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좌점(三座店) 석성과 성자산(城子山) 산성
삼좌점 유적(三座店 遺蹟)
삼좌점 유적(三座店 遺蹟)은 적봉시 서북 40㎞ 떨어진 송산구(松山區) 초두랑진(初頭朗鎭) 삼좌점촌 음하(陰河) 왼쪽의 동자산(洞子山) 위에 위치한다.
2005년 7월부터 11월 초까지 삼좌점 수리사업수고건설 중 내몽고문물고고연구소가 삼좌점 석성유적에 대한 구제발굴을 진행해 [하가점 하층문화(BC 2,200년 ~ 1,600년)] 늦은 시기에 해당하는 대형 산성유적을 발굴 조사하였다.
유적 내에서 두 개의 석성(石城)이 확인되었다. 대성은 서쪽에, 소성은 동쪽에 축조되어 있다. 대성 서쪽은 벼랑이며, 동·북 양쪽은 석체(石砌)의 성벽으로 되어 있다.
산 정상부에서 남쪽까지 약 140m 이상이며 동·서는 110m이다. 총 면적은 약 1만4000㎡ 이상이다. 소성은 대성의 동측에 위치하는데 형태는 정사각형이다. 남·북 길이는 50m, 동·서 40m이다. 총 면적은 2000㎡이다. 사면 모두 석체의 성벽으로 되어있다.
발굴 조사는 대성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석체원형건축기단, 반원형건축기단, 움, 석장(石墻), 적석대, 영성묘장(零星墓葬) 등이 확인되었다. 완벽한 형태의 우물과 60여 채의 집터, 부족회의 장소로 추정되는 모임장소, 곡식창고와 문설주까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성벽은 내·외성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조밀한 마면(馬面)과 이중 고리 석벽건축이 특이하다. 그리고 내성 북쪽 성벽의 치(雉)는 5m 간격으로 13개나 발견되었다.
출토 유물은 석기, 토기, 골기 등이 있다. 석기는 마석(磨石), 절구(臼), 부(斧), 산(鏟), 도(刀), 병형기(餠形器) 등이 있다. 토기는 하가점 하층문화 표지유형인 통형력(筒形鬲) 이외에 관(罐), 옹(甕), 분(盆), 발(鉢) 등이 발견되었다. 골기는 소량 출토되었으며 골추(骨錐), 골잠(骨簪), 점뼈(卜骨) 등이 발견되었다. 이 밖에 인면문암화, 석문도(石門道), 원시문자가 새겨진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확인된 치(雉)만 13개나 되는 어마어마한 츠펑 산줘뎬(삼좌점, 三座店) 석성(BC 2000~BC 1200년). 고조선의 성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고구려 백암성과 백제 계양산성 등과 축조기법이 똑같다.
츠펑 북쪽의 청동기시대 성터인 삼좌점 석성의 모습. 앞으로 튀어나온 ‘치’ 같은 구조물의 모습이 보인다.
샤자뎬 하층문화 (夏家店 下层文化)
샤자뎬 하층문화(하가점하층문화, 중국어 간체자: 夏家店下层文化, 정체자: 夏家店下層文化, 병음: Xiàjiādiàn xiàcéng wénhuà Lower Xiajiadian culture[*])는 기원전 2200년부터 1600년경까지 현재의 중국 동북부, 내몽고 자치구 남동부, 허베이성 북부, 랴오닝성 서부를 중심으로 한 고고 문화를 말한다.
내몽고 자치구 츠펑 시 샤자뎬 유적의 하층을 표식 유적으로 한다. 같은 지역의 훙산 문화에 이어지며, 그 과도기를 샤오허얀 문화(小河沿文化)라고 한다.
생활의 중심은 잡곡 재배이며, 그 밖에 목축, 수렵도 행해졌다. 유적에서는 돼지, 개, 양, 소 등이 발견되었다. 정주 생활을 하면서 인구밀도는 높았다. 석기, 골기, 토기가 발견되고 있고, 그 밖에 금, 납, 칠기, 비취, 동기, 청동기도 발견되었다. 동기, 청동기로 만든 귀고리가 많고, 뼈를 이용하여 점도 행해졌다.
