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4)숙신,훈,돌궐

간추린 흉노제국사

자연정화 2013. 9. 16. 12:31

간추린 흉노제국사

 

(1) 흉노의 성립

 

스텝 국가 흉노제국(匈奴帝國)의 형성기는 중국 역사상 제 1차 전성기였던 한조(漢朝 206BC - 220AD)와 한조가 멸망한 후의 혼란기와 대체로 일치하고 있으며, 이때에 스텝 지대를 다스린 세력은 흉노제국이었다. 흉노제국은 스텝 지대에서 일어난 최초의 국가조직은 아니었으나, 흉노제국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학자들은 근래에 흉노를 실질적인 최초의 스텝 제국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흉노는 튀르크, 몽골, 만주-퉁구스, 한족(韓族) 등 소위 알타이족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부족 연합체로서 지도층은 알타이어의 하나인 튀르크어의 한 방언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이미 중국에 한조(漢朝)가 건설되기 이전에 스텝을 석권하고 있었다.

 

 

초기에 흉노제국의 통치 영역은 오르콘(Orkhon), 셀렝가(Selenga) 강 유역과 외튀켄( t ken) 평원, 그리고 오르도스 지방이었다. 이 당시 스텝의 서쪽, 즉 아무다르야 강과 시르다르야 강 유역과 카스피해 지역에는 스키타이민족이 활동하고 있었다. 흉노족들에 대한 기록은 극히 빈약하며, 남아 있는 기록의 대부분은 중국과의 군사적 충돌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들의 적대국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상당한 편견이 내재되어 있다.

 

그들이 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기원전 4세기 말경으로서 중국의 전국시대와 때를 같이 한다. 흉노가 중국을 크게 위협하는 고로 진(秦)나라는 기원후 221년 만리장성 구축을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흉노는 다른 북방 민족들과 연합하여 진(秦)에 대항하며 그 세력을 확장시켰다.

흉노는 연(燕), 진(秦), 한(漢)이 계속되는 동안 이들 중국 왕조들에게 있어 무척 위협적인 존재였으며, 중국은 이들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시황제가 구축한 만리장성은 칸수성의 린타오에서 요동에 이르는 것으로 약 5천km에 달했다.

 

진의 만리장성 구축과 적극적인 군사대응으로 흉노등 북방세력이 잠시 쇠퇴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묵돌(冒頓)의 등장으로 흉노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2) 흉노의 대영웅 묵특(묵돌, 모돈)의 등장

 

흉노제국의 창립자는 투멘(頭曼; Tumen)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여러 유목 부족 집단들을 통합한 후에 선우(單宇 : Shan-yu)라는 공식적인 관직명을 가짐으로써 흉노제국을 출범시켰다. 묵돌(冒頓: Motun)은 자신의 아버지 투멘이 후궁 연씨의 아들을 왕위에 계승하려고 하는 것에 반발하여 10만 기병대를 출동시켜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정권을 탈취하였다.

 

 

선우가 된 묵돌은 정권을 강화시킨 후에 먼저 서쪽으로 천산산맥과 칸수 지방에 자리잡은 월지국(月氏國)을 공격하여 붕괴시키고 후에 동쪽으로 만주 서부지역에 위치한 동호국(東湖國)을 멸망시킴으로서 명실공히 중국 북방 최대의 유목민족국가를 수립하였다. 이처럼 북방을 장악한 묵돌이 중국을 공격하게 되자 기원전 201-199년에 중국과 휸오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마침내 묵돌은 한고조(漢高祖)를 퇴패시키고 승리하였다. 이에 한고조는 흉노에게 매년 조공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흉노와 화친조약을 맺었다.

 

기원전 198년 한(漢)의 신하 유경(劉敬)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화친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흉노 선우에게 공주를 출가시킨다.

(2) 비단, 곡물 등 매년 조공을 바친다.

(3) 흉노와 한(漢)은 동등한 외교적 관계를 유지한다.

(4) 만리장성을 경계로 하여 상호 침입을 중지한다.

