룽산문화(龙山文化) / 동이족(東夷族)
룽산 문화(중국어 간체자: 龙山文化, 정체자: 龍山文化, 병음: Lóngshān wénhuà Longshan culture[*], 기원 전 3000년경-기원 전 2000년경)는 중국 북부(화북)의 황하 중류에서 하류에 걸쳐 퍼져 있는 신석기 시대 후기의 문화를 말한다. 흑도가 발달하여 흑도 문화라고도 한다.
룽산 문화는 중원 룽산문화(허난 룽산문화와 샨시 룽산문화) 및 산둥 룽산문화로 나뉘어 있다. 산둥 룽산문화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존재한 다원커우 문화에 이어 나타나며, 허난 룽산문화는 황하 중류에 존재한 양사오 문화에 이어 등장하고 있다. 룽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다른 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까지 널리 퍼졌을 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 등, 이후 한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란각도 고병배, 산둥 룽산문화의 출토품 / CMOC Treasures of Ancient China exhibit - black pottery goblet
개요
‘룽산’이라는 이름은 1928년 산둥 성 룽산에서 처음으로 유적이 발굴된 데에서 비롯되었다. 룽산 문화는 중원 룽산문화(허난 룽산문화와 샨시 룽산문화) 및 산둥 룽산문화로 나뉘어 있다. 산둥 룽산문화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존재한 다원커우 문화에 이어 나타나며, 허난 룽산문화는 황하 중류에 존재한 양사오 문화에 이어 등장하고 있다. 룽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다른 문화가 발전했던 지역에까지 널리 퍼졌을 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 등, 이후 한족의 문화가 발달한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룽산 문화는 산둥성 동부의 장추 시 룽산진에 있는 청즈아이(城子崖)에서 1928년에 유적이 출토되어 1930년 이후 본격적으로 발굴되었다. 룽산 문화의 특징은 고온으로 구운 회도, 흑도를 중심으로 한 높은 도기 기술에 있으며, 그릇이 얇고 균일하여 녹로가 사용되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란각도(卵殻陶)로 불리는 것은 그릇을 알의 껍질처럼 얇게(0.5 – 1 mm) 만든 흑도의 도기로, 한층 더 연마해 검은 윤기를 내고 세밀한 문양을 조각한 것이다.
이것은 황하 유역뿐만 아니라 장강 유역이나 중국의 남부 해안 부근에서도 발견되고 있어 룽산 문화의 확산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으로 장강 중류 지역의 취자링 문화도 회도, 흑도를 특징으로 하는 문화로 허난성 부근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어 룽산 문화가 장강 부근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도기 생산 효율의 상승은 출토하는 도기의 수나 종류가 전대 문화에 비해 대폭 증대되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어 솥이나 격(鬲, 삼족 솥), 규(鬹, 세발달린 가마솥), 높은 자루 잔(高柄杯) 등, 조리기나 식기로서 사용된 다양한 흑도, 회도의 도기가 출토되었다.
도기뿐 아니라 돌칼(石包丁) 등 석기나 골기 등의 무기나 도구, 비취 등의 구슬도 출토되었다. 룽산 문화 후기에는 청동기도 출현하였고, 은대, 주대(또눈 은나라 이전의 하나라)의 청동기 시대로 가는 과도기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삼족 조리기 鬹, 산둥 룽산문화의 출토품 / CMOC Treasures of Ancient China exhibit - white pottery gui(1)
룽산 문화의 사회에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도시의 출현이다. 초기의 주거 형태는 수혈식 주거였지만, 곧 기둥이나 벽을 세운 가옥이 출현했다. 또 흙을 다져 만든 성벽이나 굴이 출토되고 있어, 특히 샨시성 샹펀 현 타오스 향(陶寺郷)의 남쪽에서 발견된 샨시 룽산문화의 유적, 타오시 유적(陶寺遺跡, 기원 전 2500년 - 기원 전 1900년)은 룽산 문화의 도시 유적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다.
농업이나 수공업의 발달도 특징이다. 샨시성의 웨이허 주변에서는 농업과 목축업이 양사오 문화의 시기에 비해 크게 발전하였다. 쌀의 재배도 시작되었고, 누에를 기르는 양잠업의 존재와 소규모의 견직물 생산도 확인되고 있다.
동물의 견갑골을 사용한 점술이나 무술(巫術)의 흔적도 엿볼 수 있어 종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농업 등의 발달로 인한 잉여 생산이 생기고, 사유재산이 출현하여 사회의 계층화가 진행되었고, 부권제 사회나 계급 사회가 탄생했다.
