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초고대왕 스사노오신과 세오녀 아마테라스
1장. 청도 이서국 이진아시 일본건국신 이자나기
淸道 伊西國 伊珍阿? 日本建國神 伊耶那岐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467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고,
서기 42년 신라 유리왕은
경상북도 청도에 있던 이서국伊西國을 멸망시켰다.
이서국 왕손은 낙동강을 서남쪽으로 건너 가야국을 만들고,
동시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일본의 건국신 이자나기 부부가 되었다.
태양신을 모시는 이자나기 부부가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이 일본 열도라고 전하며,
나라 이름은 대팔주국大八洲國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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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 이후, 일본에는 고령高靈의 대가야大伽倻로부터 이자나기伊耶那岐(=이진아시伊珍阿豉)와 이자나미伊耶那美신이 도래하여 일본을 건국하였다.
이자伊耶는 일一과 같다. 뜻은 하나, 첫번째 신이라는 의미다.
또한 한반도의 이서국伊西國 출신(나기)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본래 이스伊西, 혹은 우스內는 구슬珍을 나타낸다. 구슬 진珍은 우쓰宇圖로 발음하라고 [일본서기] 저자가 주석하였다.
이스伊西는 동시에 여자 무당巫堂, 신녀神女을 의미한다.
부여의 영역이었던 내몽고 서요하西遼河의 천산天山 지역에서는 지금도 남자 무당을 박博이라고 하며, 여자무당을 이도칸伊都干이라 부르는데 굿驅邪(=굿)을 하여 구사치병驅邪治病 한다. 일본발음으로는 이쯔칸이 된다.
이서국 위치와 이서국성 위치도
[삼국유사]에서 가야의 본래 관직명 이름은 아도간阿刀干, 여도간汝刀干 등 9干이 있었는데 이도칸伊都干과도 관련된다. 이도간이 가야에서 이스칸伊都干으로 변하여서 이서국伊西國이나, 일본의 이도伊都, 이세伊勢 등의 지명과 이스케요리伊須氣余理(신무천황비) 등의 인명을 남긴 것이다.
남자무당 박博에서 신라왕 박혁거세의 성씨 박朴씨도 유래되는 것이고, 방언으로 신라왕을 차차웅次次雄이라고도 했는데 차차웅은 무당이란 뜻이었다.
이자, 이진아의 어원은 이슬이다. 이는 “이어진 구슬 목걸이 영瓔”를 의미한다. 신라왕 박혁거세의 최초 호칭이 거서간居西干 혹은 거슬한居瑟邯이었다.
거슬한居瑟邯의 거居도 훈訓인 이슬로 읽으면 이슬한이 된다. 고대 일본의 이름 중의 쿠시다마櫛玉姬나 타마쿠시玉櫛媛도 우리말 줄-다마에서 비롯되니 줄에 꿴 옥, 영瓔이라는 뜻이다.
신라 3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때에, 신라의 확장으로 경상북도 청도淸道에 있던 이서국伊西國을 쳐서, 이서국이 서기 42년에 멸망하자, 이때 일본으로 건너간 이서국의 후손이 일본의 건국신建國神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부부다.
이서국성伊西國城이 있던 청도군 오도산성烏刀山城 부근의 예전리禮田里에서 발굴된 청동검을 보면 초기 비파형 청동검이다.
만주의 요양시遼陽市와 무순시撫順市에서 이와 비슷한 초기 비파형 청동검이 발굴 되었는데 이는 후단군시대 최초 기자奇子였던 서우여徐于余의 번한조선番韓朝鮮에서 만든 형식이다. (졸저 한국고대역사지리 참조)
▲ 비파형 동검 / 청도군 예전리에서 출토된 비파형 동검
즉 이서국은 그 유물로 보아서 bc1100년경의 후단군조선시대에, 서우여 기자 영역(전단군조선의 마한과 번한 영역)에서 만들어서 전파된 것이다. 즉 서기 42년에 망했어도 이미 천년의 역사를 간직했던 나라다.
경상북도 고령군의 대가야大加耶에는 이진아시伊珍阿豉라는 왕이 있었다.
[신중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고령군高靈郡]에는 신라 석학 최치원이 남긴 대가야의 기록이 있다.
