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한일 고대사의 수수께끼 "장고형 고분"

자연정화 2013. 9. 1. 21:29

 

한일 고대사의 수수께끼 "장고형 고분" 

 

-무덤의 주인공은?


충남 부여(1972년)에서 시작되어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83년)으로 이어진 일본식 무덤(장고형 고분) 논쟁은 9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엉뚱하게 전남지역으로 번진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일본의 젊은 학자들은 ‘신임나일본부설’을 혹 거론할 수 있지 않을까 귀를 쫑긋 하며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존재’를 긍정했다. 그러나 한국 연구자들은 전면 부정했다.


◇전남지역에만 존재한 ‘장고형 고분’=그런 가운데 ‘나홀로 연구’에 몰두하던 강인구 교수는 85년 전남 해남 장고봉 고분·용두리 말무덤 고분 측량 조사결과 분명한 형태의 장고형 고분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한국학계는 여전히 “외형만 전방후원일 뿐 실상은 자연구릉”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던 90년 전남 함평 신덕고분이 도굴꾼에 의해 유린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긴급조사를 벌인 국립광주박물관은 이 신덕고분이 일본의 ‘전방후원분’ 같은 방법으로 조성됐음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 하지만 발굴보고서도 내지 않았고, 종합조사도 ‘쉬쉬’하며 이뤄지지 않았다. 아직 ‘한반도에 홀연히 나타난 일본식 무덤’이라는 이 ‘뜨거운 감자’를 쥐고 연구할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후 전남 영암 자라봉 고분을 필두로 함평 장고산 고분, 영광 월산리 고분, 광주 월계동·명화동 고분 등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이 장고형 고분이 속속 발견되었다.

 

반면 80년대 ‘장고분’ 논쟁을 주도했던 경남 고성 송학동 고분은 99년부터 3차례에 걸쳐 실시된 동아대 박물관 발굴결과 ‘장고형이 아님’이라는 최종 판정을 받았다. 이미 70년대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충남 부여 고분은 자연구릉으로 밝혀진 바 있다. 장고형 고분은 결국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에서만 나타나는 ‘일본식 묘제’인 것이다.

 

 

 

전형적인 장고처럼 생긴 해남 방산리 장고형 고분,

전남지역에만 13기가 확인되고 있다. 

 

 

 

 

1999년 전북 고창 성남리에서 확인된 주구묘.

묘 주변에 도랑을 드른 이 주구묘가 장고형 고분의 원류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본식 무덤의 기원은 한반도 주구묘?=이제 ‘장고형 고분’에 대한 연구는 피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두가지였다. 이 무덤의 기원(起源)이 한반도냐, 아니면 일본이냐는 것과 그렇다면 무덤을 쌓은 사람은 일본인(왜인)이냐, 한국인(마한의 토착세력)이냐 하는 것이었다. 향후 한·일 고대사 문제에서도 반드시 풀어야 할 수수께끼인 것이다. 몇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이 무덤이 한반도에서는 서기 5세기 전반~6세기 전반, 즉 약 100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하고 등장했다가 사라져 버린 묘제라는 점. 또 영산강 유역에서 겨우 13기만이 조사됐다. 반면 일본엔 2,000여기나 확인 조사됐고 조성시기도 3세기 중반~6세기 후반까지다. 결국 이 장고형 고분은 조사된 무덤의 수나, 조성시기를 살펴보면 일본 쪽이 앞선다는 뜻이다.

 

그런 전제 아래 장고형 고분의 기원문제를 살펴보자. 82년 김원룡 교수는 “고대 경상도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고향의 집자리 지형, 즉 전방과 후원으로 생긴 구릉을 골라 나무곽을 배치해서 만든 묘제”라고 주장했다. 90년 북한의 리정남은 “압록강 유역의 적석총 가운데 원형의 적석부에 네모난 형태의 제단형태 석축단이 조성된 것에서 비롯됐다”고 고구려 기원설을 폈다.


줄기차게 ‘한반도 기원설’을 주창해온 강인구 교수는 “원분(둥그런 무덤)과 방분(네모난 무덤)의 결합으로, 그리고 원분과 제단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그 원류는 우리나라”라고 보았다.


