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大檀君帝國의 周나라 征伐과 燕의 대단군조선 이탈
周나라는 武王 이래로 단군 제국에 대한 禮를 소홀히 하고 여러 諸侯國을 자주 침범하였다. 제27대 단군제국 豆密 天王은 관내 여러 諸侯國의 유대를 强化하였다. 요동 요서의 諸侯를 대동하고 수미리국(須密爾國) 양운국(養雲國) 구다천국(句茶川國) 등의 各王候가 예물과 문후사절(問候使節)을 보내 왔다. 그러나, 周는 武王 이래 使節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豆密 天王은 화북의 서언왕에게 命을 내려 周를 토벌하라 하고 인근 열후에게 命令하여 서언왕을 지원하라고 하였다. 이 때에 周는 무왕의 손자 강王때였다. 서언왕은 주위 열후들과 함께 大軍을 이끌고 주나라로 진격하였다. 중원 서북부를 점유한 조선군은 수도 서안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 때 周는 강왕도 그간에 죽고 그 孫子 목왕때였다. 목왕은 크게 놀라 天王에게 謝罪使를 보내고 周나라 영토의 半 이상에 이르는 36개 諸侯國을 조선 제국에 양도하고 天王에게 항복하였다. 중국 고전에는 단군제국의 주나라 정벌 총대장의 서언王 출생 경위를 고구려 주몽 천王 出生 경위 전설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으나 주몽 出生 시대 이전인 BC 千年경임으로 同一人은 아니며 후세 史家가 혼동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 서술에서 무왕이 숙진을 토벌하였는데 강왕 때에 이르러 조선이 다시 와서 서언왕이라고 칭하면서 九夷(朝鮮族의 總稱)를 거느리고 종주국인 周나라를 쳐서 서쪽 하상에 이르렀다. 주의 목王은 그 강성함을 두려워하여 東方 제후들을 서언王에게 갈라 주어 주관토록 하는 제후국은 36개국이며 어진 정치를 행하였다. 종주국인 주나라를 토벌했다고 기록한 것은 망발이다. 종주국인 단군제국이 주를 토벌한 것이다. (及武王滅討肅愼來獻康王之時肅愼復至候徐夷僭乎奈率九夷以伐宗周西至河上穆王畏其方熾乃分東方諸候命徐偃王主之行仁義陸地而朝有三十六國 『後漢書』)
이 곳은 단군제국의 서북지역 일부이며 이때는 단군 제국이 분립하기 전으로 주가 단군 제국에 사자를 보냈고 서언왕의 자손 일부는 성도로 나아가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이동하는 대로 주민이 따랐다. 그 일부 자손은 동으로 이동하여 만주로 들어와 해모수의 선조로 보인다. 주몽 성왕의 출생 전설이 역시 여기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당시 檀君 天王이 열국을 봉작한 것은 그 제도가 후세에 동이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은나라를 거쳐 주나라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공자의 출생지는 곡부로서 중국 사기에는 魯나라 사람(燕나라 안에 있는 魯라는 諸侯國)이라 하였고 조선족의 나라인 연나라인이라 아니하고 그냥 노나라 사람이라 하였다. 그리고 중국 사기에는 유명 인사에 관한 기록은 반드시 어느 나라 사람이고 누구 자손이다 라고 썼는데 孔子에 관해서는 그의 母系 기록이 있고 父系는 분명하지 않다. 공자는 중원 여러 종족이 분립한 제후들을 순방하며 구세철학 도덕경을 전파하고저 평생을 희생적으로 봉사하였으며 제후를 說服하고자 하였으나 中原의 漢族을 위시한 각 민족간에 도가 통하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후에는 동방군자국 조선에 가고 싶다고 여러 번 시도하였으나 老衰하였음에 弟子들이 말려 실행하지 못하고, 東夷族의 道德 規範이 中原 列國에서 실행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孔子悼道不行設浮欲居九夷有以也夫)
孔子는 中原의 四方 民族을 東은 東夷, 南은 南蠻, 西는 西戎, 北은 北狄이라고 불렀다. {周禮}에 東에 九夷, 南에는 八蠻, 서에는 육융, 북은 오적이 산다 하여 渭之四海之大夫君이라 하였다. 이러한 수십 종의 민족이 四海(四方)에 살고 군주가 있다고 이른다고 했다. 처음 東夷의 이는 그 뜻은 음이 큰 활쏘는 大弓으로써 다른 三方과는 뜻이 달랐으나 후세에 와서 한족이 중원을 차지한 후 漢 武王 시절에 글자와 뜻을 고쳐 부르고 기록했던 것이다. 東夷族이라고 쓰여 왔는데 언제부터 뜻과 글자가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족의 後進性을 수치로 생각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BC 640년경 조선 제국의 서역 변방인 연이 천왕의 정령을 받들지 않고 이때 연후는 제나라와 동맹하여 제국으로부터 분립을 꾀하는지라 천왕은 이를 고죽국의 두열후에게 훈령을 내렸다. 군사를 일으켜 연을 함께 정벌하자는 것이었다.
