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4)숙신,훈,돌궐

한무제의 흉노정벌과 흉노의 쇠퇴와 서역이동

자연정화 2013. 8. 18. 14:04

 

한무제의 반격과 장건의 서역파견

 

 


흉노와 조약에 따라 많은 조공물자와 교역의 실시 및 황실의 여자까지 흉노의 연지로 보냈으나 흉노의 변경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15세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한무제는 기원전 201년 한고조의 평성의 치 이후 고조의 유언에 따라 70여 년간 유지해온 화친정책을 던지고 굴욕적인 상황을 타게 할 방법을  절치부심하였다.

전투에서 포로로 잡은 흉노병사와 귀화인을 심문하던 중 한 가지 공통적인 내용이 있었다.

 

수십년전 흉노가 월지를 공격하여 월지를 천산너머 이리지방으로 쫓아냈는데, 이 때 월지왕이 전사하고 그의 두개골로 흉노가 술잔을 만들어 사용하여 월지가 원한을 갚기 위해 동맹군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주었다. 때마침 무제등극 이후에 풍년이 들고  풍족한 국가 재정을  바탕으로 흉노를 칠 준비를 하던 무제에게는 쾌재를 부를만한 내용 이였다.


기원전139년 무제는 천산산맥 북쪽 이리 땅에 있을 월지를 찾아 장건에게 감보를 비롯한 100명을 딸려 보냈다. 장건이 대월지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길을 택하나 흉노의 땅을 통과해야 했는데, 결국 하서회랑에서 붙잡혀 군신선우(BC160~BC126)앞에 끌려와 심문을 받게 되었다. 군신선우의 포로로 10여년을 흉노 땅에 살면서 처와 자식까지 낳았으나 한의 사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있었다.

 

흉노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감보와 함께 탈출하여 이리에 있을 월지를 찾아 갔으나  월지는 이미 대하지방으로 이동하여  세력을 구축하고 떵떵거리며 살고 있었다. 장건의 설득에도 벌써 30여년이 지나 흉노에 대한 원한도 희미해지고 1만 여리나 떨어진 한과의 동맹으로 가까이에 있는 흉노를 자극할 위험도 있어 동맹을 거절 하였다.

 

1년을 월지 땅에서 머문 장건은 사신의 임무를 보고하기 위해 한나라로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길은 서역에 대한 지리정보도 풍부하고 흉노를 피하기 위해 강거 땅을 귀국루트로 택했으나 강거족에 붙잡혀 다시 흉노의 손에 넘겨지게 되었다.


이번에도 장건은 운이 따랐다. 때마침 군신선우가 죽고 후계자문제로 혼란한 틈을 타 아내와 감보와 함께 극적으로 흉노를 탈출, 사신으로 파견 된지 13년 만에 귀국(BC126)하여 무제에게 보고하였다. ( 군신의 동생 이치사가, 어리고 연약한 태자를 제압하고 선우에 자리에 올랐다. 태자 어단은 한나라에 투항 하여 척안후라는 지위에 봉해졌으나 수개월 만에 죽었다. 군신선우 까지 장자상속 이였으나 이 사건으로 훗날 흉노가 분열하는 선례를 제공하였다.)

 

장건은 서역 여러 나라의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와 실크로드의 길을 열게 되었다.(장건의 착공)

100여명 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장건과 감보뿐 이였다. 평성의 치 이후 흉노가 자주 변방에 침입하긴 했으나, 흉노와 한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흉노인과 선우까지 장성 아래까지 왕래 하곤 하였다.

 

기원133년 군신선우는 10만기를 이끌고 무주변방(지금의 선서성 좌운의 남쪽)을 침입하였다.

한나라는 마읍성 부근에 병사 30만명을 매복시킨 후 가축을 풀어 놓고   흉노를 유인하였으나  포로가 된 한나라 병사의 자백으로 매복이 발각되어 수포로 돌아갔다.(마읍성사건)

이 마읍성사건으로 한과 흉노의 화친이 깨지고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위청, 표기장군 곽거병의활약과  흉노 혼야왕의 투항


기원전 129년, 장건이 서역에서 귀국하기 3년 전 한은 위청을 비롯한 4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흉노가 차지하고 있던 오르도스 지방을 정벌하여 삭방군(BC127)두었으나 흉노와의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팽팽한 소모전을 치루었다.

