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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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부여국 의려왕 효령천황과 의라왕 숭신천황

자연정화 2018. 7. 23. 14:59

7장. 부여국 의려왕 효령천황과 의라왕 숭신천황

夫餘國 依慮王 孝靈天皇과 依羅王 崇神天皇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217

 

 

1. 부여국 의려왕 효령천황

夫餘國 依慮王 孝靈天皇

 

[記]大倭根子日子賊斗邇命 /[紀]大日本根子彦太瓊天皇

 

랴오허강 서쪽 대릉하 북동쪽에 살던 부여국인들이 선비족의 전연국 모용외에게 망하여 부여국 의려왕이 부여국을 아들 의라왕에게 물려주고, 의려왕 자신은 대릉하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와서 효령천황이 되었다.

제 7세 천황으로 기록된 효령천황孝靈天皇(261~316)은 부여에서 온 의려왕依慮王이다. 285년에 일본에 도래하여 316년에 55세로 죽었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桓檀古記大震國本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주定州(발해 정주定州 = 심양시瀋陽市 북쪽 신대자新臺子 의로懿路)는 (부여왕) 의려국 도읍이었다. 선비족 모용외에게 패하여 도읍이 위태하니 의려왕 생각에 백성들이 있으니 어디간들 성공하지 못하랴?

 

아들 부라扶羅를 불러 도읍을 맡기고 백랑산白浪山(백랑수였던 대릉하의 산)을 넘어 바다를 건너가서 왜인들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

 

혹은, 의려왕이 선비에게 패하여 바다로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았고, 아들들은 북옥저北沃沮(북옥저가 요하의 발해국 정주 위치다. 의라왕의 천도 전에는 대릉하에 있었다.)로 도망했는데 이듬해 아들 의라가 부여왕이 되었다.

 

다시 모용외에게 침략당해 백성들이 끌려가니(북경의 노예시장에서 포로가 된 부여인들이 팔렸다.) 의라왕이 수천명을 데리고 바다 건너 왜인들을 정벌하고 왕이 되었다.

 

定州依慮國所都...依羅 率衆數千 越海 遂定倭人 爲王

 

이 의려왕과 의라왕의 이야기는 [진서/부여전晉書夫餘傳]에 기록이 있다.

 

285년, 모용외가 습격하여 쳐부수니 의려왕이 자살하였다. 단, [한단고기]에 의하면 일본으로 갔다. 의려왕의 아들들이 도망한 옥저는 심양시瀋陽市 북쪽이며 의라가 있던 곳은 읍루고지挹婁故地라고 와전된 의로懿路다.

 

진무제가 “부여왕이 대대로 충성했는데 오랑캐에게 망했으나 그 후예들이 나라를 되살리도록 조치하라”고 말했다. 이는 선비족을 경계하기 위하여 선비의 배후인 부여를 살리려고 한 것이다.

 

앞서 부여를 구하는데 실패했던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 선우영鮮于嬰을 파직하고, 새로 하잠何龕을 호동이교위로 임명했고, 의라왕이 하잠을 만나러 오니 하잠이 부하 고침賈沈을 보내어 선비족을 물리쳐서 의라가 부여국을 다시 세웠다. 그후 매년 선비 모용외가 부여인을 약탈하여 중국에서 팔아대니 무제가 불쌍히 여겨서 관의 재물로서 (부여인을 노예에서) 속환贖還시켜주고 사주司州와 기주冀州에서 부여인을 팔고사지 못하게 하였다.

 

윗글을 종합하면 285년경에 대릉하에 살던 부여국이 선비족의 침략으로 망하여 의려依慮왕이 일본에 가서 왜왕(=효령천황이다.)이 되었다.

 

의려왕이 왜왕 효령천황이 된 시기는 효원천황의 아들 타케하니야스建波迩夜須毘古(248~287)가 패전하여 전사한 287년부터, 효안천황의 황비인 오시카히메押媛(235~288)가 죽은 288년으로 고려된다.