 

이와같은 불평등한 화친조약은 중국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으나, 군사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흉노에 대해 중국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묵돌의 영역확장을 위한 군사원정은 계속되었다. 그의 정복 사업의 결과로 묵돌 통치시대에 제국의 경계는 동쪽으로 만주지방, 서쪽으로 아랄 해, 북쪽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쉬 강 유역, 그리고 남쪽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 지방과 티벳고원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로서 약26개의 종족과 국가를 복속하여 통치권에 두었다.

 

이처럼 묵돌은 중국을 위협하여 중국과 불평등 화친조약을 맺고 수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동북아시아의 우세한 세력으로 제국을 발전 시켰던 것이다.

마침내 중국은 가능하면 이들을 건드리지 않고, 유화정책을 쓰면서 분열과 분리정책을 함께 써나가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게 되는데, 이러한 이이치이(以夷治夷) 정책은 이 후로 중국의 전통적인 북방정책의 노선이 되어왔다.

 

(3) 동, 서 흉노의 분리

 

기원전 174년 묵돌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노상(老上) 선우가 등극하였다. 노상은 부친의 정책에 따라 군사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복속국에 대한 통치를 강화시키고, 중국 도성 장안(長安) 근교까지 진군하는 등 중국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압력도 더욱 더 강화시켜 나갔다. 그러나, 화친조약의 이행에도 불구하고 흉노의 침범이 계속되자 중국 조정내에 흉노토벌을 주장하는 강경파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노상선우를 이은 군신(君臣) 선우 때에 흉노는 약회되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서 중국은 흉노제국내 민족 분열를 조장하고 흉노족 지도층 내부의 분열을 위해 이간질를 통해 흉노세력 약화를 가속화시켰다.

 

 

이렇게 흉노 제국이 약화된 상태에서 후한(後漢)의 광무제는 그동안 60여년간 지속되어온 화친조약을 버리고 흉노정벌에 나섰다. 당시, 중국으로서 국가 경제에 주요재원이 되는 비단 수출 증대를 위해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흉노 정벌은 선결과제가 되어있었다. 한(漢) 무제(武帝)는 중앙아시아의 교역로를 회복할 목적으로 흉노를 대대적으로 정벌했는데, 이로 인해 흉노는 급속히 쇠퇴하였다.

 

이후에 흉노는 제국내 분열과 갈등이 계속되면서 제국이 남(南)과 북(北) 흉노로 분열하게 되었고, 비단길에 대한 통치력 상실과 중국의 경제적 지원이 중단됨으로서 패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 마침내 흉노는 기원후 155년 다른 중앙아시아의 민족이며 몽골계로 추정되는 선비(鮮卑)족과 연합한 중국 후한에 의해 멸망하였다.

 

흉노제국이 멸망한 후 스텝 지역에는 혼란과 정치적인 불안정 시기가 시작되어 5세기초까지 계속되었다. 중국 역사 기록에 의해 분열시대 - AD 2세기부터 6세기말 - 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에 남흉노의 후세들로 추측되는 부족들이 수 개의 왕조를 세웠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한 왕조는 거의 없다.

 

 

한편, 흉노의 쇠망으로 인해 생긴 정치적 공백은 어떠한 스텝 세력에 의해서도 메워지지 못했는데, 당시 구체적인 흉노제국의 영향력과 정도는 사료의 불충분으로 인해 만족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흉노사람들은 유목 국가 조직을 발전시켰으며 수 세기 후에 등장한 튀르크족(돌궐족)이 세운 돌궐제국은 흉노제국의 군사와 국가 조직 형태를 답습하여 세워졌다.

 

(4) 흉노의 문화

 

흉노인의 언어는 알타이어로서 지도층은 기원후 3세기 북위(北魏 Tabgach)에서도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돌궐어의 원시어(原始語 Proto-Turkic)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흉노인들이 사용한 문자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울라 16호 고분을 비롯한 흉노 유적지에서 발굴된 출토품에 흉노 문자로 추정되는 기호들이 새겨져 있다.

 

25고분에서 출토된 인물 자수화를 통해서 흉노인들의 인물상을 짐작할 수 있다. 흉노 인물은 엄숙한 자테를 가졌는데 모양은 발이 짧고, 비교적 크며 예리한 눈매를 가지고 있다.

