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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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신(肅愼) / 읍루(挹婁) / 말갈(靺鞨)

자연정화 2018. 6. 19. 13:21

숙신(肅愼) / 읍루(挹婁) / 말갈(靺鞨)

 

숙신(肅愼 영어: Sushen, 중국어: 肃慎, 병음: Sùshèn)은 주대(周代)에 중국의 동북 지방에 살던 동이인 퉁구스계 민족을 일컫던 말이다. 식신(息慎, Xīshèn), 직신(稷慎, Jìshèn), 주신(朱申, Su-shin)이라고도 불렸다.

 

역사

북쪽에 살던 퉁구스족의 일부는 연해주나 만주 같은 지역으로 남하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주로 목축이나 농업 등에 종사했다. 부족국가의 형태를 하고 있었기에 문자나 도시가 없었고, 이에 따라 그 언어의 문자기록이나 도시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이후 만주족, 여진족 등의 조상이 되었다고 추정된다.

 

 

숙신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공자가 편찬한 『춘추(春秋)』에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소공 9년조에 보면 ‘肅愼·燕·毫 吾北土也’라고 하여 숙신은 연(燕)·호(毫)과 아울러 중국의 북방에 있다고 하였다. 『사기(史記)』「오제본기(五帝本紀)」의 제순조(帝舜條)에도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渠廋·氐·羌·北山戎·發·息肅·東長·鳥夷’라고 하였는데, 후한 정현(後漢 鄭玄)의 주(註)를 보면 ‘息愼 或謂之肅愼 東北夷’라 하였다.

 

따라서 숙신(肅愼)·식신(息愼)은 고대 중국인들이 만주 지방에 살던 동북이(東北夷)를 일컫던 막연한 호칭으로서, 그들이 살던 지역의 방향을 나타내는 ‘동(東)’ 또는 ‘동북(東北)’과 관계가 있었던 명칭이 아닌가 추측된다. 주대(周代)에는 이처럼 막연한 개념으로 숙신이라고 통칭하였으나, 삼국시대에 위(魏)나라가 비로소 만주 지방을 정벌하자, 구체적으로 이 지방의 사정을 알게 되었으며, 이때에는 만주 지방에 살던 동북이를 숙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읍루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내굉(池內宏)은 「숙신고(肅愼考)」에서 중국 고전상에 유명한 고숙신씨의 정체를 역사적으로 고증할 방법은 없으며, 삼국시대에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에 새로이 들어온 읍루가 마침 고시(楛矢)·석노(石砮)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고숙신씨와 읍루를 동일하게 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주대(周代)의 숙신 이래 역사에 쓰이던 명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숙신(肅愼, Suk-chin)-주대(周代)

주신(朱申, Su-shin)-전한대(前漢代)

읍루(挹婁, Dyūr)-후한(後漢)·삼국시대(三國時代)

철아적(徹兒赤, Dzur-chi)-당대(唐代)

주리진(朱里眞, Jur-chin)-송대(宋代)·원대(元代)

여진(女眞, Jur-chin)-명대(明代)

여직(女直, Jur-chi)-명대(明代)

노아진(奴兒眞, Nyur-chin)-청대(淸代)

 

조선이란 말도 숙신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오늘날 퉁구스어에서 Sokze(n), Sokcen이나 몽고어에서 Juksen은 ‘예(禮)’를 가리키는 말이다. 언어학적으로는 이러한 말들을 숙신의 대응어로 들 수 있으나, 그 직접적인 관계는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만주 지역에는 일찍부터 여러 계통의 민족이 들어와 살다가 이동하였기 때문에 고대의 숙신 이래 여진족이 출현하기까지 적어도 몇 차례의 민족이동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고숙신씨와 청왕조를 세운 만주족을 동일한 종족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서 열전(晉書 列傳) 사이(四夷)의 숙신씨(肅愼氏)에 대한 기록

 

숙신씨는 일명 읍루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 북쪽에 있으며, 부여에서 60일 쯤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연해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에까지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사방 수천리에 뻗쳐 있다. 사람들은 심산궁곡(深山窮谷)에 살며, 그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통행하지 못한다. 여름철에는 나무 위에서 살고 겨울철에는 땅굴에서 산다.

 

그 나라에서는 부자(父子)가 대대로 세습하여 군장(君長)이 된다. 문자가 없기 때문에 언어로 약속을 한다.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단지 재산으로 여길 뿐이다.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 고기는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은 짜서 포(布)를 만든다. 낙상(雒常)이라는 나무가 있는데, 중국에 성제(聖帝)가 새로 제위에 오르면 그 나무에 껍질이 생겨 옷을 지어 입을 수 있다고 한다. 우물이나 부엌이 없으며, 와격(瓦鬲)을 만들어 4~5되의 밥을 담아서 먹는다. 앉을 때는 두 다리를 뻗고 앉으며, 발에 고기를 끼워 놓고 씹어 먹는다. 언 고기를 얻으면 그 위에 올라 앉아서 체온으로 녹인다.

