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州地域 古代文化의 特性 -潘南面 古墳群과 目支國-
崔 夢 龍 (서울대 박물관장)
1. 머리말 2. 馬韓-目支國의 위치비정 3. 考古學的 側面에서 본 馬韓-目支國 4. 맺음말
1. 머리말
羅州 潘南面 德山里, 大安里, 新村里 일대에는 각각 史蹟 76, 77, 78호로 지정된 고분군이 존재한다. 이들 고분들은 해방전 谷井濟一과 有光敎一에 의해 일부 발굴된 바 있으며, 간략하게나마 그 결과도 보고된 바 있다1). 고분군의 주체는 독무덤(甕棺墓)인데 이들은 羅州 潘南面 일대를 포함해서 多侍面 伏岩里와 인근 靈岩郡 始終面, 咸平郡 月也面 등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2) 이러한 독무덤의 군집현상은 아직까지 영산강 하류에서 유일하게 확인되었는데 이 지역의 독무덤들은 光州市 光山區 新昌洞의 철기시대 전기3)의 독무덤에서부터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주로 삼국시대 전기(1∼300년) 말에서 후기(기원후 300∼600년)의 중반까지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반남면 일대의 고분들은 거대한 하나의 봉토내에 여러 개의 옹관을 합장한 것들이다. 그중 전방후원형의 경우(신촌리 6호, 덕산리 2호)는 그 외형과 옹관의 매장방법, 봉토주위를 돌아가는 도랑의 존재(덕산리 3호, 대안리 9호) 등에 있어 일본의 고분들과 유사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이들 고분들의 연대에 관해서는 학자들마다 이론이 많으나, 반남면 독무덤의 연대는 대략 5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로 알려져 있다4).
그런데 全北 南原郡 松洞面 細田里에서 조사된 철기시대 전기 집자리 출토유물들과 비교해 볼 때 이 고분들의 연대는 5세기 이전으로 소급될 가능성이 많다. 1985년 이후 전북대 박물관에 의해 3차례에 걸쳐 발굴된 全北 南原郡 松洞面 細田里 遺蹟에서는 8基의 말각방형(抹角方形) 또는 장타원형의 수혈 움집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細田里 遺蹟에서 확인된 집자리에서는 종래의 전통적인 민무늬토기와 함께 와질토기 및 김해토기 계통의 적갈색 연질토기가 출토되었는데5), 그 중 환원소성으로 제작된 砂質의 灰白色土器들은 나주 반남면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옹관편들과 흡사하다. 철기시대 후기(1∼기원후 300년)에 해당하는 細田里 遺蹟의 실연대는 기원후 2∼3세기경이 될 것으로 보인다. 나주 반남면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는 세전리 유적과의 상관관계를 통해 볼 때 潘南面 所在 古墳들의 연대도 종래 생각했던 것보다 1∼2세기 정도 올라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고분의 연대, 금동관 등과 같은 신분을 상징하는 부장품의 존재, 그리고 대형고분의 집중적인 분포상 등을 고려해 볼 때 나주군 반남면 일대가 史書에 나타나는 마한의 마지막 근거지가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여기에서는 반남면 일대의 고분에서 나온 부장품들 중 특히 금동관을 중심으로 이들 고분군의 성격을 고찰해 보면서 반남면 일대가 지닌 역사적 배경과 목지국과의 관계에 대해서 평소에 생각해 온 필자의 견해를 가설로써 간략하게 나타내 보고자 한다.
2. 馬韓-目支國의 위치비정
馬韓 54國 중 馬韓人을 共立하여 세운 目支國의 위치 비정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後漢書>> 東夷傳 韓條에는 馬韓最大共立 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其諸國王先 皆是馬韓種人焉이라하여 목지국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는데 목지국의 위치에 관한 지금까지의 견해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목지국의 위치
이처럼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고 있다. 이병도는 <<東國輿地勝覽>> 稷山縣條, 즉 百濟 溫祚王이 직산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는 기록6)에 근거하여 辰國 이래 목지국이 직산에 위치했다고 주장했다. 천관우는 仁川의 古號가 彌趨忽인데 그 음이 목지와 같다고 보고 목지국을 인천에 비정하고 있다7). 김정배는 禮山지역에서 청동기의 출토 예가 많은 것에 주목하여, 종래의 익산설을 바꾸어 예산지역을 목지국의 중심지로 보고 있다8). 한편 전남지방의 고인돌 유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이영문은 전남지방 고인돌의 밀집분포권을 설정하고, 이를 천관우의 마한제소국 위치 비정지9)에 대비하여 마한사회가 고인돌과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10).
