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나주 반남 고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자연정화 2013. 9. 1. 21:23

 

'일본 倭' 아닌 '한국 倭'
3∼6세기 나주 일대에 존재했다

 

식민사관에 따른 ‘임나일본부’를 뒤집는 학설이 제기돼 역사학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중국 역사서, 삼국사기 등에 등장하는 ‘倭’는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 존재한 정치세력이었다는 것.

나주 반남 고분을 통해 고증한 ‘잃어버린 왕국’의 이야기.

 

경주나 부여·공주의 유적에 익숙한 사람들, 그래서 남한의 고대 유적은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가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은 전남 나주 영산강 유역의 반남이란 작은 면 일대에 산재한 고분(古墳)들을 본다면 커다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나주군 반남면 자미산 일대에 산재한 30여 기(基)의 반남 고분군은 한국 고대사에 남겨진 최대의 비밀이다.

 

이 지역이 백제 영토였으니 부여·공주의 고분보다 작으리라는 예상을 가지고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일단 그 엄청난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덕산리 3호분의 경우 무덤의 남북 둘레가 46m이고 높이가 9m에 달한다.

 

이런 엄청난 규모는 백제 왕실의 고분들보다 훨씬 커서 통일신라나 가야 왕실의 고분들과 비교해야 할 것이다. 이 정도 고분을 조성할 수 있었던 정치권력이라면 적어도 고구려·백제·신라·가야에 뒤지지 않는 세력을 지니고 있었어야 한다. 도대체 이 거대한 고분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일본 천황가의 고분으로 알려진 전방후원분 형태를 하고있는 나주 반남 고분군.

앞쪽이 신촌리 9호분이고, 뒤�이 덕산리 고분들이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의 1장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신촌리 제9호 무덤에서는 다섯개의 옹관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그 가운데 옹관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것이 고고학과 역사학에서 매우 흥미로운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데, 대체로 삼한시대 마한의 마지막 족장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한은 처음에 충청·호남지방에 근거를 두었는데 북쪽에서 내려온 백제에 밀려 충청도 직산에서 금강 이남인 전라도 익산으로 쫓겨갔다가 4세기 후반 근초고왕의 영토확장 때 이곳 영산강까지 밀리게 되며, 이후 백제가 공주·부여로 내려오면서 더욱 압박을 받게 되어 5세기 말에는 완전히 굴복하고 만 것으로 추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반남 고분군은 대개 5세기 유적으로 비정되고 있죠.”

 

유홍준의 설명처럼 이 반남 고분군은 마한의 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현재 학계의 불완전한 추측이다. 그러나 모 방송사에서 ‘아파트형 고분’이란 제목 아래 이 고분의 주인공을 마한세력으로 추정하다 확실한 결론을 못내려 물의가 인 데서 알 수 있듯이 마한이라는 설명은 합리적 설명이 부족한 그야말로 추측 차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반남고분군은 매장 방법도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특이하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다. 거대한 하나의 봉토(封土) 내에 수개 혹은 수십개 이상의 시신을 담은 옹관(甕棺·항아리관)이 합장돼 있는 것이나 몇몇 고분 조사에서 밝혀지고 있듯 봉토 주위에 도랑이 존재했던 점도 특이하다. 옹관 규모도 우리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큰 것은 그 길이가 3m, 무게가 0.5t이나 되는 것도 적지 않다. 그 안에는 금동관(金銅冠) 및 금동제(金銅製)의 호화로운 장신구와 환두대도(環頭大刀) 등 무기류들이 부장돼 있었다.

 

일본 후나야마 유물과 비슷한 반남고분

 

처음 이 고분들을 주목했던 사람은 일본인들이었다. 일본은 ‘고분시대’(古墳時代)를 하나의 시대로 시기구분할 정도로 고분을 중요시하는데 반남고분군이 일본의 고분들과 겉모양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신촌리 9호분에서 발견한 금동관 역시 일본 구마모토(雄本)현의 후나야마(船山) 고분에서 출토한 것과 유사하다. 이러한 특이한 점들 때문에 반남고분군은 일제시대 초기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됐다.