반심을 품은 연을 정벌할 것임에 정벌군을 도와 함께 연을 정벌하라고 배퍼명을 토벌장군에 임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연으로 진격하였다. 정벌군은 三路로 나누어 연도를 포위하고 四方으로 공격하니 왕도가 함락하고 연왕을 자칭하는 文候는 다급하여 齊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이 때 齊의 桓公은 문무를 겸비한 명재상 관중(管仲)의 경륜을 힘입어 제나라 72성을 무혈점령하여 일약 중원 제일의 강국으로 부상하여 6국 제후국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이제 연이 패전하여 구원을 청하니 연은 동방을 지키는 제나라의 방패라 이에 단독으로 조선 제국 대군이 연을 파하고 장차 중원 전정토를 휩쓸 형편이니 이제 격퇴하지 못하면 중원열국은 위험에 직면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아니하랴! 열국은 때를 놓치지 말고 전군을 동원하여 대전에 동참하라 하였다. 이에 전국 제후국의 군대가 속속 제나라로 집결하니 지모 탁월한 관중은 대장성부에게 步騎 10 만을 주어 이르되 장군은 곳 태행산을 넘어 불리지국을 음습하라 지금 그들 군사는 대부분 연을 치는데 출동하여 수성군이 허약할 것이다 하고 관중은 전군을 二路로 나누어 열국장수들을 지휘하여 연나라 도읍을 탈환하고 한 쪽으로 고죽국을 침공하여 그 나라를 점령하고 한편 성부도 주야배도하여 불리지국을 점령하니 이로써 조선 제국 2개열후가 함몰하고 조선제국 서경(西境) 방위에 큰 헛점을 가져왔다.
이 전쟁으로 중원의 조선족은 혼란에 빠져 일부 난민은 바다를 건너 험산고도(險山孤島)라고 알려진 조선 반도로 건너간 자도 있고 대다수가 요동 만주로 이주하였다. 패잔군이 선두에서 인솔하고 갔다. 전란으로 연은 제나라의 절제를 받게 되었으며 공자도 燕人 차림의 조선족 풍속을 버리고 한족 풍속으로 돌아가게 된 것을 관중의 덕으로 칭찬하였다.(孔子曰微管仲吾其被髮在? {書傳}) 연은 기후 정축 31년 연의 소왕은 악의(樂毅)를 상장으로 제나라를 정벌하여 단번에 제의70여성을 항복 받고 고토를 회복하여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조선제국 열후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한편 요동 만주로 이주한 고리국 후예들은 후대에 임희부(지금의 개로) 고도(古都)에서 나라를 세웠다.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은 숙진 예맥 말갈 등으로 불리는 동이족이다. 그들은 광야에 말을 달리고 마상에서 능숙하게 활을 쏘고 창검을 휘두르는 용맹한 기마민족의 기질로 삼한족의 집단들 이였다. 고리국에서 이주한 동이와 쉽게 융합하여 대부여국을 창업하고 장차 고구려 백제 신라의 모태이다. 옛날 周는 소공을 연후에 봉하고 후대 해후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후 연후의 수는 34대에 이른다. 제후란 나라의 왕족이다. 국가 유공자에게 명예로 내리는 후가 있고 한 지역을 지배하는 추장에게 후작을 내려 관리권을 가지는 것이 있고 국경 지역에 있는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는 추장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그 사람이 누구이든 그 때의 실력자를 후에 봉하는 단군 제국의 제도이다. 제나라 전성기에 지나족의 주나라는 주의 후기 쇠퇴기에 이르러 제후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약소국이였다. 다만 지난날의 종주국(宗主國)이라고는 명분으로 제후를 봉하는 허령제도이다. 그러나 그것은 연이 조선 제국으로부터 이탈하고 왕을 자칭하고 대군주를 꿈꾸는 유혹에 빠지기 충분하였다.
