흥왕 37년 條에 기록된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

* 崔致遠.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曰風流. 設敎之源, 備詳仙史, 實乃包含三敎, 接化군生. 且如入則孝於家, 出則忠於國, .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風流)라고 한다. 이 교를 창설한 내력은 선교(仙敎)의 사적에 자세히 밝혀져 있으니, 실상인 즉 세 가지의 교(儒·佛·仙)를 포함하여 인간을 교화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집에 들면 부모에게 효도하고 집을 나서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이요, 아무 것도 하는 일이 없는 듯이 말없는 교훈을 실천하는 것은 노자의 종지이며, 모든 악행을 하지않고 모든 선행을 실천하는 것은 석가의 교화이니, 바로 이와 같은 것들이다」 하였다.)

 

48.《사기》권 117, 열전 <사마상여>의 관련 본문은 아래와 같으며,《규원사화에서 밝힌 내용과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 意者泰山·梁父設壇場望幸, 蓋號以況榮, 上帝垂恩儲祉, 將以薦成, 陛下謙讓而弗發也. 설三神之驩,[一] 缺王道之儀, 군臣뉵焉(생각건대 태산과 양보산에 제단의 장소를 설치하고 행차하시기를 바라는 것은 이름을 세워 드러냄으로서 선대의 영광과 부합시키고자 함으로서, 상제께서 드리우신 은혜와 쌓으신 복지의 그 공로가 곧 이루어졌음을 올려 고하는 것이니, 폐하께서 겸양하시어 드러내지 않으심은 삼신의 기쁜 마음을 끊는 것이요 왕도의 예의를 결하는 것이며 뭇 신하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一] 集解 徐廣曰: 「설猶言垂也.」 인案: 韋昭曰「설, 缺也. 三神, 上帝·泰山·梁父也.」  索隱 案: 徐氏云「설猶垂」, 非也. 應소作「絶」, 李奇.韋昭作「闕」, 意亦不遠. 三神, 韋昭以爲上帝·太山·梁父, 如淳謂地祇·天神·山岳也(집해: 서광이 이르기를 「설는 '드리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였다. 인이 생각건대, 위소가 「설는 '결손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며, 삼신은 상제와 태산 그리고 양보를 말하는 것이다」라 하였다. 색은이 생각건대, 서씨가 「설는 '드리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라 말한 것은 틀린 것이다. 응소는 「끊어지다」로, 그리고 이기와 위소는 「빠져 있다」로 하였는데, 의미가 서로간에 그리 먼 것은 아니다. 삼신은 위소가 상제와 태산 그리고 양보라 여겼으며, 여순은 지기와 천신 및 산악이라고 말하였다).

☞ "옛날 사마상여가 한 나라 무제에게 아뢰어":《사기》의 사마상여 열전에 따르면, 상기 문장은 상여가 죽으면서 천자에게 남긴 서찰에서 봉선의 의식을 행할 것을 주청하였더니, 대사마(大司馬)가 상여의 서찰 내용에 동조하며 천자에게 아뢴 말의 일부분이다. 즉 상여가 천자에게 아뢴 말이 아닌, 대사마가 천자에게 아뢴 말이다.

☞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였으니": 해당 주석에서 '삼신'을 풀이하여 상제·태산·양보 또는 지기·천신·산악이라 하였으니 '삼신'을 바로 '상제'로만 풀이하지는 않았다. 이는 본문에서도 '태산과 양보산에 제단의 장소…'라 밝혀 놓았으니 주석자의 의견인 것 만은 아니다. 따라서 북애가 말하는 단순한 상제(上帝)로서의 의미인 삼신이 아닌 '세 곳의 신'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외형적으로 '삼신'이라는 단어가 통용되었음은 사실이다.

 

49. '압록'은 중국의 역사서에 지명과 강 이름에서 모두 '鴨록'으로 기록된 것이 많다. '압록'이라는 이름은 압록강의 물이 오리(鴨) 머리처럼 푸르다(綠)는 의미에서 온 이름이기에 '鴨綠'이 맞을 것이지만, 중국의 사서에서는 '맑은 물줄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綠'과 글자 형태가 비슷한 '록'으로 대체하여 쓰기도 하였다. 본 교정에서는 출전이 있는 문장은 그 원서의 글자를 따르고(상기《신당서·발해전의 경우), 일반적인 경우는 '鴨綠'을 채택하였다.

