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 박현배의 발해사
남북국 시대에는 두 나라 모두 불교가 융성하였다. 발해인의 불교에 대한 애정은 국왕이었던 문왕의 존호에서도 알 수 있다. 지역마다 신앙의 차이도 나타나며 많은 승려들이 당에 건너가서 활동을 하였다.
신라와 더불어 발해도 불교가 꽃피운 나라이다. 남아 있는 유적.유물만 보더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불교를 계승하고 당의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를 발전 시켰는데, 문왕은 자신의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고 하였다.
이 중에서 금륜, 성법은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문왕은 자신을 불교의 수호자로 생각한 것
이다. 불교는 발해 지배층의 중심 종교이기에 크게 융성 하였는데, 고왕 시대에 당나라에 갔
던 왕자가 사찰에서 예배하기를 원했던 사실, 762년 일본에 사신으로 간 왕신복 일행이 나
라 동대사에서 예불한 사실 등은 이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현재까지 석인정, 석정소, 살다라, 재웅 등의 발해 승려들이 전해지고 있다. 발해 시대에는
지역에 따라서 불교 신앙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발해 이전 고구려 지역이었던 훈춘 지
역에서는 이불병좌상을 중심으로 한 화엄 신앙이 유행하였다.
발해가 건국하면서 영역으로 편입된 상경 지역은 당의 영향을 받은 관음 불상을 중심으로
한 관음 신앙이 발전하였다. 한편으로 외래 종교와의 접목도 보이는데 연해주 아브리코스
사원에서 발견된 점토제의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와 중국 길림성 훈춘현 팔련성지에서
발견된 삼존불 중, 왼쪽 협시 보살이 네스토리우스교 십자가를 걸고 있다.
이렇게 지역적 전통과 문화적 교류에 따라서 불교 문화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무덤 위
에 탑을 세우는 것은 발해만의 독특한 형태이다. 정효 공주 무덤의 경우 무덤 위에 벽돌
탑이 있었다. 부처의 사리를 모시는 곳이 탑이니, 정효 공주는 불교적 장례를 치른 셈이다.
발해 시대의 탑은 정효공주 무덤의 탑과 더불어 훈춘의 마적달탑, 영광탑이 전해진다.
이 중에서 완전한 모습을 갖춘 탑은 영광탑인데 이 탑이 발해 시대의 탑으로 판명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 학술 조사에 의해서 밝혀졌다.
영광탑을 보수하면서 지하에 지궁이라는 무덤 칸이 확인 되었다. 한국에 남아 있는 많은 탑들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탑인데 비해 발해는 벽돌로 쌓은 탑들이 남아 있어 지리.환경적인 차이를 느끼게 한다. 전탑은 무너지기 쉬운 단점이 있기에 발해시대의 탑이 영광탑 외에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오지에 탑이 있었기에 남은 것이다.
일본에 갔던 제 27회 발해사절단은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전하여, 이것이 현재, 일본 석산사에 남아 있다. 또한 연해주에서 발견된 석불상은 다른 발해 불상들과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로 인해서 신라 시대의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불상의 유입은 신라와의 문화적 교류 과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서적)
고구려 연구회,<<발해건국1300주년>>,(사)고구려 연구회,학연문화사,1999.
방학봉 저,박상승 편역,<<발해의 불교 유적과 유물>>,서경 문화사,1998.
송기호 저,<<발해를 찾아서>>,솔,1993.
송기호 저,<<발해를 다시 본다>>,주류성,1999.
한규철 외,<<발해사의 종합적 고찰>>,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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