중국의 신석기 시대의 인구는 룽산 문화에서 절정을 이루었지만, 룽산 문화의 말기에는 인구가 격감했다. 동시에 분묘의 부장품에서 고품질의 란각도, 흑도 등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란각도로 만든 고병배, 산둥성 주청 시 청즈유적에서 1976년 출토된 룽산문화 도기
시대구분
룽산 문화의 전기는 기원전 3000년에서 기원전 2600년경으로, 기원 전 2600년경에서 기원 전 2000년경이 후기에 속한다. 또 룽산 문화는 황하 유역의 지형에 맞추어, 중원의 허난 룽산 문화, 웨이허 연안의 샨시 룽산 문화, 황하 최하류의 산둥 룽산 문화 등 지역 마다 여러 가지로 분화되고 있어, 특히 후기가 되면 분화가 명확해 진다. 웨이허 연안은 그 뒤로 실크로드로 불리는 서역 교역로의 기점으로서 중국 역사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동이족(東夷族)
중국 동북방에 분포한 민족을 중국인[漢族]이 부르던 명칭.
‘동이(東夷)’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기보다는 중국의 한문화(漢文化)와 상대적인 문화개념으로 호칭된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한족과는 종족·언어상으로 구분이 된다. 이들은 태호(太皡)·소호(小皡)·유제(有濟)·서방(徐方)·제부(諸部)·풍족(風族)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동이의 시원과 종족적 성격·활동범위·문화단계에 대해서 고대부터 깊은 관심이 있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삼국사기(三國史記)』에 동이라는 기록이 나온 이래 기자(箕子)와 관련지어 관심을 가졌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은 동이를 상고사 문제와 관련시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치윤(韓致奫)은『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단군조선보다 앞서 동이총기(東夷總記)를 두고 동이족에 대한 중국의 고기록들을 정리하였다.
중국인들도 자국의 상고문화와 관련해 선진문헌(先秦文獻)부터 현대까지 동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이(夷)는 “종대종궁동방지인야(從大從弓東方之人也)”라고 하여 대궁(大弓)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유궁(有窮)주 01)의 군주 예(羿)주 02)와 회수(淮水) 유역의 서언왕(徐偃王), 고구려의 주몽(朱蒙) 등 동이계의 수장(首長)들에게는 궁시설화(弓矢說話)가 있어 동이족은 활을 잘 쏘는 민족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동이전에는,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라고 하는 것은 뿌리이다. 말하기를,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고들 한다. 모든 것은 땅에 뿌리박고 있으므로 천성이 유순하고 도로써 다스리기 쉬워서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가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여 ‘이’의 문화적 특성과 동경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견이(畎夷)·우이(于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陽夷) 등 9종으로 분류해 기술하고 있다.
이 밖에도『논어(論語)』·『예기(禮記)』·『산해경(山海經)』등에 동이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사기(史記)』·『전한서(前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송서(宋書)』·『남제서(南齊書)』·『위서(魏書)』등의 사서에서는 논찬(論贊)·평어(評語) 등에 역사적 사실과 함께 시대에 따라 변하는 동이에 대한 인식을 기술하고 있다.
1. 종족적 성격
‘이(夷)’라는 말은 산둥반도로부터 회사(淮泗) 유역, 즉 현재의 장쑤성(江蘇省)·안후이성(安徽省)·황해연안 등에 분포된 이들 집단이 한족과 접촉을 시작하는 은대(殷代)부터 역사에 등장하였다.
은 말기에는 인방(人方)으로 불리었으며, 시방(尸方)·이방(夷方)으로도 불렸다. 은으로부터 대규모의 정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은대의 갑골문(甲骨文)에도 ‘이’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 시조의 난생설화나 분포지 등을 고려할 때 동이라는 견해가 통용되고 있다.
특히 서주(西周)시대 때 동이의 대표적 수장인 서언왕(徐偃王)의 시조난생설화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설화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 은의 시조신인 순(舜)임금도 동이족이다. 그리고 은이 하를 멸망시키는데 이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서주시대의 금석문에는 동이·남이·회이라는 명칭이 보인다. 중국인들이 점점 여러 종족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만(蠻)’·‘융(戎)’·‘적(狄)’의 구분이 생기고, 그 뒤 음양오행사상이 발달함에 따라 방위개념이 첨가되어 동이·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 등의 명칭으로 고정되었다. 『관자(管子)』에도 이러한 구분이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역사 초기에 ‘동이’라는 것은, 한족이 동방의 이민족에게 붙였던 범칭으로서 특정한 종족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방위개념을 첨가한 한족에 대한 상대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족의 활동영역이 확대되고 지리적 지식의 양이 증가하면서 점차 일정한 종족적 개념의 성격을 띠게 된 것이다.