 

이 때, 월지와 군사동맹에는 실패했으나  장건이 가져온 서역의 36국에 관한 정보와 한혈마에 관한 장건의 보고는 무제에게 단비와 같은  매우 귀중한 것 이였다. 무제는 장건의 보고를 토대로 전군을 서역의 요충지인 하서지역으로 진군시켰다.

 

흉노의 입장에선 서부지구의 관문이며 친분관계인 강거족과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로, 서역으로 통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고 강거족과 흉노를 차단하려는 한나라 모두 사활이 걸린 싸움 이였다.(기원전 124~기원전121년)

 

서역정벌에 나선 표기장군 곽거병의 활약은 눈부셨다. 곽거병은 오르도스를 정벌한 대장군 위청의 조카로 18세의 어린나이에 시중이라는 직책으로 황제의 신변 업무를 볼 정도로 총명하였다고 한다.

 

기원전121년 봄  표기장군에 임명된 곽거병은 1만기를 이끌고 하서지구를 급습하여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그 전과는 대단하여  적수급과 포로가 3만이 넘고 ,휴도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금인을 탈취하고 기련산의 추도왕을 비롯한 5명의 왕과 왕자들 59명, 선우의 연지를 포로로 잡고 적 병력의 3/10을 섬멸하였다고 한다. 이 때 박망후 장건은 대장군 위청의 참모로 많은 정보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곽거병의 승리로 패전의 책임을 두려워한 혼야왕은 이치사 선우의 충신인 휴도왕을 살해하고 수하와 함께 한나라에 투항하였다. 무제는 투항한 혼야왕에게 1만호의 봉읍과 탑음후라는 직위를 하사하고 그 일족 또한 후대하였으며, 정벌한 휴도왕의 땅에는 무위군, 혼야왕의 땅에는 장액군을 세우고  서역을 경영하였다. (일설에는 이때 항복한 휴도왕의 아들을 동쪽으로 보내어 낙랑군의 고조선 싸움에 투입하였다고 한다.)

 

여세를 몰아 기원전 119년에는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각각 5만기를 주어 흉노의 본거지를 정벌하였는데 ,이 전투중에 흉노 선우가 실종되고 여려왕을 비롯한 7만의 포로를 잡았다고 한다.(BC117년 곽거병이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무제는 건설중인 자신의 무덤옆에 곽거병의 묘를 만듬.)


위청과 곽거병의 활약으로 하서지구를 획득한 한나라는 이른바 하서4군(장액,주천,돈황,무위)을 설치하여 서역으로 가는 길을 확보 흉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BC115년~BC73)


흉노는 한의 대 공세 중 호전적인 이치사 선우가 사망(BC114)하여 그 세력이 더욱 약화되었다.

사기 흉노열전에는 곽거병의 활약으로 고비사막 이남에서 흉노를 찾아 볼 수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상황을 흉노인은  "우리가 기련산을 잃어 가축을 먹일 땅이 없고  연지산을 잃어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도 없다." 고 탄식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의 서역진출과 이광리의 대원원정

 

하서지역을 차지하여 서역으로 가는 출구를 확보한 무제는 장건의 건의를 받아들여 오손으로 장건을 파견하였다. 천산산맥 북쪽 이리강유역 이시크쿨호수(키르키스탄지역 천산산맥 분지의 호수)에 살고 있는 오손을 옛 혼야왕의 땅에 이주시켜 흉노를 방어하려 장건의 계획은, 오손왕이 늙고 친 흉노파의 반대도 있어 이주에  이주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오손으로 부터  수십필의 명마(서극)를 답례로 받아왔다.

(장건의 3차 서역여행,2차원정은 미얀마지역으로 시기 미상 원정실패)

 

또한 장건은 동행한 부사들을  대원과 강거(지금의 카자흐스탄지역), 대원,강거,대월지, 대하,안식(이란),신독(인도) 등으로 파견하여 한과의 교류를 하게 하였다.

이 때 많은 서역물품(포도와 목숙,비파 등) 들이 한나라에 들어왔다.

