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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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왜국을 재건한 근초고대왕 일본무존

자연정화 2018. 7. 23. 15:02

8장. 왜국을 재건한 근초고대왕 일본무존

倭國 再建 近肖古大王 日本武尊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193

 

백제 근초고대왕 후손 일본천황표

 

 

1. 백제 걸대왕 경행천황

百濟 契大王 景行天皇

 

[記]大帶日子於斯呂和氣 /[紀]大足彦忍代別

 

백제 걸대왕은 조부 책계대왕의 원수인 부여왕 의라왕에게 빼앗긴 일본 본토를 수복하기 위하여 거울을 앞세운 전쟁을 하였다.

일본 수복 후에 백제 걸대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선비족 모용황의 침입으로 백제 부여 땅을 잃고 퇴위하여 일본에서 은거하였다.

제 12세 천황으로 기록된 경행천황景行天皇(273~358)은 백제 분서대왕汾西大王(재위298~304)의 아들 걸대왕契大王(재위343~346년)이다.

 

걸대왕은 분서대왕의 암살 당시에 32세나 되었으니, [삼국사기] 기록과 같이 어려서 즉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지 못했고, 대신에 비류대왕이 즉위하였다. 분서대왕을 암살한 낙랑태수는 백제 땅의 반란자로서 고구려 미천왕에게 낙랑을 빼앗긴 장통이다.

 

그후 평양의 백제대왕을 낙랑태수라고 한 것은 동진東晋에서 보낸 근초고대왕의 책명에서 나타나고, 그후 [양나라 직공도梁職貢圖]에도 백제 사신을 낙랑 사신이라고 기록해놓았다.

 

부여 의라왕의 침략에 의해 책계대왕責稽大王이 298년에 전사하고, 뒤이어 백제의 일본 땅을 부여가 침탈하였으므로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대왕, 즉 경행천황은 대규모 병력으로 도일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경행천황의 자손이 80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 80명중에서 태자太子라고 불린 사람은 셋이었는데, 성무천황成務天皇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와 야마토타케루 즉 일본무존日本武尊으로 일컬어지는 야마토오구나倭男具那(295~333) 그리고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 등이다. 이 중에서 성무천황이 된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命(326~370)만이 경행천황의 아들이다.

 

두번째인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백제 비류대왕의 쌍둥이 아들중 동생인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세번째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태자였다. 그는 호무다노미와카品陀眞若(305~361)을 낳았고 그의 세 딸이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하였다.

 

그의 세 딸은 타카기노이리히메高木入日賣命(318~366)와 나카쯔히메中日賣命, 오토히메弟日賣命(324~368)인데, 응신천황(320~394)과 결혼한 오토히메가 384년생일 가능성은 없으므로 324년출생이 확실하고, 그의 조부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273년생이 되며 경행천황과 동갑이니 경행천황의 아들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273~318)는 비류대왕의 장왕자로서 백제 태자이며, 백제에서 숭신천황을 치기 위해 건너온 정벌군의 대장이었고, 그는 318년 6월에 숭신천황과 전투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고려된다.

 

오호야마토타라시히코日本足彦國押人天皇인 효안천황(222~298)의 사후에 그의 뒤를 이어서 백제 걸대왕이 일본에 가서 오호타라시히코大帶日子가 되었으므로 25세인 298년에 경행천황이 조왕인 책계대왕의 복수를 위해서 도일하였을 것으로 고려된다. 대물주신의 아들로 주장된 오호타타네코意富多多泥古가 경행천황일 가능성은 적다.

 

경행천황이 이나비노오호이라쯔메伊那毘能若?女命(278~318)을 통하여 얻은 야마토네코倭根子命(302~348)와 카무쿠시神櫛王命(308~350)가 도일하여 초기에 얻은 아들들이다.

 

그보다 큰 아들로 기록된 쌍둥이 두 아들인 오호우스大?命(295~318)와 일본무존日本武尊(295~333)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6~343)의 아들들이다.

 

구이대왕仇台大王(재위 234~238)의 아들 비류대왕이 343년에 죽고, 분서대왕의 아들 걸대왕契王이 343년에 백제로 돌아와 백제대왕이 되었다.