 

50.《후한서·동옥저전에는 '太山'이 '大山'으로 되어 있는데, 단지 참고한 판본의 차이인지 아니면 잘못 옮겨 적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여기에서 '大山'으로 고쳐놓으면 그 뜻 풀이가 앞뒤 문장의 흐름에 있어서 저자의 논지와 반(反)하는 내용으로 오인될 수도 있기에 그러한 내용만을 밝히고 고치지 않는다.

 

51.《산해경》제 17, 대황북경(大荒北經).

 

52. '○○대산(大山)'이라 함은 곧 '○○산맥(山脈)'을 가리키는 말이다.《후한서에서 말하는 '개마대산'은 지금의 낭림산맥을 가리키는 것이지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북애노인은 후한서의 '개마대산'을 '개마태산(蓋馬太山)'으로 잘못 옮겨 기록하고 '백두산'으로 비정하였으나 사실과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고려사·열전에서 밝힌 것 처럼, '개마대산'이 아닌 단지 '개마산'이 백두산으로 비정되는 것은 타당성이 있다. 또한《후한서의 주석에서 밝힌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는 내용을 논박한 것은 이와는 별개의 바른 지적으로 볼 수 있다.

 

53. 國南有徒太山, 言「太白」, 有虎豹비狼害人, 人不得山上수오, 行逕山者, 皆以物盛(나라의 남쪽에 도태산이 있는데 나라 말로 「태백」이라 하며, 호랑이와 표범 및 곰과 이리 등이 있어 사람을 해치기에 사람들이 산 위에서 오줌을 누어 더럽히지 못하며 산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물건에다 (자신의 분비물을) 담아가지고 간다). ..《위서·물길전》:《위서의 본 내용은《북사의 내용과 비교하여 '不' 한 글자의 유무 차이로 전체적인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깊은 산에 맹수가 많아 사람을 해치며 사람들이 그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흔적(방뇨)을 남기지 않았다는, 당시로서는 평범한 사실만을 말하고자 하였다면 굳이 사서에 기록까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뒷 문장에서 '자신의 분비물을 담아가지고 간다'라고 하였으니, 만약 사람을 해치는 맹수에게 피해를 줄이기 위한 행위라면 오히려 그러한 행위 자체가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기에 앞뒤가 맞지 않으므로 그 외의 의미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위서에서는 태백산의 민간신앙적인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 자가 '맹수는 사람을 해친다'는 생각 아래 원래의 문장에서 '不'자를 빼 버리고 앞뒤 문장을 정리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한 본《위서를 비롯한 양(梁)·주(周)·수(隋) 등 여덟 나라의 기존 사서를 참고하여 엮은《북사(北史)에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라 하였으니,《위서에도 본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로 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54. 國南有從太山者, 華言太皇, 俗甚敬畏之, 人不得山上수오, 行經山者, 以物盛去. 上有熊비豹狼, 皆不害人, 人亦不敢殺(그 나라의 남쪽에 종태산이란 것이 있는데 중국어로 태황을 말하며 풍속에 그 산을 매우 경외시하였으니, 사람들은 산 위에서 오줌을 누어 더럽히지 않았으며, 산을 지나다니는 자들은 물건에 (자신의 분비물 등을) 담아가지고 간다. 그 산위에는 곰과 말곰 또는 표범이나 이리 등이 있으나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 역시 감히 짐승들을 죽이지 않는다). ..《북사·물길전》

 

55.《고려사에서 인용된 구절은 光宗 10년조가 아닌 成宗 10년 10월조의 기사이다.

 

56.【效嚬】:《장자·천운편(天運篇)》무턱대고 남의 것을 어눌하게 흉내냄 .. 東施效빈: 중국 월(越)나라에 서시(西施)라는 미인이 병색이 깊어서 그 마을 사람들 앞에서도 항시 얼굴을 찡그리곤 하였다. 그 마을에 사는 얼굴이 박색인 동시(東施)라는 여인이 이를 보고 아름답다고 여기고는 돌아가서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마을 사람들 앞에서 똑같이 찡그리곤 하였다. 그러자 그 마을의 부자가 그 모습을 보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으며, 가난한 이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처자를 거느리고 마을을 도망치듯 떠나 버렸다고 한다.

 

57.《사기》권 28, <봉선서> 제6.

