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4)숙신,훈,돌궐

훈족이야기 9. 유럽을 굴복시킨 훈족 신무기

자연정화 2013. 8. 18. 13:01

 

출처 : 조선일보 [JR의 유목민 이야기] 한수선

 

유럽을 굴복시킨 훈족 신무기


훈족의 한반도 기원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말의 안장이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말의 안장이 훈족이 사용한 말의 안장과 형체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나무로 만든 말의 안장은 가죽으로 만든 현대의 말안장 보다 말을 탄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고 피로를 덜 느끼게 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황남대총과 천마총을 축조한 선조들은 말의 안장을 천마총과 황남대총 상층부에 매장했다. 그 이유는 죽은 왕이 말을 타고 저세상으로 갈 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증거로, 천마총에서 출토된 하늘을 날으는 천마도를 들 수 있다. 사후에 하늘을 날으는 천마를 타기 위해서 말의 안장을 고분의 정상부분에 묻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천마도

              

무술에서 말과 활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달리는 말위에서 활을 사격할 때, 이를 삼합(三合) 이라고 한다. 훈족이 말과 활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달리는 말에서 자유자재로 활을 쏘며 배사(달리는 말에서 뒤를 돌아보며 활을 쏘는 형태)를 하는 훈족의 궁기병들은 4세기에 미국이 개발한 M1A1 Abrams 탱크가 달리면서 포를 쏠 수 있는 최초의 전차와 같은 위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훈족이 유럽에서 제종족과 로마군을 제압할 수 있었다. 유럽을 침공한 훈족은 말과 활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로마군을 공격하는 삼합의 신병기였다.

훈족이 삼합의 신병기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신라고분에서 출토한 기마인물상에 보이는 등자와 고구려의 맥궁과 로마군의 어떤 갑옷도 관통할 수 있는 화살이 있었기 때문이다.

 

 



훈족의 배사장면 - 유럽인의 의상을 한 훈족의 배사 장면은 훈족이 활동할 당시가 아닌 후대에 그려진 그림으로 추측할 수 있다.

 

로마경외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야만족으로 무시한 로마인들이 훈족에 대해 남긴 기록에 따르면, 훈족은 말위에서 활동이 많아 땅위에서는 비틀거리며 잘 걷지 못한다. 훈족의 사내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사를 만들기 위해 코를 납작하게 눌러 투구를 쓸 때 코가 장애가 되지 않게 기른다. 훈족의 남자 아이는 다섯 살이 되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다.

로마의 수의사가 남긴 훈족의 말에 관한 기록을 보면 훈족은 피가 뚝뚝 흐르는 고기를 잘라 말안장 밑에 넣고 다니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칼로 잘라 생고기를 먹는다. 또한 훈족의 말은 몸체에 비해서 머리가 커 괴물과 같다는 기록을 남겼다. 로마인의 눈에 비친 훈족은 쭉 찢어진 눈에 납작한 코, 편두를 한 사람들이 생고기를 뜯어 먹는 모습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악귀로 보였고, 작달막한 체구에 머리가 큰 말도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훈족의 말은 유럽의 말에 비해 크기가 작았다. 그러나 훈족의 말은 온순해서 사람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르고, 무거운 짐을 싣거나 사람이 타고 하루에 100km를 달릴 수 있는 지구력을 가진 강인한 말로 추위에도 강했다. 쇠로 된 말발굽을 박아줄 필요도 없었고, 먹이를 사람이 따로 준비하는 노력도 필요치 않았다. 훈족의 말들은 겨울에도 앞발을 이용해 눈을 헤치고 먹이를 찾아 먹어 로마의 말들과는 달리 관리가 따로 필요 없는 말이었다.