이후 장건은 귀국 후 1년 후 죽었다.(기원전 114년)

 

한편, 장건으로부터 대원의 한혈마에 대한 보고를 들은 무제는 흉노의 말보다 뛰어난 대원 말을 얻기 위해  장사와 차령이라는 직급의 특사를 많은 황금과 특산품을 주어 보냈다.

<사기> 대원열전에 대원국은“한의 서쪽 1만리 가량 떨어져 있고, 70여개의 성에 인구는 10만이며 활과 창으로 무장한 기병군대가 있다. 생활은 벼와 보리 포도농사를 짓고 있으며 특히 피와 같은 땀을 흘리는 명마(천마의 자손)가 있는데 이사성에 모아 기르고 있다.“ 고 기록하고 있다.

 

한의 사신을 맞이한 대원왕은 한나라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군대를 파견치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한의 사신을 욱성에서 살해하고 재물을 빼앗았다. 격노한 무제는 이광리에게 이사장군이란 직책을 내려 대원공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사막지역에 서투른 한의 군대는 태반이 굶주리거나 병이 들어 싸워보지도 못하고 돈황으로 후퇴하였다.(1차 원정)

 

무제는 옥문관을 넘지 못하도록 명하고 변경의 기병과 죄수 등 6만 군대와 소 10만 마리 말 3만 마리를 증원군을 편성  재차 원정을 명하였는데,  주천과 장액에 후위군 18만 대군을 대기시켰다.(2차 원정)

 

지금의 기준으로도 대단한 규모의 파병이었다. 이광리는 이사성의 물줄기를 차단하는 작전으로 성안의 수원을 고갈 시켰다. 대원은 한나라가 필요한 명마들을 모두 죽이겠다며 버텼으나, 견디다 못한 신하들이 왕과 왕후를 살해하고 투항하였다.(기원전 104년)

 

이광리는 대원에 매체라는 왕을 세우고 수십 필의 선마를 비롯한 3천 필의 말을 이끌고 한나라로 귀국하였다.

 

이 때 무제의 기쁨이 넘쳐“ 천마가 오도다, 서족 끝에서 만리를 넘어 유덕하게 돌아오도다....” 라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광리의 원정은 명마를 손에 쥔 것 못지않게 서역 여러 나라에게 힘을 과시하는 효과가 따랐다. 안식과 강거, 대식국까지 한에 조공을 하게 되었고 중앙아시아와 서방까지 한나라의 영향권 안에 두게 되었다.


 

흉노와 한나라의 망명자들(선우와 혼야왕과 일축왕, 이릉과 이광리)

흉노와 수세기에 걸친 전쟁 중 많은 흉노와 중국은 사람들의 망명이 있었다.

곽거병의 대대적인 서역정벌로 혼야왕은 패전책임이 두려워 휴도왕을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기원전 121년)하여 흉노의 서부지역의 지배권을 한나라에 빼앗겼다.

또한 서역지배의 중요한 일축왕이 선우다툼에서 밀려나  수하 수 만기를 이끌고 한에 투항하여(기원전 97년) 한나라는 이 땅에 서역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후로도  분열한 동흉노의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입조(기원전 51년, 왕소군의 남편)하였으며, 훗날 춘추 전국시대에 남흉노의 호주천선우(195~216)가 위나라의 조조군에 투항하였다.

     한편 흉노의 기원역시 정권싸움에서 밀려난 하후씨의 자손이 설이  말해 주듯, 중국에서 흉노로 망명한 사람들도 다수인데, 한고조 때 고조의 흉노정벌 명을 어기고 흉노에 투항한 한왕 신을 비롯한 대표적인 인물로 한나라의 이릉과 소무, 흉노를 정벌한 이사장군 이광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릉은 이사장군이 거느린 3만군의  수하 장수로 흉노로 원정을 떠났는데 궁병 5000명을 거느리고 흉노를 유인하는 임무 중 거연(내몽골자치주 염호)에서 흉노의 주력군 8만 명과  조우하게 되었다.

이릉은 용감하게 싸워 적병 1만 명을 사살하고 분전하였으나, 내부의 질시로 오기로 한 지원군이 오지 않고 화살마저 떨어져 흉노에게 항복 하였다.(기원전 99년) 그런데 조정의 이서라는 자가 이릉이 배반하여 흉노에 투항하여 선우의 참모가 되었다고 모함을 하였다.

