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 殷의 箕子와 東夷 고죽국의 백이 숙제가 周나라 곡식을 안 먹는 절개와 조선대 제국의 倭國정벌
주나라에 불복하는 충절 중에는 고죽국(孤竹國, 백이국 고리국 영지국 등으로 불리는 나라)태자와 같은 사람도 있다. 고죽국은 단국제국의 제후국이다. 때에 은나라가 멸망하는 시기에 단국 제국도 통제력이 미약한 상황 이였다. 그 틈에 주나라는 고죽국도 그 지배하에 통제하였다. 고죽국태자 백이는 은나라에 유학하여 은나라의 태자와 함께 하여 은태사 기자의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는 무왕의 봉작을 거부하고 그의 아우 숙제와 함께 주나라 영토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먹지 않는다 하고 수양산에 들어가(당시 수양산은 조선 제국의 관경이였음) 그 산중에서 산나물을 캐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 공자 역시 기자와 같이 충절이라고 찬양하였다. 기자가 피난민을 인솔하고 조선에 온 것도 피난민을 구한다는 목적도 있었으나 주나라에서 생산되는 곡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도 그 목적 이였다. 그런 守節하는 인품은 피난민들과 함께 와서 삶으로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아니하였다. 무왕이 기자를 방문하고 치적과 치세에 대해 물었을 적에 기자가 홍범9편을 강의함에 무왕이 진노함을 전술한 바와 같거니와 백이 숙제가 망국의 한을 품고 수양산으로 들어간 비극은 그 나라의 비참한 모든 국민의 비극이였다. 은나라 국민이 비통에 빠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당시 그것을 시를 지어 탄식하였다. 이르기를 "期分尾分(산산히 흩어졌내) 流亂之子(정처 없이 떠다니는 관민이여) 叔分伯分(숙제와 백이의 슬픔) ?如充耳(냉소하듯이 못들은 척하네)"
초후(초후는 古竹國의 酋長)의 군신이 산산이 흩어져 유랑하니 가련한 형편였다. 그러나 위(衛)나라 관료들은 같은 동이족으로써 모르는 척하고 그런후에 어렵게 지냈다는 말을하니 위나라 사람들은 역시 이같은 행동을 하였다. (言초之君臣流離期尾若此其可憐也而衛之諸臣淑然如塞耳而無間何載至是然後盡其辭焉流離患難之余而其言之有序而不迫如此其人亦可知矣)
제후들은 비록 나라는 다르다 하여도 서로 어려움을 구해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초가 망하면 衛에도 어려움이 미칠 것인데 초나라 사람들의 고통을 구휼하지 아니함은 어찌된 것인지 그때 위나라는 하북에 있었고 초와 위는 영토가 북적과 접하여야 할 처지인데 그와 같이 피난민을 도와주지 아니함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眉山巍氏가 말하였다.
侍傳, 그 시대에 조선 제왕도 불안 상태로 中原 東北 地域의 諸侯들을 구하지 못하였다.(眉山巍氏는 古史五十篇을 지은 사학가였다.) 은나라가 망한 후 은의 덕망 있는 신료가 주나라에 항복해서 봉작을 받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은나라의 당시 선진의 도덕성은 그와 같았으며 은나라 사람들이 그 당시 부른 시에도 오랑캐(周나라)가 침입하여 물리칠 수 없는 터에 유왕이 色情에 침적하여 충신의 간하는 말을 듣지 아니 한다고 한탄하였다. 기자를 朝鮮王에 봉했다는 변조는 당시 무왕이 한4군을 설치했다는 역사 날조를 하기 위하여 안사고에게 강요했슴이랴! 아니면 후기에 당왕 이세민이 한 짓인지. 안사고는 문제의 역사를 변조하면서 {시전} {서전} 등에 기록을 모조리 없애는 작업을 소홀했다.