집은 둥글고, 흙과 돌로 만들어졌다. 취락은 벼랑이나 경사면에 방어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또는 석벽을 취락의 주위에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 같은 지역에서 그 후, 샤자뎬 상층문화가 퍼졌다.
조선과 일본에까지 전해진 석성의 치
삼좌점 주거지를 둘러싼 석성은 일정하게 튀어나온 치를 갖고 있었다. 삼좌점 언덕에 둥글게 돌을 쌓아 만든 고대인의 주거지. 중국 요녕성 등탑현에 있는 고구려 백암성의 치와 수원 화성의 치(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비사막에서 일어난 모래가 바람에 날려 온다. 한반도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황사(黃砂) 바람이 불어온다. 수천년에 걸쳐 모래가 쌓이면 사람이 떠난 주거지는 고스란히 모래흙에 묻히게 된다.
삼좌점에 고대 유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지역 주민들 사이에 오래전부터 떠돌았다고 한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음하를 막는 댐 공사를 벌이면서 이곳을 발굴했다. 요녕대학이 펼친 이 조사는 2007년에 완료됐는데 그 결과 서기전 2000년의 삼좌점 유적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좌점 주거지를 둘러싼 돌성에는 놀랍게도 ‘치’가 있었다. 치는 톱니바퀴의 톱니처럼 밖으로 툭 튀어나간 성 구조물이다. 치가 있으면 성 안의 군사는 공격해오는 적을 쉽게 막아낼 수 있다.
석성은 한반도와 일본에서 많이 발견된다. 중국의 중원지역에는 돌이 적기 때문인지 흙을 빚어서 만든 벽돌 성이 많고 치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 성은 100%라고 할 정도로 치가 있다.
삼좌점의 주거지를 둘러싼 석성에서는 7~8m 거리로 일정하게 툭 튀어나온 치가 있었다. 서기전 2000년 당시의 고대인들이 치가 있는 돌성을 쌓았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우하량에서 여신상과 사라진 곰뼈 자리를 보았을 때 이상으로 흥분됐다.
돌성은 높지 않았다. 1~2m쯤 될까. 그러나 신석기인의 키는 150cm 이하였으니 결코 낮은 것은 아니다. 고대인들은 이긴 흙으로 돌을 쌓아 올렸기에 성의 단면은 매우 거칠어,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튀어나온 돌을 잡고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실제로 답사단원들도 이 성을 가볍게 오르내렸다. 치도 매우 작아서 한두 사람밖에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허술한 성이 과연 유사시 방어기능을 할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이 돌성이 청동기 초기인 서기전 2000여 년에 만들어졌다는 것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 시기 인류는 금속기를 개발했으나 여전히 돌과 나무가 주무기였다. 손자병법 같은 병서(兵書)가 나오기 훨씬 전이었므로 전술과 전략도 없었다. 몇몇 사람의 꾀와 용기 그리고 힘으로 결판이 나는 싸움을 하던 시절이다. 그렇다면 돌성과 치는 충분히 방어벽의 기능을 할 수 있다.
삼좌점 유적은 홍산 문화 다음에 일어난 청동기 문화인 하가점 하층 문화의 일부다. 석성에 치를 만드는 전통은 고구려를 거쳐 조선까지 이어졌고, 일본으로도 건너갔다.
