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배달한국(BC3898)

황제(黃帝) 헌원(軒轅)

자연정화 2018. 7. 2. 13:26

황제(黃帝) 헌원(軒轅)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는 중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帝王)으로, 삼황(三皇)에 이어 중국을 다스린 오제(五帝)의 첫번째 왕이다. ‘황제(黃帝)’라는 명칭은 재위 기간 중 황룡이 나타나 토덕(土德)의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붙여졌다. 사실상 신화로 여겨졌던 삼황과 달리 황제를 필두로 한 오제는 실존한 제왕들로서 추앙되었으며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 여겨졌다. 도교의 시조로 추앙되기도 한다.

 

개요

황제는 중국 문명의 시조로서 오제(五帝)와 하·상·주 3대 왕실의 공통 시조로 알려져 있다. 《사기》에 의하면, 소전(少典)의 아들로 이름을 헌원이라 하며, 치우를 물리치고 신농(神農)에 이어 제왕이 되었다. 의복, 수레를 비롯한 수많은 발명품과 문자, 60갑자, 한의학 등의 학문과 기예를 창시하였다고 하며, 100년 동안 재위하였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랜 의학서인 《황제내경소문(黄帝内經素問)》, 《황제내경령추(黄帝内經靈樞)》을 비롯하여 방중술에 대한 저작인 《소녀경》 등 다양한 서적 역시 황제가 저술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역사학적 비판

청나라 말기 강유위, 고힐강 등의 의고학파(疑古學派)는 황제 신화를 비롯한 삼황오제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역사성을 부인하고 전국시대에서 위진남북조시대에 걸쳐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로 판정하였다.

 

특히 황제는 음양오행설의 탄생 이후 이와 함께 일본에서도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이치무라 산지로(市村瓉次郎), 이이지마 타다오(飯島忠夫) 등이 황제의 실존을 부정하는 논문을 저술하였다.

 

황제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황제내경》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워 권위를 얻으려 했을 뿐 실제 저작은 한나라 시기로 추측되며 다른 황제 저작의 서적들 역시 황제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이다.

 

 

치우천왕과 황제 헌원

출처 : 재외동포신문 2018. 06. 26. [역사산책] 이형모 칼럼

 

배달의나라 제14세 자오지환웅

신시에 개천한 배달의나라 역대 임금에 관해 기록한 ‘신시역대기’가 있다. 이 책에 자오지환웅은 제14세 환웅인데, 치우천왕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다. 4세 앞서서 갈고환웅은 제10세 환웅인데, 중국 3황의 둘째인 염제신농과 같은 시대 인물이라고 했다.

 

원동중이 ‘삼성전기 하편’에 치우천왕에 관해 자세히 기록했다.

“뒤에 갈고환웅이 나셔서 염제신농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했다. 또 몇 대를 지나 자오지(慈烏支)환웅이 나셨는데, 귀신같은 용맹이 뛰어났으니 동두철액을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듯 온 누리를 다스릴 수 있었고,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모두 크게 그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이라고 불렀으니 치우란 속된 말로 우뢰와 비가 크게 와서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

 

치우천왕 상

 

최초로 금속제 무기를 사용한 치우천왕

치우천왕은 기원전 2,747년에 태어나 기원전 2,706년 42세에 환웅으로 즉위한 후, 기원전 2,598년까지 109년 간 재위하면서 모든 전쟁에서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다. 여러 역사서가 공통적으로 치우천왕을 표현하는 수식어는 ‘동두철액(銅頭鐵額)’으로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말한다. 치우천왕의 철갑투구를 처음 보는 동시대인들의 놀라움이 드러난다.

 

치우천왕은 광석을 캐고, 대장간에서 철을 주조하여 각종 병기를 만들었다. 지금으로부터 4,700년 전에 이미 청동기와 철제 무기를 사용했다는 기록이다. ‘전쟁 불패의 신화’는 당시로서 가공할 비대칭 무기 체계를 보유하고 구사한 결과이고, 귀신같은 용맹과 우레와 안개를 부려서 산과 강을 바꾼다는 기록은 그의 지모와 전략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의 표현이다. 지금껏 동북아시아 최고의 군신으로 추앙받는 이유다.

 

만주에서 산동으로, 중원 남쪽 회대지역으로 강역 확대

삼성기전 상편에 "신시의 말기에 치우천왕이 있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다."고 기록했는데, 청구는 산동지역이다. 배달의 나라 신시는 만주지역인데, 강성한 치우천왕이 산동지역으로 강역을 넓힌 것이다.

 

삼성기전 하편에 치우천왕에 관한 기록이 계속된다.

“치우천왕께서 염제신농의 나라가 쇠함을 보고 마침내 큰 뜻을 세워 여러 차례 천병을 서쪽으로 일으켰다. 또 색도(산동성 임치현 남쪽)로부터 병사를 진격시켜 회대의 사이(강소성, 안휘성 지역)에 웅거했다. 황제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서 황제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고, 뒤에 오장군을 보내 서쪽으로 제곡고신을 쳐서 공을 세우게 했다.”