 

그러나 346년 초에 선비족 전연국의 모용황이 백제 부여부를 쳐서 부여왕 여현餘玄과 5만명의 포로를 끌어갔다. 343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환도성을 함락하고 5만명을 끌어간 모용황에 의해서 백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자치통감資治通鑒] 346년初,夫餘居於鹿山,?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燕王?遣世子俊帥慕容軍、慕容恪、慕輿根三將軍、萬七千騎襲夫餘..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以玄??軍將軍,妻以女。

 

당시 부여는 이미 모용외 때에 멸망하여 대릉하 백랑산과 철령시 북옥저로부터 의려왕과 의라왕이 순차적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천황이 되었으므로, 이 부여왕 여현의 영토는 남옥저 지방으로 고려된다.

 

구이대왕묘仇台大王墓로 추정되는 위영지령魏令支領 고분이 백제 초기 벽화고분이므로, 그 고분이 있는 태자하太子河 요양시遼陽市가 당시 백제 대방왕의 수도로 고려된다.

 

위영지령 고분의 벽화도에는 제2부인으로 공손부인 초상이 있는데 구이대왕은 공손탁의 딸을 비로 맞이했었다. 또한 전체적인 고분 벽화 형식이 황해도 안악 3호분과 똑같다. 또한 대릉하 조양시의 고분 벽화와도 주제와 형식, 화법이 일치한다.

 

이 당시 모용황에게 약탈당한 부여성은 대방 지역으로 보아서 옛 대수帶水인 태자하太子河가 흐르는 요양시로 고려된다.

 

요양시 동쪽 본계현本溪縣에는 고대에 발해 삼로군杉盧郡 한양현漢陽縣이라는 지역 이름도 있었다. 삼로군 터에는 삼송산성이 남아 있고 한양현 위치는 환인현 오녀산성이다.

 

백제 걸대왕은 선비족에 대한 패전의 책임을 져서, 재위 3년만에 강제 퇴위 당하고 일본으로 다시 떠나가서 경행천황景行天皇이 되었는데, 전쟁에서 패전하면 왕이 죽거나 물러나는 것이 본래 부여인의 국법이다.

 

경행천황은 일본 정벌에서 거울을 앞세운 것으로 고려되는데, 경행천황의 지시를 받고 정벌에 나선 일본무존은 배를 타고 갈 때에 배 위에 큰 거울을 걸었던 사실이 있고, 계契, 걸契과 경景의 일본 발음이 “게이”로서 같고 “걸”은 우리말 거울 옛 발음일 수도 있다.

 

[일본서기]에서 경행천황의 이름은 오시로(於-斯呂, 忍-代)이며 그의 궁성 이름은 히시로日代 궁이었다. 시로는 흰색白의 발음과도 같다.

 

시로斯呂는 대代로도 썼지만, 백제 걸왕의 걸, 계契를 일본에서는 [게이]로도 읽지만 [시루시]라고도 발음했다. [일본서기/인덕천황기]의 원년 기록에서 후엽지계後葉之契의 契는 “시루시(=증표證票)”로 읽었다.

 

따라서 위덕왕이 된 백제 창왕昌王과 같이 걸대왕의 본래 이름은 여설餘契, 혹은 여걸餘契이 되고 일본에서는 시로왕, 후에는 게이고우천황景行天皇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행천황은 효안천황처럼 이름 앞에 타라시帶를 경칭으로 썼는데, 경행천황은 키가 크고 특히 다리가 길었다고 [고사기]에 기록되었다.

 

(주) 비류대왕이 구수대왕(재위214~234)의 둘째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기록은 구이대왕(재위234~238)의 둘째 아들의 오기誤記로 본다. 구수대왕 사망년도에 태어난 비류대왕이라고 해도 서거 나이가 최소 109세가 되는 무리가 있는데, 하물며 둘째 아들이라면 더욱 무리다. 특히 구수대왕은 160년 초고대왕의 일본 정벌에 동행하여 대국주신이 되었으니, 그의 둘째 아들이라면 343년에는 180세가 넘는다. 286년에 서거한 고이대왕이 개루대왕의 아들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도 구이대왕의 아들이라야 상식적으로 되니, 개루대왕은 164년에 서거했기 때문에 그 아들이 286년까지 살기 어려운 것이다.

