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출처 : 박현배의 발해사
8세기 초, 발해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을 벗어하기 위해서 일본을 선택
하였다. 하지만 당이 몰락하자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정치적 관계가 퇴색
되어 경제.문화적인 관계에만 치중하게 된다.
727년 가을, 발해의 사절단이 일본에 표착하면서 발해와 일본의 외교 관계는 시작 되었다.
이후 발해는 35차례(동란국 1번 포함), 일본은 13차례 사신을 파견하였다. 무왕이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한 것은 외교적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였다.
무왕이 첫 대사를 무인 출신으로 파견한 것은 일본과의 군사적 협력을 원했기 때문이다.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757년을 전후로 일본이 신라 침공 계획을 세우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일본측은 발해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할려는 계획을 성사 시키기 위해 고구려인 출신을 대사로 임명하여 발해로 파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발해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762년에 돌아온 답례사는 다름아닌 자수대부,정당성 좌윤이라는 직함을 가진 문관 출신
'왕신복' 일행이었다. 발해는 대사의 신분으로 일본측의 계획을 간접적으로 거부한 셈이고,
'왕신복' 은 발해 사절단 중에서 가장 비참한 대우를 받으면서 낡은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
아왔다.
안사의 난으로 당이 몰락하자 발해는 강력한 국력을 외교적으로도 표출하고자 하였다.
문왕은 스스로 천손이라 칭하며 발해와 일본의 관계를 장인과 사위로 설정하여
국서 없이 구두로 일본 천황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등 국력을 과시 하였다.
물론 이러한 발해의 행동은 일본 정부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전 국가이던 고구려를 이용
하여 고구려=발해라는 인식을 일본측에 심어주어 일본 정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외교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발해는 일본에 대한 외교 정책에서 경제적 이익을 챙기며 정치적 명분을 이용하여 일본
정부에 발해의 유구한 역사와 왕실의 정통성을 심어주고자 하였다. 문왕대의 발해와 일
본의 힘 겨루기는 결국 발해 사절단만 곤란하게 만들어 771년 '일만복'이 이끄는 사절단은
국서가 무례하다고 하여 되돌려 받자 일만복은 다시 국서를 고쳐 쓰는 일도 발생하였다.
문왕 말기부터 발해와 일본의 관계는 경제적인 것에 집중 하였으며, 9세기 중순 이후 당이
혼란에 빠지자 일본에 대한 무역 의존도가 높아졌다. 상경용천부에서 발견된 일본의 화
동개보는 이러한 교류를 뒷받침 해주는 증거로 872년 26회 사절단인 '양성규'의 일행은 일
본 정부에서 40만 관전을 교환하여 일반 시장에서까지 모피를 거래할 정도였다. 발해 사신
의 이런 행동은 일본 조정에서 "실제로는 상업을 하는 무리"로 일컫어졌다.
양국은 불편한 시기도 있었지만 발해와 일본은 대체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에 파견 되는 발해 대사의 교양 수준은 매우 높아 일본측 문인들은 발해 사절단을
만나는 것을 매우 기뻐하였다. 특히, '양태사' 등은 무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시적 감각이
뛰어났다.
지금도 일본측의 사서에 발해인의 한시 9수가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한편으로 발해 대사
들은 일본 천황 앞에서 격구의 시범을 보여주고, 문인들과 이야기도 나누는 등 여러가지
문물을 전해 주었다.
26회 발해 사절단의 경우 일본에 "장경선명력"을 전해 주었는데, 일본에서는 이것을 1684년
까지 사용 하였다. 27회 발해 사절단의 경우에는 '불정존승다라니경'을 전하여 지금도 일본 석산사에 남아 있다. 또한 발해에서 전래된 발해악은 현재에도 '아야키리'로 아악의 상연 종목으로 남아 있으며, 1992년 일본 동경 예술극장에서 '궁내청식부직악부'에 의해 상연 되기도 하였다.
일본 역시 발해가 필요한 물품을 전해 주었으며 무녀들을 발해 왕실에 보내기도 하였다.
발해에 머물면서 공부하던 일본인들도 있었으며 중국이 혼란스러워 해상 교통로를 위협
받자 발해를 통해서 육지나 서부 해로로 중국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발해는 일본과의 교류에서 많은 희생을 치루었다. 대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동해
를 건너다가 풍랑을 만나 죽었으며, 전염병에 의해서 귀국 하지 못하고 노토 반도에 묻힌
발해 대사도 있었다. 한편으로 일본 동북 지역의 불안한 정세로 인하여 일본 정부에 복속
되지 않았던 아이누족 등에 의해서 도착 하자마자 살해 당하기도 하였다.
수령 '고다불'의 경우에는 귀국하지 않고 월전국에 머물면서 학생들에게 발해어를 가르치
면서 일생을 보내었다. 하지만 발해와 일본의 우호적 관계는 군사적 협력이 배제 되었기에
발해가 멸망하면서 양국간의 관계는 자연스레 단절 되었다.
하지만 동해를 건넜던 발해인의 용기와 정신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참고서적)
윤명철 저,<<바닷길은 문화의 고속도로였다>>,사계절,2000.
유득공 저,송기호 역,<<발해고>>,홍익출판사,2000.
상전 웅 저,최봉렬 역,<<발해의 수수께끼>>,교보문고,1994.
임상선 편역,<<발해사의 이해>>,신선원,1990.
한규철 저,<<발해의 대외관계사>>,신선원,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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