* 此三神山者, 其傅在渤海中, 去人不遠; 患且至, 則船風引而去. 蓋嘗有至者, 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 其物禽獸盡白, 而黃金銀爲宮闕. 未至, 望之如雲; 及到, 三神山反居水下. 臨之, 風輒引去, 終莫能至云(이 삼신산이란 것은 대대로 전하기를 발해의 가운데에 있다고 하며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곳에 닿을까 두려워하여 마치 배처럼 바람결에 이끌려 떠나간다고 한다. 무릇 가본 적이 있는 사람에 의하면, 뭇 신선들과 불사의 영약이 모두 있으며 그곳의 사물과 짐승들은 모두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아직 닿지 않은 위치에서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도 같은데, 도달하면 삼신산은 도리어 물 속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 곳에 닿으려고 하면 바람이 번번이 이끌어 가 버리니 결국에는 닿을 수가 없다).

 

58.《맹자》권 8, 이루장구(離婁章句) 하(下)

* 孟子曰: 舜生於諸馮, 遷於負夏, 卒於鳴條, 東夷之人也. 文王生於岐周, 卒於畢영, 西夷之人也. 地之相去也, 千有餘里. 世之相後也, 千有餘歲. 得志行乎中國, 若合符節, 先聖後聖, 其揆一也(맹자가 이르기를, 순은 제풍에서 태어나고 부하로 옮겨 거처하였으며 명조에서 죽었는데 동이의 사람이다. 문왕은 기주에서 태어나고 필영에서 죽었는데 서이의 사람이다. 지역이 서로 떨어져 있음은 천여 리나 되며 세대가서로 차이남은 천여 년이 되지만 뜻을 얻어 중국에서 행한 것은 마치 부절을 맞춘 것과 같이 똑같으니, 앞선 성인과 뒤이은 성인으로서 그 뜻은 하나같이 똑같다).

 

59.《한서》권 25 상(上), 교사지(郊祀志) 제5 상(上)

* 及高祖풍분楡社, 순, 爲沛公, 則祀蚩尤, 흔鼓旗. 遂以十月至覇上, 立爲漢王. 因以十月爲年首, 色上赤(고조가 풍 땅의 분유사에서 기도를 올리고, 패 땅을 순행하여 패공이 되어서는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며 북과 깃발에 희생의 피를 발랐다. 마침내 10월에 패상에 이르러 왕위에 올라 한왕이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10월을 한 해의 머릿달로 삼았으며 색은 붉은 것을 숭상하였다).

* 後四歲, 天下已定, 詔御史令분楡社, 常以時, 春以羊체祠之. 令祝立蚩尤之祠於長安(그 후 4년 뒤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어사에게 조서를 내려 풍 땅의 관리에게 분유사를 수리하여 꾸미게 하고는, 항상 때에 맞추어 봄이면 양과 돼지로 제사지내게 하였다. 축관에게 영을 내려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도록 하였다).

 

60.《진서》제 12, 지(志) 제 2, 천문(天文) 중(中), 서성(瑞星) 條

* 六曰蚩尤旗, 類彗而後曲, 象旗. 或曰, 赤雲獨見. 或曰, 其色黃上白下. 或曰, 若植관而長, 名曰蚩尤之旗. 或曰, 如箕, 可長二丈, 末有星. 主伐枉逆, 主惑亂, 所見之方下有兵, 兵大起; 不然, 有喪(여섯번 째는 '치우기'라고 하는데, 혜성과 비슷하며 뒷부분이 굽어져 있어 깃발 모습을 하고 있다. 혹은 붉은 구름만이 홀로 보인다고 한다. 혹은 그 색이 위는 누렇고 아래는 희다고 한다. 혹은 마치 풀을 세운 것과도 같이 그 기운이 무럭무럭 일어난다고 하는데, 이름하여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다. 혹은 마치 삼태기와 같으며 길이가 거의 2장으로 그 끝에 별이 있다고 한다. 올바르지 못한 반역의 정벌을 주관하고 미혹한 변란을 다스리는데, 그 별이 보이는 곳의 아래에는 군사가 있으니 군사가 크게 일어나게 되며, 그런 것이 아니면 죽음의 변고가 있게 된다).

 

61. 부루 때의 '신지'는 태시기의 '신지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벼슬 이름으로 정착한 '신지'를 말한다.