화가 난 무제가 이릉의 노모와 처자를 비롯한 일족을 멸족시키자 억울함과 돌아갈 곳 없는 신세가 된  이릉은 흉노에 투항하였다.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은 이릉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변호하다 궁형이라는 치욕스런 형벌을 받았다.

중량장 소무는 이릉이 투항하기 1년 전에 한나라의 사신으로 흉노에 파견되었는데 차제후 선우의 투항권고에도 19년간 전향하지 않은 강직한 인물 이  였다.

흉노와 한나라 간 화친이 성립된 소제 때, 한나라로 귀환하는 절친한 친구 소무를 보내는 이릉의 심정을 한서 소무전에 “이방인, 한번 헤어지면 영원한 이별”이라 돌아 갈 수 없는 처지를 전하고 있다.

     또한 무제의 총애를 받으며 대원과 흉노정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 이광리는, 누이가 낳은 창읍왕을 황태자에 오르게 하려 한 혐의로 일족이 멸족당하고 자신마저 위태롭게 되자 흉노에 망명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광리는 선우모친의 병 쾌유를 비는 흉노신 제물로 희생되고 말았다.

 

( 호록고,호연제, 차제후 선우등  수대의 선우 측근으로 있던 한나라 망명자 위율의 모사에 의해) 

 

흉노의 분열과 쇠퇴 

 

힘을 기른 한나라의 압박과 극심한 천재지변이 겹친 가운데, 수대에 걸쳐 선우들이 일찍 세상을 뜨자 장자상속의 전통이 무너지고 내분에 휩싸이게 되었는데,(BC105년~BC97년, 3명의 선우가 사망함)  기원전 97년 호록고 선우가 등극할 무렵에는 동족간의 세력다툼이 극심한 가운데 많은 눈까지 내려 가축들이 아사하고 흉작이 들었다.

수십 년에 걸친 흉노의 내분과 피폐해진 틈을 타 한나라는 오손과 협공하여 우곡려왕의 본거지를 습격하여 3만9천명을 생포하고 가축 70만마리를 포획하는 등 치명타를 주었다.(BC71)

또한 북쪽의 정령, 동쪽의 오환까지 4면에서 흉노를 압박하여 흉노족의 3/10과 가축의 절반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흉노의 동서분열과 굴복

호록고 선우 이후 선우 쟁탈전에서 밀려난 일축왕(호록고선우의 동생 아들)은 악연구제 선우의 보복을 피해 수하 수만 명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하였다.(BC60)

일축왕의 투항으로 흉노로부터 서역지배권을  넘겨받은 한나라는 이 땅에 서역도호부(현재 쿠처부근) 설치하였다.(BC59)

이런 흉노의 위축을 틈타 동쪽의 오환은 흉노 변경의 고석왕을 습격하여 많은 흉노인을 포로로 잡아 갔는데 악연구제 선우의 문책을 두려워 하여 동부지역의 귀족들과 합세하여 호한야 선우를 세워버렸다.(동흉노)

악연구제선우는 호한야를 제거하기 위해 우현왕에게 원군을 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분에 못 이겨 자결을 하고 말았다.(BC58년)

이후 호한야 선우를 비롯한 악연구제선우의 측근 등 다섯 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극심한 혼란이 일어났다.

곧 호한야 선우에 의해 난립한 선우들을 평정하였으나 좌현왕으로 있던 호한야선우의 형이 질지선우(BC56~BC36)라 칭하고 나섰다.(서흉노)

질지선우의 팽창으로 선우 정(선우의 본거지)까지 빼앗겨  수세에 몰린 호한야선우(동흉노)는 아들 우현왕을 한나라에 보내 원군을 청하였다.

기원전 51년 한나라 선제(BC74~BC49)에게 의지하고자 한나라 감천궁에 입조하여 투항하였다.

중국으로서도 버거운 상대인 흉노 선우의 투항은 대단한 사건 이였다.

선제는 극진하게 객신의 예우로 대접했는데, 황제를 배알할 때 신이라고 칭하지 않아도 되었었다.