현재까지의 일반론을 따른다면 목지국의 처음 위치는 이병도의 설대로 충남 천원군 직산 일대로 추정된다. 이 일대에서는 후에 개축된 당시의 성이라고 추정한 바 있는 蛇山城이 발굴되기도 하였다11).
그런데 백제의 近肖古王이 기원후 369년 (近肖古王24년)에 마한의 잔여세력을 복속시키고 전라도 남해안 일대에까지 그 세력권을 확장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12), 마한의 초기 영역이 천안군 직산 일대 및 부근의 평택·성환 일대였다 하더라도 후대에 이르러 그 영역이 남 쪽의 익산 일대로 옮겨졌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3)
그러나 마한-목지국의 존속시기가 한국 고고학의 시대구분에서 철기시대 후기, 즉 서력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로부터 기원 후 300년경까지에 해당되며, 그 하한이 근초고왕대까지 내려감을 고려해 볼 때 앞에서 제시된 지역들에서 이에 부흥하는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나주 반남면 대안리, 덕산리, 신촌리 일대에는 시간적으로 이 시기에 근접하는 매우 설득력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 즉, 이 일대에는 대형 독무덤들이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다. 그런데 분묘는 전통적인 형식요소에 대한 지속성이 매우 강하면서도 외부적인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이다.
나주 반남면 소재 신촌리 9호분에서는 강력한 지배집단의 존재를 시사해 주는 금동관이, 또 나주 복암리 3호분에서는 금동 신발이 출토된 바 있다. 그리고 漢城時代 百濟 (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즉 始祖 溫祚王이 백제를 건국하여 文周王이 熊津으로 遷都하기까지의 백제의 영역이 북으로 禮成江, 동으로 春川, 서로 仁川, 남으로 堤川·淸州로 비정됨을 생각할 때, 목지국의 최종 위치는 종래 제기되어 오던 인천, 익산 보다는 제천·청주 이남지역으로 비정되는 보다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14). 1986년 忠北 鎭川郡 德山面 山水里에서 발굴된 백제 초기의 토기 가마터15)는 이를 뒷받침해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한편 1989년 이후 발굴되어온 鎭川郡 德山面 石帳里 유적에서는 백제 초기 제철로 4기, 용해로 2기, 鐵斧鎔范 등이 확인되었는데 이들은 초기 백제의 철생산과 그 전이과정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필자는 문헌자료와 마한지역에서 이루어진 고고학적 성과를 이용하여 全南 羅州 潘南面 일대를 목지국의 마지막 근거지로 비정하는 가설을 세운 바 있다16). 마한의 특징적인 문양으로 여겨지는 조족문(鳥足文)이 그 근거중의 하나이다. 조족문이 시문된 토기는 淸州 新鳳洞17), 洪城 神衿城18), 羅州 潘南面 德山里 4호분 및 新村里 6호분 등에서 출토된 바 있는데, 이는 마한의 목지국의 이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19). 이 가설은 서기 369년 근초고왕에 의해 마한의 잔여세력이 백제에 정치적 군사적으로 병합 당한 후에도 이 지역에 馬韓의 문화전통이 상당기간 동안 지속되었다는 전제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3. 考古學的 側面에서 본 馬韓-目支國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마한-목지국 문화의 성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전남지방에서 조사된 마한관계 유적의 성격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전남지방에서 발견된 마한-목지국 관련유적으로는 고인돌(支石墓)20)과 독무덤(甕棺墓)21)으로 대별되는 분묘유적과 생활유적인 집자리 유적이 있다.
1980년대 중반 이전 몇몇 선사시대 집자리 유적22)이 전남지방에서 확인된 바 있으나 마한시대에 해당하는 철기시대 후기23)의 집자리 유적은 조사된 예는 없었다. 그런데 1986∼1989년에 걸쳐 이루어진 주암댐 수몰지구 발굴조사에서 順天市 洛水里와 大谷里 道弄部落에서 대규모 집단취락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조사된 철기시대 후기의 집자리들은 전남지방에서 최초로 발견된 마한의 집자리들로 마한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다.