 

삼성기에 치우천왕에 관한 사마천의 기록을 소개했다.

“사마천이 ‘사기’에 말하기를, ‘제후가 모두 다 와서 복종하여 따랐기 때문에 치우가 지극히 횡포하였으나 천하에 능히 이를 벌할 자 없을 때 헌원이 섭정했다. 치우의 형제가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몸은 짐승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장, 도극, 태노를 만드니 그 위세가 천하에 떨쳐졌다. 치우는 옛 천자의 이름이다’라고 했다.”

 

중국의 시조 황제헌원이 치우천왕을 이겼다고 기록하는 이유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한 염제, 황제, 치우에 관한 내용이다.

“황제헌원은 염제신농씨의 후손인 천자와 판천의 들판에서 교전하여 세 번 싸워서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치우가 천하를 어지럽혀 황제헌원의 명을 듣지 않으므로 황제는 군사와 제후를 징집해 탁록의 들에서 싸워 드디어 치우를 잡아 죽였다. 이리하여 제후들이 모두 헌원씨를 높여서 천자로 삼았고 그를 신농씨의 자손에 대신토록 했다. 이 사람이 황제(黃帝)다.”

 

그러나 북애자의 ‘규원사화’를 보면 이 전쟁에서 ‘치우비’라는 부장 한 사람이 진중에서 죽었는데 이를 중국사서가 왜곡한 것이며 사실은 치우가 이겼다고 했다.

 

치우천왕은 당대 유일의 철제 무기 소유자요, 150세까지 재위하면서 동북지방과 중국을 호령한 전쟁 불패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러한 치우천왕에게 돌도끼, 돌화살을 가진 황제헌원이 어떻게 도전하며 싸워서 이길 수 있겠는가? 치우천왕이 기원전 2,598년에 150세로 붕어하신 후, 황제는 19년을 더 살면서 중국을 다스렸다.

 

사마천은 마땅히 ‘치우천왕의 사후에 황제는 중국의 시조가 되었다.’고 기록함이 자연스럽다. 황제헌원은 기원전 2,689년에 태어나 2,679년 11세에 즉위하고, 100년을 재위하여 111세인 기원전 2,579년에 사망했다.

 

제왕의 부끄러운 기록은 감춰야 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는 원래 황제를 자신들의 시조로 받들고 시작한다. 중국의 도통(道統)은 ‘황제-요-순-우-탕-문왕-무왕-주공-공자-맹자’로 이어진다. ‘치우천왕이 살아있는 날들에는 황제는 치우천왕에게 패배하고 굴복했노라’고 기록하면 황제헌원과 중국역사에 치욕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마천이 ‘중국의 시조’ 황제와 중국을 높이려니 ‘치우천왕이 황제헌원에게 패배하고 죽었다’고 ‘사기’에 왜곡 기록하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의 학계가 국가의 개입 아래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적인 영향으로 황제 신화를 한족의 국조 설화로 중요시 여기면서, 황제나 치우를 역사적 실존인물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황제는 화하(華夏)라는 실체를 구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상의 임금으로 사마천은 삼황오제에서 삼황 부분은 전설이라고 치부해 아예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오제부터는 본기(本紀)로 저술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부분부터는 역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고대의 다른 전승에 나오는 황제 헌원은 인간이 아닌, 확실히 신(神)이다. 제(帝)는 본래 인간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고대 동아시아의 종교는 가문의 조상을 다른 종교의 신에 상당하는 대상으로 섬기는 구조(가부장이 제사장의 역)였는데, 이 조상신을 부르는 이름이 제(帝). 좀더 정확히는, 은나라의 가장 고귀한 가문인 상(商)씨 왕가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帝)라고 불렀다. 따라서 노란빛(黃) 제(帝)라고 불리는 존재가 본래 인간이 아님은 명백하다. 다만 처음부터 신적 존재로 섬겨졌을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책세상에서 펴낸 책인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에 나오듯이 헌원은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덧칠되었으며,《포박자》에 보면 동서남북 사방의 여러 나라의 신선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개중에는 청구국(고대 한국)의 자부선인이란 신선도 있다. 참고로, 은나라를 엎고 개국한 주나라의 희(姬)씨는 자신들의 조상신을 천(天)으로 칭하며 하늘에 대입하고, 이것으로 제(帝)를 대체하는 프로파간다를 행하였다. 천자라는 명칭도 이에서 유래.

 

《사기》의 기록은 신이었던 헌원을 위대한 인간 황제로 역사화했다.《사기》에 따르면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 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였으며, 남들이 걸음마도 떼지 못했을 때 이미 뛰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근근히 쳐들어오면 막고, 나면 먹고 안 나면 굶는 느슨한 공동체 생활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창, 방패, 수레(바퀴)[3], 옷, 글자, 거울, 60갑자, 팔괘 등을 만들어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안 만든게 없다는 인물. 심지어 그의 스승(이라 쓰고 신하라 읽는다.)들과 함께 한의학도 정리했다고 한다. 황제내경이 그것이다. 어디까지나 전설. 현실적으로 황제내경은 훨씬 뒤에 황제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책이라는 게 정설이다. 거기다 내용도 상당 부분이 헌원이 신하이자 스승 기백천사에게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는 구조다.

