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 周가 殷을 멸함과 箕子 比子 微子 三仁의 비극
이어추장(제가추장)들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오르니 이가 주 문왕이다. 은 나라의 열후로서 백자 벼슬에 봉함을 받고 있었다. 문왕은 천성이 왕위에 관인 후덕하여 六국 제후의 신망을 받고 은을 제압하였다. 도사 여당(강태공)을 師父로 맞아 국권을 공고히 하고 아들 무왕이 二대왕으로 登立한 후 은을 멸하였다. 周는 지나족(支那族)으로 중원에 군림하니 후세 모든 사서(史書)는 모두 주를 정통으로 편찬하였다. 殷은 동이족을 포함한 묘족이 주체를 이룬 나라로 그 시대에 문물이 상당히 발달하고 예악이 성하였다. 미개한 周에게 패하니 國人이 불복하여 사방에 民亂이 일어나니 조선의 접경 제후국 음(음)나라는 조선서경열국인 희이 제후의 도움을 받아 주를 공격하니 (朱子曰奄東方之國陳氏曰此奄與淮夷三監同助武庚以叛 『書傳』) 주의 무왕은 대군을 이끌고 반란군을 정벌함에 조선은 국경을 방위하고 전쟁에 가담하지 아니하였다. 무왕은 패잔 반군이 하북성 조선국으로 도피하였으나 추격하지 아니하고 東夷와의 충돌을 피하였다. 周는 殷을 정복한 후 은나라 백성들을 낙읍으로 옮겨 새로운 왕도 건설의 대역사를 벌여 은나라 백성들을 勞役에 투입하였다. 무왕이 출정한 틈에 은나라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무왕은 포고를 내려 은나라 국민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을 노역에 종사케 한 것은 이것이 너희들의 운명이거늘 나 없는 틈에 너희가 반란을 일으켰으니 너희 四개국 백성들은 모두 죽여 없앨 것이나 내가 너희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너희를 살육하지 아니하고 낙읍에서 노역에 종사케 하여 나의 신민을 삼는 것은 周나라 조정의 美德의 소치니라 하였다. (我來自商奄之時汝四國之民罪皆應死我大降爾命不忍註戮乃至明治天罰移爾遠去于洛以親比臣我宗周有多遜之美 『書傳』) 옛날 은나라에 한 도사가 살고 있었는데 성은 여씨고 이름은 望이며 자는 자아라고 하였는데 후에 강씨 성을 하사 받아 그의 벼슬을 따라 강태공 강자아 여망 등으로 불리운 사람이 살고 있었다. 원래에는 동이 족으로서 동방 노나라에서 왔다고 하였다. 학문이 道를 통할 경지에 이르고 일찍이 치우 병법을 익혀 천문 지리에 통달하고 인후 돈독한 품성이였다. 벼슬과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고 오직 수도에만 전념하니 가난을 면치 못하여도 벼슬을 탐하지 아니하고 八十에 이르도록 고생을 같이하든 아내는 견디다 못해 그를 버리고 가 버렸다. 때에 유왕의 행패로 기우는 나라를 구할 수 없음을 천기를 보고 점치고 있음이었다. 殷이란 어떤 나라인가 옛날 상나라는 은나라 백성에게 七百理 땅을 주어 속국을 삼았는데 六개 종족이라 하였다.
(皆七百里之守兼商殷之民賜以附庸殷民六族 『漢書』) 周나라가 殷을 멸하고 중원의 종주국이 되니 漢족 周의 온 국민이 노래하고 춤추며 시를 지어 축하하고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東方군자 지국 동이국에서 봉황이 날아오르고 수많은 새들이 함께 날아와서 경축한다 하였다. (興也鳳凰靈鳥也出於東方君子之國見則天下安寧飛則群鳥從以萬數慶燐同 『侍傳』)공자께서도 이르기를 하늘의 이치로 周나라에 운이 돌아와 다시 인간의 도리가 행하였다 하여 기뻐하였다. (孔子曰天道循環周而復始人道亦然) 또 왕도 근처 높은 언덕에 봉황이 나타났다 하여 후세 학자들이 일제히 축하하며 가로되 봉황이 나타남은 周가 융성할 조짐이라 하고 봉황이 동방 군자국을 나와서 주나라로 왔으니 천하가 편안함을 볼 수 있고 날으면 모든 새들이 함께 날아 서로 즐거워 한다 라고 시를 지어 경축하였다.
