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처음 만들어 황제헌원을 굴복시킨 치우천왕
무신‧군신‧전신‧병신 치우천왕은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
자료출처 : 고구려역사저널 2016. 09. 26.
환웅천왕은 기원전 3897년 신시에 도읍을 정하고 배달(倍達) 나라를 연 이래로 18분의 환웅이 역년 1,565년을 다스렸고, 특히 치우천왕으로 잘 알려진 14세 자오지 환웅은 기원전 2707년에 즉위하여 도읍을 청구로 옮겼으며, 109년 동안 재위하였고 151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때부터 널리 알려진 붉은악마의 엠브렘이 바로 우리 민족 만고의 영웅인 치우천왕의 모습이다.
치우천왕은 신령스러운 용맹함이 매우 뛰어났으며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고 아홉 곳의 대장간을 만들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해 세상에서는 그를 치우천왕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다.
▲ 배달국 14대 자오지환웅인 치우천왕의 두 모습 © 편집부
무기와 군대와 전법을 최초로 만든 치우천왕
사마천이 쓴 <사기>에서 치우천왕에 대해 “헌원이 등극하자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으나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여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었다. 헌원이 섭정할 때에 치우는 형제가 81인이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동두철액을 하고 모래를 먹으며 칼과 창과 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를 천하에 떨쳤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중요한 것은 중국인인 사마천이 치우천왕을 옛 천자(古天子)라는 칭호로 불렀다는 것이다.
기원전 2700년 당시 중국에서는 철기와 청동기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치우천왕의 군대가 쓴 투구를 보고 동두철액이라 한 것으로 보면 우리는 당시 이미 청동기와 철기로 된 무기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학계에서 정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사용연대는 한참 앞으로 가야 할 것이다. 짐승의 모습을 하였다는 것은 소·말 등의 가축을 전쟁에 사용하였다는 의미이며, 모래를 먹었다는 것은 소금을 식생활에 이용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치우천왕은 금속제 무기뿐만 아니라 투척기 등을 만들어 적을 공격했으며, 군대를 처음으로 조직하였고 군대가 사용할 전술과 무술까지 처음으로 만든 위대한 인물이다. 그래서 무기와 무술의 시조라 무신(武神), 전쟁의 신이라 전신(戰神), 군대를 처음 만든 신이라 군신(軍神) 또는 병신(兵神)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 삼국시대의 귀면와는 치우천왕의 형상 © 편집부
황제 헌원을 굴복시킨 치우천왕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과 10년 동안 73번을 싸워 모두 이겼으며, 마지막 탁록전투에서는 헌원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신하로 삼는다. 헌원은 죽을 때까지 황토고원인 유배지에서 치우천왕에 대한 공포에 벌벌 떨며 전전긍긍하며 살았다고 한다. 현재 중국의 동해안 유역인 산동성과 양자강 유역까지 평정하여 배달국의 위상을 한껏 드높인 위대한 우리의 조상이다.
<사기>에는 “헌원이 치우를 잡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기록이라 한다. 치우천왕의 부장 중에 치우비라는 장수가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공을 서두르다가 진중에서 죽은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점은 황제 헌원의 고향과 무덤 위치를 보면 알 수 있다. 헌원의 고향은 황하남부 하남성 신양시인데, 무덤은 섬서성 중부를 흐르는 낙하의 중류에 있는 연안시 황룡현에 있어 고향에서 아주 먼 곳에 묻혀 있다.
또한 한고조 유방이 항우와의 전쟁에 나갈 때마다 치우에게 제사를 올렸고, 통일 후 축관에게 명하여 치우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방이 자기네 시조 대신 이민족인 치우를 무신/군신으로 모신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 치우만가에는 치우가 탁록에서 패배한 것으로 와전되고 있다. © 편집부
중국 묘족(苗族)의 시조
중국 소수민족 중 인구수 4위인 묘족은 치우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족과 만족 등 중국의 다른 소수민족 상당수가 묘족에서 떨어져나간 것이며, 한족으로 호적을 바꾼 사람들까지 치면 아마 중국 인구의 반도 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치우천왕의 명성은 아시아 도처에 알려져 객가인(客家人) 등으로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동방의 군신으로 숭상 받으면서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우리나라에서도 치우천왕의 모습이 친근한 도깨비의 모습으로 전승되어 지붕의 기와나 처마나 담 등에 도깨비 문양을 많이 새겼으며 치우천왕의 원력으로 바람을 막고 사악한 것을 쫓는 역할로 이어져 내려왔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도 전투에 나가기 전 반드시 승리의 신인 치우천왕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서울시 성동구 뚝섬에 치우사당이 있었으며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이처럼 우리는 실존인물인 치우천왕을 민족의 수호신으로서 믿어왔으며, 축구국가대표팀 서포터스의 붉은악마로 부활하여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와 있다.