 

그가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중국의 왕을 잡고 있다 볼 수 있는 최대 세력은 농업의 아버지인 염제 신농(神農)이었으며, 노쇠한 그의 나라를 북동에서 내려온 치우(蚩尤)의 세력이 늘 노리고 있었다. 황제는 신농과의 주도권 싸움을 3차례 벌여 세 번 다 승리하고 거대한 연맹체를 구성, 치우와의 일대 결전을 벌여 결국 탁록 땅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다. 그 뒤 황제는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의 죽을 날을 택하고 용을 타고 승천하였다 한다. 그 때 신하들이 같이 올라가려고 들어 용을 붙잡고 수염이 뽑혀서 떨어지는 등의 추태를 보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황제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설령 황제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첨삭이 있었을 것이다. 단 그의 존재가 후세에도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받았다는 것을 볼 때 그런 인물이 실제 있었다기 보다는 그런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황제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겠다.

 

워낙 대단한 인물로 묘사되어있고 동양에서 학술적 내용의 연원을 고대에서 찾는 경향이 있어 각종 학파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치우천황(蚩尤天皇)과 황제헌원의 10년 전쟁의 의미

 

출처 : 한민족사관정립의식개혁회 [폴김의 한민족 참역사]

 

원동중(元童仲) 어른이 지은 <삼성기전三聖記全> 하편, ‘신시역대기’의 기록을 보면, 치우천황(蚩尤天皇)은 배달국 제14대 환웅으로 본명은 자오지(慈烏支)이다. 치우(蚩尤)란 자(字)이며 “번개와 비가 크게 내려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으로, 당시 세상을 놀라게 한 인물이기 때문에 자오지라는 본명보다는 치우라는 세속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1)‘치우천황’은 삼족오의 기원

 

<역대신선통감>의 기록에 의하면, 치우(蚩尤)는 73명의 형제가 있었다. 8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슬하에 81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 치우의 본명인 자오지(慈烏支)의 오(烏)자는 "까마귀 오"자 이고, 지(支)자는 "가지 지"자로 이 이름이 뜻하는 바는 실로 크다. 고구려의 삼족오(三足烏) 즉 "세발 달린 까마귀"가 대명사처럼 쓰인 것은 여기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 진다.

 

동이배달한민족사(東夷倍達韓民族史)에서 삼족오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단군조선 제8대 우서한(于西翰) 단군 갑인 7년인 BC1987년으로, "삼족오가 궁중에 날아들었는데 날개 넓이가 석자였다."라고 되어있다. <회남자淮南子> ‘정신훈精神訓’의 기록에는 "삼족오를 양오(陽烏:동방의 까마귀)라고도 하고 금오(金烏:쇠(금)로 된 까마귀:구리와 철을 가지고 칼, 창, 갑옷, 투구 등 최초의 무기를 만든 사람은 치우천황임)라고도 한다."고 되어있다. 주(周)나라 목왕과 서왕모와의 사랑 이야기에 나온 서왕모(西王母)는 삼족오에 속한다고 <산해경>에 기록되어 있다. 회남자는 한(漢)나라 유방(劉邦)의 아들로 BC247-BC195년경 사람이고, 주나라 목왕과 서왕모 이야기는 BC962-BC949년경의 이야기 이며, 그 후 송서(宋書) 본기와 장경의 본문에 삼족오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여러 가지 사서를 종합 검토해 보면, 치우천황(BC2727)이 삼족오(三足烏)의 기원이다. 치우천황은 동이(東夷)로 호랑이(범)족 이였고 공손헌원은 곰족 이였다. 당시 부족의 이름을 범족, 곰족, 백사족, 독수리족 등으로 명명한 것은 그 부족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한 방법 이였던 것 같다. 공손헌원(황제헌원)과의 인류 최초 최대의 10년 전쟁으로 인하여 전설같은 인물이 되었던 배달국 제14대 천자인 치우천황의 군호(君號)가 바로 구려군(九黎君)이다. 군호의 군(君)은 ‘임금 군’자로 치우 임금이란 의미이다. 려(黎)자는 ‘검을 려’ 또는 ‘무리 려’자로 검은 까마귀를 상징하면서, 환인의 9형제인 모든 자손의 무리를 통솔하는 임금을 의미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자오지 천황이나 치우 천황이나 치우 임금이나 구려군은 모두 같은 뜻인 것이다. 김창암, 김창수, 원종, 장진구, 김구 모두 김구 선생을 달리 부른 이름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추모(鄒牟) 황제가 고구려를 처음 건국할 때는 국호를 "가우리" 또는 "구려"라고 했다. 배달국의 치우천황과 단군조선의 정통성(正統性)을 계승하겠다는 굳은 의지로 자오지(치우) 천황의 "까마귀"에서 전설적인 삼족오(三足烏)가 유래됐고, 치우의 군호인 구려군에서 구려와 가우리(高句麗:고구려)의 국호가 생겼다고 본다. 가우리는 순수한 소리글자로 단군조선 때의 가명(이두어)이며 "가우리"를 한자로 적으면 高句麗(고구려)인 것이다. 까마귀는 강인하고 날카롭고 예리하며 의지적인 속성(俗性)이 있다고 한다.

