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4)숙신,훈,돌궐

훈족이야기 11. 훈족 아틸라가 꿈꾼 제국은

자연정화 2013. 8. 18. 13:08

 

출처 : 조선일보 [JR의 유목민 이야기] 한수선

 

11. 훈족 아틸라가 꿈꾼 제국은

 

 

 

 

[사진설명 - 훈족왕 아틸라의 대리석 부조. 새겨진 글자는 '아틸라, 플라겔룸 데이' 즉, '아틸라, 하느님의 재앙'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고목나무에 울긋불긋한 천 조각을 매달고 나무신을 모시는 훈족을 보고 아르메니아인 사가 모세(Moses Daskhuranci)는 무속신앙을 넘어 사탄의 숭배라고 혹평했다. 훈족은 이외에 조상이나 신에게 말을 제물로 하는 제사를 지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인정을 받은 후, 야만족이라는 훈족들에게도 전파되기 시작했으나 훈족이 기독교를 받아드리는 수준은 고트족에 비해서는 미미한 정도였다.


훈족이나 13세기에 유럽을 정복한 칭기스칸의 공통점은 유목민만이 가진 종교에 대한 관용이었다. 아틸라, 칭기스칸은 다함께 정복지에서 피정복자들이 가진 어떤 종교도 인정했다. 정복자였던 훈족의 일부는 기독인이 되었고, 칭기스칸과 함께 유럽과 소아시아를 침공한 몽골인 중의 일부는 정복지의 종교인 회교도가 되였다.


 

[한국 농촌에서 흔히 있는 서낭당]


훈족의 유럽 침공 후 이들은 로마 영내・외 어느 곳에서 살든 어떤 야만족보다 더 야만적이라고
알려지며, 훈족은 야만족의 대명사가 되였다. 야만족이라는 훈족의 왕인 루아가 죽은 후 아틸라는 왕위를 그의 형인 블레다와 함께 11년간 공동으로 유지했다. 형인 블레다는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과 로마제국과 협상을 하면서 조공을 받아내는 외치에, 아틸라는 내정을 담당하며 행정업무에 경력을 쌓았다. 서기 445년, 형인 블레다가 죽은 후 아틸라는 비로소 왕권을 독차지 하면서 그가 평생 꿈꾸든 혁명적인 비전을 펼쳐 나가기 시작했다.


아틸라는 훈족이 정복한 유럽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하려면 선진문명을 배워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이런 사고는 그가 거느린 최측근 보좌관 인사들이 거의 외국인이라는 사실이 입증하고 있다. 아틸라의 최측근 보좌관은 오레스테스(Orestes), 그의 아내는 로마제국 노리콤(Noricum)성의 로마주둔군 총사령관의 딸로 그와 함께 아틸라의 궁정에 거주하며 아틸라를 보좌하며 훈제국의 최고위층에까지 올랐다. 그의 아들 로물로스(Romulus)는 후에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가 되였다.


아틸라의 업무를 총괄하는 비서는 이태리인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가 담당했다. 아틸라에게 영향을 준 또 한명의 사람은 로이에(Loire)지역에서 농민봉기를 주도한 전직 의사 유도시우스(Eudoxius)가 있었다. 이외에도 국적은 분명치 않으나 그리스 문화권에서 온 형제로 명성을 떨친 아틸라의 최측근 시종관인 오네기시우스(Onegesius), 로마와 맺은 아나톨리우스 조약에 따라 로마로부터 훈족이 받는 조공인 황금과 금화와 훈족 도망자를 인도받는 일을 담당한 스코타(Scotta)가 있었다. 이들은 로마제국에서 사용하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외국인으로 로마제국의 모든 정보를 아틸라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아틸라가 가진 최종의 목표는 그가 정복한 대제국에서 모든 인종과 종교와 문화를 인정하면서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으로 그의 원대한 계획은 성취되지 않았으나, 야만족이라는 훈족의 왕인 아틸라가 가졌든 통치이념은 그가 살고 있든 5세기에 로마제국의 문명인들도 꿈꿀 수 없었던 이같은 통치이념은 아틸라가 세기를 뛰어넘는 선각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구에서 아틸라의 리더쉽을 연구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리더쉽에 대한 많은 책들이 촐판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