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영산강과 日 큐슈 고분 모양 놀랍게도 일치, 5~6세기 교류 활발했던듯

자연정화 2013. 9. 1. 22:08

 

고분 모양 놀랍게도 일치, 5~6세기 교류 활발했던듯

 

고분.jpg

후나야마 고분. 전남대 박물관 답사팀이 고분을 바라보고 있다. 이 고분 정상부위에 석실을 갖추었다.

촬영=권경안 <2006년 1월 20일>

 

 

일본 큐슈(九州)를 답사했다.

 

역사상 한반도와 가장 교류가 빈번했던 곳이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후쿠오카에 있는 고대 관청(官廳) 유적지 다자이후(太宰府)를 보면서 감회가 더욱 일었다. 백제 멸망 직후 이제 나라가 망했구나라고 탄식하며 일본으로 향했던 백제인들이 이곳에 도착했었다. 도착하자마자 방비를 위해 백제식 산성(山城)을 다자이후 뒷편에 쌓았었다. 그 산성을 보면서 백제인들의 숨결을 새겨보고자 했다.

 

이처럼 큐슈에는 한반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유적들이 즐비했다. 그 중의 하나가 구마모토(熊本)에 있는 후나야마(船山)고분. 생긴시기는 대략 5세기말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222DSC01831.JPG

후나야마 고분의 모형. 발굴조사결과에 따라 추정 복원된 형태이다. 촬영=권경안

 

앞쪽이 네모지고, 뒷쪽이 둥그런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다. 1965년 일본정부는 이곳에서 나온 금동관 금동신발 금동허리띠 등을 국보로 지정한 대단히 중요한 고분이다. 놀라운 것은 현지에서 모형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을 보는 순간, 영산강 유역에서 발굴된 것들과 마치 쌍을 이루듯 했다.

 

 영산강 유역에는 전방후원의 특성을 가진 무덤들이 남아 있다. 최근까지 조사한 것으로 14기가 보고되고 있다. 마한시대의 지역중심지였던 나주를 제외환 외곽지역에 흩어져 있다. 광주, 해남, 함평, 영광, 담양, 영암, 고창 등지다. 대부분 고분길이가 50m 안팎이다. 대략 5세기말~6세기전반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영산강 유역 전방후원형 고분은 북큐슈 지역의 것들과 형태가 비슷하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영산강 유역과 북큐슈 지역의 무덤형태와 출토물들이 비슷할까. 두 지역간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여기에 관한 한 아직까지는 만족할만한 답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선진문물의 일본 열도 전파라는 대세론이 있는 가운데 영산강 유역 사람들이 큐슈지역으로 이주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들이 양 지역의 친연성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6세기 초반 무렵 영산강 유역이 백제에 의해 흡수되고, 큐슈지역이 기내(畿內)지역 세력에 의해 복속되었다.  동반몰락이었다.

 

이것을 우연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여러 견해가 있지만, 양 지역은 단순한 외교관계를 넘어 정치적 파트너쉽을 갖는 단계까지 올라갔기 때문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여기에는 물론 여러 설들이 있다. 큐슈지역 정치적 실패자들이 영산강유역으로 망명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 흔적물이 전방후원형 고분이라는 추정이 고개를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