자고로 동방에는 九種 夷가 있는데 서쪽에 유연 거란제국(東方九種夷西有幽契丹諸國)이라고 분명히 해 온 타민족의 추장에게 候를 봉하고 왕국으로 격상하는 氣勢 그러하였다. 연은 비록 나라를 보전하였다고 하나 쇠약하여 관중의 손아귀에 들었다. 중국 {史記}들은 燕나라를 그들 역사 속에 편입하여 기록하고 있다. 상고컨데 공자의 생향은 노나라이며 노나라는 연나라에 속하였으니 연에는 한족도 섞여 살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 대전이 대단군 조선 제국의 통제 불가능한 비극을 초래하였고, 이것은 장차 동이열국간의 장기 분립으로 민족의 이질화를 가져온 불씨가 되었다. 원래 주가 봉한 연후는 연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으나 이로부터 중국 사서에는 동이열후가 아닌 周나라로 중국 역사에 편입하여 춘추 사기를 편찬하면서 그와 같이 기술하였다. 단군 治勢에는 象形 表意가 있었으나 100리밖에 있는 열국끼리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가림토라는 38자를 창제하였다. 우리 나라의 첫 문자가 천부경인데 환웅천왕이 하느님의 탁선을 기술케하였다는데 鹿圖文으로 기록하였다.
고운 최치원이 일찍이 篆古碑를 보고 이것을 베껴서 책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였으나 후세 사람들이 대체로 신라 중기부터 유학에 전념하여 이것을 버리고 발전시키지 못하였고 최치원 자신도 관심을 보였으나 이것이 출세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므로 이상 연구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 吏讀文字도 같은 결과로서 단군 천왕께서 태자를 우에게 보내어 금간옥첩을 전하여 중원 개척의 신기원을 열었다. 이 문자는 고대 동이족이 사용한 표의인즉 지금 우리가 쓰는 한자의 시초이다. 중원의 大聖 孔子께서는 이를 발전시켜 『詩傳』, 『書傳』, 『春秋』 등의 모든 사서를 한자로 기록하기에 이르러 그 深奧한 字義는 인간의 생활 철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우리는 이것을 한자라 하나 그 원류는 우리 동이족의 글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당시 이렇다 할 문자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고 우리의 역사를 상세히 기술하지 못하고 당학에 침적하여 모화사상이 싹트고 그것을 모방하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나마 書雲觀에 비치한 역대조의 古史는 朝鮮 太宗의 무리한 民의 史書 所持禁止令으로 개인의 소유를 없애고 다시 수집 보관한 것이다. 이후 유명한 일본 역사 제조 회사 사장의 별명을 가진 악덕 높은 역사 학자 今西龍이 완전히 소각하고 우리는 그들이 만든 식민 사관 역사에 매달린 형편에 이르렀다. 그러면 옛날의 일본은 어떠하였는가? 동이족에 속한 섬나라로 옷을 입지도 아니하고 몸에 붉은 문신을 하고 한 남자가 수 십명의 여자를 거느렸다.
