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배달한국(BC3898)

이집트 와 고조선의 피라미드 비교

자연정화 2018. 6. 25. 11:05

이집트 와 고조선의 피라미드 비교

 

이집트 피라미드 (영어: Egyptian pyramids)는 이집트에 위치한 정사면체의 모양을 가진 고대 석공들의 건축물이다. 2008년 기준, 이집트에 모두 138기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 대다수의 피라미드는 이집트 파라오나 그들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사카라의 계단 피라미드

가장 먼저 알려진 이집트 피라미드는 이집트 북부의 멤피스 사카라지방에서 발견되었다.

가장 최초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630년부터 2611년까지 이집트 제3왕조 때 지어진 파라오 죠세르의 피라미드로 알려져 있다.

 

 

이 피라마드와 주변의 건축물들은 설계자 임호테프(Imhotep)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마름돌로 쌓아올린 건축물로 인정받는다. 피라미드 건설에 동원된 인부들은 거의 수천명에서 2만, 혹은 10만명까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무덤으로 시작하였으나, 몇 번의 증축을 거쳐 62미터에 이르는 현재의 계단식 피라미드가 되었다. 기초부는 109 x 125 미터에 달하며, 주변에서도 많은 양의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기자의 대피라미드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이집트 기자에 있는 피라미드 중 하나이다.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인 쿠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대피라미드는 기원전 2560년경 14년 에서 20년간에 걸쳐 완공되었다. 쿠푸의 와지르였던 헤미우누가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는 약 147미터이며, 밑변의 길이는 약 230미터이다. 고대 이집트의 단위로는 높이 280 큐빗, 한변의 길이 440 큐빗이 된다. 고대 이집트의 1 큐빗은 0.542m에 해당한다. 원래 꼭대기에는 금으로 만든 피라미드석이 있었는데 도난당해 지금은 마치 윗면이 작은 사다리꼴이다.

 

 

쿠푸의 대피라미드를 짓는 데 들어간 돌의 전체 무게는 약 5900만 톤으로 추정되며, 약 230만개의 석회암과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은 돌은 2톤 정도이지만 큰 돌은 한개의 무게가 무려 50톤에 달한다. 그리고 평균 돌의 무게는 2.5톤이다.

 

 

 

홍산문화(紅山文化·BC 4500~BC 3000년)

뉴허량 훙산 유적은 원래 1930년대 중반 일본에 의해 발굴된 유적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학자들은 이 유적지의 중요성을 그리 깊이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1981년부터 시작해 1983~1985년에 진행된 주요 발굴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성과가 줄을 이었다.

 

 

이들 유적은 중국 최초의 원시 종교 유적이 발견된 둥산쭈이(東山嘴)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젠핑(建平)과 링위안(凌源) 중간에 있다. 인근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울창한 소나무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제단, 여신묘(사당), 적석총과 이집트와 유사한 피라미드 그리고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 형태와 돌로 쌓은 방형(方形, 사각형) 모양의 광장이 발견되었다

 

뉴허량 훙산 유적은 전체적으로 여신 사당을 중심으로 피라미드형 무덤을 전면에 두고 여러 산 정상이 돌무덤들로 둘러싸여 있는 형태이다. 이와 같은 배치는 남북 10킬로미터, 동서 50킬로미터의 광대한 면적 안에 각 시설이 일정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음을 의미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전체 배치에서 여신 사당이 중앙의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과거 신석기시대로 간주하던 5,000~6,000년 전에도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 ‘국가 추형(雛形, 모델)’으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국에 ‘신비의 왕국’이 존재했다는 뜻이며, 중국 측에서 ‘중화 문명 오천 년’을 들고 나온 근거이다.

 

1992년에 확인된 동방의 피라미드(제13지점). 아직 정식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는 이집트 사카라에 있는 제2왕조 파라오인 조세르(BC 2630~BC 2612년 추정)의 계단식 피라미드다. 그런데 이 동방의 피라미드는 이보다 1000년 앞선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훙산문화(홍산문화·紅山文化) 돌무덤은 라오닝성 푸신(阜新) 후터우거우(호두구·胡頭溝)에서도 확인됐다. 이 또한 의미심장했다. 훙산문화 시대(BC 4500~BC 3000년) 위 문화층에서 한반도와 발해연안의 대표 유물인 비파형 청동단검이 나왔기 때문이다.

 

비파형 청동단검을 썼던 사람들이 훙산문화인들의 묘제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의미. 이 얼마나 끈질긴 문화적인 연속성과 계승성인가. 돌이켜보면 우리 민족은 끔찍하게 돌무덤을 사랑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 직전 중국 정부는 지안(輯安)의 국내성 주변에서만 1만3000여기의 고구려 적석총을 확인했다. 43년이 흐른 지금에도 약 6000기가 남아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보다 500-1000년 앞서…중원에는 없어

문제의 60m짜리 피라미드식 거대 적석총은 아직도 발굴이 안 된 상태다. 처음에는 그 규모가 너무 커서 무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주변을 파봤더니 돌이 쌓여 있었다. 이것도 혹시 적석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시굴을 하고, 그것을 기초로 평면도를 그렸다.

