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영산강 마한 추정 세력과 백제

자연정화 2013. 9. 1. 21:41

영산강 마한 추정 세력과 백제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는, 백제는 마한의 묵인 하에서 건국을 하고 이어 시조왕 때에 이미 마한을 흡수하여 강국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요사이 주목되고 있는 영산강 유역의 옹관묘 세력을 보면, 동시기에 백제와는 다른 세력이 나주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의 영역은 어떻게 된 것이며, 또한 영산강 유역의 세력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 점에 대해서 알아보자.


2.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백제와 삼국지에 나타나는 백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백제의 모습은 삼국사기의 기록에서이다. 다음 기록을 보자.

왕이 군사를 내어 겉으로 사냥을 한다 하고 몰래 마한을 쳐서 드디어 그 국읍을 병합하였으나 다만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은 고수하여 항복하지 아니하였다. (시조왕 26년 10월)


두 성이 항복하므로, 그 성민을 한산 북쪽으로 옮겼다. 마한은 드디어 멸망하였다. (시조왕 27년 4월)

 

위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쇠약해가던 마한을 백제의 온조왕이 멸망, 흡수시켰다는 기록이다. 그런데 망했다던 마한이 중국측 기록에 남아 있다. 다음 기록을 보면,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하니 면적이 사방 4천 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으로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를 가꿀 줄 알고 면포를 만들었다. 각각 장수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고 했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성곽이 없었다. 마한의 여러 나라들로는 원양국,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탁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 백제국, 속로불사국……건마국, 초리국 등 모두 50여 국이다. 큰 나라는 1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만여 호이다.

 

위 기록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의 기록이다. 삼국지는 진나라의 진수가 편찬한, 중국 삼국시대인 220∼265년 사이의 역사를 담고 있는 정사이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따른다면, 3세기까지도 백제가 아닌 마한 중심의 역사가 진해되고 있고, 백제는 마한을 구성하는 국가 중의 하나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삼국지의 기록과 삼국사기의 기록은 어떻게 된 것일까? 백제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3. 백제 초기의 모습

백제와 마한의 관계를 나타내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다음 기록들을 보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을 잡아 마한에 보냈다. (시조왕 10년 9월)
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고하고 강역을 확정하였다. (시조왕 13년 8월)


왕이 웅천책을 세우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나무라기를, “왕이 처음 하수를 건너 용족할 곳이 없자, 내가 동북 100리의 땅을 떼어 안거케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터웠다 할 것이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이 있어야 할 것이어늘, 이제 나라가 완전하고, 인민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 하고 크게 성지를 만들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의리에 그러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부끄러이 여겨 드디어 책을 헐었다. (시조왕 24년 7월)

 

위 기록들을 살펴보면, 백제는 마한의 속국으로서 행동한 것으로 알 수 있다. 특히, 백제가 초기에 정착한 지역이 마한왕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아마도 마한왕이 북쪽의 위협 세력인 말갈과 낙랑 등의 적대 세력을 백제를 통해 차단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특히 시조왕 24년 7월의 기록과 다음의 기록을 비교하면 그 차이가 더욱 분명해 진다.

 

마수성을 쌓고 병산책을 세웠다. 낙랑 태수가 사신을 보내 고하기를, “근자에 사빙을 보내어 우호를 맺었기에 일가와 같이 여겼는데, 지금 우리 강역 가까이 성책을 만드는 것은 혹시 잠식할 계책이 있어서가 아닌가. 만일 구호를 저버리지 않고 성책을 헐어 버린다면 시의할 바가 없겠지만 혹시 그렇지 않다면 싸워서 승부를 결하자”고 하였다. 왕이 회답하기를 “요새를 베풀어 나라를 지키는 것은 고금의 상도이어늘 어찌 이로써 화호에 변함이 있을 것인가. 조금도 집사의 의심할 바가 아닌 것 같다. 만일 집사가 강함을 믿고 군사를 낸다면 우리도 이에 대응할 것이다.”하였다. 이로 인하여 낙랑과 실화하게 되었다. (시조왕 8년 7월)

 

위의 기록을 살펴보면, 똑같은 상황에서 백제왕은 마한에 대해서는 신속을, 낙랑에 대해서는 동등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즉, 백제는 마한의 속국임이 더욱 분명해 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동왕의 시대에 상국인 마한을 완전 병합하였다는 기록이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삼국지 동이전 한조에는‘마한인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르기 때문에 모두 장례용으로 써 버린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북방에서 이주해 온 온조세력이 고구려에서의 정치 경험과 새로운 전술의 구사를 통해 마한 세력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백제는 마한의 모든 지역을 병탄 하였을까?