 

(주) 당시 백제에는 만주의 대방 지역과 부여 지역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찬성씨록]에서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있다.

 

[신찬성씨록] 御池造; 出自百濟國扶餘地卓斤國主施比王也

[신찬성씨록]에서 백제 혜대왕惠大王을 주몽대왕 30세손이라고

[신찬성씨록] 出自百濟國都慕王?世孫惠王也

 

했는데 [삼국유사]의 28대와 비교하면 혜왕 위에 사라진 두 왕이 더 있고 그중 하나는 추증된 시조 주몽대왕이 되니 다른 한 분은 구이대왕이 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백제 6대 구수대왕은 10세라고 했는데

[신찬성씨록] 出自百濟國都慕王十世孫貴首王也

 

고대에 칠七과 십十을 구별하기 어렵게 썼으므로 이를 7세라고 교정해서 보면 그의 앞에 주몽대왕 한 분만 있다.

 

따라서 구수대왕 뒤에 사라진 한분이 있는데

[삼국유사]에서 고이대왕의 즉위년을 기왕에 알려진 234년이 아니라 낙초樂初 2년 기미년 239년이라 하였으므로,

 

사반대왕의 즉위년을 238년으로 보아야 하고, 구수대왕(재위 214~234) 서거 뒤에 234년에서 238년까지 다스린 백제대왕이 비게 되므로 그 자리 8대 백제대왕 위치가 구이대왕 자리가 된다.

 

(주) 만주 대방 고지의 구이대왕은 공손탁의 딸을 후비로 들였고 인격이 훌륭하여 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수서隋書][북사北史/백제전] / 東明之後,有仇台者,篤於仁信,始立其國於帶方故地。漢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주) 이전까지 백제대왕은 고이대왕계의 책계대왕, 분서대왕, 걸대왕과 비류대왕계의 근초고대왕까지 교대로 즉위하였는데 걸대왕 이후 고이대왕계가 끊어졌다.

 

경행천황이 죽은 일본내 궁성 이름이 근기近畿의 시가국滋賀國 성이다. 칠지도에 기록된 백자국百慈國의 위치로 고려된다.

 

경행천황의 높은 이름은 그의 일본 정벌에 의한 것인데, 사실은 경행천황이 백제대왕으로 있을 때에, 그의 명령을 받은 비류대왕의 쌍둥이 둘째 아들, 일본무존日本武尊,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295~384)이 대신 출정하여 정벌하였다.

 

또한 걸대왕의 마지막 영지는 오사카大阪의 대화大和가 아니라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므로, 343년 백제 걸대왕이 되었다가 346년 근초고대왕에게 양위하고 백제에서 되돌아왔을 때에는 왜국의 대표자에서도 밀려난 것이다.

 

 

2. 근초고대왕 야마토타케루 일본무존

近肖古大王 日本武尊

 

[記]倭建命 倭男具那 小?命 /[紀]日本武尊 烏具奈 童男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둥이 아들들이 걸대왕을 따라 일본 탈환 전쟁에 참전하여 태자와 쌍둥이 형은 318년에 전사하고 쌍둥이 아우인 근초고왕자가 일본 전역에 혁혁한 공을 세워서 야마토타케루, 즉 일본무존日本武尊, 왜건명倭建命이라는 최고의 칭호를 얻었다.

근초고대왕이 백제 태자로 다시 돌아가니, 그를 기리는 백조릉이 일본 곳곳에 세워지고, 근초고대왕의 아들들이 당연하게 일본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근초고대왕이었던 일본무존의 빈 고분 기록에 의하면, 295년에 태어나서 [삼국사기]에 붕어한 374년까지 80세를 살았다. 일본무존의 고분은 일본무존이 백제로 떠난 뒤에 만들어진 빈 고분으로서 인덕천황기에도 확인된다.

 

일본 교토京都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에는 제신祭神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있다.