 

(2) 삼족오인 까마귀는 어떤 새일까?

 

까마귀는 아시아에서 유래된 새로 알려져 있다. 까마귀는 도구를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구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새라고도 한다. 따라서 까마귀는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지적(知的)인 동물로 여겨지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마다 까마귀에 대한 전설이 많다. 힌두인(인도사람)들은 까마귀가 자신들의 조상새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까마귀는 많은 기억을 하고 있는 새로 자신들에게 좋은 정보를 주는 길조(吉鳥)로 알려져 있다.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인류 최초의 역사 기록이 쑤메르인(Sumerian)들이 살았던 지금의 이뢐(Iraq: 이라크)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 역사는 쑤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인류 최초의 홍수 이야기는 쑤메르 기록에 나오는데, 신(神: 아누나키 위원회)들이 홍수로 인간을 멸망시키려 할 때 쑤메르의 한 현명한 사람인 지우쑤드뤄(Ziusudra)는 엔키(Enki: 신으로 지금의 외계인)의 도움으로 그의 가족들과 모든 생물들을 대홍수로부터 구해낸 사람이다. 이 지우쑤드뤄가 그후 어케이디언(Akkadian)과 배벌로우니어(Babylonian)에서는 유트너피쉬팀(Utnapishitim)이란 이름으로 각색되고 성경에서는 노우어(Noah: 노아)로 각색되어 진다.

 

길거메쉬 영웅 서사시(The Epic of Gilgamesh)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Utnapishitim releases a dove and raven to find land; however, the dove merely circles and returns. only then does Utnapishitim send forth the raven, which does not return, and Utnapishitim concludes the raven has found land.(유트너피쉬팀은 홍수 후 육지를 찾기 위해 비들기 한 마리와 까마귀를 내 보냈다. 비들기는 그저 원을 그리며 빙빙 돌다가 되돌아왔다. 그리고 나서 유트너피쉬팀은 까마귀를 내보냈는데 그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트너피쉬팀은 까마귀가 육지를 찾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본문에서 ‘홍수 후’라고 적은 것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우리가 적어 넣은 것이다. 우리가 이 기사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더라도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는 분이라면 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줄 안다.

 

그런데 우리 민족사에 기록된 까마귀는 보통 까마귀가 아닌 발이 세 개 달린 까마귀인 것이다. 이 부분을 설명하는 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자랑스러운 동이배달한민족사를 꾸민 이야기로 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옛 기록을 시대에 맞게 해석하고 싶을 뿐이다. 필자는 증보 교정판을 내면서 이 부분을 첨가하였다. 1947년 7월 8일 이후 이 광할한 우주(宇宙)에는 우리 인간 이외에도 수많은 외계인(外界人)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엄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UFO는 모선(母船: Mothership)과 자선(子船: Sonship)으로 되어있다. 모선은 크기가 대략 2마일(3.2Km)이며 자선을 일반적으로 비행접시라고 부르는 UFO이다. 그런데 이 비행접시는 세 개의 다리가 있어 육지에 착륙을 할 때 세 개의 다리가 내려온다. 아주 먼 옛날 조상들이 다른 별에서 이 지구에 내려올 때 타고 온 비행물체을 의식하여 세발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로 기록한 것이 아닌가하고 추정해 보았다.

 

 

(3) 치우와 헌원은 사촌간 ?

 

배달국(倍達國:BC3898-BC2333) 때는 큰 2부족이 있어 처음부터 살던 부족은 범족(虎族:호족)이고 새로 살기 시작한 백성을 곰족(熊族:웅족)이라 했다. 진(晉:265-420)나라 때 <산해경>을 정리한 곽박(郭璞)에 의하면, "貔 卽 東夷族 卽 虎族(비 즉 동이족 즉 호족) 비의 부족인 동이족은 범족이다."라고 한다. 이를 정리하면 우리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은 범족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곰족에서 갈라져 나간 자에 소전(少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배달국 제8대 안부련(安夫連:BC3240-BC3152) 환웅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아 강수(姜水:섬서성 서쪽)에서 병사를 감독하게 된다. 이 소전의 별고(別孤:아비 없는 자식의 뜻으로 당시 지나 대륙은 모계사회였음을 암시함)에 공손(公孫)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가축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라는 곳으로 유배된 자다. 헌구란 지명은 없고 대신 헌원구(軒轅丘)란 지명은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제 754쪽에 의하면, “軒轅丘 在河南新鄭縣西北(헌원구 재하남신정현서북)헌원구는 하남성 신정현 서북이다.” 신정현은 하남성 정주 남동쪽으로 정주에서 직선거리로 약 96리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사기/오제본기>에는 황제(황제헌원)가 헌원구에서 살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사기/오제본기>에 공손헌원의 나라가 유웅국(有熊國)이라고 되어 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유웅국은 없고 유웅(有熊)이란 지명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黃帝之都 卽今河南新鄭縣(황제지도 즉금하남신정현)유웅은 황제헌원의 도읍지로 즉 지금의 하남성 신정현이다.” 이 두 기록으로 보아 공손헌원이 나중에 살았던 곳이 하남성 신정현 이였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 헌원구가 유웅이고 지금의 하남성 신정현인 것이다. 그러나 황제헌원이 살았다는 이 헌원구와 죄를 짓고 쫓겨간 유배진인 헌구는 다른 지명으로 보인다.