 

7층짜리 피라미드식 적석총인데, 한 변의 길이가 60m나 된다. 그 밑에는 가로 세로가 60미터, 40미터인 평평한 돌을 깐 제단까지 나왔다. 이 거대 적석총을 발굴하면 그 안에 뭐가 나올지, 진짜 세계적인 이슈가 될 것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나온 것보다 더 많은 게 나올 수밖에 없다. 저 큰 무덤 안에 달랑 옥기 하나 나올 리는 없지 않은가?

 

 

동북아시아 상고사와 고대사를 보는 눈을 새롭게 다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피라미드가 메소포타미아 우르지역에 나오는데, 그게 기원전 2600-2500년까지로 추정한다. 그런데 홍산문화의 이 거대 적석총은 그것보다 500-1000년가량이나 앞선다. 크기도 어마어마하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기원전 2500년까지 밖에 안 본다.

 

이런 피라미드식 적석총은 중원에는 안 나온다. 중원 가까운 곳에서는 허베이성 위쪽과 내몽고자치구가 만나는 영하시에 있는 서하왕국의 서하왕릉에서 흙벽돌로 쌓은 피리미드식 묘를 발견할 수 있다. 거기는 전부 황토 고원이라 돌이 없으니까 흙으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그쪽 사람들의 조상 역시 홍산문화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 수도 국내성 터 일대 적석총 수천 기 널려 있어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이 우리 민족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홍산인들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한반도로 적석총 문화가 이어졌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장군총이다. 장군총은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중국 집안시에 있다.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장군총 앞에 서면 기가 죽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장군총의 한 변의 길이는 30미터, 31미터다. 그런데 평면도를 보면 홍산문화의 적석총과 구조가 똑같다.

 

물론 연대와 크기는 홍산문화 거대 적석총에 비교할 수 없지만. 장군총뿐만 아니라 광개토대왕릉, 북한이 발굴했다는 단군릉도 모두 7층, 9층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구조다. 또 집안시의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무덤군’에 아직도 수천 기의 크고 작은 피라미드 적석총이 널려 있다. 모두 홍산문화 적석총과 연결된다.

 

중국 집안시 산성한 고분군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우실하 교수 제공

 

어떤 사람들은 홍산문화 적석총과 고구려 적석총이 연결된다고 하면 ‘고구려 적석총은 빨라야 기원후 3~4세기 이고, 홍산문화 적석총은 기원전 3500년인데, 어떻게 4천 년 가까운 간격을 뛰어 넘어 두 유적을 연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기원전 2500 년에 피라미드를 짓고 지금까지 한 번도 다시 지은 적이 없다.

 

또한 마야, 잉카문명을 일군 사람들이 거대한 피라미드를 만들었지만, 그 이후로 현재까지 이들은 한 번도 그런 거대한 피라미드를 다시 지은 적이 없다. 그렇게 4천 년 동안 한 번도 안 지었다고 현재의 이집트인들이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의 경우에는 고구려, 백제 시대에 과거의 피라미드를 복원까지 하지 않았는가?”

 

홍산문화 시절엔 한국도, 중국도 없어…후손들 여러 갈래로

백제 적석총을 보면 고구려 장군총에 비해서 규모는 훨씬 소박하다. 그러나 형태는 홍산문화의 것과 거의 똑같다. 돌을 깎거나 다듬어 네모나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석을 크기에 맞춰 축대 쌓는 식으로 가지런히 쌓았다. 일본에서도 3단으로 쌓은 피라미드 무덤이 발견된다. 당연히 백제를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홍산문화에서 최초로 등장한 적석총이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이어진다. 몽골 초원 지역에도 적석총이 많지만, 중원에는 없다. 서하왕릉이 있긴 하지만, 그것도 중화문화라고 할 수 없다. 서하는 요나라, 거란 시절에 독립왕국이 있었다. 그들도 어차피 홍산문화의 영역 안에 있었다.

 

홍산문화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을 닮은 고구려 장군총(위 사진·조현 기자)과 백제의 피라미드식 적석총 조감도(왼쪽 사진)과 일본의 피라미드식 적석총(오른쪽 사진). 우실하 교수 제공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홍산문화 세력들이 전부 다 한반도로 온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홍산문화 시절엔 중국도 없었고, 한국도 없었다. 일부 세력은 옥 귀걸이의 경우처럼 중원으로 남하하기도 하고, 다른 세력은 한반도로 내려오고, 또 한 세력은 몽골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문화유형을 보면 앞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주요한 맥이 한반도로 내려왔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몽골에도 돌궐족이나 흉노족들의 무덤이 있다. 그들의 무덤도 전부 적석총이지만, 피라미드는 아니다. 그냥 돌무지무덤이다.(일부 피라미드식 적석총도 동몽골 지역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것을 몽골에서는 ‘돕조’라고 부른다. 몽골학자들과 연대해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