 

그후 의려왕의 아들 의라왕依羅王이 부여국을 정주定州 땅에 임시로 세웠으나 다시 선비족에게 약탈을 당하여 견디다 못해 역시 일본으로 가서 왜왕이 되었다. 여기서 나중에 도일한 의라왕은 아래에서 10대 숭신천황으로 확증이 되고, 의려왕은 7대 효령천황으로 고증된다.

 

부여국은 [위지/동이전]에서 예(穢huì)라고도 하였으며 예왕지인穢王之印이라는 국새國璽를 가졌었다. 요녕성 부신阜新市 서북 지방에 있었는데, 고구려 태조대왕(53~146) 때에 고구려의 중국 공격을 저지하고, 요동왕 공손탁公孫度(194年 卒)의 질녀를 왕비로 맞이했고 의려왕(285年)에 이르러 선비족 모용외에게 쫓겨 일본으로 갔다. 부여는 고구려 태조대왕의 중국 한나라 침공을 저지한 부여왕 위구대尉仇台의 후손이며, 위구대 이후에 간위거簡位居, 마여麻余. 의려依慮, 의라依羅로 부여왕위가 이어져왔다.

 

효령천황의 이름은 후토니(賊斗邇, 太瓊)이며 그의 수도는 구로다노이호토黑田盧戶궁이다. 이 분이 요서遼西의 부여夫餘(=阜新市)에서 선비족에게 패배하고 대릉하로부터 일본에 도래한 부여왕 의려왕依慮王이다.

 

그의 도성 려호궁廬戶宮은 의려依慮의 이름에서 비롯된다.

효령천황은 나라현 북갈성군北葛城郡 마판릉馬坂陵에 묻혔다.

 

(주) 효령천황의 이름 후토니(賊斗邇 = 후로알 = 홀알 = 太瓊)에서 후루賊斗는 홀忽, 즉 크다는 뜻이 있으니 홀한강 홀한성, 홀승골이 그 예다. 그래서 후토니賊斗邇를 거쳐 큰-옥알의 태-경太-瓊으로 바뀌는 것이다.

 

 

2. 부여국 의라왕 숭신천황

夫餘國 依羅王 崇神天皇

 

[記]御眞木入日子印惠命 /[紀]御間城入彦五十瓊殖

 

의려왕으로부터 부여국을 이어받은 의라왕은 중국 동진의 도움으로 재건하여 다시 요하 부근에 나라를 세웠으나, 거듭되는 모용외의 침략으로 인하여 결국 수많은 백성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와 숭신천황이 되었다.

의라왕의 이동 행로 중에 298년 백제 책계대왕이 전사하였고, 300년에 신라와 교류를 하였다. 숭신천황은 선진화 된 왕권 제도를 수립하고, 대마도에 처음으로 임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318년 백제의 반격으로 숭신천황은 죽고, 의라신사가 세워졌다.

제 10세 천황으로 기록된 숭신천황崇神天皇은 미마기 이리히고 이니에御間城入彦 五十瓊殖, 御眞木入日子 印惠(277~318) 천황이라고 하였다.

 

중국 동진東晋에서는 선비족 모용외를 견제하려고, 중국의 장군들을 파견하여 의려의 아들인 의라依羅를 다시 세워 옥저沃沮 부근에 부여국을 재건하였지만, 누차 모용외慕容嵬가 부여국을 쳐서 자몽지야紫蒙之野(=대릉하 조양시에 두었던 영주營州 12술戌 중에 자몽술紫蒙戌이라는 초소가 있었다.)를 빼앗고, 또 부여인을 약탈하여 중국에 노예로 팔아대고, 다시금 모용외가 북경 이북을 차지하고 끝내 중국 동진으로부터 모용외가 제후로 인정을 받아버리고,

 

의라왕은 요하 동쪽으로 옮겨 심양시 북계 의로懿路에 다시 의라국을 세웠다. 의라왕이 옮겨가서 살던 곳을 신당서는 읍루挹婁고지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의라依羅국 고지였다.