 

헌구와 헌원구가 같은 지명인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공손이 죄인으로 귀양 간 점으로 볼 때 하남성이 아닌 섬서성에서 아주 먼 서북 방향의 신강성(新疆省)에 있는 곤륜산(崑崙山) 근처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공손의 후예가 공손헌원 즉 황제헌원이며, 황제헌원이 한족(漢族)의 시조(始祖)라는 기록 때문이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漢族 最初根據地當在 崑崙山(한족 최초근거지당재 곤륜산) 한족이 최초에 근거지로 삼았던 곳은 곤륜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원래는 천산(天山)이였는데 황제헌원 때부터 곤륜산이라 했다고 <산해경>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정리하면, 이 공손(公孫)의 후예로 공손헌원(公孫軒轅)이란 자가 있었으며 이 공손헌원이 바로 황제헌원(黃帝軒轅)이다. 황제란 왕이라는 칭호이고, 헌원은 공손헌원의 이름인 동시에 황제헌원이 만든 나라 이름이라고도 한다. 황제헌원의 황은 ‘누루 황(黃)’자로 ‘임금 황(皇)’자가 아니다. 따라서 황제헌원의 황제(黃帝)란 "노랑색의 임금"이란 뜻이다. 한자를 모르면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함으로 여러 가지 오해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치우천황이 배달국(倍達國)의 천자(天子)가 된 후 공상(空桑:현 하남성 진류陳留)에 유망(楡罔:지나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음)이라는 사람이 다스리는 배달국의 제후국이 있었는데, 유망이 정치를 잘못함으로, 치우천황이 양수(洋水: 섬서성 서향현 남쪽 경계)를 건너 공상을 정벌한다. 이 무렵에 공손헌원도 임금이 되고자 군사를 일으켜 치우천황과 전쟁을 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BC2707년으로 지금으로부터 4,716년 전의 일이다. 치우천자가 양수를 건넜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섬서성(陝西省)은 배달국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아시아 전 대륙이 배달국(倍達國)의 영토였던 것이다. "황제헌원과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사촌 간으로 고향이 같은 산동성(山東省) 사람이다."라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다른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사촌간이 될 수 없다.

 

배달국에서 갈려나간 소전씨(少典氏)는 BC3152년경 사람으로 소전씨의 서출(庶出:첩의 소생)중에 공손(公孫:BC2759)이라는 사람이 있어 헌구로 유배(流配:죄인을 귀양 보냄)된 사람이며 이 공손씨의 후예가 황제헌원이다. 소전씨와 공손씨는 약 393년의 연대 차이가 나고, 공손씨나 황제헌원이나 치우천자는 같은 시대의 인물인 것은 분명하나 치우(蚩尤)는 범족으로 동이족이며 황제헌원의 조상격인 소전씨는 곰족으로 부족(部族)이 서로 다른데 어떻게 사촌간이 될 수 있는가?

 

여러 가지 사서에 분명히 한족(漢族:지나족)의 시조는 황제헌원(黃帝軒轅)으로 되어있다. 당시 치우는 42세이고, 헌원은 12세로 서로 30세의 나이 차이가 난다. 치우천황은 BC2727년에 배달국(倍達國:도성은 산동성 광요廣饒)의 제14대 천자(天子)가 되고 나서 구야(九冶) 즉 9개의 대장간(지금으로 말하면 9개의 무기 공장)에서 구리와 철을 단련하여 칼, 창, 활, 갑옷, 투구 등 당시의 최신무기를 만들어 가지고 있었다.

 

(4) 갈로산은 산동성 래주(萊州)

 

<한단고기> ‘태백일사/신시본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葛盧山之金大制刀鎧矛戟大弓楛矢一幷齊整拔涿鹿(갈로산지금대제도개모극대궁호시일병제정발탁록)갈로산의 쇠로 많은 칼 갑옷 창 큰활 화살을 만들어 잘 다듬어서 탁록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제1056쪽에 갈로산(葛盧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後漢置 當在 山東舊萊州府境(후한치 당재 산동구래주부경)후한 때 설치한 지금의 산동성 래주에 있던 옛 행정관청의 경계이다.” 당시 배달국(倍達國)의 도성이 있던 산동성(山東省) 광요(廣饒)의 동북 방향으로 직선거리 약 307리의 지역이다. 위도로 표시하면 경도 120도 위도 37.3 도의 위치이다. 이곳 갈로산에서 치우천자는 쇠를 캐내어 당시의 최신 무기를 만들어 배달국에 반기를 든 공손헌원을 탁록 들판 즉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남서부 운성염지(運城鹽池: 현재의 해지) 근처에서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던 것이다. 그 당시 공손헌원이 치우천자로부터 받은 벼슬은 운사(雲師: 사법 담당)라고 한다.