 

그 지방에서는 소금과 철이 생산되지 않으므로, 나무를 태워 재를 만들고 물을 부어 즙을 받아서 먹는다. 그 사람들은 모두 편발(編髮)을 하고, 포(布)로 지름이 한자 쯤 되는 가리개를 만들어 앞과 뒤를 가리운다. 혼인하러 갈 때에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는데, 여자가 결혼을 승락하면 그 깃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에 예를 갖추어 맞아 온다. 부인(婦人)은 정숙한 반면 처녀는 음란하며, 건강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는 천하게 여긴다.

 

죽은 사람은 죽은 그 날에 곧 바로 들에다 장사를 지내는데, 나무를 짜 맞추어 작은 곽(椁)을 만들고 돼지를 잡아서 그 위에 쌓아 놓고는 죽은 사람의 양식이라고 한다. 그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을 서로 숭상하므로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곡(哭)하지 않는데, 곡하는 사람은 씩씩하지 못하다고 한다. 도둑질을 한 사람은 물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모두 죽인다. 그 때문에 비록 들에다 놓아 두어도 훔쳐가지 않는다.

 

숙신에는 돌로 만든 살촉(石砮)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과, 석자 다섯치의 단궁(檀弓)과, 한 자 몇 치쯤 되는 길이의 고시(楛矢)가 있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운데, 그 돌을 채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하여야 한다.

 

주(周) 무왕(武王)때에 그 고시(楛矢)와 석노(石砮)를 바쳤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하던 때에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였다. 그 뒤 1000여년 동안은 비록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강성한 세력으로도 그들을 오게 하지 못하였다.

 

문제(文帝)가 위(魏)의 정승이 되었을 때인 위나라 경원(景元)(260~263년) 말경에 고시(楛矢)·석노(石砮)·궁갑(弓甲)·초피(貂皮) 따위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위제(魏帝)는 그 물건들을 승상부(丞相府)에 보내도록 명하고, 숙신의 왕 녹(傉)에게는 닭·비단·모직물·솜을 하사하였다.

 

무제(武帝)의 원강(元康)(291~299년) 초에 다시 와서 공물을 바쳤다. 동진(東晋)의 원제(元帝)가 진(晋)나라를 중흥시키자, 또 강좌(江左)에 와서 그 석노(石砮)를 공물로 바쳤다.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서는 후조(後趙)의 석계룡(石季龍)에게 통호(通好)하여 조공하였는데, 4년만에 비로소 도달하였다. 석계룡이 사신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언제나 소와 말이 항상 서남쪽으로 향하여 잠자는 것을 3년간 보고서, 대국(大國)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왔습니다.” 하였다 한다.

 

 

읍루(挹婁)

 

읍루(挹婁)는 숙신(肅愼)의 후예이자 말갈(靺鞨)의 전신이다.

후한(後漢)에서 오호십육국 시대 사이에 연해주와 그 부근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 동북쪽 천여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닷가에 임하고 남으로는 북옥저에 접하며 가히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땅은 산이 많고 험하며, 사람의 형상은 부여인과 닮았으나 그 말은 각각 다르다. 오곡과 베가 있고 붉은 옥이 나오고 담비가 좋으며 군장은 없으나 읍락 각각에 대인(大人)이 있다.

 

산림 사이에 살며 몹시 추우며 항상 토굴에 있어 깊은 것을 귀하게 여기고 큰 집은 사다리 아홉 개에 이른다. 돼지 기르기를 즐겨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두껍게 나누어 몸에 발라 이로써 바람과 추위를 막는다. 여름에는 벌거벗고 앞뒤를 베로 가린다. 사람이 냄새가 많이 나고 더러움을 알지 못하여 변소를 가운데 짓고 그 주위에 산다.

 

한나라가 흥한 이후로 부여에 속하고, 무리는 비록 적으나 용력이 많고 산세가 험한 곳에 살고 또한 활을 잘 쏘니 능히 사람의 눈을 맞추었다. 활의 길이는 네 척이고 노와 같은 힘이 들고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그 길이는 일척팔촌이다. 푸른 돌을 화살촉으로 하고 촉에는 모두 독을 발라 보통사람은 즉사하였다. 편안히 배를 타고 도둑질을 좋아하니 이웃나라에서 두려워하고 근심하였으나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동이와 부여는 음식의 종류를 모두 조두그릇을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만은 그렇지 않아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말갈(靺鞨)

 

