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1)貊族,고구리,발해

발해사 [9]: 발해의 주민구성

자연정화 2013. 10. 1. 20:29

자료출처 : 박현배의 발해사

 

 

발해의 주민구성 논쟁은 이원적 계층론에 이어 일원적 계층론이 등장하면서 의견이 상충하고 있다.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으로 발해는 구성 되었는지 아님 발해 주민 모두 고구려인 출신이었을까?

 

발해의 주민구성을 보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전통적인 이원적 계층론과 이후 새롭게 등장한 일원적 계층론이다. 아직 어느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지, 사실인지는 고고학의 성과와 새로운 사료 발견에 의해서 달라질 것이다.

이원적 계층론의 주장은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유취국사> 권193 <발해국지장편> 권2 총략 하 부분을 살펴보자.

"또 재당학간승 영충 등이 덧붙여 보낸 글을 받들어 전하였다. 발해국은 고려의 옛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천명개별천황7년 고구려 국왕 고씨가 당에게 멸망 되었으며, 그 후 천지진종풍조부천황 2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화동 6년에 당에서 책립받았다. 그 나라는 사방 2천리이며, 주.현과 관역이 없으며, 곳곳에 촌리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으며, 토인은 적다. 모두 토인이 촌장이 되었으며, 대촌에는 도독, 다음에는 자사이며, 그 아래는 백성들이 모두 수령이라 부른다. 토지는 극도로 춥고, 물이 있는 논(수전)이 마땅치 않다. 자못 풍속에 글을 안다."

又傳奉在唐學間僧泳忠等所附書,渤海國者高麗之故地也,天命開別天皇七年高麗王高氏爲唐所滅也,後以天之眞宗豊祖夫天皇二年大祚榮始建渤海國,和銅六年受唐冊立,其國延?二天里,無州縣管驛,虛虛有村理,皆靺鞨部落.其百姓者,靺鞨多,土人少,皆以土人爲村長,大村日都督,次日刺史,其下百姓皆日首領,土地極寒,不宣水田,俗頗知書

두번째로 발해 멸망 후에 발해인, 여진인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발해인과 여진인은 발해가 존재한 시대에도 이들 두 민족은 분리 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럼 이들 발해인은 누구이며 여진인은 누구인가? 발해인으로 불리워지는 사람은 고구려 후손들이고 여진인은 바로 말갈인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한국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민구성이 이원화된 모습이다.

일원적 계층론은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의 동향과 사료상에 나타나는 말갈에 대한 해
석 차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에 나오는 말갈이 시대적으로 수 세기가 차이 나는 상황에서, 말갈이라는 명칭은 스스로 불렀던 것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정해진 타칭이라는 주장이다.

즉,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만주 동부 지역 사람들은 동일 지역에 거주함에도 불구하고 그 명칭이 시대에 따라 바뀌어졌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다. 또한 고구려 시대에는 이원적 주민구성이 없었는데 30년 뒤 건국한 발해에만 등장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설명이다.

고구려 멸망시 호구수 69만 7천호에 따른다면, 1 가구당 다섯명으로 계산할 때 고구려 총 인구는 350만명이다. 이 인구 중에서 주변 국가로 이주하거나 잡혀간 사람은 50만명 내외로 추산한다면 나머지 300만명 주민의 행방을 고려 해야 한다. 또한 연해주에서 발견 되고 있는 고구려 유적.유물도 일원적 계층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두 계층론 중에 어느 것이 설득력을 가질까? 필자는 얼마 전까지 발해 주민구성 부분에서 일원적 계층론을 지지했으나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발해 주민 구성은 '변천론'이다.

발해 초기에는 말갈인이 보다 많이 주민을 구성 하였지만 중앙 집권화가 강화되면서 말갈 부락도 자연 영향을 받게 되어, 멸망시에는 어느 정도 발해인으로 동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동화가 되지 않은 말갈인들은 발해 멸망 후에는 여진족으로 독자적인 정치 집단을 이루어 생활했다고 본다.

연해주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적을 본다면, 산에서 생활하던 그들이 평지로 내려와 성을 쌓고 주거지를 마련한 사실은 이들 지역이 발해화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발해는 고구려보다 국가 존속이 짧았기에 강력하게 동화시키지 못하여 발해 멸망 후에는 자연히 발해에서 이탈하는 부락과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모든 고구려인을 지배층으로 볼 수 없으며, 피지배층을 말갈인에만 한정 시킬수도 없다. 말갈 출신도 관직에 오르고 성을 지키는 장수도 있는 등 말갈계 발해인들이 지배층에 존재했다. 물론 지배층만 본다면 옛 고구려인 출신이 많지만 적지않은 말갈인도 인정을 해야 한다.

결국 출신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귀속 본능이 더욱 중요하지 않나 싶다. 말갈인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자기가 발해인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발해인이고, 고구려인 출신이더라도 그가 말갈인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다면 그는 말갈인일 뿐이다. 그럼 발해 주민구성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이원적 계층론인가? 일원적 계층론인가?

멸망시에 대부분의 발해 부들이 요에 대항하여 싸운 사실은 종족 계통을 따지기 전에 이미 그들은 발해인이 되었던 것이다. 앞으로 민족보다는 발해인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