 

62.【方瞳】: 눈동자가 네모남. 고대 성군인 순(舜)임금의 눈동자가 네모졌다고 한다. 곧 어질고도 도를 통한 사람의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63.《후한서·동이열전》: 夏后氏.太康失德, 人始畔.[太康, 之子也. 槃于游田, 十旬不反, 不恤人事, 爲所逐也.]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자 이인(夷人)들이 처음으로 배반하였다.[태강은 계(啓)의 아들이다. 사냥터에 머무르면 백일이 지나도록 돌아가지 않았으며 백성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 예(예)에 의해 쫓겨났다.]) .. 태강은 하(夏) 제3세 임금이다. 예에 의해 쫓겨난 그 19년은 B.C.2170년이며, 곧 가륵 37년으로 단기 164년에 해당한다.

 

64.《후한서에 주석으로 인용된 관련 내용과《죽서기년의 원문 및 서명해제.

*《竹書紀年》曰: 「后泄二十一年, 命견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后相卽位二年, 征黃夷. 七年, 于夷來賓, 後少康卽位, 方夷來賓」也(《죽서기년》에 이르기를 「후설(后泄) 21년에 견이·백이·적이·현이·풍이·양이 등에게 명을 내렸다. 후상(后相) 즉위 2년에 황이(黃夷)를 정벌하였다. 7년에 우이(于夷)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하였으며, 뒤에 소강(少康)이 즉위하자 방이(方夷)가 와서 복종하여 조공하였다.」) .. 후상은 하(夏) 제5세 임금으로, 그 2년은 B.C.2145 그리고 7년은 B.C.2140년이며, 각각 오사 11년 즉 단기 189년 그리고 오사 16년 즉 단기 194년에 해당한다.

*《죽서기년》의 원문: 帝相元年 … 征淮夷, 二年征風夷及黃夷, 七年于夷來賓, ….

*《죽서기년》:《진서(晉書)·속석전(束晳傳)》에 「初, 太康二年, 汲郡人不準盜發魏襄王墓, 或言安釐王총, 得竹書數十車. 其紀年十三篇, 記夏以來至周幽王爲犬戎所滅, 以事接之, 三家分, 仍述魏事至安釐王之二十年. 蓋魏國之史書, 大略與《春秋》皆多相應(처음, 진 태강 2년[서기 281년]에 급군 사람 불준이 위 양왕의 무덤[혹은 안리왕의 무덤이라고도 한다]을 도굴하여 죽서 수십 수레 분량을 얻었다. 그 가운데의 기년 13편에는 하나라 이래 주 유왕이 견융에게 멸망하기까지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기록이 춘추시대의 진이 세 집안[魏, 韓, 趙]으로 나누어진 때의 일로 연결되면서 위나라 안리왕 20년까지의 일을 수록하고 있다. 아마도 위나라의 역사서일 것이며, 그 내용이 대략《춘추》와 상응한다)」고 하였다. 지금 전하는 것은 모두 2권으로 심약(沈約)이 주석을 달았으며,《수서·경적지에도 실려 있으나, 송나라 이후 사람이 옛 내용에 의거하여 지은 위서(僞書)라고 한다.

 

65.《죽서기년》: 帝少康 … 二年方夷來賓(제 소강 … 2년에 방이가 들어와 복종하며 조공하였다). .. 소강은 하(夏) 제6세 임금이다. 그 2년은 B.C.2117년이며, 곧 구을 28년으로 단기 255년에 해당한다.

*自少康已後, 世服王化, 遂賓於王門, 獻其樂舞(소강 이후로부터 대대로 왕의 교화를 입더니 마침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며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쳤다). ..《후한서·동이열전》

 

66.《죽서기년》: 帝芬 … 三年九夷來御(제 분 … 3년에 구이가 들어와 왕의 교화를 쫓았다). .. 분은 하(夏) 제 8대 임금이다. 그 3년은 B.C.2038년이며, 곧 한율 2년으로 단기 296년에 해당한다.

 

67.《죽서기년》: 帝發元年乙酉帝卽位, 諸夷賓于王門, 再保墉會于上池, 諸夷入舞(제 발 원년 을유에 즉위하니 뭇 이(夷)들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였으며, 다시 거느리던 자들을 상지에 모이게 하니, 뭇 이(夷)들이 들어와 춤을 바쳤다). .. 발은 하(夏) 제 16대 임금이다. 그 원년은 B.C.1837년이며, 곧 흘달 7년으로 단기 497년에 해당한다.