말갈(靺鞨; 중국어: 靺鞨, 병음: Mòhé, 뭐허)은 6~7세기경 중국의 지린 성, 헤이룽장 성과 한국의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에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으로, 주나라 때에는 주로 숙신, 한나라 때에는 읍루라 불렸다. 본래 쑹화강 (松花江) 유역의 물길(고대 중국어: Miut Kit)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중세 중국어: Muat ɣat)이라 부른다. 이후 말갈 7부는 고구려에 복속되거나 통제를 받았으며, 속말말갈은 발해를 세우는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말갈의 최초 조상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 기록에 나오는 숙신이다. 숙신은 진시황의 진나라 이전의 종족이고 이들이 한나라 시대에는 읍루였고 남북조 후위 시대에는 물길 그리고 수, 당나라 시대에는 말갈이다. 이 말갈은 발해가 멸망하고 송나라부터는 여진이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들 종족명의 공통점은 모두 기록자 중심으로, 스스로 부른 종족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말갈임을 인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국사기》에는 1세기 무렵부터 말갈이 신라, 백제와 교전한 기록이 있는데, 이에 대해 다산 정약용은 이들 국가와 교전한 "말갈"은 예(濊, 동예)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들은 위치상 강원도의 영동, 영서에 있어서 영동말갈, 영서말갈로도 표기하나 퉁구스/숙신계통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僞)말갈(혹은 가짜말갈)"로 표기한다. 삼국사기의 이런 기록 때문에 강원도나 중부지방 내륙 등 한반도에도 말갈이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언급했듯이 동예 등 예맥계 주민이었거나 혹은 말갈이라고 불렸던 가짜말갈이며, 한반도로 내려온 말갈들은 극소수에다가, 대부분 한반도의 한민족에 동화되었다.

 

평안도 북부나 함경도 대부분의 경우는 고려, 조선 초기까지 말갈의 후손인 여진족들이 존재했으나 4군 6진 개척이후 이곳의 말갈, 여진족들은 한민족에 동화되거나 압록강, 두만강 북쪽으로 도망쳐서 그곳에 살게 되었다.

 

말갈의 7부족

 

속말말갈 (중국어 정체자: 粟末靺鞨, 병음: Sùmò Mòhé)

              : 지린 시

백산말갈 (중국어 정체자: 白山靺鞨, 병음: Báishān Mòhé)

              : 지린 성 (吉林省) 지방

우루말갈 (중국어 정체자: 虞婁靺鞨, 병음: Yúlóu Mòhé)

불열말갈 (중국어 정체자: 拂涅靺鞨, 병음: Fúniè Mòhé)

              : 헤이룽장 성 (黑龍江省)지방

                - 지금의 지시 시 (鷄西市) 및 무단장 시 (牧丹江市)

철리말갈 (중국어 정체자: 鐵利靺鞨, 병음: Tiělì Mòhé):

              : 헤이룽장 성 (黑龍江省)지방

                - 지금의 하얼빈(哈爾濱, 러시아어: Харбин)

월희말갈 (중국어 정체자: 越喜靺鞨, 병음: Yuèxǐ Mòhé)

흑수말갈 (중국어 정체자: 黑水靺鞨, 병음: Hēishuǐ Mòhé)

              : 헤이룽장 성 (黑龍江省) 지방

                - 지금의 솽야산 시 (雙鴨山市), 자무쓰 시 (佳木斯市), 허강 시 (鹤崗市), 이춘 시 (伊春市),

                   하바롭스크 지방 (러시아어: Хабаровский край) 지방

                - 지금의 비킨(러시아어: Бикин), 뱌젬스키 군 (러시아어: Вяземский),

                   라조 군 (러시아어: имени Лазо), 하바롭스크 (러시아어: Хабаровск)

 

이외에도 백돌부(伯咄部) : 납립하 유역

안거골부(安車骨部) : 하얼빈 의란현(依蘭県)에서 동쪽

불열부(拂涅靺鞨) : 안거골(安車骨部)의 동쪽

호실부(号室部) : 현재 수분하(綏芬河) 유역

등이 있었다.

 

말갈(靺鞨) 7부 중에 불열부(불열말갈), 백돌부(백돌말갈), 호실부(호실말갈), 안거골부, 흑수부(흑수말갈)는 퉁구스(숙신계)계 부족이며, 옛 부여와 북옥저 지역에 있는 속말부(속말말갈), 백산부(백산말갈)는 예맥계인 부여와 옥저에 숙신계가 혼합 되어있었고, 점차 고구려화된 부족이다. 고구려가 성장하면서 대부분의 말갈부족은 고구려의 직, 간접지배를 받게 된다. 이외에 사모말갈(思慕靺鞨), 군리말갈(郡利靺鞨), 굴열말갈(窟說靺鞨), 막예개말갈(莫曳皆靺鞨) 등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