2. 동이의 범주
동이족은 중국의 서북부에서 수렵생활을 하다가 동으로 이동해, 한 줄기는 산둥반도(山東半島) 방면으로, 다른 한 줄기는 다시 동으로 나와 만주·한반도 일대에 분포하였다. 동이족의 적용범위는 진나라의 통일을 전후해 다르게 나타난다.
진나라의 통일 이전에는 한족과 대립관계를 가지고 황허(黃河)·화이허(淮河)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와 북만주일대, 한반도 등 기타지역에 거주하는 북방 몽골리안계 종족을 일컬었다. 이들은 환황해연안 지역에 분포했으며 중국 한족과는 갈등 혹은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진나라가 통일을 한 뒤에는 산둥반도의 일부가 중국역사에 흡수·동화됨으로써 발해만을 끼고 만주와 한반도로 분포한 한·예맥(韓·濊貊)을 ‘동이’라 불렀다.『설문(說文)』에는 예맥(濊貊)을 동이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의 서(序)에 ‘진병육국기회사이개산위민호(秦竝六國其淮泗夷皆散爲民戶)’라는 기록은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을 반영한다.
한편,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전에는 부여·고구려·백제·신라·마한·진한·변한 등 현재 우리 민족과 직접 관련 있는 나라들이 나타난다. 다만 현재는 우리와 민족 및 역사를 달리하고 있는 읍루(挹婁)·왜(倭) 등이 포함되어 있어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동이의 범주에 관해서는 나라와 학자 또는 시대에 따라 서로 다른 견해가 나오고 있다. 동이에 관해서는 흑도문화와의 관련성, 민무늬토기, 청동기문화의 담당자로서의 역할과 구체적인 종족적 특징 등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가 많다. 또한 역사적인 실체로서 거주지역 및 유적유물조사, 황해연안에서의 해양문화 담당 등 구체적인 활동 모습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동이가 한민족의 근간이 된 예맥족을 포함하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 대립하면서 중국 및 북방종족들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전통을 유지·발전시켰다는 것이다.
3. 동이와 기자조선과의 관계
동이는 기자조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 견해는 흑도문화(黑陶文化)가 동이의 분포와 일치하고 룽산문화(龍山文化)가 은문화로 연결이 되는 것으로 전제하고, 은나라는 동이족의 한 부류이며 따라서 은나라의 후예인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은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은나라와 동이의 종족적 관련성을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설사 기자가 은나라의 후예이고 은나라가 동이의 하나라 하여도 동이가 한민족이며 동이문화가 곧 고조선문화라는 등식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 해동역사(海東繹史)
▷ 설문해자(說文解字)
▷ 논어(論語)
▷ 예기(禮記)
▷ 산해경(山海經)
▷ 사기(史記)
▷ 전한서(前漢書)
▷ 후한서(後漢書)
▷ 삼국지(三國志)
▷ 송서(宋書)
▷ 남제서(南齊書)
▷ 위서(魏書)
▷ 「황해문화권(黃海文化圈)의 형성(形成)과 해양활동(海洋活動)에 대한 연구」 ( 윤명철 ,『선사(先史)와 고대(古代)』11,1998)
▷ 「중국동부해안지역(中國東部海岸地域)과 한반도」 ( 윤내현 ,『장보고』,이진출판사,1993)
▷ 「동이(東夷)의 개념(槪念)과 실체(實體)의 변천(變遷)에 관한 연구(硏究)」 ( 기수연 ,『백산학보(白山學報)』42,1993)
▷ 「선진문헌(先秦文獻)에 보이는 ‘동이(東夷)’의 성격」 ( 이성규 ,『한국고대사논총(韓國古代史論叢)』1, 한국고대사회연구소 ,1991)
▷ 「민족기원고(民族起源考)」 ( 권태원 ,『충남사학(忠南史學)』1,1985)
▷ 「중국고대인(古代中國人)의 한국관(韓國觀)」 ( 전해종 , 『진단학보(震檀學報)』 46·47합집,1975)
▷ 「한예맥이동고(韓濊貊移動考)」 ( 김상기 ,『동방사논총(東方史論叢)』,1974)
▷ 「동이(東夷)와 회이(淮夷)·서융(西戎)에 대(對)하여」 ( 김상기 ,『동방사논총(東方史論叢)』,1974)
▷ 「기자고(箕子考)」 ( 천관우 ,『동방학지(東方學志)』15,1954)
▷ 東夷源流史 (何光岳, 江西敎育出版社, 1990)
▷ 中國史前史話 (徐亮之, 臺北華正書局, 1977)
▷ 中國民族史 (林惠祥, 臺灣商務印書館, 1983)
▷ 夷夏東西說 (傅斯年, 慶祝蔡元培先生 六十五歲論文集,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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