때에 대단군 조선 제국이 내란이 빈번하여 열국이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周가 중원에서 일어나니 봉황이 나타났다 하여 운명적 징후로 보았다. 은 王은 주후를 서백(西伯) 벼슬을 주어 리(彎)국의 열후에 봉하였던 바 부패한 은王을 밀치고 王이 되어 주문왕은 비록 열국의 종주국으로 군림하였으나 여러 종족의 열국 제후 추장들이 언제 배반할지 모르는 처지임에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처지인데 좌우에서 말하기를 천하를 통치하려면 어진 인재를 얻어 자문을 구해야 하온데 지금 渭水가에 한 도사가 있어 능히 우주를 붙뜨는 지략이 있다하옴니다. 이사람에게 천하사를 물어 보시면 근심을 덜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문왕이 가로되 나 또한 전일에 그런 위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나니 그대는 이제 곧 從者를 데리고 가서 모시고 오라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奏請은 그 사람은 전일에 殷王이 여러 차례 불러도 가지 아니하고 곤궁하면서도 벼슬도 받지 아니 하였사옵니다. 은왕이 어질지 못하니 섬길 수 없다는 생각이옵니다. 주상께서 예를 갖추어 스승으로 모시면 응할지 모르오나 부르면 멀리 피할 것이 옵니다 하였다.
주왕이 크게 깨닫고 내 미처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도다 하고 목욕 재계하고 예를 갖추어 侍中을 데리고 호위병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위수가에 행차할 새 사전에 통고치 못하게 하고 여망의 집에 이르니 초라한 오두막에 노파만 있을 뿐이라 물으니 위수에 낚시 갔다 하는 지라 강가에 가서 주위 농부에게 물으니 저기 있는 늙은이 온데 꽂은 낚시로 고기는 낚지 못하고 먼 곳만 바라보는 괴상한 늙은이를 무엇 하러 찾느냐 하였다. 문왕은 가까이 가서 서 있어도 한나절이 되어도 돌아보지 아니하니 근시가 문왕의 행차를 전하고자 한 것을 만류하고 그대로 돌아왔다. 이러하기 삼일만에 문왕은 입을 열어 사부는 낚시를 즐기나이까 하고 인사를 하였다. 그제야 여상은 낚싯대를 버리고 엎드려 소신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하였다. 문왕은 손을 잡고 일으켜 함께 수레를 타고 환궁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八十이었다.
여상 여망 강태공이라 하여 주나라 八백년 기업을 이룩한 초석이며 저 유명한 명언 즉 天下는 非一人之天下也라하여 무왕에게 천하는 만백성의 것이지 王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여 독재정치를 못하게 경계하였다. 은나라의 왕자 微子는 나라가 망함에 이르러 太師 箕子와 小師 比干을 불러 선후 책을 의논함에 비간은 비통하여 묵묵부답이고 기자는 나라와 함께 망할지언정 내 한사람의 영화를 위하여 周를 섬기지 아니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하여 기자는 은나라 백성이 모두 주나라의 奴隸가 되는 것을 참아 볼 수 없으니 죄 없는 백성들이 장차 나와 함께 주나라의 종이 될 것이니 내가 장차 누구의 녹을 먹는단 말이냐 하며 문왕의 은작을 거부하였다 (箕子所爲商其論常我罔爲臣僕是也言不幸而遭國之將亡與此無罪之民將俱被因盧而同爲臣僕未知將僕何人而受錄 『侍傳』) 후에 기자는 동이족에 귀의하고 비간은 마지막 극간하다 걸주에게 처형되고 太子 미자는 주나라에 항복을 거부함에 제후국으로 강등한 명분만의 은나라王으로 예우하고 기자는 무王이 殷을 정벌한 후 기자를 방문하였다.
무王은 말하였다 "오직 하늘은 백성들이 서로 화합하고 살도록 음호하니 내 그 윤리를 아는지라 올바르게 하고 있는지 물었다. 기자는 말하기를 옛날 큰물을 막는 것은 五행치수법으로 막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무왕은 자신의 치적을 치하할 줄 알았는데 그 말을 듣고 오행치수홍범구 등을 따르지 아니하고 크게 노하였다. (周武王伐紂箕克殷訪問箕子武王曰於乎維天陰定下民相和其居我知其常論所序箕子對曰在昔??鴻水?陳其五行帝乃震怒不從鴻範九等 『史記』) 이에 무제는 기자를 포섭코자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였다. 그러나 기자는 周나라에 신하될 것을 거절하였다. (於是武王乃封箕子於朝鮮而不臣也 『史記』) 또 주서에 이르기를 기자가 홍범의 진리를 강의한 후 무왕이 조선왕에 봉했으나 기자는 신하되는 것을 거부하였다. 대개 기자가 주나라 신하됨을 거부하는 지조를 무왕도 어찌할 수 없었다
(箕子陳洪範之後武王封于朝鮮而不臣也盖箕子不可臣武王亦遂其志而不臣之也 『書傳』)
이밖에도 기자가 무왕에게 불복하고 은나라의 신하로서 節介를 지켰다는 기록들이 많이 있으니 공자도 그러한 절개를 찬양하여 가로되 미자와 비간과 기자 세 사람의 어진이여 세 사람의 어진 행위는 비록 같은 길은 아닐지라도 모두 天理에 맞는 바른 행동이라 하였다
(孔子曰說有三仁焉三仁之行雖不同而皆出乎天理之定 『書傳』) 또 기자가 폐허가 된 은의 古都 등을 다니며 백성들과 함께 슬퍼하고 숨어살며 狂人행세를 하여 무왕의 봉작을 피하고 지냈다고 古史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부귀영화에 뜻이 없고 大義를 지켰다고 孔子는 찬양하였다. 동이의 나라로 갔다는 것뿐 왕의 봉작을 받은 古史기록은 없다. 비참한 처지에 이른 은나라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간 것인바 기록에 오천의 무리를 이끌고 갔다는 것이지 조선왕이니 무왕의 봉함을 받았느니 하는 말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리고 양심 있는 史家들도 조선왕을 봉했다는 말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한 기록들이 있다. 따라서 唐왕 이세민이 모든 사기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라고 변조하였으나 그 반증되는 기록을 모조리 고치지는 못했다. 옛 기록에 없는 것을 아무런 고증 없이 무조건 그러한 변조를 한 것이다.
