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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商왕조(bc1600-1046)의 갑골문(甲骨文)

자연정화 2018. 6. 26. 14:40

商왕조(bc1600-1046)의 갑골문(甲骨文)

 

갑골문(甲骨文)는 중국 대륙에서 청조 말엽인 1899년에 안양현 소둔촌, 상의 수도였던 은의 폐허에서 왕의영(王懿榮)이 최초로 발견한 이후 중국 도처에서 대량으로 발굴된 중국 고대 문자로서 거북이의 배딱지[龜甲]와 짐승의 견갑골[獸骨]에 새겨진 상형문자였으므로, 거북이 배딱지[腹甲]를 나타내는 갑(甲) 자와 짐승의 견갑골을 표현한 골(骨)자를 합하여 갑골문(甲骨文)이라고 명명하였다.

 

발견된 지역의 명칭을 따라 은허 문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갑골문자는 상형문자이고 한자의 초기 문자 형태에 해당한다. 발굴된 뼈의 연대는 대부분 기원전 1200년에서 기원전 1050년으로 상말기에 해당한다.

 

 

개요

갑골문은 1899년 청조 말기에 안양현 소둔촌, 상의 수도였던 은의 폐허에서 王懿榮(왕의영)이 최초로 발견하였다. 당시 한약재로서 쓰이고 있었다. 1928년 중앙연구원을 설립하여 동작빈 선생 주도하에 본격으로 발굴하고 조사하였다. 현재까지 수십만 편, 오천 자가 발견되어 그중에 천 자 정도가 완벽히 해독되었다. 세계 각국 박물관에 흩어져 보관되어 있다.

 

은허에서 출토된 거북이의 배딱지와 짐승의 견갑골에 새겨져 있는 상형문자로서 한자의 원형이다. 이것은 점치는 데에 사용되었으므로 복사라고도 하는데 반경에서 주왕까지 12왕, 273년간에 제작되었다.

 

거북이의 배딱지나 짐승의 견갑골을 사용한 복점은 신석기시대에 행해졌지만, 여기에 문자를 새긴 것은 상(商)뿐이다. 현재 알려진 한자의 가장 오래된 형태로, 회화성 요소가 있으나 순수한 문자보다는 진보되어 있지 않다. 지금까지 한 연구로써 밝혀진 내용은 제사·풍우·전렵(田獵)·농경·군사·사명(使命)·질병·복점 등등이다.

 

발굴 이후 상의 제사·정치·사회·경제 등이 연구됐고 전설로만 전해졌던 상이 중국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라는 사실이 규명됐다.

 

 

甲骨文/Oracle bone script

기원전 1,200년경에 처음 등장한, 중국 대륙에서 발견된 최고(最古)의 '체계적인' 문자이자, 한자의 직계조상문자. 거북이의 등껍질(甲)이나 동물의 뼈(骨)에 새겼다고 하여 갑골문(甲骨文)이라고 부른다. 갑골문이 새겨진 뼈는 군사적인 정벌이나 자연재해, 제례를 지내는 방식과 날짜를 신에게 아뢰고 기록한 상나라의 유일무이한 문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갑골문은 점복(占卜)을 친 결과를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한 문자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건을 기록한 갑골문도 존재하지만 흔하지 않다. 사기(史記) 귀책열전에는 "거북이 껍질을 태워 그 징조를 살폈는데 그 변화가 무궁무진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실제 고고학적 결과와 일치했다.

 

갑골문은 좌우 대칭적인 구성을 띠고 있는데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점친 것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올지 안올지에 대한 점을 친다고 하면 좌측에는 '언제언제 비가 오겠습니까?'라는 점을 치고 우측에는 '언제언제 비가 오지 않겠습니까?'라는 점을 친다. 그리고 점의 결과가 맞은 쪽에 결과를 기록했다.

 

고고학적으로는 거북이 배딱지(복갑)나 등껍데기(배갑)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뚫은 모습과 균열이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구멍을 뚫은 것은 가열했을 때 균열이 쉽게 일어나도록 한 조치이다.