 

 

4. 영산강 유역의 고분군

백제가 시조왕 때에 마한의 전 지역을 병탄 하였다면 요사이 주목받고 있는 영산강 유역의 실체에 대한 설명이 불가해진다. 그럼 먼저 나주 반남면의 고분군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선, 대안리에서는 12기의 고분군이 있는데, 그 중 4호분은 7세기 백제 석실분으로 밝혀져 있다. 그리고 8호분은 4기의 옹관과 단지, 뚜껑, 대접, 유리옥 등이 출토되었고, 9호분은 최대 규모로 직경이 47미터에 달하며, 9기의 옹관과 함께 금반지, 큰칼, 구리팔찌, 유리구슬, 토기 등이 출토 되었으며, 시기는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로 알려져 있다.

 

 

 

일제시기 나주 반남 덕산리 고분 발굴모습 

 

그리고 신촌리에서는 9기의 고분군이 있는데, 그 중 6호분은 5기의 옹관과 토기, 유리구슬, 청동환 등이 출토되었으며, 30미터 내외의 거대한 분구가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닮았다고 주목되어 왔으나, 기초조사 결과 두 개의 사다리꼴 분구가 연결되어 장고형을 띠고 있고, 도랑이 설치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7호분 에서는 3기의 옹관과 토기, 유리구슬이 출토 되었고, 9호분은 12기의 옹관이 중첩되어 안치되어 있으며,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비롯, 금반지, 용봉문 큰칼, 톱, 창, 구슬 등과 많은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 직경은 35미터에 달하며 시기는 5세기 중엽으로 알려져 있다.

 

세 번째로 덕산리에서는 10기의 고분군이 있는데, 그 중 3호분은 직경 45미터데 달하며, 3기의 옹관과 몇 점의 토기, 쇠화살촉, 은방울,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었다. 4호분은 2기의 옹관과 토기, 큰칼, 쇠화살촉, 손칼, 구리팔찌, 유리옥 등이 출토 되었으며, 시기는 5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10호분은 석실묘이다.

 

위에서 살펴본 나주지역의 고분군들은 백제의 양식과는 동떨어진 관계로 백제와 동일한 세력으로는 볼 수가 없다. 또한 그 규모 면에서 일개 지방세력의 그것으로는 볼 수가 없는 대형 고분군이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 중에서 수장을 상징하는 환두대도나 금동관, 금동 신발 등이 출토되어 단순한 세력이 아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 있었던 세력은 누구인가?

 

 

5. 마한의 실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를 살펴보면 3세기까지도 백제 중심이 아닌, 마한 중심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백제의 위상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음 기록을 살펴보자.

 

부종사 오림은 낙랑군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었으므로, 진한의 여덟 나라를 떼어 낙랑군에 병합시키려고 했는데, 역관이 사실과 다르게 번역하여 전하는 곳이 있었으므로 한조의 신지가 그 곳 사람들의 노여움을 들어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토벌에 나섰고, 이 싸움에서 궁준이 전사하지만, 두 군은 드디어 한을 멸망시켰다.

 

위 기록은 삼국지 한조의 기록이다. 이와 상응하는 기록을 삼국사기에서 살펴보자.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 왕준(궁준)이 고구려를 치므로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을 보내어 낙랑의 변민을 쳐 빼앗았다. 유무가 듣고 노하니 왕이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민구를 돌려주었다.

 

위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 8월 기사이다. 즉, 진한 8국의 관할권을 두고 낙랑태수와 다툼을 벌이는 한조의 신지는 고이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고이왕은 마한 연맹체의 수장격을 나타내는 신지로 나타나고 있다. 즉, 고이왕 대에도 마한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백제는 마한의 영도국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다음 기록을 살펴보자.