기원설과 관련, 일본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일본학계는 분구묘(墳丘墓), 즉 네모나고 주위에 구덩이 시설을 갖춘 방형주구묘(方形周溝墓)의 돌출부가 환경에 따라 변화하여 이른바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했다면서 일본자생설을 주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들어 우리나라 전라도 지방에서 기원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주구묘(묘 주변에 구덩이 시설을 두른 묘)가 잇달아 발굴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본측 주장대로 주구묘가 ‘전방후원분’의 전신이라면 한반도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게 되는 셈이다. 한반도 주구묘의 잇단 발견은 일본학자들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방후원분

 

◇무덤 주인공은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그렇다면 한반도 장고형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이 문제는 ‘정서상’ ‘민족감정상’ 한·일 학계를 뜨겁게 달구었고 앞으로도 달굴, 숙명의 논쟁거리이다. 그런데 먼저 고대사회에서 이같은 민족감정이나 국경의 개념을 논하는 게 무의미할 수 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전제 아래 갖가지 주장들을 검토해보자.


▲우선 한국인이라는 설 이는 무덤의 주인공이 당시 영산강 유역에서 살았던 마한 토착세력의 수장이라는 것이다. 이 ‘토착세력설’ 주장도 여러가지이다. ①먼저 당시 마한지역은 백제의 완전한 세력권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점을 유의해보자. 이런 상황에서 마한은 백제·신라·가야·왜(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편다. 그런데 이 영산강 유역 수장들이 왜(일본 규슈지방)와의 교류를 강화하면서 왜의 무덤인 장고분을 썼다는 주장이 있다. ②또 하나는 마한세력이 백제의 영향권 밖에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규슈지방도 일본의 중앙세력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가정을 해보자. 이 상황에서 영산강 유역의 호족세력이 이런 규슈세력과 교류하면서 규슈의 묘제인 장고분을 썼다는 설도 있다. ③다른 견해도 있다. 백제가 영역을 넓히는 가운데 영산강 유역의 마한세력을 압박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동안 왜와의 왕래를 통해 ‘전방후원분’을 본 마한세력이 백제의 남하에 어필하는 의미에서 왜의 묘제를 썼다는 주장인 것이다.

 

▲일본인이라는 설 ①영산강 유역에 왜의 무역센터 같은 곳이 있었다. 이곳에서 종사하는 유력한 왜의 상사 주재원이 고향의 무덤인 ‘전방후원분’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②일본 연구자들 가운데는 왜 계통의 사람들이 영산강 유역에서 살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중 일부가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이 무덤은 백제귀족으로 편입된 왜계 백제관료라는 주장이다.


▲마한의 망명객이라는 설 이와 관련, 임영진 전남대 교수는 독특한 학설을 편다. 당시 일본열도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마한 등에서 넘어간 한반도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와 가야사람들이 뭉쳐 야마토 정권을 세운다. 그 격변기에서 북규슈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의 이주민들이 망명객의 신분으로 다시 고향인 전남지방으로 건너왔으며 이때 일본의 장고형 고분을 썼다는 것이다.


◇“무덤 주인공은 일본에서 귀환한 ‘마한인’의 것”=모든 주장이 나름대로의 논리와 설득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한반도에서 주구묘를 썼던 전남지방의 마한세력 중 일부가 왜로 이주했다. 그런데 왜로 넘어간 마한 이주민의 후예들이 다시 5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걸쳐 원래의 고향인 영산강 유역으로 돌아온다. 이 무덤은 그때 쓰여진 것이 아닐까.

 

이들의 귀환은 당대 한반도 정세와 무관하지 않다. 서기 475년 한성백제는 고구려의 침공으로 수도를 공주로 옮긴다. 대격변기였던 것이다. 백제의 지배구조가 바뀌고 약해졌다. 그 틈을 타 왜로 이주한 마한세력 중 일부가 대한해협을 건너 돌아왔다는 가설이다. 아무튼 이 무덤에 대한 수수께끼는 아직도 명쾌하게 풀린 건 아니다. 문헌사학자들과의 공동연구가 필요하다. 그래야 실체에 접근할 터이다.

 


조유전/고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