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 박현배의 발해사
요나라가 공격한지 10여일 만에 발해가 멸망했기에 그 원인에 대해서 많은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발해의 멸망을 내분설로 설명하기에 석연치 않는 부분이 많으며, 화산 폭발과 발해 멸망을 연관시키는 사람들도 있다.
발해의 멸망에 대해서 많은 의견들이 있다. 그 가운데 주류를 이루는 것이 내분설이며 조금
씩 다른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내분설보다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내분설이 지지를 받는 것
은 요사에 나오는 이심(離心)1) 이라는 표현으로, 발해가 내분으로 인해서 요가 싸우지 않고 쉽게 이겼다는 내용 때문이다.
한편으로 일본에서 먼저 제기된 화산폭발설은 국내에서 TV 로 방영되어 일반 사람들이 발해사에서 가장 관심이 많은 부분이 되었다. 하지만 이 주장은 하나의 설로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많다. 화산 폭발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8번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내분설을 살펴보자.
내분으로 인한 국가 멸망은 발해 뿐만 아니라 다른 옛 국가에도 빈번히 일어난 일이다.
고구려 후반기에 일어난 귀족간의 투쟁과 발해 문왕 이후 25년간 전개된 정치 투쟁은 국가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하였다.
하지만 외부 위협이 있을 시기에는, 국내 문제는 자연스레 봉합 되게 마련이다. 고구려가 외부의 위협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연합 체제로 나간 점이나 발해 간왕 시대에 국인(國人)들이 정치적 타협을 모색한 것은 그 예이다. 외부의 압력은 일탈하는 지방 세력과 왕권을 강화 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지배층간의 다툼 못지 않게 백성들의 반란이나 폭동도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만든다. 어떤 연구자는 발해 후기에 대규모의 토목 공사 및 지배층의 착취로 인해서 발해 멸망을 설명하고자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자료는 없다.
지배층의 착취에 의한 피지배층의 동요는 발해 후대에 나타나지 않는다. 당나라처럼 지방의 반란이나 백성들에 의한 폭동은 발해 멸망 시기에 없었다. 오히려 멸망 후 발해인의 반요 투쟁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나타낸다.
후대의 일이지만 임진왜란이 발생했을 때 함경도 지역의 백성들이 왕자와 관리들을 잡아서 일본군에게 넘겨준 사실은, 지배층의 착취에 대한 백성들의 반발을 잘 보여준다.
발해인과 발해 군대의 항쟁은 발해 멸망으로 끝나지 않았다. 요의 대부대에 항거하여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렸던 3일간의 부여부 전투(성주 이하 전원이 사망), 항복한 후 다시 전개
된 상경용천부 방어 전투, 멸망 후에 전개된 장령부, 압록부, 안변부, 막힐부, 정리부, 남해부, 철주 자사의 지휘 하에 전개된 철주민의 항쟁은 계급간의 대립에 의한 발해 멸망을 설명
하기에 부족하다.
특히 중앙정부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발해 부들은 조직적인 항쟁을 보여 주고 있다. 가장
오랫동안 치열한 항쟁을 하던 장령부가 요의 군대에 위협 당하자 압록부가 7천 기병을
장령부의 회발성에 보내 연합하여 요군과 싸운 것은 좋은 예이다.
발해인(옛 고구려인), 말갈인의 이원적 주민 구성에 의한 종족간의 불화 역시 발해 멸망의 원인으로 볼 수 없다. 비록 멸망시에 말갈의 일부가 독자적인 행동을 보여 주지만 전체 말갈 부락이 동조한 것은 아니며 발해가 멸망할 시기에는 많은 말갈인들이 이미 발해화된 양상을 보여준다.
발해 멸망 후 정리, 안변부도 반요 투쟁에 합류한다. 특히 정리부는 3번이나 걸쳐 항쟁하는데 이들 부는 모두 말갈 지역이다. 그들을 통치하고 착취했던 지배층이 무너졌는데 무엇이 안타까워 말갈인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겠는가? 고대에는 지금처럼 강력한 민족주의가 발휘하기 힘들다. 생업만 보존해 준다면 왕조가 바뀌어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럼, 발해의 멸망 원인은 무엇일까? 필자는 복합적 요인으로 생각한다. 발해 지배층간의 권력 다툼 및 외교 정책의 실패, 결정적으로 요의 대규모 기습에 발해의 방어체제가 일시에 무너져 버린 것에 그 원인이 있다.
10세기 초, 요동 지역을 둘러싼 발해와 요의 전투는 결국 요의 승리로 끝났지만, 발해의 공격 역시 계속 되었다.