 

祭神四座 八姓の祖神である。

 第一 今木神 〔いまき?景行天皇の子〕  日本武尊 源氏の神

 第二 久度神 〔くど?日本武尊の子〕   仲哀天皇 平氏の神

 第三 古開神 〔ふるあき??神天皇の子〕 仁德天皇 高階氏の神

 第四 比賣大神〔?ち〕          天照大神 大江氏の神

 第五 縣(あがた)社 天?日命 中原?淸原?菅原?秋篠の四姓の祖神

 

즉, 히라노신사에서 제사를 지내는 제1신은 금목신이자 일본무존이고,

제2신은 구도신久度神인데 일본무존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구도신은 일본무존의 아들인데다가, 또한 구도신久度神은 백제 상고왕尙古王(=近尙古王) 즉, 근초고대왕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久度神は百濟の祖 尙古王の子仇首王(日本音くど)

여기서 상고왕尙古王은 조고왕照古王, 즉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따라서 구도신, 근구수대왕을 낳은 일본무존은 당연히 백제 근초고대왕인 것이다. 일본에서도 현재 이들 히라노平野신사의 4신을 모두 백제왕으로 인정하고 있다.

 

日本京都にある "平野神社"は倭王が先祖たちのために祭祀をあげた所だ.. 927年完成された日本古代王室文?"神名帳"を見れば李Hiranoジェントルマンに?して "平野祭神は四座であり 四時祭式には 今木神, 仇度神, 古開神, 相展の 比賣神であり 4神が皆百濟王だ" やっぱり倭國は百濟王に祭祀を執り行なうので屬國イヨッネです~

 

한편 일본무존의 일본 정벌에 사용했던 주몽검都牟劍(=쿠사나기쯔루기)를 신神으로 모신 아뜨다신사熱田神宮 기록에 의하면,

 

열전신궁의 말사인 소시모리사末社曾志茂利社에서는 거무리대신居茂利大神을 제사하는데, 이는 스사노오의 별명이라고 전한다.

 

단, 스사노오신, 즉 초고대왕은 그 바로 옆의 남궁신사南宮神社에서 따로 모신다. 따라서 거무리대신은 스사노오, 즉 초고대왕의 별명이 아닐 것이다.

 

히라노신사의 금목신今木神과 아뜨다신사의 거무리居茂利대신은 그 표기가 유사한 것인데, 뒷부분 목木과 무리茂利는 우리말 물, 강을 나타낸다.

 

앞부분 今(이제 금)과 居(있을 거)의 훈訓을 취하면 일본말 “이사”가 되고, 이는 우리말의 숫자 “하나”“一”를 의미한다. 따라서 합쳐서 “하나-물”을 우리말로 바꾸면 백제의 한수가 된다.

 

그래서 거무리대신과 금목신은 한산漢山으로 천도한 한성백제의 왕 근초고대왕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목木의 일본 발음 기き는 성城의 일본 발음 기이기도 하다.

 

즉 히라노신사의 제1신, 금목신은 백제 한성신漢城神, 근초고대왕近肖古大王이다. 그가 바로 야마토타케루日本武尊이고 근구수대왕의 부왕이다.

 

히라노 신사의 제 2신 구도신은 근초고대왕의 아들로서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이자, 일본의 응신천황應神天皇이고, 오사카에는 구도신사久度神社가 따로 있기도 하다.

 

제 3신 고개신古開神은 후루아기ふるあき라고 하는데, 근구수대왕의 아들로서 침류대왕枕流大王의 “류流”의 훈訓 “흐르”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된다. 후루는 강降의 발음이기도 한데 흘러내려왔다는 말이다. 즉 신공황후인 야가하에히메矢河枝比賣를 통해 강신降神하였으므로 후루왕이라고 했던 것이다.

 

제 4신 히메比賣신은 환무천황桓武天皇(737~806)의 어머니의 조상이다. 그런데 백제계 도래인 화씨和氏의 후예라고 한다.

 

桓武天皇とその生母の高野新笠が祀っていた神樣であった。高野新笠は和氏(やまとし)出身で、この和氏が百濟系渡來氏族であった。したがってこれら神樣は桓武天皇の母系に繫がっている。

 

이 히메比賣신은 응신천황의 부인이 되고 침류왕을 낳았던 신공황후 야가하에히메矢河枝比賣를 의미한다.