이후 기원전 49년, 기원전 33년 등 모두 세 차례 한나라에 입조하였는데 그때마다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특히 3번째 방문(원제재위)에서는 후궁의 여인들을 호한야에게 내려주었는데 이 때 흉노로 간 5명의 후궁 중에 왕소군이 있었다.

 

(왕소군은 영호연지라는 자리에 올라 호한야와 사이에  이도지아사를 낳았으며 2년후 호한야 선우가 죽자 그의 아들 조도막고(북주루선우)에게 시집을 가 2명의 딸을 낳았다. 이도지아사는 훗날 좌현왕의 지위까지 올랐으며,  선우의 자리다툼 중 나이77세에 살해당하였다. 북주로선우 사이에 난 딸들은 거차(공주)로서 명문가 집안에 시집을 갔다.

소설로 전하는 화가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흉노로 가던 중 몸을 던졌다는 것은 허구이다.)

 

한편 질지선우(BC56~BC36)는 동족인 동흉노와 한나라의 압박을 타개하고 세력을 확장하고자 이리지방의 흉노를 병합하고 북쪽의 정령족을 공격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던 중 서쪽의 오손을 세력 하에 두고자 사신을 보냈으나 오손은 흉노의 사신을 살해하고 한과 동맹을 맺어 흉노를 견제하였다.

 

(오손은 서역 최대의 국가로 인구 63만 병사가 18만8천명 정도였으며 투르크계 또는 아리아계로 알려져 있다. 오손은 흉노에 밀려 천선산맥 북쪽 이리분지에 살고 있었으며, 오손 왕 곤막은 어린시절 흉노에 의해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들판에 내버졌으나 까마귀와 늑대가 먹이를 주고 보살피자 흉노의 선우가 거두었다고 한다. 장성한 곤막은 흉노의 후원을 업고 월지족을 천산북쪽으로 몰아내고 부족을 규합하여 독립하였다. 흉노와는 애증의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장건이 하서지방으로 오손을 이주시키고자 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 였다. 오손은 장건의 요구는 거절 했지만 한나라의 공주를 받아들여 혼인정책(BC105)으로 한나라와 흉노사이에 등거리 외교정책을 펴고 있었다.)

 

흉노은 오손과의 대립관계에 있는 강거(티벳족)과 손을 잡고 한과 오손동맹에 대항하였으나, 강거 땅으로 백성들을 이주하던 중 한파가 닥쳐 대부분이 죽고 겨우 3천 명 정도가 강거 땅에 도착하였다.

기원전36년 질지의 세력 약화된 기회를 이용 한나라는 서역도호 군사를 보내 강거 땅의 질지를 살해 토벌하였다.

이로서 흉노는 완전히 세력이 꺾였으며, 일진일퇴하던 한나라에게 서역경영을 넘겨주게 되었고 동흉노와는 화친을 맺어, 왕망(재위8~23)이 한나라(전한) 황위를 찬탈하여 신나라를 세우기까지, 비교적 변경이 평화로운 기간을 보냈다.

즉 흉노는 한나라에 신하의 예를 취하고 한나라는 흉노에 매년 많은 물자를 보내고 교역의 장을 열어 흉노의 발호를 방지하였다.


 

흉노의 부흥

서흉노의 질지가 전사하고 동흉노가 한에 복종하고 있었으나 아직은 흉노의 세력이 몰락한 것은 아니였다.

서쪽의 오손과 동쪽의 오환보다 우위의 군사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왕조의 외척인 왕망이 평제(9살에 즉위 BC1~5)를 독살하고 두 살된 유영을 황제에 옹립한 뒤 황제의 자리를 양위 받아 국호를 신나라로 변경하였다.

 왕망은 흉노와 원만한 관계를 청산하고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흉노가 그간에 오환으로 받던 공납을 거부케 하고, 흉노 선우의 직위도 격하 시켰으며 인질로 장안에 있던 선우의 아들을 살해하였다.

이에 흉노는 매년 중국 변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빈번히 하였는데 그 피해가 무제 때보다 많았다고 한다.

또한 주변 이민족도 왕망의 강경책에 반기를 들어 오환과 선비, 서역 여러 제국도  흉노에 복종하고 공납을 보내는 등 흉노는 일시 부흥기를 가졌다.