 

(5) 황제헌원은 치우천자의 신하인 운사(雲師)

 

한단고기 <삼성기전> ‘하편’의 기록이다. “及軒侯之立也 直赴涿鹿之野 擒軒轅而臣之(급헌후지입야 직부탁록지야 금헌원이신지)이때 헌원이 일어나자 즉시 탁록의 벌판으로 나아가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태백일사/신시본기>에도 위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軒轅之屬皆稱臣入貢(헌원지속개칭신입공)헌원의 무리들은 모두 신하되기를 원하며 조공을 바쳤다.” 이때 황제헌원이 치우천자로부터 받은 벼슬은 배달국의 세 정승중의 하나인 운사(雲師)의 벼슬로 보인다.

 

다음은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 17년’의 기록이다. “昔者黃帝氏以雲紀 故爲雲師而雲名(석자황제씨이운기 고위운사이운명)옛날 황제씨는 구름 운으로 기록하였는데 옛 운사가 구름의 이름이다.” <사기> ‘오제본기’에도 이와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다. “官名皆以雲命 爲雲師(관명개이운명 위운사)벼슬의 모든 이름은 구름 운으로 이름 지었는데 이는 운사이다.”

 

<산해경> ‘대황북경’의 기록에,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命應龍攻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 下天女曰魃雨止(치우작병벌황제 황제내명응용공지기주지야 응용축수 치우청풍백우사 종대풍우 황제내 하천녀왈발우지)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황제를 치자 황제는 응용에게 명하여 기주의 들에서 공격했다. 응용이 물을 모아 둔 곳을 차우는 풍백과 우사에게 알려 큰 바람과 비를 퍼부었다. 황제가 곧 천녀인 발을 보내어 비를 멈추게 하였다.” <산해경>에 나타나 있듯이 치우천자는 그의 신하인 풍백과 우사에게 알려 황제헌원과 싸우도록 하고 있다. 배달국의 3정승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인데 치우가 풍백과 우사에게 알린 것은 황제헌원은 당시 치우천자의 신하로써 우사(雨師)직을 맡고 있으면서 배달국에 반역을 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6) 황제헌원국(黃帝軒轅國)은 어디일까 ?

 

<산해경> ‘해외서경’의 기록에, “軒轅之國在此窮山之際(헌원지국재차궁산지제)헌원의 나라는 궁산의 변두리에 있다.”라고 씌어 있다. 그런데 가장 권위 있다는 지명사전으로 정평이 나있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궁산(窮山)이 없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황제헌원의 나라라고 하는 헌원국(軒轅國)도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난감하다. 한족(漢族)의 조상이라고 침이 마르게 주장하는 자신들의 조상인 황제헌원의 나라 이름과 그 나라가 있었다는 궁산의 이름도 없다는 것은 황제헌원이 다스리던 나라가 처음부터 존재했었는지 조차 의구심이 간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장려화(臧勵龢) 등이 1931년에 대만에서 발행한 사전으로 그 후 1982년 중공 공산당 때에 다시 수정하여 많은 내용이 왜곡된 것은 사실이나 그래도 지나(支那)의 고대 지명을 밝히는데 이 사전만큼 신뢰감이 있는 사전은 없다. 특히 왜곡된 내용들로는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사(東夷倍達韓民族史)와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날조(捏造)되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면 탁록(涿鹿), 발해(渤海), 패수(浿水), 갈석산(碣石山), 창려(昌黎) 등의 위치를 현재의 하북성(河北省) 쪽으로 옮겨 놓았다. 옛부터 황하(黃河)를 하(河), 수(水), 해(海)등으로 불렀는데 한(漢)나라 이후 특히 수나라와 당나라 때는 이 황하를 요하(遼河)나 요수(遼水)로 불렀다. 따라서 손문의 중화민국 이전까지도 하북(河北)이란 항하 북쪽을 뜻한 것 이였다. 하남성과 산서성을 가르는 황하강을 경계로 하여 산서성은 하북(河北: 황하의 북쪽)이라 하고 하남성은 하남(河南: 황하의 남쪽)이라 했던 것이다. 한족(漢族)이라 하는 주원장이 세운 명(明: 1368-1644)나라 때까지도 지금의 하북성은 북직례(北直隷)로 불렀다. 명나라가 망한 다음해인 1645에는 북직례를 직례(直隷)로 바뀌었고 1669년에는 직례성(直隷省)으로 다시 개명하였다가 1928년 6월 20일 손문정부에 의해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이 된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 주원장의 넷째 아들 주체(朱棣) 시기인 1403-1424년 사이 동이배달한민족의 중원(中原)이던 산서성(山西省) 요서(遼西)에 있던 모든 지명들을 당시의 북직례(北直隷)로 옮긴 것이다. 그리고 나서 주체는 집권 19년인 1422년에 강소성 남경에 있던 명나라 수도를 당시의 북직례로 옮긴다. 이때까지도 북직례라고 부르다가 1669년에는 다시 이름을 고쳐 직례성(直隷省)으로 불렀으며 약 260년 후에는 이 직례성을 지금의 하북성(河北省)으로 바꾼 것이다. 정확하게 1928년 6월 20일부터 손문정부에 의해 하북성으로 이름이 고쳐진 것이다. 여기에 엄청난 음모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하북(河北)은 황하북부의 산서성을 뜻하였으나 명나라가 이곳 산서성에 있던 모든 지명들을 직례성으로 옮겨놓자 이 황하북부의 뜻인 이 하북을 지명이 옮겨간 직례성으로 정당화 하기위해 직례성을 하북성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래서 1931년에 간행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산서성에 있어야 할 지명들이 지금의 하북성에 있는 것처럼 왜곡, 날조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대한민국의 재야사학자들 조차도 이들 지나인들과 일본인들이 왜곡 날조한 하북성의 지명들인 갈석, 창려, 노룡, 고죽국, 탁록, 요서 등이 처음부터 하북성에 있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속아온 것이다.