 

흉노 고분에서 출토된 마구(馬具), 양털로 엮은 깔개 등과 금속 제품이나 골기(骨器) 등에 나타난 동물 문양 등을 통해서 흉노사회에서는 돌궐사회에서 처럼 민요나 예술 등에 유목민족적인 요소가 풍부하게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무용담을 담은 민요가 발달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대표적인 악기(樂器)로는 유목민족 전통 악기인 호가(胡茄)와 북이 있다.

 

한편, 금속 출토품 중에는 사슴, 사자, 말 등이 서로 물어뜯고 있는 문양들이 많이 발견 되는데, 이것은 흉노가 스키타이와 관련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흉노의 대표적인 수예품으로는 펠트 위에 여러 색상의 털실을 사용해 장식한 것을 들을 수 있다.

 

흉노 사회의 혼인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부족 간의 문제였다. 또한 형이나 동생이 죽었을 때 형수나 계수를 아내로 삼는 수혼(嫂婚)제도가 존재했었다.

 

흉노의 신앙 체계는 천신사상이 강하게 나타나는데, 통치자 선우(單于)는 천신(天神)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제사장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통치자가 신의 아들로 표현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등장하는 천신의 대리자로서의 천자(天子)의 개념은 주왕조 설립자와 초기 왕조가 북방 유목민족 출신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북방 알타이민족의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상 숭배 사상은 흉노인들에게도 나타난다. 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관을 사용하였으며, 죽은 자가 생시에 사용하던 금, 은장식이나 의복 등을 함께 묻었다. 특히, 지도층 귀족이 죽었을 때는 노예를 함께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흉노사회에는 샤마니즘의 흔적도 많이 나타난다. 인간과 신을 중개하는 무당이 있었으며 주술도 행했다. 또한 어떤 무당들은 의술도 행했는데, 한서(漢書)에는 흉노 사회의 무당이 실신한 사람을 의술을 사용하여 치료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5) 훈 제국

 

흉노제국이 선비와 중국의 연합군에 의해서 기원후 155년에 멸망된 후, 흉노의 지도층은 세력을 잃고 서진(西進)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서진하여 우랄산맥을 넘어 정착하게 된다.

 

흉노제국이 붕괴된 후 약 2세기가 지나서 유럽에 돌풍을 몰고온 훈족(Huns)은 바로 이 흉노제국의 후예들로서 중국의 중앙아시아 정벌 후에 서북쪽으로 이동한 집단일 개연성이 많다. 학자들이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군사 전술, 문화의 유사성, 그리고 흉노와 훈 두 이름의 유사성 등에 기인한다.

 

흉노(匈奴)라는 이름은 우리가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원시 알타이어(Proto Altaic) 흉(hyung)과 중국어 노(奴)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훈(Hun) 혹은 흉(Hyung)족을 경멸시하여 부르는 것으로 중국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조어(造語)이다. 즉, 흉노인들은 자신들을 흉(hyung) 혹은 훈(hun)이라 불렀으나, 중국인들이 경멸조로 이 말에 '노예'를 의미하는 노(奴)를 첨가시킨 것이다.

 

훈족은 4세기 중엽 알란(Alan)國을 정복한 후, 374년경 볼가 지역에 등장했다. 당시에 흑해(黑海) 북부 지역 돈 강과 드네프르 강 유역에는 東고트族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서부지역에는 西고트族이 거주하고 있었다. 반달族은 헝가리 지방에 살고 있었다. 이외에도 슬라브계 및 페르시아계 종족들이 흑해 북부와 발칸반도 일대에 분포되어 있었다.

 

 

 

훈제국은 기마를 사용한 기동력과 기마전술를 가지고 東코드를 공격하여 374년 동코트를 붕괴시켰다. 훈제국은 후리문트(Hurimund)를 동코트 통치자로 임명하고 서코트를 공략하여 375년 서코트 왕 아타나리크(Atanaric)를 불가리아 지역으로 몰아내었다. 이리하여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훈족에 밀린 서코트의 로마 유입으로 395년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급격히 분리되었다.