왕망은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를 정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서기23년 전사하고 말았다.

신나라의 멸망 후 후한의 광무제(재위25~57)가 전국을 재통일하기까지 중국내부의 군웅들의 다툼에 개입하여 중국내에까지 정권을 확장하였다.

그러나 지원한 노방이 광무제에게 패하여 흉노로 망명하여 죽고(42년) 흉노부흥의 중심인 선우 여가 사망하자(46) 짧은 부흥 후 다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또다시 분열하는 흉노(남북흉노)

묵특선우 이후 중흥을 꿈꾸던 선우 여가 사망하자 차기 선우자리를 두고 흉노는 분열하기 시작했다.

선우 여는 죽기 전 자기 아들을 선우로 등극시키기 위해 동생 이도지아사(왕소군의 아들) 를 살해하였다.

그러나 선우자리를 이어받은 오달제후(재위46년)가 같은 해 사망하자, 동생인 좌현왕 포노가 선우에 등극하였으나, 우일축왕이 반발하고 매년 가뭄과 해충의 피해가 막심하여 흉노의 2/3가 굶주리거나 죽었다.

이즈음 흉노에게 억눌려 핍박을 받던 오환도 동호 때부터 쌓인 원한으로 흉노를 공격하고 선우의 묘를 파헤치기도 하였다.

여 선우계의 연이은 등극에 불만을 품은 비 일출왕은 8부대인들과 협의하여 조부와 같은 호한야 선우로 칭하고 중국에 의존하였다.(48년)

이로서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하였다.

남선우 비(남흉노)는 북흉노의 본거지를 습격하여 북선우(포노)의 동생을 생포하고 50년 가을 아들을 한나라에 입조시켜 광무제에게 복속하였다.

광무제는 남흉노에게 제후의 지위와 막대한 양의 견포,솜,곡식 등을 하사하였으나 신하의 예로 대하였으며 북흉노의 바람막이 역할을 하게 하였다.

한나라는 흉노뿐만 아니라 타 이민족도 적절하게 이용하여, 많은 곡물과 비단을 하사하여 달래는 한편 군사 감독관을 보내 이들을 통제 하였는데

같은 계열인 선비와 흉노의 군사는 함께 출병 시키지 않고, 흉노와 선비를 칠 때는 오환의 군사를 앞장세우는 등 당근과 채찍 적절한 이간책으로 다스렸다.

   76~140년 이 시기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시기로, 남북흉노의 다툼와중에 선비의 공격(87년)으로 북흉노 우류선우가 살해당하자 북흉노 일부가 20만명을 이끌고 남흉노로 투항하였는데 점차 투항자가 늘자 남흉노와 한나라, 북흉노 투항자 간에 얽히고설킨 혼란이 계속 되었으며,

북흉노는 선비와 오환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겪어 남흉노에 투항한 북흉노족을 지원할 처지가 못 되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북흉노 투항자들은 다시 북흉노로 귀환하였으며, 이미 기마민족의 기질을 상실한 남흉노는 한나라에 예속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도 계속 전쟁만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한나라가 남흉노에게 보낸 많은 공물들이 교역에 의해 북흉노에 흘러들어가고 북 흉노는 다시 이 물건들을 서역제국들과 교역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때론 북흉노와 한나라가 직접 사신을 교환하고 교역의 장을 열기도 하였다.  

 

 북흉노의 서방이동

선비의 공격으로 우류선우가 사망하고(87년) 한나라와 남흉노의 공격으로 일축왕이 무너지고 20만명이 투항하는 등  견디지 못한  북흉노는 몽골고원을 버리고 서쪽 오손 땅인 이리지방으로 이주하였다.(91년)

이틈을 노려 선비는 남은 10여만 명의 흉노를 병합하여 몽골지방을 지배하였다.

비록 선비와 한나라 오환 등에 밀려 서쪽으로 쫓겨났으나 흉노는 무력으로 오손 등을 복속시키고 서역의 작은 나라들을 지배하며 서쪽으로 이주 하였다.

서역 땅은 기원전 수세기 전부터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땅 이였다.

