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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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 뉴허량의 원형제단이 베이징 천단의 기원

자연정화 2018. 6. 25. 16:40

홍산 뉴허량의 원형제단이 베이징 천단의 기원

 

천단(중국어 정체자: 天壇, 간체자: 天坛, 병음: Tiāntán)은 중국 베이징 직할시 충웬 구에 있는 사적으로, 명청시대 중국에서 군주가 제천의식을 행하던 도교 제단이다. 매년 풍년을 기원하는 것은 황제의 연례행사였고,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냈다. 고대 규모로는 가장 큰 제단 규모로 만들어졌으며, 대지면적은 약 273만㎡로 황궁인 자금성의 네 배이다.

 

1961년 국무원에서는 최초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선포를 했고, 1998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공중에서 본 천단

 

1406년에 시작하여 명의 영락제 18년인 1420년에 완공되었다. 영락제는 자금성을 건설했던 황제로, 이곳의 건설 당시는 천지단(天地坛)이라고 불렸고,1530년 가정제 9년에는 3개의 제단을 더 추가함으로써 천단이라고 불리게 된다. 동쪽으로는 일단(日壇)을, 북쪽으로는 지단(地壇)을, 서쪽으로는 월단(月壇)을 추가하였다. 현재의 규모로 확장된 것은 청대의 건륭제 연간이다.

 

천단의 기년전

 

중국에서 군주 제천 행사를 맞기 위해 지은 제단 중 가장 유명한 건축물 중의 하나로서 천안문, 자금성과 함께 베이징의 상징이다. 기년전은 직경 32m,높이 38m,25개의 중심에 유지된 제단으로 현존한 중국 최대의 제단.중국 건축 사상 중요한 건축물로 간주 된다.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정월에 황제가 오곡풍작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목조에다가 금도금을 입혔으며, 삼층으로 유리기와를 올려 지붕을 만들었다. 명나라 시대에는 위에는 청색과 황녹색으로 되어 있었지만, 건륭제가 1751년에 중건을 하면서 전부 청색으로 바꾸었다. 1889년 낙뢰에 의하고 한번 소실되었지만,1906년에 다시 재건되었다.

 

공중에서 본 환구

 

천단의 주요 건물은 황제가 풍작을 기원하면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기년전(祈年殿)과 엄밀한 과학적 수치에 의해 축조된 환구(圜丘)인데 둥글게 지어진 이 두 건물에서 하늘은 둥글다는 이념이 엿보인다.

 

그리고 기년전과 환구를 둘러싼 나지막한 담은 땅은 네모지다는 이념에 의해 사각형으로 둥근 건물을 둘러싸 둥근 하늘을 떠받드는 땅을 의미한다.

 

 

중국 문명의 원조는 동이족

 

중국 고고학계의 태두 쑤빙치(蘇秉琦)는 “동이의 랴오허문명과 한족의 황허문명이 조화를 이뤘으며, 여기에 남방·서북문화가 중원으로 집합해 오늘날의 중국 문명이 완성됐다”고 결론 내렸다. 중국 문명을 일원일체에서 다원일체의 문명으로 바꿔 해석한 것이다.

 

중국인들의 ‘용 신앙’이 중원이 아닌 대릉하 상류의 동이족 본거지에서, 그것도 BC 5600년 유적(차하이(사해, 査海))에서 ‘용 형상의 돌무더기’ 형태로 확인된 것도 충격이었다. 또한 차하이 유적과 동시대(BC 6200~BC 5200년)인 싱룽와(흥륭와, 興隆窪) 유적에서는 요즘의 전원주택단지와 같은 주거유적이 발견되었다. 중국인들은 차하이와 싱룽와 유적의 이름을 ‘중화(中華) 제1촌(차하이)’, ‘중화시조의 취락(싱룽와)’이라고 명명했다.

 

 

이 차하이-싱룽와 문화는 뒤에 이어지는 훙산문화(紅山·BC 4500~BC 3000년)의 원형이었다. 랴오닝성 차오양시 젠핑(건평, 建平)과 링위안(능원, 凌源) 양현 경계에 걸쳐있는 뉴허량(우하량, 牛河梁) 유적은 무덤과 제단, 신전(여신묘) 등 고대사회의 3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츠펑(적봉, 赤峰) 싼줘뎬(삼좌점, 三座店)과 청쯔산(성자산, 城子山·샤자뎬 하층문화 즉, BC 2000~BC 1200년)에서 확인한 엄청난 규모의 석성과 돌무덤떼, 제단, 주거지 등도 이미 고국(古國)의 형태를 띠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쑤빙치는 “훙산문화와 샤자뎬(하가점, 夏家店) 하층문화, 진(秦)·연(燕)의 문화는 고국(古國·훙산)-방국(邦國·샤자뎬 하층)-제국(帝國, 진·연)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이것은 중국 문명과 국가 형성의 기원 형태를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고 보았다.

 

뉴허량 제2지점 원형제단 유적

 

훙산문화의 대표유적인 뉴허량 유적 전경. 수장(首將)급이 묻힌 것으로 보이는 적석총을 비롯한 돌무덤들이 줄비하고, 왼쪽엔 조상신·하늘신에 제사지낸 원형제단도 조성돼있다.

 

 

중국 문명사를 1000년 이상 앞당긴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지는 길이 160m에 너비 50m 규모로 거대한 적석총 5개와 돌로 쌓은 제단 1개로 이뤄져있다. 중국 정부가 지난 1983~85년 본격적인 발굴을 했으며 탄소측정결과 기원전 3500년 만들어진 것으로 측정됐다.

 

각 적석총에는 10여개의 석관묘와 함께 옥으로 만든 룡(玉龍. 돼지나 곰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빗살무늬 토기 등이 대량으로 발견됐다. 특히 여신묘는 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우하량 적석총 무덤군에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여신묘는 175m×159m의 대형 유적으로, 진흙으로 만들고 눈에 옥을 박은 사람 머리 크기의 여신의 두상이 발견됐다.

 

대형 제단과 적석총, 여신묘 및 여신상의 존재는 이 문화가 상당 수준의 계급분화가 진행되어 이미 씨족 사회를 넘어섰으며 국가 형성 초기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줬다.

 

우하량 유적지에서 50㎞쯤 떨어진 커주어(喀左·원 이름은 '객나심좌익몽고족자치현(喀喇沁左翼蒙古族自治縣)')의 동산취(東山嘴) 유적도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있다. 기원전 3500년 께로 추정되는 이 유적은 전체 길이 60m, 너비 40m의 크기다. 동산취 유적은 직경 2.5m 가량의 원형 제단터 및 사각형 돌 무덤, 인물 소상, 빗살무늬 토기, 각종 옥 제품 등이 발견됐다.

 

중국 고고학회 상임 이사장인 궈따쉰(郭大順)은 2004년 2월 발간한 <우하량유적지 고고발굴보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5000년 문명의 기원이 요하 유역에 있음이 유적으로 확인됐다. 특히 지난해 우하량 적석총 제16지점에서 발견된 옥풍(玉風. 봉황), 옥인(玉人) 등을 비롯해 각종 제단과 묘, 이들의 배치는 베이징의 천단(天壇) 및 명나라 황제를 모신 13릉과 비슷해 '예(禮)'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전통 사학가들은 황하 유역을 중국 문명의 요람으로 봤다"며 "그러나 홍산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과 유적은 중국 문명의 중심지가 결코 한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요하유역은 중국 문명 발상지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