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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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사 [2]: 문왕의 실리 외교

자연정화 2013. 10. 1. 19:49

자료출처 : 박현배의 발해사

 

 

발해 제 3대 문왕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왕이다. 발해의 기초를 마련하여 발전시킨 국왕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당대의 국제 정세는 복잡하게 전개 되어 발해의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한국 역사상 가장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친 왕이라면 대부분 광해군을 생각한다. 임진왜란때 선조를 대신하여 전쟁을 지휘하고 명.후금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 정책으로 조선의 국익을 보호했던 국왕이다. 하지만 국제 정세의 혼란을 영토 확장으로 기회를 삼은 왕이라면 고려 공민왕과 발해 문왕이다.

특히, 문왕은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여 외부의 위협을 제거하고 발해의 위상을 높였다.중국의 혼란한 상황을 시기적절히 활용했던 국왕도 한국 역사상 드물 것이다. 이 글에서는 발해 문왕의 외교 정책을 살펴보고자 한다.

위기를 기회로 삼았던 문왕

발해 제 3대 문왕은 대흥이라는 연호처럼, 발해의 이름을 크게 떨친 왕이다. 정효공주묘지문에 나오는 문왕의 모습은 황상이라는 용어를 쓸만큼 자신감에 찬 국가의 통치자였지만, 사실 문왕의 56년 통치 기간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부적으로 왕권 통치 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수도를 여러 번 옮겼으며, 중국에서 일어난
안사의 난을 피하여 수도를 옮기고 전쟁에 대비하는 등 힘든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도 왕비, 아들, 딸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대(對) 중국 외교정책

737년 국왕이 된 문왕은, 이전 무왕의 영토 팽창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동.북쪽의 여러 말갈 부락을 복속시켰다. 한편으로 문왕은 꾸준히 당에 사신을 보내어 적극적으로 당의 문화를 받아들였는데 정효공주무덤, 상경 용천부, 5경15부62주의 지배체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선진 문화의 수입은 고구려 멸망 후 사라진 고구려 선진 문물의 복원과 더불어 당의 문화를 접목시켜 당과 대등한 수준으로 발해의 문화적 수준을 격상시키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발해와 당의 우호적 관계는 당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서 변화하게 되었다.

755년 당나라에서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발해는 대당 정책 노선을 친당 노선에서 중립 노선으로 선회시켰다. 문왕은 신중하면서도 정확한 현실적 안목을 보여 주었다.

아래의 내용을 보자.

" 숙종지덕원재 (756년), 평로유후사 '서귀도' 가 과의도위.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 '장원간' 을 발해에 보냈는데 그가 말하기를 금년10월에 당이 안록산을 공격할 것이니, 왕은 병사 4만을 일으켜, 적을 평정하는데 지원해주기 바란다. 문왕은 그가 다른 마음을 가진 것으로 의심하고 장원간을 발해에 머물게 하였다."

肅宗至德元載,平盧留後사徐歸道遺果毅都尉行柳城縣四府經略判官張元澗來聘曰, 今載十月唐擊安祿山,王須發兵四萬,來援平賊,王疑其有異,留之."1)

당시 문왕은 서귀도를 의심하여, 장원간을 억류시키고 관망하였다. 그 해 12월 서귀도 역시
안록산의 진영에 가담하였다. 이미 문왕은 서귀도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문왕이 군대를 파병했다면 전쟁 양상은 발해가 반란군을 지원한 결과가 되어 발해-당 전쟁으로 확대 되었을 것이다.

757년 위구르의 파병으로 인하여, 장안이 회복되고 반란군은 수세적인 입장에 놓이게 되었
다. 758년 4월에 왕현지가 장군 왕진의를 발해에 보내,

"4재 4월에 현지는 장군 왕진의를 보내 전하기를, 천자는 이미 서경에 돌아왔으며 태상황을 촉에서 맞이하여, 별궁에 거주하게 되었으며, 달아난 적을 무찔러버려 저를 보내어 알리는
것입니다. 문왕은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워하여, 진의를 머물게 하고, 별도로 사신을 보내 알아 보았다. 숙종이 칙서 한 권을 하사하였다."

四載四月,玄志遣將軍王進義來聘曰,天子已歸西京,迎太上皇干蜀,居別宮,초滅賊徒,故遣下臣來告.王爲其事難信,留進義,別遣使評間.肅宗賜王勅書一券.2)

762년 사사명의 아들 조의가 이끄는 반란군에 당의 대종은 위구르에 다시 원병을 요청하고, 위구르의 3대 가한인 무우가한은 직접 병력을 이끌고 당의 지원에 나섰다. 이 시기에 당나라는 발해 문왕에게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지위를 격상시켜 책봉 했는데, 이것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발해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이다.

762년 당은 홀로 반란군을 진압하기에는 국력이 쇠진하였다. 겨우 주변국의 지원에 의해서 버티고 있었다. (신라도 3만명을 파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직접 참전했는지 알 수 없다)763년 안록산의 난이 진압된 후, 발해와 당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발해가 안록산을 간접
적으로 지원했기 때문이다.