그 이유인즉 이세민과 그의 주위 사관 온언박 등의 공명심에 도취한 결과로서 당시 당의 이세민은 천하 유일의 황제가 되고자 항상 침략의 위협을 받고 있던 흉노를 달래여 세페를 받치고 정략결혼으로 사돈을 맺고 북방의 안전을 확보한 후 이 세상에 유일한 적 고구려 정복의 계략을 꾸민 것이라 이세민은 스스로 어질고 덕망 높은 聖君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다. 그러나 고구려 정복은 분명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행위로서 그것을 옛 중국 영토를 회복하는 일이라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한 무왕이 조선 침략에 내세운 명분도 그러한 것이였다, 그리하여 주나라 무왕이 조선왕을 봉하고 한 무왕이 四군을 설치한 중국 땅을 회복하는 전쟁이라는 역사 변조를 강행한 것이다. 당왕 이세민은 원래 흉노의 손자로서 수나라 때에 전쟁에서 공을 세운 공로로서 李씨의 성을 하사 받은 자 이다. 그러한 그의 흉노 특유의 침략 정신은 고구려 황제보다 자기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망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 변조를 계기로 중국의 역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저서에 무왕봉기자조선 한무왕 한사군 설치라는 허위 기록을 되풀이하여 그에 반증되는 古代기록들을 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에도 중국의 역사 서적뿐 아니라 지도들도 변조해서 발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자가 변절하여 조선왕에 봉함을 받았는지 아니면 기자에게 무왕이 내린 조선왕에 봉한다는 작호를 거부하고 절개룰 지켰다고 三仁이라 칭송한 것이 공자가 허위로 쓴 것인지 여부는 중국 사학가들의 양심에 맡길 것이다. 기자는 은나라 국민의 고초를 보고 내가 군자의 나라 동이국으로 가고저하니 원하는 자는 나를 따르라 하니 백성들은 주나라 오랑케의 奴僕이 될 수 없다 하며 군중이 기자를 따라 동으로 향하니 민족의 대이동이였다. 이러한 상황은 주나라로서는 그들의 노예가 된 은나라 국민이 빠져나가는 것을 방관한 것은 어떤 까닭인지 나라의 노예가 너무 많으면 국비의 과다 지출과 또 하나는 은나라 국민을 벽지로 옮기고 그 요지를 주나라 국민이 이주하는 바 자연적으로 비우는 것은 막을 필요가 없다는 두 가지 이유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역사 기록은 다만 기자가 五千의 무리를 이끌고 조선으로 갔다라고만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험하고도 긴 수천리길을 남부여대하고 조선 왕검성험독(지금의 산동성)에 다다르니 도중에 굶어 죽고 병들어 죽고 살아남은 피난민은 五千에도 못 미쳤다. 이 때 二十五世 단군 솔나천왕은 은태사 기자가 인덕이 고매한 현인 군자라는 것을 알고 그를 환대하여 접견하고 원로의 고생을 위로하고 서화의 땅 營주에 定着케한 후 기자를 번조선후에 봉하고자 하니 기자 아뢰기를 망국의 대부 성상의 거둠을 얻어 함께 피난온 무리와 생을 얻었사오니 이상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천王은 그의 인품이 믿을 만함을 보고 이르기를 그대는 현인구자의 기모로서 능히 나랏일을 맡아 善治의 공을 이룰 것인즉 사양치 말라 하였으나 기자 固사하고 말하기를 성상의 聖恩이 망극하오나 신이 감히 聖旨를 받들지 못하옴은 이제 신이 위작을 받자 오면 은나라와 주나라 사람들이 신을 가르켜 작위의 유혹을 받고 이곳으로 도피해 왔다 할 것이니 이는 불쌍한 백성을 구하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피신한 본의가 아니옵고 주왕 또한 聖上을 원망할 것이 옵니다. 그러하오니 원컨대 신으로 하여금 성은을 입어 여생을 편하게 지내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하며 끝내 사양하였다.