 

이와같은 훈족의 침입으로 코트족 이외에 동유럽의 부족들이 로마 영내로 유입되기 시작하였고 이탈리아 로마는 크게 위협되었다. 로마가 분리되면서 훈족의 로마 침입은 가속화되어 주력 부대가 발칸반도와 트라키아(Thracia), 또 다른 주력 부대는 코카서스와 에르주름(Erzurum)을 거쳐 아나톨리아 반도로 진격하였다.

 

훈족의 로마 공략과 대외외교는 400년경 울드즈(Uldyz) 통치시대에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다. 동유럽의 여러 부족들을 압박하던 울드즈는 투나 강 유역을 공격하였다. 이에 다시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반달족과 훈의 공격을 받아 서진한 서고트가 이탈리아 변경으로 몰려들었다. 로마 장군 스틸리코는 402년 알라리크(Alaric)가 이끄는 서고트족을 패퇴시켰다.

 

그러나 다음에는 동고트의 라다가이수스(Radagaisus)장군이 반달족 등 여러 게르만족을 이끌고 로마를 공격하여, 이탈리아는 매우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훈제국이 개입하여 훈의 울드즈와 로마군 연합군대는 라디가이우스 군대를 제압하고 라디가이우스를 처형함으로 로마는 구출되었고 훈제국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훈제국의 영토는 아랄 해 동부지역에서 동유럽, 발칸반도에 이르렀다.

 

410년 울드즈가 사망하고 카라톤(Kara Ton)이 훈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카라톤은 412년에서 422년까지 훈제국의 동부지역을 통치했으며, 422년에 훈왕족의 루아(Rua), 문추크(Munchuk), 아이바르스(Aybars), 옥타르(Oktar) 왕자들의 권력투쟁에서 루아가 왕에 올랐다. 루아는 비잔틴제국을 제압하여 연간 금 350 리브레의 공납을 부과할 정도로 그 기세를 크게 떨쳤다. 루아는 434년 돌연 사망하고 훈제국은 드디어 아틸라(Attila)가 통치하게 되었다.

 

부친인 문추크가 일찍 사망하자 숙부인 루아 왕에 의해 양육된 아틸라는 40세에 왕이 되어 그의 형 블레다(Bleda)와 함께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아틸라는 왕위에 오른 후 비잔틴제국에 대해 연간 공납액을 2배로 올려 700리브레를 요구하였다. 비잔틴황제 데오도시우스는 아틸라의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틸라 통치 시대의 훈제국의 위세는 대단했다. 아틸라 시대에 훈제국의 영토는동서로는 우랄 산맥에서 알프스 산맥까지, 남북으로는 카프카스야에서 발트 해안에 이르렀으며 약 45개여 종족을 다스렸다.

 

 

아틸라의 정복사업은 계속되는 가운데 445년 그의 형 블레다가 사망함으로 아틸라 1인통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 때에 훈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여동서로마를 완전히 장악하고 서아시아에 서 중부 유럽에 이르는 전 지역을 통치하였다.

 

452년 봄에는 드디어 아틸라의 서로마제국 원정이 시작되었다. 아틸라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줄리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베네치아 근교에 도달하였다. 교황 레오 1세는 사절단을 데리고 7월에 아틸라를 방문하였다. 로마제국과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는 교황은 로마의 파괴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아틸라는 이 청을 받아들여 철수하였고, 동서 로마 통치를 선언하였다. 그는 마지막 정복 대상인 사산조 페르시아제국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철군 후 아틸라는 급작스런 출혈로 60세 나이에 사망했다.

 

아틸라 사후 훈제국은 내부 분열하기 시작했다. 일레크(Ilek), 뎅기지크(Dengizik), 이르네크(Irnek) 등 아틸라의 세 아들 가운데 먼저 왕이 된 일레크는 게르만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뒤를 이는 뎅기지크는 비잔틴 자객에 의해 사살되었다. 이르넥(Irnek)가 집권했을 때는 이미 훈제국은 크게 기울러 있었다. 이르네크는 훈족을 이끌고 남부러시아로 이주하였고, 훈제국은 종말을 고했다. 후에 이들 훈족들에 의해서 헝가리와 불가리아가 탄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