분묘유적으로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의 하나로, 특히 전남지방에 1만 여기 이상이 무리를 이루면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과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하여 철기시대 전기가 되면 지배적인 묘제가 되어 백제시대까지 사용된 독무덤이 있다. 전남지방의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철기시대 전기에 이르기까지 축조되었는데, 이들은 당시의 정치·사회상을 밝히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고인돌 사회에는 전문장인이 존재했으며, 각 지역간에는 기술의 전파 및 물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이 고인돌 사회는 사회진화 단계상으로는 계급(rank) 사회인 족장사회(chiefdom society) 단계에 도달했다24). 앞으로 고인돌의 공간적인 분포에 따른 세력권 또는 문화권이 설정되고, 전남지방 고인돌이 지니는 독자적인 성격이 究明되면, 차후 이 지방에 등장하는 사회의 성격을 파악하는데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대형 독무덤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영산강 유역의 반남면 일대를 포함하는 羅州지역은 全州와 함께 全羅道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을 만큼 고대 한반도 남서부지방에서 정치·군사·경제·문화적으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해 왔다. 史書에 의하면 나주는 백제시대에는 發羅郡이라, 또 統一新羅 景德王 때에는 錦山으로 불렸으며, 나주라는 現 地名이 처음 사용된 것은 高麗代에 이르러서이다25). 통일신라시대 羅州는 전남지역의 州治所인 武州에 예속된 하나의 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高麗가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나주에 12牧의 하나를 설치하게 되면서 나주는 고려 및 조선조에 걸쳐 영산강 유역의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되었다26). 나주라는 지명 또한 고려 이후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통일신라 이전과 이 지역이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기 이전의 상황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우며, 당시 나주 일대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는 반남면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 고분군이 있을 뿐이다.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을 비롯한 여러 유물들을 통해 볼 때 당시 이 지역에는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이러한 물질적ㆍ문화적 기반은 반남면 일대를 포함하는 나주 지역에 마한 54국의 하나인 목지국을 비정하는 가설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학자마다 서로 견해가 달라 不彌(支)國27), 布彌支國28), 新彌國29), 치唎國30) 등의 馬韓 小國이 이 일대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이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다. 비록 그 國名은 확실하지 않지만 나주 지역, 특히 반남면 일대에 분포된 고분군들의 연대로 볼 때 백제초기부터 국가단계의 정치체계가 이 일대에 존재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반남면을 비롯한 영산강 유역 소재의 대형 독무덤들은 이 일대가 실질적으로 백제의 영향권내로 편입되기 이전에 자리잡고 있던 마한의 지배층들의 분묘들로 보여진다. 철기시대 전기 이후 새로운 철기문화를 수용함으로써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사회적인 발전을 이룩한 마한의 소국들은 그들의 통치 권력을 확대·팽창시키면서 소형 독무덤을 거대화시켰던 것이다. 제반 사항을 종합해 볼 때, 영산강 유역이 실질적으로 백제의 지배하에 편입되는 시기는 기록에 보이는 것처럼 4세기 후반경인 近肖古王代(기원후 369년으로 추정)라기 보다는 대안리 5호분31)과 같은 백제의 석실분이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리는 6세기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영산강 유역에 밀집 분포하는 대형 독무덤들의 피장자들은 마한 제소국의 지배층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금동관이 출토된 신촌리 9호분의 피장자는 목지국 말기의 지배자, 또는 목지국의 전통을 이은 지방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가 남천하게 됨에 따라 백제의 지배영역이 남쪽으로 팽창함으로써 그 세력이 축소된 목지국의 최종 근거지는 영산강 유역의 나주 반남면 일대로 비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지금까지 발견·조사된 금동관들이 당시의 정치체제하에서 국가단계를 나타내는 최고 지도자 또는 왕의 상징물(status symbol)로서 인정되는 것으로도 그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최근 발굴된 나주 伏岩里 3호분32) (1996년 발굴, 석실 내부 옹관 4호) 출토 금동제 신발, 1997년 발굴된 石室 7호 출토 금판 관모 장식, 금동제 이식, 삼두 환두대도 등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1998년도 3월에 발굴된 제 5호와 16호 횡혈실 석실 2기에서는 銀製冠飾이 출토된 바 있다33). 