 

현재의 지명도 의로懿路(심양시瀋陽市 신성자구新城子區)인데 읍루, 의라, 의로 세 지명이 모두 현지 발음으로 yilou에 수렴한다.

 

의로懿路는 [대원일통지]에 의하면 그 아래에 모미현慕美縣이 있었으며, 모미현은 당나라 마미주磨米州였다. 고구려 미마나를 뒤집은 말이다.

 

마미주는 임나任那, 즉 미마나任那에서 비롯된 말이다. 임나는 서우여 번한의 4세손 번한 임나任那의 이름이었다. 그런데 당나라 때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미마나任那의 이름을 뒤집어서 마미주磨米州로도 불리운 것이다.

 

의라왕은 도망하듯 일본으로 떠난 부여왕 의려와는 달리, 꽤많은 신민과 군사들을 데리고 도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신기]에서 숭신천황은 왜국을 통일하기 위하여 사도장군四道將軍을 파견하는데, 그 사도장군들 모두가 중국식 인수印綬를 가졌으므로, 이전까지 왜국의 형편과 비교되지 않는 선진 문명의 증거이다.

 

의라依羅에게는 국새國璽가 있었다. [진서晉書]에 소개된 부여의 예왕지인穢王之印이다. 이 예왕지인, 줄여서 예인穢印이라고 불러서,[일본서기]에서 숭신천황의 이름자로서 이니예印惠가 기록되었던 것이다.

 

숭신천황 이름의 발음은 “이ㄴ예”로서 우리말에서 뒤집힌 것을 고려하면 예인과 일치한다. 또한 중국 발음으로 예(穢huÌ)와 혜(惠huÌ)가 일치한다.

 

게다가 의라(숭신)왕이 왜국 땅에 쌓은 첫 번째 제방을 의망지依網池라고 한다. 의라依羅의 라羅는 새그물이라는 뜻이 있는데 바로 그물 망網과 호환互換되는 한자이다. 천라지망天羅之網, 혹은 망라網羅라는 단어가 그 예다.

 

일본 발음은 망網과 라羅를 똑같이 “아마”라고도 읽는데 훈과 발음이 같은 것이다. 따라서 본래 이름은 의라지依羅池인데 후에 의망지依網池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의망지 유적지依網池跡에는 대의라신사大依羅神社가 남아있으니, 대의라신사 의망지적大依羅神社 依網池跡이라고 한다.

 

의라신사의 의망지적비

 

숭신천황이 만든 의망지 위에 훗날 의라신사를 세운 것이므로, 숭신천황이 부여 의라왕인 것이 다시 확인된다.

 

숭신천황은 나라의 기근으로 인하여,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가야계 아마테라스天照大神와 백제계 구수대왕倭大國魂神과 대물주신大物主神을 동시에 제사 지냈다. 즉 토착 백제세력을 선무한 것이다.

 

숭신천황은 국가적으로 호구 조사를 처음 실시하고 그에 따른 과역을 부과한 최초의 왕이다. 또한 그의 도읍을 처음으로 제도帝都라고 하였다.

 

숭신천황 말년에 임나국任那國에서 소나가시치蘇那曷叱智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숭신기]에서 임나는 축자국筑茨國과 2000리 떨어져 있고, 임나의 북쪽에 바다가 있으며 신라의 서남에 있었다고 하였다. 즉 대마도다.

 

대마도에 인위가라仁位加羅가 있었고 최초의 임나가라였다. 인위仁位의 우리말 발음 이뉘가 숭신천황의 우리말식 이름 이니예와 같기 때문이다.

 

[수인천황기]에서는 이 임나인 소나가시치가 조공하러 와서 왜왕을 자칭하는 이쓰쓰히고伊都都比古(이도국의 왕)에게 억류되었다가 수인천황을 찾아오게 되었다. 대마도는 이미 숭신천황의 영토였고, 수인천황 천일창은 시마네현 동쪽 단마국但馬國에 있었다. 이쓰쓰히고伊都都比古는 축자筑紫의 숭신천황이었을 것이며 숭신천황의 사자로서 천일창을 회유하러 찾아간 것이 된다.