안록산이 중앙 아시아의 보급로를 유지할려면 발해 지역을 통과하는 외에 방법이 없다.
서쪽의 비단길이 통제되는 상황에서 발해의 북쪽 지역인 '담비의 길' 을 통해서 우회하여 보급로를 유지하였다. 이 길은 발해의 영토이기 때문에 발해의 묵인하에 보급로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즉, 발해가 안록산의 보급로를 묵인하였기 때문에,당의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3)

문왕은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전쟁 없이 요동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당나라에 개입 하지 않고 실리를 챙겼다.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유민에 의해 자치 형태로 남아있던 이 지역은
문왕대에 발해로 복속되었다. 발해는 요동 평야의 경제력을 확보하여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요동 평야를 확보함으로써 발해는 해란강 유역과 함께 양대 경제축을 확보하였다.

763년 안사의 난은 끝났지만, 당은 위구르의 파병 결과로 위구르에 막대한 공물을 보상해 주었고, 특히 견마교역으로 인한 무역 역조 현상으로 인해서 당은 큰 부담을 가지게 되었다.4) 일시적이나마 발해와 당의 관계는 악화 되었지만 곧 복구되어 발해는 당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해 나갔다.

대(對) 일본 외교정책

중국 지역이 혼란한 상황에서 일본에서는 757년을 전후로 하여 신라 정벌에 착수하였다. 일본은 단독 작전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발해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일본에 오는 발해 사신을 특별히 대접하였다.

명분은 일본 사신이 신라에서 굴욕적인 대접을 받았던 원한을 갚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전쟁의 주된 목적은 일본의 내부 문제를 해결할려는 것이 이유였다. 761년 일본측에서는
고구려계 출신인 고마오오야마(高麗大山)를 보내어 협공 계획을 실현시킬려고 했지만5)
762년 연말에 돌아온 발해 사신은 무관이 아닌 자수대부의 관직을 가진 문관이 파견 되었다.
대사의 신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이전까지 무인 출신이던 대사와 달리 문인이
대사로 온 것은 더 이상 군사적인 관계에 치중하지 않겠다는 발해의 우회적인 답변이었다. 즉, 발해는 대사의 신분으로 일본측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한 것이다.

762년 국제 정세를 살펴본다면, 발해는 이미 당으로부터 공식적인 국(國)으로 승인 받았으며, 당에 대해서도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과 안사의 전투로 인하여 발해는 손쉽게 요동 지역을 확보 하였으며,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문왕은 내부 통치에 주력하였다.

발해는 남쪽의 신라보다 북쪽의 거란을 사이에 두고 있는 강국 위구르를 견제해야 할 상황이었다. 사실, 문왕은 군사를 동원해서 신라를 칠 이유가 없었다. 이미 발해는 넓은 영토를 점유하고 있었으며 요동 지역의 확보로 인해서 충분한 경제력이 확보 되었다. 또한 신라의 공격이 예상되는 시기도 아닌만큼 희생을 치루면서 전쟁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문왕의 자신감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도 나오는데, 그는 천손이라는 용어 사용과 더불어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의 나라(또는 외숙과 숙질)라고 하였다.6) 문왕의 초기 시절과는 다르게 발해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771년 청수대부 일만복이 이끈 사절단은 국서로 인해서 문제를 일으키자 대사 일만복이 국서를 고쳐, 사태는 수습 되었는데 그 이후에도 문왕대에 파견된 사신들은 국서 문제로 일본측과 문제를 일으켰다.

문왕의 이러한 외교 정책 변화는 대.내외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당-신라의 연합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무왕대에 일본과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신라 견제의 목적이 된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당이 몰락하여 대외적인 위협이 사라지자 자연히 일본과의 정치적 관계가 퇴색되었던 것이다.

안사의 난은 동아시아에서 발해의 위상을 제고시킨 계기가 되었다. 발해 문왕은 고구려의
천손을 표방하며 발해 왕실의 존엄 및 유구한 역사를 일본 측에 통보할만큼 자신감에 충만
하였다. 대내적으로도 56년간의 1인 통치에 발해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였다.

슬기롭게 난국을 헤쳐나간 문왕

문왕은 국제정세의 불안감을 무력 대신에 외교 정책으로 해결하였다. 동아시아 전체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문왕은 흔들리지 않고 적절히 상황에 대처하여 위기를 국가 발전의 기회로 삼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주)

1) <<渤海考>>,<君考>,文王.
2) <<渤海考>>,<君考>,文王.
3) 에.붸.샤브꾸노프 엮음,송기호.정석배 옮김,<<러시아 연해주와 발해역사>>,민음사,1996,p.285.
4) 우덕찬,<<중앙 아시아사개관>>,부산외국어대학교 출판부,1998,p.83.
5) 상전 웅 저,최봉렬 역,<<발해의 수수께끼>>,교보문고,1994,p.92.
6) 송기호 역,<<발해고>>,홍익출판사,2000,p.153.

참고문헌)

상전 웅 저,최봉렬 역,<<발해의 수수께끼>>,교보문고,1994.
송기호,<<발해정치사연구>>,일조각,1995.
송기호 역,<<발해고>>,홍익출판사,2000.
에.붸.샤브꾸노프 엮음,송기호.정석배 옮김,<<러시아 연해주와 발해역사>>,민음사,1996.
한규철 외,<<발해사의 종합적 고찰>>,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