훈족의 말에 대한 유럽인의 기록을 살펴보면 훈족의 말은 고구려의 과하마와 같은 종이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사용한 말은 과하마를 개종한 중형의 말과 과하마 두 종류의 말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구려에서 주력으로 사용한 말은 과하마다. 과하마는 키가 작아 산악지대에서 전쟁이나 사냥에서 큰말 보다 유리한 조건을 갖춘 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구려 무용총 사냥도 배사장면


훈족의 배사 장면과 같은 고구려벽화 무용총 사냥도중 배사 장면에서 보이는 기마인물의 배사 장면은 왼손잡이 무사라는 추축도 있으나, 바로 이 장면 밑에 그림에서 활쏘는 기마인물 장면과 그림의 구도를 맞추기 위해 왼손으로 활을 쏘는 장면을 그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말을 타고 배사 할 수 있는 기마술은 훈족이나 고구려만 가진 전유물이 아니다. 북방 유목민이면 다함께 공유한 기마술인 배사 장면이 벽화에 그려진 사실은 고구려에 북방 유목민이 살고 있었거나, 아니면 고구려가 북방 유목민족으로부터 전수 받았다고 가정할 수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이민족들이 등장한 그림들은 고구려는 이미 다민족 국가였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어 북방민족인 흉노가 고구려 영내에 거주 했다는 사실은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고구려는 집집마다 병기를 갖추고 있다는 기록은 고구려가 전쟁에 대비한 방책으로 전국민이 국가 위기 시에 일시에 무장을 할 수 있었다는 증거이며, 북방 민족 못지않게 말을 잘 다루며, 또 이용했을 것이라고 쉽게 유추 할 수가 있다.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위에 세워진 신라의 지배층이 흉노였다는 근거중의 하나로 필자는 신라 8대왕인 아달라 이사금(阿達羅 泥師今)의 이름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달라 신라8대왕의 이름은 유럽을 침공해 로마제국과 대항해 대제국을 건설한 훈족의 대왕 아틸라와 같은 이름이라고 추측 할 수 있는 이유는 아틸라라는 이름은 알타이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터키와 훈족의 본거지가 있었던 헝가리에서는 흔한 남자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라의 지배층은 우랄 알타이어를 사용한 흉노족이며, 중국인들이 워싱톤을 화성돈(華盛頓)으로 표기한 것과 같이 한자에서 음을 차용해 아틸라를 아달라로 표기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국어가 우랄 알타이어계나 아니냐에 대한 연구결과가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여러 학자들 중, 핀란드 태생의 람스테트에 이어서 한국어와 알타이제어의 친연관계를 한층 깊이 있게 연구한 학자는 포페(N.Poppe)이다. 포페(1960)의 [알타이제어 비교 문법]은 음운론에

한정된 것이지만, 한국어의 낱말 82개가 비교 대상인데, 이 작업은 람스테트에서 보다 훨씬 정밀화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알타이제어와 한국어의 관계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국어에 적어도 알타이어 기층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Poppe 1960:6)."라고 신중하게 말했다. 그는 “한국어의 위치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고 전제한 다음 한국어의 계통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1) 한국어는 알타이제어와 친연관계가 있을 수 있다.

(2) 원시 한국어는 알타이 통일체가 존재하기 전에 분열했을지 모른다.(즉 분열 연대가 대단히 이르다).

(3) 한국어에는 알타이어 기층밖에는 없다. 즉 한국어는 기원적으로 비알타이어인데 이것이 기층언어인 고대 알타이어를 흡수했던가 혹은 기층언어인 알타이어 위에 얹혔을지도 모른다.

 

이 진술은 한국어의 계통 추적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대변해 준다. 필자는 한국어에 대한 포페의 연구에서 보듯, 신라지배층과 함께 이주한 북방유목민이 사용한 알타이어가 고대 한국기층언어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을 배재할 수 없다고 본다.


훈족, 고구려, 신라, 백제가 고대로부터 사용한 과하마는 한민족과 흥망성쇠를 함께 한 민족의 말이다. 제주도 찬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남아 있는 과하마는 온순하며 사람의 말을 잘 따른다. 아래 그림은 말을 그리는 화가가 많지 않은 한국에서 과하마와 말을 주제로 그리는 馬화가 류정실이 그린 [과하마 군무]다.

 

 

 



과하마의 군무도를 볼 때마다 용솟음처 오르는 힘을 느끼게 하는 8마리 과하마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에서, 유럽을 침공한 훈족의 용맹을, 우리의 선조인 고구려, 신라, 백제인들이 외침을 막기 위한 전쟁에서 보여준 불굴의 투혼 정신을 느낄 수 있다. 때때로 나는 과하마 군무도에 빠져 들어가 한 마리의 백마를 잡아타고 북쪽으로 달려 올라가 고구려의 옜영토인 만주벌을 지나 서쪽 유럽으로 훈족이 지나간 길을 달려가는 환상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