“대가야의 시조는 이진아시伊珍阿豉王(혹은 내진주지內珍朱智)이고 도설지왕까지 520년이었다. 가야산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에 감응하여서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왕 뇌질청예를 낳았으니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의 별칭이고 뇌질청예는 수로왕의 별칭이다.”
本大伽倻國[詳見金海府山川下] 自始祖伊珍阿豉王[一云內珍朱智] 至道設智王 凡十六世五百二十年[按崔致遠釋利貞傳云 伽倻山神正見母主 乃爲天神夷毗訶之所感 生大伽倻王惱窒朱日 金官國王惱窒靑裔二人 則惱窒朱日爲伊珍阿豉王之別稱 靑裔爲首露王之別稱
뇌질주일, 뇌질청예는 가야산 정견모주의 후손이다. 그녀의 남편 이비가夷毗訶는 일본식으로 이히고伊-日子로 보면 큰 제사장이라는 뜻이니 이서국伊西國의 왕 또는 남자 무당을 의미한다.
그런데 42년에 신라 유리왕이 이서국을 멸망시켰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해 42년은 바로 대가야와 금관가야 등의 건국년도이기도 하다.
즉 42년에 망한 이서국의 왕실로부터 정견모주와 두 아들이 청도靑道로부터 낙동강을 건너서 경상북도 고령高靈으로 피난와서 42년에 대가야를 세운 것이다. 김해金海의 금관가야金官伽倻도 역시 42년에 건국되었다.
두 아들의 성을 뇌질惱窒이라 하였는데, 고대 일본말로 보아서 뇌질의 어원은 뇌직瀬織(일본발음 세오루)으로 고려된다. 지금 일본말로는 금칙錦織이다. 즉 비단을 짜는 일이다. 따라서 “비단 짜는 신녀, 뇌직瀬織”의 아기다.
일본의 히미코여왕이 된 뇌직진비매瀬織津比賣가 일본 발음으로 세오리츠히메인데 바로 연오랑延烏郞-세오녀細烏女의 세오녀細烏女인 것이며, 세오녀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비단을 일본에서 짰고, 신라에도 나누어 주었다.
뇌惱, 瀬는 우리말 동사로서 바늘을 누비다, 자수를 놓다의 어간 “놓”이다.
서기 42년 육가야六伽倻 건국 직후에 대가야왕 뇌질주일, 즉 이진아시伊珍阿豉는 일본 열도로 건너가서 일본의 건국신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이자나미伊邪那美 부부신夫婦神이되었다.
일본의 여러 지방의 토착신들은 이 대가야의 왕 이자나기와 그의 부인 이자나미의 후예라고 하는데, 대가야에서 함께 건너간 가야인들의 세력이 된다.
이자나기 부부 중에서 이자나미는 가야로 돌아와서 죽었고, [고사기]는 이를 황천국荒天國으로 떠났다고 기록하였다. 이자나기는 가야에 돌아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갔다.
[주] 아메리카인디언 풍속에서 보듯이 신석기시대에는 사나운 동물을 죽여서 그 짐승들의 이빨을 줄줄이 꿰어 매달은 목걸이가 힘 센 추장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점차로 사회가 발달되어서 이빨이 아니라 구슬을 꿰어 달게 되었다. 굽은옥曲玉의 생김새도 본래 동물의 이빨 모양에서 유래된 것이다.
“쿠사나기쯔루기”와 함께 대대로 전승되어 온 일본 천황의 신보神寶 중에도 구멍이 뚫린 곡옥曲玉이 있다.
따라서 이빨(보물)의 고어가 이슬(잇살)이었거나, 이빨을 꿴 것, 혹은 구슬을 꿴 것이 이슬이 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언이 있는데 구슬을 꿴 것이 바로 또 “이슬”인 것이다.
그리하여 삼한시대 마한馬韓 등에서는 금은金銀보다 옥玉이 더 가치있는 보물이었다. [후한서]와 [위지동이전]의 마한 설명을 보면 마한馬韓은 오로지 구슬-목걸이瓔珠를 중시했다. 마한은 구슬목걸이를 재보로 삼았다. 唯重瓔珠以瓔珠為財寶。
혹은 구슬을 옷에 달기도 하고,혹은 목에 매달아서 늘여뜨렸다. 或以綴衣為飾或以縣頸垂耳,금은비단이 이슬珍을 대신하지 못하고,구슬을 꿰어서 목에 걸었다. 不以金銀錦繡為珍以珠玉綴成的頸飾.