이는 부여 하황리, 논산 육곡리 7호분, 남원 척문리, 나주 흥덕리와 扶餘 陵山里 공설운동장 예정부지내에서 발굴된 36호 우측(인골편은 남아있지 않으나 좌측에 남아있는 부인의 것으로 여겨지는 인골의 나이는 40세이상으로 추정된다34).)에서 발견된 은제 관식에 이어 한반도에서 여섯 번째로 확인된 것이다. 피장자의 신분은 백제 16관등 중 6품인 奈率 이상에 해당되는데, 이는 대안리 5호분35)의 백제식 석실분의 경우와 함께 피장자가 나주지역이 백제의 행정체제내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금동 신발인데 이는 新村里 9호분, 公州 武寧王陵, 益山 笠店里에 이어 백제지역에서 네 번째, 나주에서는 두 번째로 확인된 것이다36). 또 1998년 4월 3일 나주 복암리 3호분 제 8호 석곽 옹관에서는 朱漆의 逆卍字文37)이 시문된 蓋杯(제 8호 옹관)와 함께 일본 고분시대말기에 보이는 圭頭大刀가 제 5호 석실 연도 가까이의 玄室벽에 기대어 놓인 채로 확인되었다. 출토상황으로 보아 이 칼은 현실에 묻힌 피장자의 것이라기보다는 장례행사에 참석했던 피장자와 가까운 손님이 마지막으로 끌러놓은 葬送禮物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복암리 3호분의 내부에서는 옹관묘, 수혈식 석곽, 횡혈식 석실, 횡구식 석곽, 횡구식 석실과 석곽 옹관 등 34기에 이르는 매장유구가 확인되었다. 이 고분은 약 300여년에 이르는 기간에 걸쳐 한 집안의 가족묘지(世葬山)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오늘날과 같은 墳坵는 마지막으로 5호 석실분을 쓰면서 각각의 무덤에 조성된 봉토가 합쳐져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던 것 같다. 그 피장자들은 과거 목지국의 지배층을 형성하는 토호들로 후일 이 지역이 백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되어 가는 과정에서 백제왕실이 하사한 벼슬을 받았으며 자신들의 무덤에도 백제양식을 채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圭頭大刀를 통해 시사되는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는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밝혀야 할 것이다. 은제 관식의 연대를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초로 볼 수 있다면 목지국의 잔여세력인 토착세력은 거의 백제멸망시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볼 때 목지국을 맹주국으로 하는 마한 제소국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과 공시적으로 상호 대등한 수준의 관계를 맺어 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4. 맺음말
지금까지 馬韓 諸小國의 맹주국으로 알려진 目支國의 위치 비정에 대한 종래의 견해들을 살펴보고, 고고학적인 측면에서 羅州 潘南面 일대를 목지국의 최후 근거지로 비정하는 필자의 가설을 피력하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남아 있는 문헌자료 및 고고학적 자료가 매우 영세하며, 더구나 얼마 되지 않는 문헌자료는 그 자료의 해석에 따라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해 낼 수도 있는 상황이므로 현 시점에서 어떤 확정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필자 나름대로의 연구를 통해 얻은 몇 가지 가설을 제시하는 것으로 맺음말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확실하지는 않지만 마한의 성립시기는 늦어도 서력 기원 전후로 한 시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마한이 4세기 후반경 백제에 의해 멸망당한 후에도 538년 扶餘 遷都 이후 백제가 반남면을 포함하는 나주 일대를 직접 통치할 때까지 이 일대에는 나름대로 독자적인 문화전통이 계승되어 왔다.
둘째, 마한 제소국의 맹주국이었던 목지국의 처음 위치는 天原郡 稷山 일대 및 부근의 平澤·成歡 근처로 비정될 수도 있겠으나, 이후 백제의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목지국은 익산이나 예산으로 점차 이동하여 마지막에는 나주 반남면 일대까지 쫓겨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다.
셋째, 마한-목지국은 고대의 삼국과 마찬가지로 稱王을 할 정도의 강력한 국가체제를 형성했다. 즉, 비록 시대가 떨어지는 자료이긴 하지만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의 유물을 통해 볼 때 이 일대에 왕에 버금가는 최고 권력자나 정치체제가 존재했음이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반남면 일대는 4세기 후반경이 되면서 백제에 편입되었으나, 이 지역의 대형 고분군들은 실질적으로는 백제와는 별개인 독자적인 마한-목지국의 전통을 유지해 온 세력집단의 분묘로 추정된다.