 

 

(7) 10년간의 탁록 전쟁

 

치우천황(蚩尤天皇)과 황제헌원은 탁록(涿鹿)의 들판에서 싸움을 하게 된다. 탁록은 현재의 산서성(山西省) 좌측 최남단에 있는 운성시 아래 운성염지(運城鹽池:동서 35km 남북 7km) 일대이며 그 곳 지명으로 한 때는 해량(解梁) 해진(解鎭)등으로 부르다가 2009년 현재는 해주(解州)로 지명이 또 바뀐 곳이고 운성염지도 현재는 해지(解池)라고 부른다. 운성염지를 단군조선 때는 북해(北海) 혹은 창해(蒼海)라고 불렀다. BC2707년부터 시작된 이 전쟁은 10년간 73차례 피 비린내 나는 전쟁을 한다. 이 때 죽은 자의 시체가 수백만 이였다고 사서(史書)들이 기록하고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당시에 "어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았겠느냐? "고 믿지 않으려고 하지만,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단군조선 제14대 고불단군(古弗壇君)을해 56년인 BC1666년(지금으로부터 3,675년 전)의 인구조사 기록을 보면, 당시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인구는 총 1억 8천만 이였다.

 

춘추시대 때 제(齊)나라 재상인 관중이 쓴 <관자管子>에 의하면, "천하의 임금이 전장에서 한번 화를 내자 쓰러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천하(天下)의 임금이란 치우(蚩尤)를 뜻한다. 10년 동안 73회의 전쟁에서 항상 헌원이 졌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치우를 잡아 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우비’라는 한 장수가 죽은 것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기록에 나와 있는 내용으로 치우(蚩尤)를 죽였다는 사람들은, 첫째: 응용(應龍)이 치우와 과부를 죽였다.<산해경/대황북경>, 둘째: 황제헌원(공손헌원)이 치우를 죽였다.<당나라 왕관王瓘이 지은 헌원본기와 운급칠첨雲笈七籤>, 셋째: 치우를 죽인 것은 소득이다.<곽박>이며, 치우를 죽인 장소로는 첫째: 흉여곡(凶黎谷)이다.<학이행>, 둘째: 여산구(黎山丘)에서 죽였다.<원가>, 셋째: 치우가 피살된 곳은 언덕이다.<응용>, 넷째: 치우를 죽인 땅은 남방이다. 다섯째: 치우가 피살된 땅은 기주(冀州)의 들판 탁록(涿鹿)의 언덕이다.<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 여섯째: 흉여토구(凶犁土丘)이다.

 

이들 내용을 요약해보면 치우를 죽인 사람은 공손헌원, 응용, 그리고 소득 세 사람으로 치우 한 사람을 세 사람이 죽인 것으로 되어 있다. 후대의 각색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치우를 죽인 곳은 흉여곡, 여산구, 언덕, 남방, 탁록의 언덕, 흉여토구 모두 6곳이다. 치우(蚩尤)를 죽인 곳을 6곳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아 치우를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을 크게 웅변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공손헌원이 치우를 싸움에서 죽였다면 피살된 장소 한 곳의 이름만 역사에 기록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먼 훗날 한(漢)나라 때 지나인들이 자신의 시조라고 하는 공손헌원(公孫軒轅: 황제헌원)을 추존하고 정당화하며 신성화하기위해 후대인들이 각색한 허구로 보인다. 치우천자와 황제헌원의 10년 전쟁은 당시 엄청난 대 사건 이였다. 이 같은 역사적인 대 사건을 3사람이 죽이고 6곳에서 죽였다는 전혀 일관성 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말은 당시 치우와 헌원의 10년 전쟁중 헌원이 치우를 죽이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사기>의 기록대로 만약 헌원이 치우를 죽였다면 헌원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헌원은 죽어서 자신의 고향인 산동성에 묻히지 못하고 타향인 섬서성(陝西省)에 묻혔다. 그러나 치우천황의 묘는 자신의 고향인 산동성 동평(東平)에 있다. 치우천자(蚩尤天子)의 무덤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壽張縣) 중간지점에 있으며 그 무덤의 높이는 7장(七丈: 21m)이고 해마다 10월이면 사람들이 이 묘지에 와서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이 한가지만으로도 "치우를 잡아 죽이다."란 <사기>의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전쟁에서 헌원이 얼마나 전전긍긍 했었는지 <사기史記>의 기록을 보면 가히 짐작이 간다. "산을 뚫고 길을 내고 단 한번도 편한 적이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거처를 옮겨 다니며,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헌원의 항복으로 10년 전쟁은 끝났지만, 이 전쟁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황하(黃河) 이남으로 내려가게 되고, 난을 피하여 서역(西域:청해성, 신강성, 서장성, 감숙성 등)으로, 중동(쑤메르민족이 된 동이족) 쪽으로, 그리고 미 대륙(미국 인디언)으로 이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보아진다.