성자산 산성(城子山 山城)
국가 성립 요건의 다섯 가지 중에서 평양의 경우 넷째와 다섯째는 청동시대의 유물로 간주하는 고인돌이 1만4천여 기나 발견되며 부장품으로 많은 청동유물이 매장됐다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또한 두 번째로 제시되는 도시 유적의 경우 북한측은 상당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평양시 삼석구역 표대유적, 남경유적, 평안남도 덕천시 남양유적, 복창군 대평리 유적, 황해북도 송림시 석탄리 유적, 황주군 고연리 유적 등이다. 이들 유적에서 100~150여 호의 집터들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남경유적, 대평리 유적, 고연리 유적 등은 면적이 2만~5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비교적 큰 부락터이며 표대 유적, 석탄리 유적, 남양 유적 등은 면적이 10만 제곱미터가 넘을 정도로 대규모의 유적을 갖고 있다. 표대 유적의 경우 확인된 집터만 200개 이상에 달하며 절대연대 측정법에 의할 경우 표대 유적의 8호 집터는 최고 528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의 경우 아직 단군 시대의 궁전 유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라고 자인했다. 다만 북한측의 견해에 의하면 단군의 근거지를 평양으로 삼고 있는데 현 평양 지역은 고구려가 수도로 계속 사용했기 때문에 유물은 물론 궁전 터조차 발견할 수 없을지 모른다고 발표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고대 문명의 경우도 왕궁을 정확하게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앞에 설명한 5가지가 고대국가의 성립 요건으로 제시되지만 이들 모두 반드시 충족돼야 하는 것은 아니며 5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식하는 것은 성벽이다. 성벽을 쌓았다는 자체가 정주 여건을 갖춘 것은 물론 외부와의 차별을 두는 내부 체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의 황대성보다 약간 시기는 늦지만 중국 홍산 지역 하가점하층(夏家店下層) 문화(4000~3500년 전)에서 성벽은 물론 돌무덤, 제단 등이 발견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부여받는다. 하가점하층과 상층 문화가 집중적으로 발굴되는 하가점은 과거 하씨가 많이 산다고 해 붙여진 이름으로 적봉에서 오한기(敖漢旗)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데 산 정상이 평편해 고위평탄면으로 불리는 산등성을 끼고 감싸는 형태의 중앙분지에 위치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적은 국가가 성립됐다는 실증적인 증거로 제시되는데 하가점하층 문화는 중화 5천년의 배경이 되는 홍산문화를 계승하는 문화로 인식하며 고조선과 연계돼 매우 중요시하게 생각한다. 또한 이곳에서 출토된 제련된 청동 덩어리의 C¹⁴측정연대는 기원전 1900년쯤으로 측정돼 단군조선과 엇물려 있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8년 동안 홍산문화의 중심지인 오한기 지역을 집중적으로 답사했다. 10여 개의 작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청쯔산의 전체 유적 규모는 6.6㎢다. 이들 중에 가장 중요한 해발 800미터에 있는 아(亞)자 형태의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은 1987년에 발견됐다.
답사단은 곧바로 사회과학원에 보고했고 2000년 유국상 박사 등 현지 실무단이 도착해 조사한 결과는 그들을 놀라게 했다.
성자산산성은 살력파향(薩力巴鄕)과 마니한향(瑪尼罕鄕)과의 경계를 이루는 곳에 있다. 북쪽으로 합라구촌(哈拉溝村)에서 약 4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시야가 열려져 있어 초원(草原) 사막지대를 볼 수 있는 장관을 연출한다. 더욱이 성자산산성의 유지군(遺址群)은 6.6㎢나 되며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성자산 주봉(主峰)의 정상부의 평면은 ‘아(亞)’자형으로 불규칙하지만 남북 440m, 동서 폭은 340m다. 총면적은 약 15만㎡나 되는데 주위에 계단식 성벽이 있다. 내성과 외성으로 나뉜 이중 성벽은 주로 맥반석으로 축조됐는데 기초 폭은 약 15m, 현재 남아 있는 높이는 약 2m이며 외성과 내성 각각에 5개의 문이 설치됐다. 하늘신과 조상신에 제사를 지냈다는 돌로 쌓은 제단터와 사람들이 살았거나 공무를 보았을 대형 건물터도 발견됐다.
놀라운 것은 외성에 반원형(半圓形)의 ‘마면식(馬面式·치)’ 석축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치는 고구려 성벽의 고유물처럼 알려져 있는 것으로 성벽을 방어하는 데 유리한 형태를 갖고 있다. 적석총과 석관묘, 제단터는 물론이고, 성벽의 축조 방법을 보면 고구려·백제와 비슷하다. 할석으로 한 면만 다듬어 삼각형으로 쌓고, 다음 것은 역삼각형으로 쌓는 형식을 말한다.