참조
1) ① 谷井濟一, 1920, <京畿道 廣州, 高陽, 楊州, 忠淸南道 天安, 公州, 扶餘, 靑陽, 論山, 全 羅北道 益山 及 全羅南道 羅州郡古墳調査略報告> <<大正六年度(1917)古墳調査 報告 >>, p. 663, 朝鮮總督府. ② 有光敎一, 1940, <羅州潘南古墳の發掘調査> <<昭和13年度 古蹟調査報告>>,pp. 20-35, 朝鮮總督府. ③ 全榮來는 <韓國 湖南地方の 古墳文化>(九州 考古學 61호, 1987, pp. 32-60)라는 글에서 이들 결과를 종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2) ① 成洛俊, 1983, <榮山江流域의 甕棺墓硏究> <<百濟文化>> 15, pp. 35-113. ② 李榮文, 1978, < 榮山江下流地域의 古墳群> <<羅州大安里 5號 百濟石室墳發掘調査報告書>>, pp. 33-56, 羅州郡廳, 羅州.
3) 필자는 철기시대의 용어와 편년을 다음과 같이 개정해 사용하고자 한다.(崔夢龍,1996, <한 국의 철기시대> <<東아시아의 鐵器文化-도입기의 제양상>> 문화재연구소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제 5집, pp. 11-34.) 철기시대 전기 기원전 300∼1년: 종래의 초기철기시대에 해당. 철기시대 후기 1∼기원후 300년: 또는 삼국시대 전기, 종래의 원삼국시대에 해당. 삼국시대 후기 기원후 300∼600년.
4) 穴澤口禾光·馬目順一, 1973, <羅州潘南面古墳群> <<古代學硏究>> 70, p. 28, 古代學硏究 會. 그 이후 전방후원식 고분은 함평 월야 예덕리, 해남 북일면 장고봉, 영암 태간리와 광 주 광산구 월계동과 명화동 등지에서 새로이 발굴된 바 있다.
5) ① 全北大博物館, 1985, <<細田里出土土器>>, 全北大 博物館, 全州. ② 尹德香, 1986, <南原細田里遺蹟地表 收合遺物報告> <<全羅文化論叢>> 1, p.18 全羅文化硏究所, 全州.
6)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之十八 建始沿革, "本慰禮城 百濟溫祚王 自卒本扶餘 南奈開國 建都干此"
7) 千寬宇, 1979, <目支國考> <<韓國史硏究>> 24, p. 28.
8) 金貞培, 1985, <目支國小攷> <<千寬宇先生 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p.125. 正音文化社, 서울.
9) 千寬宇, 1979, <馬韓 諸小國의 位置試論> <<東洋學>> 9, pp.199-239.
10) 李榮文, 1993, <<全南地方 支石墓社會의 硏究>>, 韓國敎員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1) 처음에는 4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成周鐸·車勇杰, 1985,<稷山蛇山城發掘調 査 中間報告書>(1985년도 第一次 發掘) <<百濟硏究>> 16, pp. 101-160.), 후일 6세기말 에서 7세기초에 조성된 것이라 확정짓고 있다(成周鐸·車勇杰, 1994, <<稷山 蛇山城>>, 백제문화개발연구원, pp. 132-145.)
12) 李丙燾, 1959, <<韓國史>> 古代篇, p. 362, 乙酉文化社,서울.
13) 李基白·李基東, 1982, <<韓國史講座>> 1 古代篇, p. 95 및 p. 138, 一朝閣, 서울.
14) 崔夢龍·權五榮, 1985, <考古學的 資料를 통해 본 百濟初期의 領域考察> <<千寬宇 先生 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pp. 83-120, 正音文化社, 서울.
15) 韓南大學校 博物館, 1987, <<鎭川 山水里 百濟土器 가마터 發掘調査 略報告>>, pp. 13-15, 韓南大學校 博物館, 大田.
16) 崔夢龍, 1986, <고인돌과 독무덤> <<全南文化의 性格과 課題>>, 第一回 全南古文化 심포지움 발표요지, pp. 25-30.
17) 車勇杰·趙詳紀·吳允淑, 1995, <<淸州 新鳳洞 古墳郡>>, pp. 293-294, 忠北大學校 博物館, 淸州.
18) ① 成周鐸 外, 1990, <<神衿城 南門址 및 周邊 貝殼層 精密調査>> 忠南大學校 博物館, ② 李康承ㆍ朴淳發ㆍ成正鏞, 1994, <<神衿城>> 忠南大學校 博物館, 大田.
19) 최몽룡·이선복·안승모·박순발 1993, <<한강유역사>>, pp. 246-247. 민음사, 서울.