기련산맥 부근은 좀더 일찍 곽거병 등에 의해 한나라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투르판 분지를 중심으로 한 차사전국은 기원전 108년에 최초로 토벌하여 한나라의 영역 하에 두었다.

이후 흉노와 한나라의 서역쟁탈전은 수시로 지배자가 바뀌는 형국이 되었는데 사막의 작은 국가들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많은 희생을 강요당했다.

흉노의 동서분열이후 왕망이 강공책을 쓰기 전까지 서역국가들은 한나라와

가깝게 지냈다.

    후한시기 서쪽으로 밀리는 북흉노는 서역에 더욱 비중을 둘 수밖에 없는  까닭에 한과 북흉노의 공방은 더욱 치열하였다.

한나라는 73년경 차사국을 지배하고 있던 북흉노 호연왕을 치고 이듬해 차사국까지 복속시켜 서역도호와 무기도호를 세웠는데, 1년 후 흉노의 좌곡려왕이 2만기를 이끌고 이지역 왕국인 언기와 구자(쿠처)와 합세하여 도호와 교위를 쳐 다시 찾아왔다.

근 300여 년간 흉노와 한나라의 틈바구니에 있던 서역국가중 대표적인 나라가 누란국(선선)이다.

흉노와 한나라가 번갈아 처 들어올 때마다  양쪽에 인질과 충성 맹약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는 누란 땅에서 흉노와 한나라 사신들이 싸움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까지 초조하게 지켜봐야 했는데, 유명한 한나라 반초의 이야기다.

반초는 <한서>의 저자인 반고의 동생으로 그의 아버지는 후한의 이민족정책을 주도한 반표이다.

반초가 36명의 부하를 이끌고 선선국의 사신으로 갔을 때 마침 흉노의 사신100여명이 선선국에 머물고 있었다.

당시 선선국은 먼 한나라보다 가까운 흉노를 중시하였기 때문에 홀대를 받으며 협상이 순조롭지 않았다.

반초는 이 상황을 돌파하고자 불과36명의 부하를 이끌고 흉노 사신단을 기습해 모조리 살해하였다.(반초-자(字) 중승(仲升). 산시성[陝西省] 셴양[咸陽] 출생. 학자 반표(班彪)의 아들로 학문에 뜻을 두고 뤄양[洛陽]으로 갔으나, 사서(寫書)를 하면서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빈곤한 생활을 단념하고 무인(武人)으로서 입신양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73년 두고(竇固)를 따라 흉노(匈奴)토벌의 별장(別將)으로 재능을 발휘해 큰 공을 세우고, 이후 31년간 서역(西域)에 머물며, 선선(躇善) ·우전(于蚊:호던) ·구자(龜玆) ·언기(焉耆:카라샬) 등지의 오아시스 제국가를 정복하고 부하 감영(甘英)을 페르시아만(灣) 방면으로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등 많은 공적을 세웠다.  벼슬은 군사마(軍司馬)에서 장병장사(將兵長史)를 거쳐 서역도호(西域都護)가 되고 정원후(定遠侯)에 봉(封)하여졌다.

서역을 토벌하고 반세기 이상 흉노의 지배하에 있던 50여 나라를 한(漢)나라의 위령(威令) 밑에 복종시켰다. 102년 71세의 고령을 이유로 귀국할 것을 간청하여 뤄양에 이르렀으나, 다음달에 병사하였다. )

반초는 선선왕의 항복을 받아 서역도호(91년)로서 31년 간 통치하였으며 그의 아들 반용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역장사(123년)로 임명되어 언기를 항복시키고 이오와 하밀에 둔전병을 두었다.

이후 반용이 4년 만에 실책으로 물러나자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흉노 또한 서천을 계속하였는데, 남흉노에 투항했던 많은 북흉노족이 내분중에  돌아오자 이들 무리를 더하여 어느 정도 세력을 회복했던 듯하다.

잠시 오손 땅인 이리(현 신강위그르 자치구의서부와 카자흐스탄 동부지역)에 근거를 두고  서역지역을 장악한 북흉노는 전통적인 지배자인 연제씨의 일축왕이 아닌 호연왕의 무리였다.

호연왕은 차사지역을 비롯한 멀리 흑해까지 세력을 확장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