 

훗날 고구려가 대마도를 치고 임나연정을 설치하였다.

 

위를 종합하면 의라왕이 왜국 땅에 오면서 도중에 대마도를 중심으로 임나를 건설하였고 얼마 후에 사도장군을 파견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고 천황이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반도의 가야국이 어느날 갑자기 임나가라任那加羅라고 주장되는 것이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인데, 그 근원을 숭신천황에게서 찾을 수 있다.

 

임나대마도와 가라국은 원래 별개였고, 임나를 인위가라, 혹은 임나가라라고도 하였을 뿐이며, 이는 부여의 의라왕이 일본 땅에 도래하면서 중간 기착지에 명명한 지명이다.

 

이 이름이 확산되어 한반도 남부까지 임나가라로 발전한 것이다.

 

[고사기]에서 의라(숭신)왕에 이르러 왕의 서거연도를 처음으로 기록하였는데 무인년 12월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318년 12월에 해당하며 숭신천황 고분의 묘지 기록 무인년 12월 7일과도 일치한다.

 

의라의 요하 서쪽 부여국왕 즉위는 모용외에게 부왕이 침탈을 당한 285년경이었고, 동천東遷하여 요하 동북쪽의 의려국 고지 의로에서 개국하여 있다가 수년간 준비하여 298년부터 도일하게 되었다.

 

일본의 숭신(의라)왕기는 서기 300년에서 318년까지다.

숭신천황의 서거년인 318년에 대혼란이 있다.

 

318년 3월에 비류대왕의 아들이자 근구수대왕의 쌍둥이 형인 오호우스大碓命가 24세로 전사했다. 백제의 일본 탈환 전쟁이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318년 6월에 백제 정벌군의 대장이자 비류대왕의 태자인 이호키노이리히코五百木入日子命가 전사했다. 이는 뒷장에 자세하다.

 

318년 10월에는 대물주신 효안천황의 부인이었던 야마토모모소가 죽었는데 그녀를 위해 거대한 전방후원 고분이 세워졌다. 백제계가 다시금 득세한 것이다.

 

마침내 318년 12월에 숭신천황이 죽음으로서 부여계의 일본천황 시대는 종막을 고한다.

 

조작된 일본 역사에서는 수인천황이 숭신천황의 아들로서 이어가지만 실제 수인천황은 가야계 천일창이었으므로 숭신천황의 아들도 아니고 숭신천황보다도 선대이다.

 

(주) [대원일통지]에 기록된 발해 모미현慕美縣은 중국 심양시 서북쪽 삼도강자진三道崗子鎭으로 추정한다. 현지 지명 랑미포狼尾浦가 마미(馬尾, 磨米)의 후신으로 추정된다. 숭신천황의 고향 이름이 바로 이 만주의 임나, 미마나彌摩那였던 것이다.

 

(주) 한편 의라왕의 옥저 이주로 인한 동천東遷은 고구려나 백제가 달가와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의라국은 철령시 의로에도 오래 있지 못하고, 역시 일본으로 떠나서 일본을 평정하고 왕이 되었다.

 

(주) 실제로 서기 298년경 백제 책계대왕의 전사는 맥인貊人과 한인漢人의 침입 때문이었으므로 바로 의라왕과의 전쟁 결과로 추정된다.

 

의라왕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라와도 교류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기 300년경 [삼국사기] 신라 기림왕基臨王 때 기사에서 낙랑,대방 양국樂浪帶方兩國이 귀복하였다는 것이다. 본래 낙랑 지방은 의라국이 세워져 있던 만주이다.

 

그런데 의라의 남천으로 한반도 남해안 일대에 새로운 낙랑(=낙안읍樂安邑, 순천시順天市), 대방(남원시南原市)이 생겨났던 것이고, 즉 서기 300년에 의라왕이 일본으로 건너가다가 한반도 남부 가야에 일부 영토를 잡고 뿌리내린 것이다. 따라서 그의 도일 시기도 300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