(倭屬燕倭國在帶方東大海內以女爲主其俗露개衣服無鍼功以丹朱塗身不嫡忌一男子數十婦也 『山海經』) 이러한 일본에 단군제국 이래의 우리 나라 『史記』가 존재할 수 없음에도 그들이 조선의 고대사를 만들어 조선 역사라고 한 것을 우리 나라에서 지금까지 그 일부만을 수정하여 가르치고 있다. 중국은 어떠한가? 한족의 주가 은족을 멸하고 중원에서 종주국으로 군림하였으나 황하 너머 동이국의 통제를 받았다. 그런 기록도 있다. 진시왕이 연을 멸함으로써 중원 동북 지역의 조선족이 황하유역에서 밀려나는 비극을 맞았다. 주왕조와 은왕조는 대단군 조선제국에 조공을 바치고 상국으로 섬겨 온 것은 우리 고기에는 있으나 중국 사기에는 빠졌다. 지나족의 주나라는 집권 초기에는 미약하였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역내의 수십개 종족들을 공자의 문자 혁명으로 포섭하고 동화하는데 성공을 거두어 중원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나 감히 조선제국에 도전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여기에 중원의 한족 역사 왜곡을 본다.
魏略에 기자 이후 조선후(주의 통제국이라는 뜻)는 주나라의 쇠퇴함을 보고 연나라가 주나라에 맞서 스스로 왕이 되어 東域을 공략하려고 하니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쳐서 주나라를 섬기려고 했다. (箕子之後朝鮮候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朝鮮候亦自稱爲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또 기자가 5천명의 피난민과 함께 조선에 가서 무왕의 봉작을 받아 조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에 관한 모든 기록에 항상 이것을 근거 삼아 고대 조선을 축소시켰다. 그리하여 조선이 주나라에 충성하기 위하여 연을 치고자 했다고 하고 주나라가 조선 제국에 조공한 사실은 아예 기록이 없다. 이러한 황당무계한 『史記』를 조작하였다. 공자는 기자를 삼인(三仁)의 인물로써 절개를 지켰다고 찬양하였다. 후세에 와서 당나라 사학자는 무왕이 조선을 정복하여 기자를 조선왕에 봉했다고 기록하였다. 『史記』위조도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다. 고대 다른 어떤 중국 역사책에도 기자가 변절했다는 기록은 없다.
한무왕이 사마천의 역사 바로 쓰기를 트집잡고 역사 위조를 아니한다고 사마천의 불알을 까는 형을 가하여 『사기』의 고조선 기록 전부를 없애 버려 중간 부분이 없어진 채 중국 치부를 삭제케 하고 당왕 이세민이 어용학자를 동원하여 역사 위조를 강행하는 등의 관습은 지금 시대에도 남아 있다. 연후가 연왕을 잠칭하고 조선제국의 절제를 배제한후 조선 본국과의 전쟁은 상곡일대(北京一帶)에서 요하에 이르는 곳에서 그치지 아니하였다. 이러한 빼앗고 빼앗기는 동이족의 내란은 그칠 줄 몰랐다. 연이 점유한 대단군 조선 영토는 (代郡 鳴門 南은 ?郡地域 容城 范陽 北은 新城 故安 ?縣 良鄕 新昌 及 渤海之安此皆燕地 樂浪 玄?도 燕에 屬했다)라고 『漢書地理志』에 記錄하였다.
이것은 주나라 영토보다 큰 것이며 중원의 古朝鮮 영토 전부를 만주만 제외하고 연나라 영토로 기록하고 연나라는 중국 영토다라고 한 것이다. 그 이전 고대사에 국경에 관한 기록이 있다. 주나라와 연나라 사이 영토 경계선도 확실하게 하여 협을 경계로 「'陜'이란 하남성에 있는 유명한 오세지 함곡관을 말한다.」 동쪽은 연나라 소공이 관할하고 서쪽은 주나라 주공이 관장한다라고 약정하였다. (成王時召公爲三公自陜以西召公主之自陜以東周公主之 『史記』) 당시 주나라 영토는 서촉과 산동은 관경이 아니 였음으로 연나라의 ⅓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주는 종주국으로 행세하고 연나라와는 예물 등을 주고받는 관례가 있을 뿐 연은 주의 열후는 아니며 싸운 일도 없고 국경을 서로 존중하여 충돌을 피하였다. 중원 전국시대 말기에 연나라가 진나라에게 패하여 태자 丹을 볼모로 진나라에 보내여 휴전을 하였다가 오랜만에 풀려 나왔다. 태자 단은 원수를 갚고자 진시왕을 죽이려고 노심초사하였으나 두 번이나 실패하고 연나라의 멸망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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