요사 태조본기의 기록을 참조하자.
신책3년(918년), 겨울 12월 경자 초하루에, 요양의 고성에 행차하였다.
(神冊三年)冬十二月庚子朔,幸遼陽故城.
신책4(919년) 삼월병인, 옛 요양의 고성을 수리하여, 한민과 발해인으로 채우고, 동평군으로 고쳐, 방어사를 두었다.
神冊四年 三月丙寅,修遼陽故城,以漢民渤海戶實之,改爲東平君郡,置防禦使.
신책 6년(921년)12월, 단주, 순주의 백성들을 동평군과 심주로 이주하도록 하였다.
神冊六年 十二月,認徒檀順民干東平瀋州.
위 사료를 참조한다면, 요의 태조는 918년 요양에 행차한 후 본격적으로 요동 지역을 요의
통치 지역으로 공고화 하기 위하여 한인과 발해인, 단주, 순주의 백성까지 이주시켰다. 요의
침략은 발해 영토가 일정 부분 상실 되었다는 의미이며, 멸망의 과정을 거치는 중앙 정부의 약화로 받아 들일 수 있다.
하지만 924년 5월에 전개된 발해군의 요주 공격은, 발해의 중앙 정부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발해군은 요주를 점령하고 자사 장수실을 죽인 후 거란인을 납치하였다. 이 전투 이후 요는 보복전으로 7, 8월 발해를 공격했지만 승리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해 6월, 요의 태조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 지역으로 정벌을 떠났다.
요의 주력군이 서쪽으로 이동하자 발해는 외부적인 위험에서 잠시 벗어나게 되었다. 외부의 긴장감이 완화 되면서, 발해 내부에서는 다시 정치 투쟁이 일어났다. 925년 9월, 고려로 망명한 발해인들은 정치 투쟁에서 밀려난 세력인 것이다. 요의 태조가 이끈 군대는 신속하게 서쪽 지역을 정벌하고 돌아왔으며, 925년의 국제 정세는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인선왕도 이런 상황을 파악하고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외교적으로 오월과 신라와 결속을 맺어 요의 공격에 충분히 대항할 여유를 가졌다. 925년 12월, 요의 태조는 요동 지역에서 발해 서부를 공략한 것이 아니라, 북쪽 지역이던 부여부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부여부는 상경용천부와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 부여성만 돌파하면 수도를 기습하기에 아주 유리한 위치였다.
부여성이 함락된 후 길목에 있던 차단성과 방어성들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요의 주력 부대가 기병이 중심이 되어 신속하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요군은 발해의 거란도를 따라 공격에 들어갔다. 당시, 부여부는 3일간의 전투를 치루었지만, 요의 대군에 무너지고 발해 노상이 이끌던 3만 발해군도 적의 선봉 부대에 괴멸 되어버려 10여일 만에 상경용천부는 포위 되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주위의 발해군이 지원하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이미 수도를 지
키던 3만 발해군은 출전하여 괴멸 되었고, 한편으로 16km나 되는 평지성을 방어한다는 것은 요의 대군 앞에서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더욱이 고구려나 발해 초기처럼 이원화된 방어
체제(산성과 평지성)가 아닌 점이, 상경용천부의 함락을 쉽게 만들었다.
결속을 맺었던 국가들이 발해에 군사적인 도움은 커녕 오히려 요군을 도와주는 사태가 일어났다. 발해는 외교적으로도 고립되어 요나라에 멸망을 당하는 비운을 겪은 것이다.
비록 926년에 발해는 멸망하고, 국왕 이하 대부분의 신하는 요에 잡혀 갔지만 세자 대광현에 의해서 935년까지 항쟁은 계속 되었다. 이후에도 발해 후국들이 계속 발해의 역사를 이어갔다는 점에서, 발해 후국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926년, 발해가 멸망하면서 만주와 요동 지역이 한국사에서 멀어진 것이 아니다. 12세기 대발해국이 멸망하면서 발해의 역사와 만주 지역이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앞으로 발해사는 926년을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서술 되어야 하지 않을까?
주)
1)요사 권75 열전 제5 야율우지전.
참고문헌)
김은국,<발해멸망의 원인>,<<발해 건국 1300주년>>,(사)고구려 연구회,1998 .
박시형,<<발해사>>,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1979.
송기호,<<발해정치사연구>>,일문각,1995 .
임상선,<<발해의 지배세력연구>>,신서원,1999.
유득공 저,송기호 역,<<발해고>>,홍익 출판사,2000.
한규철,<<발해의 대외관계사>>,신서원,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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