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 박현배의 발해사
남북국은 200년간 대립과 협력의 시대를 보내었다. 가장 힘든 시기에 발해는 신라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신라 역시 승낙하였다. 발해와 신라가 멸망한 이후
에도 발해 후국과 고려가 관계를 계승하여 이어 나간다.
발해와 신라의 관계
신라의 제5품 대아찬 사여
698년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영주에서 2000리(약 1000km)나 떨어진 동모산에서 그는 나라를 세웠지만, 사실 당나라 추격 군대와 교전한 시기는 700년이다. 동모산에 698년 나라를 세웠다면 시간적으로 역전된다. '대조영'이 영주를 탈출하여 처음에는 자신들의 연고지였던 요동지방으로 가서 그 곳에서 일시 나라를 세웠다가, 급기야 당나라 군대가 공격해오자 당시에는 오지였던 이 곳으로 어쩔 수 없이 피신하였던 것으로 생각한다.1)
신라가 '대조영'에게 제 5품 대아찬 이라는 벼슬을 준 것이 700년으로 짐작된다.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에 유일하게 나오는 내용으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조영'이 당나라의 '이해고' 군대를 궤멸시키고 동모산에 나라를 다시 세우자마자 바로 사신을 파견한 셈이다.
'대조영'은 당시 국제 정세와 더불어 고구려의 멸망을 잘 알고 있었다.668년 이후 신라와
당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신라는 이 시기에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당의 군대를 패퇴시킨 신라이기에 그들은 당을 경계하였다. 군사적으로도 당에게 승리하였기에 신라는 당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고 있었다.
동모산에 다시 나라를 열었던 '대조영'은 고구려가 당과 신라의 연합 작전으로 인하여, 멸망
했다는 사실을 '대조영' 스스로 경험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신라의 연합을 막고 두 나
라의 불편한 관계를 이용하여 발해의 안전을 보장 받고자 하였다. 결국 '대조영'은 신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수립하여 성공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발해와 신라의 교류
발해와 신라의 민간 교류는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 사기에- 발해국의 남해, 압록, 부여, 책성의 4부는 모두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신라 천장군으로부터 책성부까지 39개의 역이 있다.-라고 전해진다.
발해의 주요 다섯도로 가운데 신라도가 있었으며 연해주 지역에서 발견된 불상이 신라 형
식의 모습을 띄고 있기에 신라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발해의 국제상인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발해상인과 신라상인과의 관계에 주목하고 있다. 산둥지방에 발
해인이 머무는 관(館)이 있었으며 신라인이 머무는 곳도 있었기에 <도장>에 나오는 '이광
현'의 내용처럼 상인들간의 교류가 활발했을 것이다.
또한 도인이 신라와 발해를 유력한다는 사실 역시 양국간의 우호적인 관계 없이는 불가능
하다. <협계태씨족보>에는 왜구가 신라 동해안에 침략하자 발해 군대가 출동하여 신라군대와 협력해서 싸워 격퇴시킨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발해 멸망 시기에
발해가 신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여 결속을 맺은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남북국의 관계는 한규철 교수의 '발해의 대외관계사'를 참고하기 바란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은 필자의 예전 홈페이지 발해사1 '남국과의 외교'를 참조하기 바람)
발해와 고려의 관계
고려 태조가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고 부르며 발해 왕실과 혼인을 맺었다는 내용은 사실일까? 고려와 발해와의 혼인관계를 알 수 있는 부문은 <자치통감>이다. 서역의 승려 '말라'가 고려의 태조에게 들은 내용을 후진의 고조에게 전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 태조는 말라에게 발해는 본래 친척의 나라이며 그 왕이 거란에 잡혀 있으니 후진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여 발해왕을 구하고 옛 원한을 갚고자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
만 고려 태조가 발해왕실과 혼인을 맺었다는 구체적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어느 사서에도 고려 태조와 발해 왕실이 혼인 관계를 맺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없다.
필자는 발해 멸망시까지 발해와 고려는 우호적 관계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위의 내용 역시 고려 태조가 실리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 취한 행동이라고 본다.
(임상선 선생은 '발해의 지배세력연구' 에서 긍정적으로 발해와 고려의 혼인 관계를
받아 들이고 있다. '제 2장 발해의 왕위계승과 왕실협력' 참조)
발해 남부 영토를 침략한 고려
10세기 초, 발해는 요와의 전쟁으로 인해서 남부 지역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요동에서
벌어진 공방전으로 인하여 발해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이 지역은 자연히 정치적 공백
상태를 맞이하였다. 이전 고려후국 역시 발해가 요동지역을 상실하면서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고려군이 발해 남부 지역인 평양을 비롯하여 평안도의 일부분을
점령한 것은 발해에 대한 명백한 침략 행동이었다.
고려군의 북진 자체가 발해에 대한 위협인 것이다. 922년 거란이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고
925년에 고려가 거란에 사신을 파견한 사실은 고려와 거란의 관계가 우호적인 것을 반영
한다. 후백제에 밀리던 고려가 거란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까? 또한 발해 마
지막 왕인 '대인수'가 주변 국가와 결속을 맺었던 국가에 신라는 언급 되고 있지만 고려는
언급 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지리적으로 고려가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신라와의 결속을 맺은 발해정부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언급되지 않은 주변국가에 고려도 포함되는 것일까? 고려가 고구려 계
승을 표방한 것은 필연적으로 옛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발해와의 마찰을 가져 올 수
밖에 없다. 발해의 중앙 정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발해의 멸망은 고려에게 실익을 주었다. 발해인의 망명은 고려에게 군사,경제적으로 많은 이익을 주었으며 발해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명분이 생겼다. 발해인 역시 발해가 존재할 당시에는 경쟁 국가였지만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고구려 계승 의지를 표방한 고려가 다른 나라보다도 우호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요가 발해 지역을 점령하는 것은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며 고토 회복을 강하게 표방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양국간의 충돌을 예견한 셈이다.
고려는 조물성 전투 이후 후백제에 대한 군사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발해 지역을 회복하고 삼한을 통일할 수 있다는 태조의 자신감이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던 요나라의 사절단을
홀대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주)
1) 송기호 저,<<발해를 찾아서>>,1993,솔,p.75.
참고문헌)
임상선 편역,<<발해사의 이해>>,신서원,1990.
임상선,<<발해의 지배세력 연구>>,신서원,1999.
송기호,<<발해정치사연구>>,일문각,1995.
한규철,<<발해의 대외관계사>>,신서원,1994.
'홍익인간·인류공영 > 1)貊族,고구리,발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사 [9]: 발해의 주민구성 (0) | 2013.10.01 |
---|---|
발해사 [8]: 백두산 화산 폭발과 발해 멸망 (0) | 2013.10.01 |
발해사 [6]: 발해 서부 해상세력 (0) | 2013.10.01 |
발해사 [5]: 동해를 건넌 발해인 (0) | 2013.10.01 |
발해사 [4]: 불교가 꽃피운 나라 (0) | 2013.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