 

반남고분군을 최초로 조사한 기관은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古蹟調査委員會)다. 1917∼18년 곡정제일(谷井濟一)·소장항길(小場恒吉)·소천경길(小川敬吉)·야수건(野守健) 등 4명의 위원이 나주군 반남면 신촌·덕산·대안리 일대 고분들 가운데 신촌리 9호분, 덕산리 1호·4호분과 대안리 8호·9호분 등을 발굴·조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대적인 발굴 조사와 달리 곡정제일이 단 한쪽짜리 보고서만 세상에 내놓는 것으로 발표를 갈음했다. 다음은 당시 내놓은 보고서 전문이다.

 

‘반남면 자미산 주위 신촌·덕산리 및 대안리 대지 위에 수십 기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다. 이들 고분의 겉모양은 원형(圓形) 또는 방대형(方臺形)이며 한 봉토 내에 1개 또는 여러 개의 도제 옹관(陶製甕棺)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 조사결과를 대략 말하면 먼저 지반 위에 흙을 쌓고 그 위에 도제의 큰 항아리를 가로놓은 뒤 이에 성장(盛裝)한 시체를 오늘날에도 한반도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천으로 감아서 판자에 얹은 뒤 머리쪽부터 큰 항아리 속에 끼워 넣고 큰 항아리의 아가리에서 낮거나, 또는 아가리를 깨서 낮게 한 작은 단지를 가진 판자를 아래로부터 받친 뒤 약간 작은 항아리를 큰 항아리 안에 끼워 넣어서 시체의 다리 부분을 덮고 크고 작은 항아리가 맞닿은 곳에 점토(粘土)를 발라 옹관 밖의 발이 있는 쪽에 제물(祭物)을 넣은 단지를 안치하여 흙을 덮는다.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칼(大刀·刀子)과 도끼·창·화살·톱이 있고, 귀고리· 곡옥(曲玉)· 관옥(管玉)·다면옥(多面玉)·작은 구슬 등 낱낱이 열거할 겨를이 없을 정도다. 이들 고분은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뤄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 그 자세한 보고는 후일 ‘나주 반남면의 왜인의 유적’이라는 제목으로 특별 보고로서 제출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훗날 내놓겠다던 ‘나주 반남면의 왜인의 유적’이란 보고서를 끝내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이 간단한 한쪽짜리 보고서의 내용도 당시 고고학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보고서를 보고 먼저 움직인 것은 고고학계가 아니라 도굴꾼들이었다. 보고서 내용 중 ‘금동관·금동신발, 칼과 도끼’ ‘귀고리· 곡옥(曲玉)· 관옥(管玉)· 다면옥(多面玉)’ 등은 이들의 모험심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1차 발굴조사 20여년 후인 38년 일제는 다시 신촌리 6호·7호분과 덕산리 2호·3호·5호분 등 옹관고분 5기와 흥덕리 석실분(石室墳)을 발굴·조사했는데, 조사에 참여했던 유광교일(有光敎一)과 택준일(澤俊一)이 “도굴의 횡액(橫厄)으로 이처럼 유례가 드문 유적이 원래 상태를 거의 잃어버리게 됐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의 고분이 도굴당해 완전한 봉토가 거의 없었다”면서, “신촌리 6호분에서 겨우 2개의 옹관을 수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도굴은 사실상 일제가 조장한 셈이었다. 일제는 1차 조사 후 한쪽짜리 보고서에서 ‘금동관·금동신발’ 등의 유물이 나왔음을 발표하고도 이 지역에 대한 아무런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는 도굴꾼들에게 도굴 장소를 안내한 격이었다.

 

한쪽짜리 보고서의 ‘그 장법(葬法)과 관계 유물 등으로 미루어 아마 왜인(倭人)의 것일 것이다’라는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제가 시종일관 주장해왔던 한반도 내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일제는 ‘광개토대왕비문’의 왜 침략 기사와 “일본서기” 기사를 바탕으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는데, 그들은 이를 한반도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일본 나라현 덴리(天里)시 고분에서 발굴된 무녀·樂人 등의 인물상,

말·돼지·닭 등 동물상, 검·방패 등의 무기 모양들이 일괄적으로 출토됐다.

전남 광주시 월계동에서도 비슷한 원통형 토기들이 발견됐다.

 

일본의 입장에서 ‘아마 왜인’일 가능성이 있는 한반도 내 유물이 출토됐으면 침묵을 지키거나 도굴을 조장할 것이 아니라 임나일본부설이 타당함을 대대적으로 선전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한쪽짜리 면피용 보고서만 내놓은 채 침묵을 지키며 도굴을 조장했다. 왜 그랬을까.