 

근초고대왕(재위 346~374)은 일본무존으로서 333년에 39세로 죽었다고 금탄원琴彈原의 백조릉에 기록되었는데, 이 333년은 근초고대왕이 39세로 일본 정벌 후에 백제로 돌아간 해이다.

 

[고사기]나 [일본서기]에서 일본무존은 갑자기 병이 들어 백조가 되어 날아갔다고 하였고 그래서 백조릉이란 곳이 일본의 여러 곳에 생겨났다. 물론 한반도를 바라보는 큐슈 서북 해안에도 있는데 그가 떠나간 마지막 장소에 세워진 고분이다.

 

근초고대왕의 일본 후비들 중에 가야계 수인천황의 딸인 후타지노이리히메布多?能伊理毘賣(297~363)가 있어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을 낳았다.

 

근초고대왕은 비류대왕比流大王(재위 304~343)의 차자이고, 걸대왕의 부왕은 백제 분서대왕(298~304)이었다.

 

근초고대왕, 일본무존은 태자도 아닌 세째 왕자로서 298년 숭신천황에게 죽임을 당한 책계대왕의 손자인 걸왕자가 일본 탈환 공격에 나서니 함께 참여하여 큐슈를 먼저 공략한다.

 

큐슈는 이미 경행천황이 일부 점거하고 있었지만 큐슈를 통일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초고대왕의 형이라는 오호우스大?命은 295년에 쌍동이로 태어나 318년에 24세로 죽었는데 숭신천황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직접 큐슈 정벌을 완성하고, 당시 재왕齋王이자 가야계 수인천황의 딸인 야먀토히메倭比賣(277~366)를 만나서 히미코 이래로 여제사장이 보관하던 주몽검을 건네받고 큐슈 정벌에 도움을 받는다.

 

부여계인 숭신천황에 대항하여 가야계와 백제계가 연합했던 것이다.

 

근초고대왕이 일본 본토 이즈모를 공략하고 다시 나라현을 공략하고 도꾜東京를 공략할 때에 야마토히메가 준 쿠사나기쯔루기草雉儉를 사용하였다. 이후에 동경은 근초고대왕의 장자인 호무야와케品夜和氣命(311~374)가 물려받았다.

 

일본의 히라노신사平野神社는 백제 근초고대왕과 근구수대왕, 침류대왕, 그리고 근구수대왕비 신공황후를 모시는 백제인들의 신사였던 것이다.

 

한편 일본의 구도신사久度神社는 구도久度대신과 팔번八幡대신을 모시는데 지금 구도대신의 신분을 감추었지만 역시 근구수대왕이고, 팔번대신은 그 아들 침류왕이 가장 유력하다.

 

(주) 일본에 백제대왕을 모시는 신사는 참으로 많다. 한반도에는 전무하여 안타깝지만, 일본에 백제대왕들의 고분이 남았으니 신사도 많을 수밖에 없다.

 

비조부신사飛鳥部神社는 백제 개로대왕의 동생으로서 일본 청령천황이 된 곤지대왕을 모시는 곳이다.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는 의자왕의 아들인 백제왕 선광禪廣과 스사노오, 즉 초고대왕을 모시는 곳이다.

 

또한 출운신사出雲神社는 스사노오였던 초고대왕,

대국주신사大國主神社는 대국주신이었던 구수대왕,

하압신사下鴨神社 등은 사대주신이었던 사반대왕을 모시는 곳이다.

고압신사高鴨神社는 구수대왕의 아들인 의덕천황을 모시는 곳이다.

 

(주) 근초고대왕의 일본 이름인 소대小?, 동남童男, 오구나男具那는 남군男君, 남근男根, 즉 우리말 좆으로 고려된다.

 

소대명의 대?가 “절구공이”라는 뜻이 있는데 남자의 성기가 많이 커서 작은 절구공이 만하다는 것이다.

이 오구나, 즉 남근, 큰 좆은 男具那 ← 男根 ← <좆> → 照古, 素古, 肖古 의 발음과 관련되는 이름이다.