20) ① 李榮文, 1993, <<全南地方 支石墓社會의 硏究>>, 韓國敎員大學校 博士學位論文 ② 李榮文·曺根佑, 1996, <<全南의 支石墓>>, 學硏文化社, 서울. ③ 李榮文·曺根佑, 1996, <全南의 支石墓> <<全南의 古代墓制>>, 全羅南道ㆍ木浦大學校 博物館.
21) 成洛俊, 1983, <榮山江 流域의 甕棺墓硏究> <<百濟文化>> 15, pp. 35-114.
22) ① 崔夢龍, 1978,〈光州 松岩洞 住居址 發掘調査報告〉《韓國考古學報》4, pp.53-73. ② 崔盛洛, 1986,《靈巖 長川里 住居址Ⅰ》,木浦大學校博物館, 木浦. ③ 崔盛洛, 1986,《靈巖 長川里 住居址Ⅱ》,木浦大學校博物館, 木浦. ④ 李榮文, 1987,〈昇州 九山里 遺蹟과 出土遺物〉《三佛 金元龍敎授 停年退任紀念論叢》Ⅰ(考古學篇), pp273-296, 一志社, 서울.
23) 철기시대 후기(기원후 1-300년)는 필자가 제시한 한국고고학의 시대구분에 있어 삼국시 대전기에 해당하는데 이는 종래의 원삼국시대를 일컫는다. 그런데 전남지방의 경 우는 아직까지 이 시기를 삼국중의 어느 한 국가와 연관 지울 수 있는 고고학적 증거가 확인된 바 없으므로 삼국시대전기 대신 철기시대후기란 시대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하다.
24) ① 崔夢龍, 1982, <全南地方 支石墓社會와 階級의 發生> <<韓國史硏究>> 35,pp. 1-14. ② 崔夢龍 ?崔盛洛 編著, 1997, <<韓國古代國家形成論>>, 서울대학교 출판부, 서울.
25) 李弘植編, 1968, <<國史大辭典>>, p. 321.
26) 閔賢九, 1975, <羅州邑誌解題> <<羅州邑誌>>, p. 91, 全南大學校 史學科, 光州.
27) 李丙燾, 1976, <<韓國古代史硏究>>, p. 265, 博英社, 서울.
28) 李基白·李基東, 1983, <<韓國史講座>> 1 -古代篇-, p. 138, 一朝閣, 서울.
29) 盧重國, 1990, <目支國에 대한 一考察> <<百濟論叢>> 2, p. 90.
30) 田中俊明, 1997, <熊津時代 百濟의 領域再編과 王·侯制> <<百濟의 中央과 地方>>, p. 267, 충남대 백제연구소, 대전.
31) 崔夢龍·李淸圭·盧赫眞, 1979, <羅州 潘南面 大安里 5號 百濟石室墳發掘調査><<文化財 >> 12, pp. 90-104, 文化財管理局, 서울.
32) 전남 지방기념물 136호였으나 현재 사적 404호로 승격되었음.
33) 여기에서 출토된 인골들은 석실 17호 널길(연도)에서 화장된 채로 발견된 32세 이상으로 추정되는 男僕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仰臥申展葬을 취하고 있었으며, 석실은 거의 40세 이상의 가족성원의 家族葬 또는 追家葬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34) 최몽룡·김용민 1998 <부여 능산리 백제고분 출토 인골에 대하여> <<부여 능산리 고분 발굴보고서>> 부여문화재연구소, 부여.
35) 전게문 주 30).
36) 目支國내에 포함되는 이웃 伏岩里 3호분은 1995년 11월에서 1997년 6월까지 國立文化財 硏究所와 全南大博物館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는데 이에 관한 보고로는 나주시? 전남대박 물관, 1997, <<나주 마한문화의 형성과 발전>>, 삼한역사연구회, 1997, <<삼한의 역사와 문화-마한편>>, 자유지성사, 서울. 나주 복암리 제 3호분 발굴조사자문위원회 1997년 3월7일, 1997년 11월 6일과 1998년 4월 3일자의 회의자료 등이 있다.
37) 이 逆卍字文은 "巴"로 읽어야 하는데, 그 의미는 죽음(死)을 뜻한다고 한다(渡邊素舟, 1971『東洋文樣史』p. 78). 그렇다면 佛敎의 영향하에 만들어졌다는 견해는 再考되어야 할 것이다. | |||||||||||||||||||||
목포대학교 박물관 199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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