내성은 중심구(中心區)/동/서/남/북/동남 등 6구역으로 분할됐다. 구역과 구역 사이는 서로 돌담으로 격리했지만 돌문으로 연결된다. 중심 구역은 다른 구역보다 높은 지역에 있으며 ‘회(回)’자형의 오르내리는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벽 돌담 변의 길이는 88~93m이고, 현재 약 1미터 높이의 담이 남아 있다. 내측 돌담의 변의 길이는 30m이며 돌담 내에서 10여 개의 건축지(建築址)가 발견되는데 이곳에서 최고위층들이 살았다고 추정한다.
중심구 외의 5구역 내에는 균등한 원형돌담이 몇 개 단위로 분포돼 있다. 각 구역 안에 건축지가 10여 개씩 발견되는데 그 중 동남 구역에서 발견되는 건축지는 73곳이나 되며 총 6구역의 건축지는 232곳이나 된다. 원형 건축지의 직경은 주로 5~6m이며 최장 13m에 달한다.
교미하고 있는 쌍돼지 대형 돌도 있는데 길이 9.3m, 주둥이의 폭은 2,1m이며 이마높이는 7.5m이다. 눈 부분은 거칠지만 모서리의 선이 분명할 정도로 인공적인 흔적이 있으며 등에는 대형 성혈이 발견됐다. 특히 동쪽 성벽 바깥에 대형 제단 3개가 있는데 이들 제단 위는 매끄럽게 연마돼 있고 별자리로 추정되는 성혈도 있다. 중국 측은 성자산산성을 20세기 말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발견 중에 하나로 평가하며 성자산산성을 곧바로 전국중점문화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했다.
아쉬운 것은 아직 이곳에서 유적들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곳 조사에 직접 참여했던 오한기박물관의 양택 연구원은 유적이 15만 제곱미터나 돼 아직 완전한 발굴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발굴에 들어가면 엄청난 유물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했다.
성자산 유적 평면도
* 1987년에 적봉시 오한기 살력파향(薩力巴鄕)과 마니한향(瑪尼罕鄕)의 경계지역에서 발견
* 성자산 정상을 다듬어 남북 440m 동서 340m의 ‘亞’자형, 총면적 15만 평방미터.
* 내성와 외성을 갖추고 있고, 방형과 원형의 각종 적석총·방유적 등이 총 232개.
* 서남쪽 외성에서 남향을 한 거대한 ‘거북바위’가 있음(중국학자들은 돼지바위라고 명명).
* 하가점하층문화가 ‘조기국가(早期國家)’에 진입했다는 중요 유적으로 평가하고 있음.
* 필자는 이 유적이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건축유지는 성자산을 주변으로 약 10여 곳에서 발견된다. 성자산으로부터 약 1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5호 유적지에서도 계단이 있는 성벽이 발견됐는데 동북 주능석 끝부분에서 발견된 장방형 유적지의 면적은 약 2만㎡나 된다. 이곳에서 원형건축지가 10여 개소 발견됐는데 특히 북문에서 발견되는 거석들은 매끄럽게 연마해 제단의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최근 발굴이 진행된 음하(陰河) 상류 삼좌점(三座店) 유적도 국가 성립의 개연성을 보여준다는 데 중요성이 있다.