 

그리고 비자발, 남가라, 훼국, 안라, 다라, 탁순, 가라의 7국을 평정하였다. 이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에 이르러 남만의 침미다례를 도륙하여 백제에 내려주었다. 이에 그 왕 초고 및 왕자 귀수 역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모였다. 그때 비리, 벽중, 포미, 지반, 고사읍이 자연 항복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 및 아라다와케, 목라근자 등이 함께 의류촌에서 만나 서로 기쁨을 나누었다.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오직 치쿠마나카히코가 백제왕과 함께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에 올라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에 올랐다.

 

위 기록은 일본서기 신공 49년조의 기사이다. 주장이 왜로 되어 있으나, 침미다례를 남만으로 표기하는 것으로 보아, 이 기사의 주장은 왜가 아닌 백제로 보아야 더 자연스러워 진다. 또한 비리를 부안, 벽중은 김제, 포미는 정읍, 지반은 부안, 고사는 고부로 비정되는데 그렇게 하면, 백제의 시조왕 13년조의 기록인‘마한에 사신을 보내어 천도를 고하고 강역을 획정하였는데, 북은 패하에 이르고, 남은 웅천에 한하며, 서는 대해에 이르고, 동은 주양에 이르렀다’는 기록과 상응한다. 즉, 시조왕 13년의 기록은 근초고왕 당시의 정복 영역과 같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근초고왕이 남만을 평정하여 남해안에 이른 서기 369년과, 시조왕 27년조에 보이는 마한 병탄기사의 연대인 서기 9년과는 정확히 36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실제보다 360년이 소급된 기록으로써 6주갑, 곧 360년마다 나라의 부흥을 맞는다는 중국의 참위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6. 맺음말-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

그렇다면 온조왕이 마한과 강역을 획정한 사실은 근초고왕이 369년에 행한 것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근초고왕의 정벌군은 낙동강 유역에 있던 가야에 영향을 미치고 이어서 강진으로 비정되는 고해진을 점령한 후에 마한과 강역을 획정하여 시조왕 조에 나와있는 대로 노령산맥을 기준으로 그 이북은 백제가, 그 이남은 계속해서 마한에 자치권을 부여하며 간접 지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근초고왕이 이끄는 백제군이 해상 교통의 요지인 고해진을 점령한 것으로 미루어 백제의 군사력은 마한의 그것을 훨씬 능가했으리라 생각되며, 백제는 곧이어 벌어지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어 마한의 전격적인 지배보다는 간접적인 지배를 통한 나주평야의 농업 생산성과 남해안 일대의 수산물에 대한 경제적인 이득만을 취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것을 증명해주는 것으로 백제의 주요 토기중 하나인 삼족토기의 분포가 노령산맥을 넘지 못하는 것을 들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영산강 유역의 세력들 역시 자치권을 부여받아, 백제의 영향으로 수장의 권위가 향상되어 나주 반남면에 보이는 거대한 고분을 남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러다가 백제가 대 고구려 전쟁에서 패배하여 공주로 도읍을 옮기면서 백제의 본격적인 남방경영이 시작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예로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 8월 기사를 보면‘왕은 탐라가 공부를 바치지 않으므로 친정하여 무진주에 까지 이르렀다.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죄를 청하므로 그만두었다’라고 하였다. 즉 동성왕 시대에 이미 전라도 일대는 백제의 완전한 지방으로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산강 유역의 고분들은 3세기 말부터 서서히 거대화되기 시작한다. 즉, 북쪽의 백제세력이 점차 세력을 키워 마한을 압박하면서 마한의 소국들 역시 영도국가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정치적으로 통합의 움직임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다가 근초고왕의 남방진출을 계기로 백제에 예속되기는 하였으나 백제의 중앙집권에 영향을 받아 그들의 수장들의 고분을 거대하게 축조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후 6세기부터는 옹관묘제가 점차 소멸되고 나주 흥덕리에서는 은제 관식이 매장되어 있는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하고 있다. 즉, 웅진천도 이후 백제의 전격적인 남방경영으로 마한 세력들이 백제 중앙의 제도적 통치 질서에 완전히 편입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백제는 고구려 유이민 세력으로서 고구려에서의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토착 세력인 마한을 서서히 압박, 흡수하여 고대국가로 나아갔으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