 

(8) 탁록 전쟁의 동기

 

삼라만상의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生命體)는 반드시 2/3가 물(수분)로 되어있다. 인간을 비롯하여 동물, 식물, 미세한 곤충, 심지어 살아있는 은하계(銀河系) 까지도 2/3는 물이다. 그런데 모든 동 식물이 태어나서 부터 소멸될 때까지의 기간 동안 섭취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소금(염분)이다. 인간의 체액은 0.9%의 염도를 유지해야 한다. 바다의 염도도 처음에는 0.9%였으나 지구표면에서 씻겨 들어간 여러 가지 물질 때문에 현재 짠 바다 물의 염도는 약 3.5% 이다. 사람의 몸속에 2/3의 수분을 유지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 바로 소금이다. 이렇게 소금은 우리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필수불가결(必須不可缺)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의 민족사는 장자, 장손, 적통, 수컷, 우두머리, 부계사회로 내려온 민족으로, 음양오행(陰陽五行)의 법칙으로 볼 때 양(陽)에 해당한다. 반면에 지나족(支那族)은 방계, 서자, 서출, 암컷, 모계사회로 이어진 민족사로 음(陰)에 해당한 민족이다. 한방(韓方:漢자가 아닌 韓으로 표기한다)의 사상체질(四象體質)을 4가지로 분류하는데 태양과 소양은 양(陽) 체질이라 하고 태음과 소음은 음(陰) 체질이라 한다. 그런데 양(陽) 체질은 음(陰) 체질보다 항상 더 많은 염분을 섭취해야 한다.

 

자오지(치우) 천자와 헌원이 10년간 73회를 싸운 탁록(涿鹿)에는 현재의 해지(解池:북해)인 천연 소금호수가 있다. 이 탁록 전쟁은 바로 천연 소금호수였던 당시의 북해(北海)를 쟁취하기 위한 전쟁으로 보인다. 치우 천자가 있던 당시에는 지금처럼 바다 물을 끓여 증발 시켜 소금을 얻는 단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천연염지(天然鹽池)가 필요 했으리라 본다. 음(陰)인 지나족 보다 양(陽)인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은 소금이 더 많이 필요 했을 것이다. 수백만 명의 살상자를 냈던 이 전쟁은 당시 소금이 얼마나 필요했던가를 단적으로 시사하는 사건인 것이다. 이렇게 치우천황이 개척한 이 땅에 단군왕검이 평양(平壤:산서성 임분시)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란 나라를 건국했다.

 

(9) 우리 역사는 5,907년, 지나 역사는 4,706년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10년 전쟁으로 인하여 우리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과 지나족(支那族:하화족)간의 분명한 민족(民族) 구분의 획을 긋는 분기점(分岐點)이 되었다.

 

BC2707년에 치우와 헌원의 10년 전쟁이 시작되어 10년 후인 BC2697년에 헌원이 헌원국(軒轅國)을 세우게 된다. 따라서 지나인(支那人)들은 자신의 역사역년을 BC2697년부터 계산한다. 금년 2009년 현재로 지나인들의 역사역년은 4,706년이다. 그러나 우리 동이배달 한민족의 역사역년은 5,907년으로, 지나인들의 역사보다 무려 1천 2백 1년이 앞선다. 2006년도 구정(음력설날)때 이 곳 뉴욕 플러슁(Flushing)에서 지나인들이 현수막에 그들의 역사역년(歷史歷年)인 4,703을 새겨 들고 다닌 것을 직접 보았다. 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10년 전쟁이 끝난 BC2697년에 2006년을 합한 숫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동이배달한민족 동포들은 이런 역사의 진실(眞實)을 알지 못하고 해마다 구정 때면 지나인들의 들러리를 서고 다닌다. 그것도 한인 타운이 아닌 지나인들의 타운에서 말이다. 자존심(自尊心)도, 역사의식(歷史意識)도, 민족관(民族觀)도, 주체성(主體性)도 없는 무분별한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