 

갑골에 씌여진 글들은 보통 왕이 직접 그 결과를 판단하는 형태의 제사가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갑자일에 점을 쳤다. 왕이 그 결과를 보고 말했다. 삼일 뒤에 비가 내릴 것이다. 삼일 뒤에 비가 내렸다." 이런 형태로 왕의 점복 관여 흔적이 발견된다. 주로 무정(武丁)시기의 기사가 많은데 갑골문 해독 결과에 따르면 무정이 거느린 무당이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 상나라는 제(帝)라는 상나라의 수호신이자 주신신에게 하늘과 자연의 뜻을 물었는데 군사적 문제로는 강(羌)족과, 인방(人方), 주방(周方) 정벌 문제를 많이 제에게 뜻을 묻는다. 특히 갑골문 기록상 주방과 갈등이 심각한데 주방은 훗날 무력 혁명으로 상나라를 전복시킨 주나라로 갑골문에서는 나라를 뜻하는 방(方)과 무리를 뜻하는 족(族)이 혼용되거나 의도적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상나라 사람이 주나라에게 품은 악감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상나라 이후 건국된 주나라 또한 갑골 문자를 사용했는데, 역시 점을 칠때 상(商)자를 두고 옷 의(衣)자로 기록하여 비하 목적으로 추정된다. 옷 의의 발음은 '은'으로 추정된다. 또는 상나라의 수도 은(殷)을 비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사기 귀책열전 『하나라와 은나라는 대나무 가지나 거북이 껍질을 사용해 점을 쳤다. 점을 치고 나면 이를 모두 버렸다. 한번 점을 친 것은 보관해봐야 영험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나라에서는 점치는 직책인 복관(卜官)이 이를 소중히 여겨 보관했다.』

 

참고로 사기에 따르면 점을 치고 버렸다고 언급했으나, 고고학적으로 갑골문은 층층이 아래서부터 겹친 상태로 발견이 되는데, 이는 상나라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에 보관을 했다는 말이 된다. 갑골문을 소홀히 여겼다면 따로 발견되어야 하므로 따라서 귀책열전의 내용이 잘못되었는 것이 현재 학계의 반응이다.

 

 

갑골문의 성격

 

갑골문은 상나라 시기의 문자지만 상나라 문자와 갑골문은 다른 개념이다. 상나라 시기에는 갑골문 이외에도 청동기나 토기,석기,옥기 등에 새겨진 글자들이 현존하고 있으며 죽간 등에 쓰인 문자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갑골문이 상나라 때의 모든 문자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갑골문은 제한적인 성격을 지닌 비교적 특수한 문자이다. 왜냐하면 갑골문은 그 대부분이 상나라의 왕실에서 행했던 점복에 관련된 글자만이 제한적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갑골문이 상나라 때의 문자를 대표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의 개별 글자수는 약 5000여 자에 달한다. 이러한 숫자는 오늘날 중국을 비롯한 한국 및 일본에서 사용되고 있는 상용한자 수가 약 2000~3000여 자임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방대한 숫자이다. 이렇게 볼 때 갑골문은 이미 초기단계가 아닌 상당히 발전한 단계의 한자로 볼 수 있다. 이는 개별 글자 수가 많다는 사실에서 뿐만 아니라 글자 구조의 복잡성과 발전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갑골문자의 독음(讀音)은 단음절로 1자 1음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합문(合文)의 형태도 있다. 또한 10 이상의 숫자도 모두 기본적으로 합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합문은 그 형태면에서 볼 때는한 개의 글자이지만 실제로는 두 글자가 합쳐진 것으로 읽을 때는 두 음 모두를 읽어야 한다. 이와 같은 합문형식은 중국 고문자에서 비교적 장기간 사용된 것으로서 시저우(西周)의 금문(金文)에서 자주 나타날 뿐 아니라 진간(秦簡0이나 한간(漢簡)에서까지도 나타난다.

 

중국 고대의 문자학자들은 한자의 여러가지 구성형태에 근거하여 <육서(六書)>라는 한자의 구성원칙을 내놓았다. 동한(東漢)때의 허신(許愼)의 예를 들면 지사(指事), 상형(象形), 형성(形聲), 회의(會意), 전주(轉注), 가차(假借)로 분류하고 있다.

 

갑골문에서도 위의 여섯 가지 형태를 모두 찾아낼 수 있지만 상형, 형성, 가차 의 세 종류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지금까지 확인된 갑골문자를 살펴보면 초기, 즉 상(商)왕 무정(武丁)을 전후한 시기의 갑골문 중에는 상형문자가 비교적 많다. 말기인 상(商)왕 제을(帝乙), 제신(帝辛)의 시기에 이르면 상형문자는 점차 감소하고 형성문자가 더욱 증가하는데, 많은 문자가 이미 기본적인 토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은허(殷墟) 갑골문은 이미 엄격한 체계를 갖춘 고문자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