 

좆이 유교 암흑기를 거치면서 “좆같이” 라는 표현처럼 오늘날 욕설의 뿌리가 되었지만, 우리 고대에는 “좋다”, “좋아”의 어간 “좋”의 뿌리인 좆으로서 좋은 뜻이었을 것이다.

 

(주) 비류대왕의 태자와 쌍동이 왕자 중의 형이 일본에서 전사하였다. 걸대왕과 함께 일본에 온 비류대왕의 아들들이 많았던 것이다.

따라서 [신찬성씨록]에는 비류대왕의 후손이 특히 많다.

 

춘야련春野連 면씨面氏 문사씨汶斯氏 강옥공岡屋公 등이 그 후손이다.

 

(주) 한편 근초고대왕의 손녀인 카구로히메訶具漏比賣命(356~400)가 경행천황(273~358)의 후비가 되었는데, 이는 경행천황이 근초고대왕의 아비가 아니라는 절대적인 반증이다. 조카와 결혼하는 일은 있어도 자기 친손녀와 결혼하는 일은 없다.

 

 

3. 걸대왕 아들 성무천황

契大王 王子 成務天皇

 

[記]若帶日子天皇 /[紀]稚足彦天皇

 

걸대왕의 아들 성무천황 때에 일본 땅을 나누어서

수많은 백제 왕자들이 분봉을 받았다.

제 13세 천황으로 기록된 성무천황成務天皇(326~370)은 와카타라시히코若帶日子라고 한다.

 

경행천황이 야스카이리히메八坂入日賣命(275~328)를 얻어 황후로 삼아서 낳았다. 성무천황의 이름 와카타리시히코는 경행천황의 소왕자로 추정케 한다.

 

성무천황 때에 분봉分封이 많았는데 그 역시 분봉을 받은 일본의 지방왕이었을 것이다. 그의 영역은 경행천황에게 물려받은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 있던 오호쯔시大津市다.

 

근초고대왕의 장남인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311~374)은 도쿄東京 부분에 분봉받고, 근초고대왕의 아들인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은 왜국 중심인 오사카에 분봉받은 것이 된다.

 

그리고 왜국 중심인 오사카大阪는 경행천황 때에 근초고대왕이 둔가屯家를 두어서 백제군대를 주둔시키기도 하였다. 이 곳은 주길대신住吉大神 3명이 함께 관리하였던 것으로 고려된다.

 

백제가 왜국을 나누어 국군國郡에 군장君長을 두고, 현읍縣邑에 수거首渠를 두었는데, 이때 여러 백제 왕자들에게 일본 땅을 분봉하였던 것이다.

 

수거首渠는 마한馬韓의 제도인 읍장 거수渠帥를 뒤집은 말이다.

 

앞서 경행천황의 아들들이 80명이라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전역에 분봉받은 백제 왕가 출신의 제후였다. 80명이 다 실제 경행천황의 아들이 아니라 그때 백제에서 일본으로 간 왕실의 숫자라고 추정된다.

 

[고사기]에서 성무천황(326~370)은 355년 3월 15일에 세상을 떴다.

 

현재 발굴된 고분 기록인 370년과 맞지 않고, 또 고분 능비의 서거일자는 6월11일 45세로서 [고사기]에 기록된 중애천황의 서거일자다.

 

반대로 중애천황(328~379)은 [고사기]에서 362년 6월 11일에 서거하였다고 하는데 고분에서는 기묘년己卯年 3월15일 52세로 되어 있다.

 

기묘년을 [고사기]에 기록된 을묘乙卯로 보면 355년 3월15일이 되기는 하는데, 이는 [고사기]에 기록된 성무천황의 서거일이다.

 

즉 중애천황과 성무천황의 서거 기록이 [고사기]에서 서로 뒤바뀌어 있다.

 

게다가 중애천황의 후비였다는 신공황후는 성무천황 능 옆에 가까이 모셔져 있다.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기록된 중애천황과 성무천황의 서거 순서가 뒤바뀐 것이고, 신공황후 능의 배치는 신공황후가 성무천황의 후비였다는 증거가 된다. 붓끝을 놀리는 역사 조작은 가능해도 산능을 바꿀 수는 없었다.