이곳은 2005년 음하 다목적댐 공사 도중 발견됐고, 2006년 말 발굴이 완료됐다. 역시 하가점 하층문화로 추정하는데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이며 건물지 수십 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됐으며 도로 혹은 수로가 구획 사이에 조성돼 있었다.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적석묘는 50~70㎝ 원을 중심으로 사방 20여m까지 확장될 만큼 거대해 제단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이다. 완벽한 형태의 우물과 60여 채의 집터, 부족회의 장소로 추정된 모임장소, 곡식창고와 문설주까지 완벽하게 보존돼 있는데 특히 외성과 내성으로 구분된 성벽 중에서 내성 북쪽 성벽의 ‘치’는 5미터 간격으로 13개나 발견된다. 더욱이 곳곳에 해독되지 않은 상형문자들이 널려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들 석성이 특별히 주목받는 것은 전형적인 초기 형식의 석성으로 기저석을 쌓고 수평으로 기저를 받친 뒤 ‘들여쌓기’를 했다는 점이다. 또한 횡으로 쌓은 뒤 다음 단은 종을 쌓았는데 이들의 추정 연대는 무려 4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아군의 추락을 막고 적병의 침입을 방어하려고 여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대각선을 뚫은 문지(門址)도 발견됐는데, 이는 은신하면서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이다. 하가점하층문화인들이 치가 촘촘하게 배치될 정도로 견고한 석성을 쌓았다는 것은 육박전 같은 대규모 전투를 염두에 둔 것으로 윤명철 교수는 추정했다. 유적의 전체 면적은 1만4000㎡이며 건물지 수십 기와 석축원형제단, 적석총, 그리고 석축 저장공(13개)이 확인됐다.
곽대순 요령성 문물연구소 연구원은 삼좌점 문화는 하(夏)나라와 같은 강력한 방국(方國)이 존재했다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또한 오한기박물관의 도록에는 성자산산성의 유적이야말로 하(夏)~상(商)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적었다. 이는 중원의 하나라(BC 2070년 건국)와 동시대에 성자산과 삼좌점 지역에 수천 기의 석성을 쌓은 국가권력을 갖춘 왕권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런 제사 공간, 주거지는 물론 거대한 적석총·석관묘 등은 사실상 치밀한 행정 조직과 공장을 갖춘 왕권이 존재하지 않으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특히 해발 800미터나 되는 산 위에 이런 큰 규모의 돌들을 운반해서 성을 쌓고 건축물과 돌무덤을 조성할 정도면 전제권력을 갖춘 국가라야 가능한 일이다.
중국은 내몽고 동부 구역(區域)에서 하가점하층문화와 유사한 산성이 계속 발견되며 오한기(敖漢旗)에만 천 여 곳에 이르는 등 밀집된 대소 원형 건축지가 발견되자 이 지역에서 국가가 성립됐다고 단정적으로 설명한다. 성자산산성 표지석에는 이곳 하가점하층문화에서 국가가 성립했음이 분명하다고 적혀 있다.
하가점하층문화는 하가점상층문화(기원전 1500~기원전 400년, 이형구 박사는 남산근문화(南山根文化)라고 칭함)로 이어진다. 하가점상층문화는 하가점하층문화의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은말 주초의 청동기 문화가 강하게 배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청동기 문화야말로 요동지역이나 한반도지역의 청동기 문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기에 이른바 비파형청동단검이 석곽묘나 석관묘 그리고 고인돌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7) 비파형동검을 포함해 이들 유물들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한국인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여하튼 하가점하층문화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오한기지역은 소하서문화, 흥륭와문화, 조보구문화(새, 돼지, 노루 등 토템 동물이 조각된 제단용 신기(神器)와 뼈로 만든 망치, 칼 등이 다량 발굴된 지역), 소하연 문화 등 초기 홍산문화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곳이다. 특히 오한기 사가자진(四家子鎭)은 사방 10여 미터의 홍산문화 초기의 적석총 3기가 발견된 지역이기도 하며 왕택 연구원은 이들이 동아몽골인이라고 설명했다. (계속)
참고문헌
김종혁, 「대동강류역일대의 고대부락터유적에 대하여」, 『조선고고학학회』, 1999년 1호
신형식, 이종호, 「‘중화5천년’, 홍산문명의 재조명」, 『백산학보』, 2007, 5~41쪽
이형구, 「발해문명 창조 주인공은 우리 민족」, 『뉴스메이커』 745호, 2007.10.16
군국전, 『Aohan China』, 내몽고문화출판사, 2004, 35~37 쪽
이기환, 「고조선 추정 청쯔산·싼줘뎬 유적」, 경향신문, 200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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