 

반남고분의 출토 유물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기는커녕 임나일본부설을 뒤집을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이다. 다시 말해 반남고분군의 출토 유물은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반남고분의 주인공들이 고대 일본열도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말해 주기 때문에 덮어 버리고 도굴을 조장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이 거대한 고분을 쌓은 주인공들은 누구일까. 먼저 일제의 한쪽짜리 보고서의 ‘아마 왜인’이라는 구절에 주목해 고대 왜에 대해 살펴보자.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한과 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진한·변진이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頭·납작머리)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왜의 위치가 한반도 밖이 아니라 한반도 안쪽, 즉 삼한의 남쪽인 한반도 남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껏 ‘왜는 일본열도에 있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이 기사를 봐왔으므로 이 기사가 말해 주는 위치 비정을 무시해왔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與倭接)는 기사를 해석하면 왜는 도저히 일본열도 내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삼국지” “후한서” 등 倭의 위치는 한반도 내

 

‘접’(接)은 육지로 서로 경계할 때 쓰는 낱말이지 바다 건너 있는 지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바다 건너 왜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한 이 기록이 유독 남쪽 경계를 표시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한 진한조의 ‘근처에 왜가 있다’(近倭)는 구절과 변진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이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는 구절도 왜가 일본열도가 아니라 진한과 독로국 근처의 한반도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서 왜의 위치를 추측해 보자.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왜의 위치는 마한과 진한·변진의 남쪽, 즉 한반도 남부다. 따라서 왜는 적어도 중국의 삼국시대인 3세기까지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은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바다 가운데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국 남북조 송나라(420∼479년) 때에는 왜가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열도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후에 발간된 중국측 문헌들은 모두 왜가 일본열도에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했다.

 

4∼5세기 일본 고대사, 문자 없는 소국 연합정권

 

일본에서 한자를 사용해 기록을 남긴 것은 대략 6세기께. 그러므로 이보다 앞선 시기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중국 및 한국의 기록과 고고학 연구성과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일본에는 ‘고분시대’라는 시기가 있는데, 학자들에 따라 견해는 다르지만 대략 3세기 말부터 7세기까지로 비정되고 있다. 고분시대는 대체로 3기로 구분된다. 3세기말∼4세기를 전기, 5세기를 중기, 5세기 이후를 후기로 설정한다.

 

고분의 출토 유물 중 토기류는 고분 주인공의 성격 변화를 보여주는데, 하지키(土師器)는 야요이(彌生·기원전 3세기∼기원후 3세기)식 토기의 기술을 계승한 것으로, 5세기 이전 고분들에서 주로 출토된 반면 5세기 이후 후기 고분들에서는 보편적으로 대륙 전래의 스에키(須惠器)가 출토됐다. 또한 중기 고분은 전기고분에 비해 규모도 획기적으로 크고 조성지도 언덕 위에서 평지로 내려오는데 이는 5세기에 일본 정치세력의 성격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 남조의 “송서”(宋書)에 따르면, 왜는 5세기 초부터 몇차례 사신을 보낸 끝에 5세기 말 송나라 황제로부터 ‘도독 왜·신라·임나·가라·진한·모한6국 제군사 안동대장군 왜왕’(都督倭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王)의 칭호를 받았다. 이는 왜왕이 당시 각 지역단위 소국(小國)의 호족, 즉 기미(王)들을 통합한 연립정권의 수장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6세기에는 오오기미(大王)로 호칭된 것으로 보아 정치·군사적으로 소국의 호족들을 상당한 정도로 통제할 수 있는 권력기반을 구축했음이 분명하다. 5세기 이전 일본의 정치세력은 호족 중심의 소국들로 분열돼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쇼토쿠 태자(聖德太子·574~622년)가 섭정하기 시작한 593년부터 일본은 비로소 관등을 제정하는 등 중앙집권화가 강화되더니, 645년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을 단행, 중앙집권제에 한층 다가섰다. 그리고 701년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따라 율령(律令)을 반포했다. 이는 명실상부한 고대 천왕제, 즉 중앙집권적 율령체제 국가를 확립한 것을 의미한다.


이덕일·이희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