이러한 고서 기록이 남아 있음으로서 역사를 바르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국은 무왕이 조선왕을 봉했다는 것과 무왕이 한사군을 설치했다는 두 가지 허위 사실을 모든 후세 역사 기록에 강조하여 古代 東夷 군자국의 문화 사회에 뒤떨어진 국민의 열등감을 씻고자 이를 항상 앞세워 기술하는 역사 서적의 기본으로 삼았으며 일제 식민 교과서는 이를 근거로 한층 조선 고대사를 말살하여 일본사를 위조하고 이것을 근거로 삼아 식민 사관을 보급하였다. 여기서 부동한 식민 사관이 생겨 신중한 古代史 記錄을 참고 없이 국민의 역사관을 오도한 것이다. 공자는 주나라 사람이면서도 기자나 伯夷 叔齊같은 주나라에 불복하고 봉작도 받지 아니하는 인사들을 충절 지사라고 찬양하는 철학자로서 충효 사상의 윤리 도덕을 존중하는 성인이였다. 당시 주나라 사람들이 무왕을 성군이라 하였으나 공자는 무왕이 무력으로 통일을 했다고 왕도가 아니라고 하였다. 무왕은 각부 추장들을 그대로 두어 조선 제국 제도를 본따 제후에 봉하고 주나라를 섬기는 제후국이 되게 하고 종주국으로서 관할권을 가졌으며 제후 추장들의 반란을 막기 위하여 주왕의 딸들을 시집보내여 사돈을 삼았다. 비빈이 많았으니 딸도 많았을 것이다.
주왕의 딸은 姓이 姬氏니 王姬라고 불렀다. 그리고 타고 다니는 수레와 입고 다니는 옷은 화려한 성장이였다. (周王之女姬姓故曰姬下嫁於諸侯車腹之盛 {侍典}) 주왕은 제후 추장들에 가혹한 조공을 받지 아니하고 종주국으로 인정케하는 것으로 그치고 은나라 국민도 반항자를 학살하지 아니하고 노예로 포섭하여 차츰 주나라에 동화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후세 사가들은 그를 역시 성군이라고 호칭하였다. 공자는 물론 올바른 인군이 아니라고 평하였다. 이 때 주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고 해서 그 영토를 중원의 중심 지역뿐이고 지금의 하북 하남 산동성과 황하 일대는 모두 대단군 영토였다. 단군세기({환단고기})에 BC 909년 제30대 단군 나휼 천왕이 청구(靑丘, 수도)의 정사를 살피고 치우천왕의 공덕을 돌에 세기고 서쪽으로 엄독홀에서 列國汗들이 모여 열병하고 하늘에 제사를 올렸으며 흉노가 조공을 받쳤다고 하였다. BC 723년에는 웅襲(熊襲)이 반란을 일으켜 대장 언파불험을 海上의 熊襲에게 보내 평정하였다.
여기에 대하여는 後記할 것이나 해상이라 함은 倭國에 위치한 큐슈(九洲) 쓰시마(對馬島) 이키(臺岐) 시곡(四國) 등 4개 섬을 말하며 거기 강력한 추장 구마소(熊襲)가 반란을 일으켜 이를 토벌한 것이다. 근래에 와서 일본의 역사책은 이것을 일본의 고대사에 편입하여 일본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 倭國의 고대 인명에 무슨 마로(磨呂), 무슨 미고도(尊), 무슨 히꼬(彦)라는 것들은 당시 그곳의 통치 계급인 조선인이다. 日本史에 熊襲을 구마소라고 하는 것은 熊襲 즉 곰습을 일본 발음으로 구마소라 부른 것이다. 일본 고대사에 웅습에 관한 기록은 물론 후세에 와서 삽입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 반도에 인적이 드물고 남부 해안 지역에 약간의 사람들이 살고 거기서 가까운 일본 열도의 서남단에 있는 구주 지방과 교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대단군 제국의 월주지역 (上海 부근)과 행상으로 통하여 단군 제국 광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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