이리하여 천왕은 하는 수 없이 그에게 제후의 예우로 정착케 하였다. 이 때가 BC 1100년경이였다. 한 고왕과 당왕 이세민에 의하여 조작된 여러 사서에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였다. 그것도 대단군 조선국 천왕의 허락도 없이 제국의 王으로 봉했다 하였으니 그 어떠한 역사적 각종 기록이나 주위 여건도 있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망언이다. 다만 후세사관이 날조한 평양의 조선왕 기자가 아닌 은나라에 동일 명칭 기자는 있을 수 있을 것이나 한 무왕 시대의 학자 반사고도 이를 정면으로 부인하여 무제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은나라가 衰亡하여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라고 역사의 기록이 있는데 무왕이 조선을 토벌하여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고 하였으니 서로 맞지 아니하다 하여 간접적으로 사기 변조를 지적하였다 (殷道衰箕子去之朝鮮武王伐討封箕子於朝鮮如此不同) 당시의 여러 기록들을 살펴보아도 무왕이 조선을 정복한 기록도 없고 미약한 주나라가 감히 단군 조선 대 제국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라 일본의 僞造史記를 기화로 그것을 근거로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에 봉하고 그것도 당시의 조선 본토인 산동 하북 요동도 아닌 한반도의 평양에 수도를 하였다 하고 이것을 정사로 배우게 하여 역사가도 맹목적으로 식민 사관에 동조케 한 희극이다.
무릇 역사란 광범한 사료를 종합 보전하고 객관적 시야에서 면밀히 감시해야 할 것이며 상기한 역사관으로 여타 모든 역사 기술에 응용하였으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건은 기본적으로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기초가 되었다. 周나라의 원명칭은 南이고 南方제후국이다. 주나라는 본래 禹貢 雍洲境內 岐山之陽이며 文王의 세대에 이르러 국력이 신장하고 상은의 걸왕 세대에 은의 폭정으로 은을 정복할 기회를 잡았다. 시전(侍典)에 周나라의 문왕은 나면서부터 성덕이 있고 또 聖女 사씨를 배필로 맞아 비로소 궁중 사람들이 정숙한 덕을 간직하고 시를 지어 칭송하였다. (周之文王生有聖德又得聖女?氏爲之配宮中之人其始至見其有幽閑貞之德故作是詩) 문왕의 ? 대사는 華國候의 딸로서 변주 진류현의 황성이 그 나라이다. 문왕비 ?氏는 모범적 성덕부인으로 당시 문란 미개한 부녀 사회에 경이적인 존재로서 문왕의 덕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요조숙녀(窈窕淑女)의 호칭을 받고 문왕을 성군의 덕을 쌓도록 큰 영향을 미쳤다. 후세 중국의 중화(中華)의 호칭은 문화의 꽃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유래되었고 요조숙녀의 성덕부인 대명사로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실로 천하가 망하고 성하는 것이 한 여자의 손에 달렸다고 비유하는 말도 여기서 연유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녀는 전무후무한 여성(女聖)이라 하였다. 주나라가 미개 몽매로부터 순화하는데는 이와 같이 문왕비와 강태공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기자가 周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거부한 것은 소씨 가로되 "기자가 周나라 신하는 아니하겠다하고 조선왕의 봉작도 받지 아니하고 무왕의 訪問을 받아 홍범의 이치를 강술한 것은 하늘이 이와 같은 도리를 우순에게 전하여 殷에 이르렀는데 자신에게서 그치고 무왕에게 아니 전하면 다시는 天下에 전할자가 없는지라 그럼으로 무왕에게 그것을 전한 것이고 그것은 무왕을 섬긴 것이 아니라." 하였다 (王訪道于箕子陳洪範王克殷釋箕子之因訪問以天道箕子以洪範陳之乃封于朝鮮홍而不臣홍浜蘇氏曰箕子之不臣周也易爲武王陳洪範也天以是道공之禹傳至於我不可使自我而絶以武王而不傳則天下無可傳者矣故爲箕子者傳道則可仕則不可 『書傳』 미루어 보건대 기자가 무왕에게 불복 신하면 면담도 사절해야 하는데 만나 주고 홍범을 강의하였으니 그것도 항복한 것이 된다는 후세 사가의 왜곡된 풀이를 할 소지가 있음에 불가불 天道를 후세에 전해야 하는 大義를 위함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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