 

신공황후의 또다른 이름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帶比賣와 관련하여, 식장천息長川은 시가현滋賀縣에 있었으니, 지금의 천야천天野川이다.

 

즉, 신공황후와 성무천황이 같은 고향인 시가현滋賀縣에서 자란 것이다.

 

그뿐아니라 그녀의 아들인 침류대왕은 칠지도 명문에서 백자?세자百慈?世子라고 하였다. 백자국은 경행천황에서 성무천황으로 이어졌고 신공황후는 바로 이 백자국의 비였던 것이니 근초고대왕의 아들인 중애천황의 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조작된 역사 속에서 중애천황과 성무천황의 순서와 역할이 서로 바뀌었다.

 

 

4. 근초고대왕 아들 중애천황

近肖古大王 王子 仲哀天皇

 

[記]帶中日子天皇 /[紀]足仲彦天皇

 

355년 근초고대왕의 아들 중애천황은 오사카를 지키다가 걸대왕의 아들인 성무천황에게 밀려나 큐슈로 피난갔고 362년 근구수대왕이 일본으로 건너와서 성무천황을 물리치고 스스로 응신천황이 되었다.

제 14세 천황으로 기록된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은 근초고대왕인 일본무존의 아들이다. 근초고대왕과 가야계 수인천황의 딸인 후타지노이리히메布多?能伊理毘賣(297~363)가 중애천황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은 타라시나가히코足仲彦였다.

 

중애천황은 왜국 중심인 오사카大阪에서, 걸대왕의 아들 성무천황의 반란을 당하여 355년에 큐슈九州로 쫓겨갔다.

성무천황은 중애천황의 큐슈九州를 마저 공략하려고 하였다.

 

백제의 근구수왕자는 성무천황에게 차라리 신라를 치라고 권유하였으나, 성무천황은 굳이 큐슈로 향하여 여육??의 공국空國을 치러 왔다. 여육의 공국은, 혈육의 나라라는 뜻이니 중애천황의 땅 큐슈다.

이 성무천황의 큐슈 공격에 성무천황 후비인 신공황후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근구수대왕을 대신하는 주길대신住吉大神 등이 남아있어서, 중애천황의 큐슈를 지켜주었고 백제군은 신공황후를 포로로 잡았다.

 

뒤이어 근구수대왕의 공격으로 355년에 시작된 성무천황의 반란은 362년에 평정되었으며 근구수대왕이 응신천황으로 등극하였다.

 

성무천황이 다시 물러나 목숨을 부지한 곳도 역시 걸대왕이 물러나 있던 시가국滋賀國 다카치호궁高穴穗宮이다.

 

[고사기]에서 중애천황은 362년에 죽었는데, 이 기록은 성무천황이 362년 6월에 강제로 퇴위된 것을 의미하고, 이후로 성무천황은 시가국 다카치호궁으로 물러나 370년에 죽었다.

중애천황은 355년에 큐슈로 물러나 379년경에 여생을 마쳤다.

 

중애천황의 후비였던 신공황후의 뱃속에 생겨난 응신천황에게 중애천황의 후사를 잇도록 하였는데 역시 조작이다. 응신천황은 신공황후의 새 남편으로서 근구수대왕이고, 태중에서 삼한왕이 된 신공황후의 아기는 우지노화기, 즉 백제 침류대왕이었으며, 침류대왕은 중애천황의 후사가 아니라 성무천황의 후사를 이엇다. 이 침류대왕이 경행천황과 성무천황의 시가국 다카치호궁을 잇도록 하여 어린 침류대왕을 백자국 세자라고 근초고대왕이 하사한 칠지도에 기록하였다.

 

조작된 일본 역사에서 중애천황비라고 했지만, 실제는 성무천황비였던 신공황후는 [일본서기]에서 389년에 101세로 죽었다고 하니 289년생이 된다. 그러나 326년생 성무천황이나 328년생 중애천황보다 무려 30여세가 더 많으니 크게 잘못되었다.

 

신공황후의 연대가 조작된 것이며 실제는 336년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