따라서 주옥珠玉을 달아맨 구슬-목걸이瓔珠에 대한 우리말이 바로 이슬珍이었던 것이다. 구슬은 단지 옥玉이고, 구슬을 꿴 이슬을 진珍, 영주瓔珠, 영락瓔珞이라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신라왕칭 거서간, 거슬한, 이사금은 모두 “이슬한”을 가리키고 이는 이빨, 즉 곡옥을 매단 목걸이의 왕이라는 뜻이다.
진한인 신라왕이 이슬한이었으니 변한弁韓(고령군의 북쪽 성주군星州郡은 고대 성산가야星山伽倻, 벽진군碧珍郡 등으로 불렸는데 별한, 변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의 왕도 역시 그래서 이진아시伊珍阿豉라고 적은 것이고, 이진아시는 “이슬아시”로 읽고 이슬아시는 본래 이름이 아니라 가야왕의 호칭이 된다. 그런데 일본에 건너가서 이자나기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주] 가야산 정견모주가 낳은 대가야왕은 뇌질주일朱日이라 하였는데 붉은구슬赤玉을 의미하고, 금관가야왕은 뇌질청예靑裔라고 하였는데 푸른옷靑衣를 의미한다.
[주] 북부여北夫餘가 bc107년에 한무제에게 패전한 후에 새로 일어난 졸본부여卒本夫餘에 밀려나서 bc86년에 새로 세운 곳이 가섭원迦葉原부여다.
“가야”는 바로 북부여의 새로운 땅이름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에서 유래되었다. 가섭원은 본래 후단군조선이 일어난 우현왕 고등高登의 고향 개사원蓋斯原, 개사수蓋斯水가 어원이다.
개사원, 가섭원이 가시원, 가이원 즉 가야가 되고 일본에 건너가서는 가시-하라橿-原로 되었다. 부여 육부족에 구가狗加가 있었는데 동물 “개”의 옛 발음 가이, 가이ㅅ 와 관련된다.
따라서 가시하라를 가야 혹은 가라라고 한 것이다. 구사한국狗邪韓國에 개狗가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주] 고대 중국에서는 구사狗邪라는 신령한 동물 신상이 있어서 사악함을 쫗아냈다. 후에는 벽사辟邪라는 말로 바뀌었는데 결국 조선의 해태獬豸 상과 비슷하다.
벽사 혹은 구사
[주] 김수로왕이 자리잡은 바닷가 금관가야에는 서기 48년 7월, 중국 사천泗川 안악安岳으로부터 피난해온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건너와서 김수로왕과 결혼하고 불교 세력을 펼치고 있었다.
普州太后許黄玉: 許黄玉,32年9月3日出生 在東漢建爲郡普州,即今瑞云許家坡。47年,四川境内發生了以雷遷爲首的聲勢浩大的暴動。48年,東漢政府爲防止再次發生叛乱,强行將“乱民”7000余人遷往江夏(今武漢一帶)。年方16歲,許黄玉家族等20余人殺死随船官兵,奪船東下,經楊子江,在5月中旬漂流入黄海。48年7月27日清晨,一座形似鏝頭狀的島嶼展現在眼前。他們絶地縫生、歡呼雀躍。
김수로왕비의 무덤에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적힌 것은 그 출신지 사천 보주普州에서의 내력에 의한 것이다.
[주] 한편 김수로왕 때에 인도로부터 석탈해昔脫解가 바다를 건너왔는데 [삼국유사]에서 석탈해의 부왕은 완하국왕玩夏國王 이라고 했다.
그의 이름 석탈해는 석가모니 시다르타Sidhartha의 차자借字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서 가야에 불교를 전파하러 온 것이다. 그러나, 이미 가야에는 허황후의 오빠인 허보옥이 장유화상長遊和尙이라는 법명으로 파사석탑을 가지고 와서 불교를 전파하고 있으므로, 석탈해는 일본으로 떠났다가 신라로 들어가서 신라의 4대왕 탈해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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