* 自少康已後, 世服王化, 遂賓於王門, 獻其樂舞(소강 이후로부터 대대로 왕의 교화를 입더니 마침내 왕실에 복종하여 조공하며 그들의 음악과 춤을 바쳤다). ..《후한서·동이열전》

 

68.《죽서기년》: 帝癸[一名桀] … 三年築傾宮.毁容臺, 견夷入于岐以叛, 六年岐踵戎來賓(제 계[일명 걸이라고 한다] … 3년에 경궁을 쌓고 용대를 허물어 버리니 견이가 기 지방으로 들어와 반란하였으며, 6년에 기에서 융에 뒤이어 들어와 복종하고 조공하였다). .. 계는 하(夏) 제 17대 임금이다. 그 3년은 B.C.1816년이고, 그 6년은 B.C.1813년이며, 각각 흘달 28년 즉 단기518년 및 흘달 31년 즉 단기 521년에 해당한다.

 

69.【亭】: 기르다, 化育하다. 「亭之毒之」《老子》.

70.《설원》권 13 권모(權謀)편

* 湯欲伐傑. 伊尹曰: 「請阻乏貢職, 以觀其動.」 桀怒, 起九夷之師以伐之. 伊尹曰: 「未可! 彼尙猶能起九夷之師, 是罪在我也.」 湯乃謝罪請服, 復入貢職. 明年, 又不供貢職. 桀怒, 起九夷之師, 九夷之師不起. 伊尹曰: 「可矣!」 湯乃興師伐而殘之, 遷桀南巢氏焉(탕이 걸을 정벌하고자 하였다. 이윤이 가로되 「조공의 직분을 중단하여 그로서 움직임을 보십시오」 하였다. 걸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그를 쳤다. 이윤이 가로되 「안되겠습니다! 저들은 아직까지 구이의 군사를 일으킬 수 있으니 그것은 죄과가 우리에게 있음입니다」 하였다. 탕이 이에 사죄하고 청하여 복종하며 다시 들어가 조공의 직분을 닦았다. 다음 해 또 조공을 보내지 않았다. 걸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는데 구이의 군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윤이 가로되 「되었습니다!」 하니, 탕이 이에 군사를 일으켜 그를 정벌하여 멸망시키고 걸을 남소의 땅으로 옮겼다). .. 걸은 하(夏) 제 17대 임금으로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탕을 친 것을 그 52년으로 보고 있으니, 이는 B.C.1767년이므로 벌음 5년 즉 단기 567년에 해당한다.

 

71.《죽서기년》: 仲丁 … 六年征藍夷(중정 … 6년에 남이를 정벌하였다). .. 중정은 은(殷) 제 8대 임금이다. 그 6년은 B.C.1557년이며, 곧 색불루 12년으로 단기 777년에 해당한다.

 

72.《죽서기년》: 河亶甲 … 四年征藍夷(하단갑 … 4년에 남이를 정벌하였다). .. 하단갑은 은(殷) 제 10대 임금이다. 그 4년은 B.C.1531년이며, 곧 연나 2년으로 단기 803년에 해당한다.

 

73.【恒山】: 중국 산서성 동쪽에 위치한 항산산맥의 주봉(主峰).

 

74. 이창환(李昌煥) 著《朝鮮歷史의 고조선 관련 기사 부분에는 '薄姑'가 '蒲姑'로 되어 있으며, 중국지도출판사編《中國古代史地圖冊》중의 '서주형세도(西周形勢圖)'에도 주공(周公)의 동정(東征) 때 패퇴당한 해대(海岱) 지역의 부락 가운데 하나로서 '蒲姑'라고 기록하고 있다.

 

75. 武乙衰폐, 東夷침盛, 遂分遷., 漸居中土(무을 때에 쇠퇴하고 피폐해지고 동이는 점차 번성하여지더니 마침내 회(淮)와 대(岱)의 지방으로 나누어 옮겨와 점차 중국의 영토를 점거하게 되었다). ..《후한서·동이열전》

 

76.【靑州】: 중국의 산동성 일대.

 

77.【徐州】: 중국 동해안의 강소성과 산동반도의 남쪽 바닷가 일부가 포함된 지역.

 

78.【畿內】: 서울을 중심으로 사방 5백 리 이내의 땅으로서 천자가 직접 관할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79. 고열가 임금의 역년이 30년이면 47대의 총 역년이 1,205년이 된다. 이상시는《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에서 고열가 임금의 역년을 '20년'으로 고쳐 놓았으며, 다른 곳에는 더러 역년을 1,205년으로 고쳐 놓기도 하였는데, 한 임금의 역년을 잘못 셈하기보다는 합친 역년을 잘못 셈하기가 쉬울 것이다. 여기서는 숫치가 틀린 사실만 밝히고 원래의 기록대로 놓아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