치우천왕의 릉은 <한서지리지>에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감향성에 있으며 높이는 5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수년 전 치우천왕의 진짜 무덤이 산동성 유성시 양곡현 십오리원진에 있다고 발표된 적이 있다. 참고로 산동성 문상현에 있는 무덤은 큰 홍수 후 그곳에서 치우총이라는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이유로 조성된 가묘라고 한다.
▲ 산동성 유성시 양곡현에서 매년 열리는 치우천왕 기념행사 ©편집부
배달 시대의 사회와 문화
1) 책화 (責禍) : <삼국지 위지>와 <후한서>에 “동이는 각 읍락에 서로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서로 처벌하는데 포로나 소·말로 보상을 하는 것을 책화라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책화 제도는 조선 이전 배달국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관경 내의 각 읍락이 서로 침범을 하면 천왕께서 이를 주재하여 벌책을 가하였는데 피해정도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도록 했다. 이러한 책화제도는 오늘날 UN 안전보장이사회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광활한 연방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제도이며 조선을 거쳐 고구리까지도 책화제도를 시행하였다고 한다.
2) 화백 (和白) : 많은 사람들은 화백제도가 신라 때 처음 생긴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 기원은 훨씬 오래되었다. 배달국 시대에는 도로써 나라의 다스림을 일으켰는데 모든 사람의 모든 행복을 생각하였던 까닭에 만약 한 사람이라도 의견이 다르면 법을 시행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를 화백이라 한다.
우리는 천손민족으로서 하늘은 둥글다고 생각하였으며 모든 사고와 행동을 하늘을 형상화한 원형으로 하였다. 춤을 출 때에는 둥글게 모여 환무를 추었으며 놀이문화도 원을 그리며 하였으며 회의도 둥글게 둘러앉아 하였다. 이러한 풍속은 강강술래 등으로 이어져 왔으며, 현재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도 남아 있다.
3) 소도 (蘇塗) : ① 도읍과 명산대천에 각각 소도를 마련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근본에 보답하고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모든 사람이 스스로 정성을 다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홍익의 공을 이룩하고 신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져 합쳐지는 경지를 이루어 나갔다.
② <태백일사>에 이르기를, 삼한의 옛 풍속은 10월이 되면 국중대회를 열었다고 한다. 둥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땅에 제를 지내는 것은 방구(方丘)라 하였으며, 조상에게 제를 지내는 것은 각목(角木)이라 하였다. 산상과 웅상은 모두 그러한 풍속이 남겨진 것이다.
이날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은 각자가 생산한 것을 제물로 바쳤으며 북을 울리고 피리를 불며 모든 놀이를 두루 갖추었다. 크고 작은 모든 나라는 방물과 진귀한 보물을 가지고와서 바쳤는데 언덕과 산처럼 쌓였다. 이는 무릇 백성을 위하여 액을 쫓는 기원을 하고 나아가 나라가 번성하고 잘되게 함이었으며 소도의 제천은 배달나라의 교화의 근원이 되었다고 한다.
③ 소도를 세울 때는 계율이 있는데 충·효·신·용·인의 다섯 가지의 도이다. 소도의 곁에는 반드시 경당을 세우고 미혼의 자제들에게 사물을 강습하는데, 대개 독서와 활쏘기, 말 달리기, 예절, 풍류, 무술의 여섯 가지 기예를 익혔다고 한다.
④ 조선 때는 소도를 많이 설치하고 천지화를 심었다. 미혼 자제로 하여금 글 읽고 활 쏘는 것을 익히게 하고 이들을 국자랑(國子郞)이라 불렀다. 국자랑들이 밖에 다닐 때 머리에 천지화를 꽂았기에 사람들이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화랑이 신라시대 때 처음 나온 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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