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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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응신천황이 된 근구수대왕과 신공황후

자연정화 2018. 7. 23. 15:06

9장. 응신천황이 된 근구수대왕과 신공황후

應神天皇 近仇首大王과 神功皇后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148

 

 

1. 근구수대왕 응신천황

近仇首大王 應神天皇

 

[記]品陀和氣命 /[紀]譽田別尊

 

백제 근구수대왕은 왕자 시절에, 일본에 건너가서 성무천황의 반란을 평정하고 362년에 응신천황이 되고, 성무천황의 후비인 야가하에히메를 취하여 아이부인으로 삼고, 야가하에히메가 침류대왕을 임신하니 태중에서 삼한왕, 즉 대마도왕으로 임명하고 5세에는 왜왕으로 임명한다.

근구수대왕은 백제로 돌아가서 태자가 되고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고구려 평양성(압록강)에 달려가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마침내 백제대왕이 되었다가 383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예전천황이 되었다.

제 15세 천황이 된 응신천황應神天皇(320~394)은 백제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이다.

 

근초고대왕이 백제 본토에서 처음 낳은 아들이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311~374)이고 두 번째 낳은 아들이 백제 근구수대왕으로서 호무다와케品陀和氣命(320~394)다.

 

근초고대왕이 도일한 것은 318년 그의 쌍둥이형인 오호우스大碓命의 죽음과 관련되어 그 뒤로 고려된다.

 

동경東京 신내천神奈川의 한천寒川에 위치한 [대신총大神塚]에는 응신천황의 형이라는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311~374)가 묻혀있다.

 

그는 311년에 태어나 64세로 374년에 죽었는데 근초고대왕의 장자다.

 

호무야는 호무가와漢川에서 유래된 말로 고려되며, 백제의 한수漢水, 즉 평양 대동강을 의미한다. 현재 대신총이 있는 곳의 지명이 한천寒川이다. 한漢이나 한寒은 크다는 뜻의 우리말이고 또 같다는 뜻의 한은 대동강과 뜻이 같다.

 

근초고대왕이 333년 일본정벌을 마치고 백제로 돌아갈 때에, 장자인 호무야화기品夜和氣命가 도꾜東京의 왕이 되었던 것으로 고려된다.

 

본래 응신천황은 호무다천황譽田天皇이라고도 하는데, 호무타화기品陀和氣命(320~394)이고 백제 근구수대왕이다.

 

응신천황應神天皇(재위 362~367)과 호무다천황譽田天皇(재위 383~394) 두 개의 이름이 존재하는 까닭은 그가 두 번이나 천황을 지낸 것을 의미하고

 

응신천황으로서는 362년부터 367년이고, 예전천황으로서는 383년부터 394년까지다.

호무다品陀는 한전漢田, 즉 근초고대왕 이래 백제 수도 한산漢山을 의미한다.

 

호무다천황릉에 해당하는 오사까大阪 예전어묘산譽田御墓山에는 근구수대왕이 묻혀있다. 320년에 태어나 394년에 75세로 죽었다.

 

호무야화기(311~384)와 호무타화기(320~394) 근구수대왕의 모후는 밝히기 어렵다. 더욱이 그 이름으로 보아서 평양 대동강의 한수, 한산에서 태어났으니, 백제 본토의 근초고대왕 황후 태생일 것이다.

 

근구수왕자는 362년 성무천황을 물리치고 나서, 성무천황의 황비였던 신공황후神功皇后를 만나 백제 본토로 데려갔다.

근구수왕자는 신공황후를 후비로 삼아서 아이부인阿爾夫人이라 부르고 성무천황의 군대를 빼앗아 신라 정벌에 동원하였다.

 

근구수왕자는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침략을 막고, 371년 고구려 북쪽의 평양성을 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371년 백제 근초고대왕은 지금의 평양 한산성 안학궁으로 천도하였고 374년에 붕어했다.

이후 근구수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하였는데, 383년에는 왜국에 건너가서 응신천황이 되었고, 대신에 원자인 침류대왕을 백제로 보내어서 백제대왕으로 즉위하게 하였다.

 

응신천황 근구수대왕은 394년에 74세로 왜국에서 서거하였다.

근구수대왕을 모셨던 신사로 추정되는 구도신사久度神社가 남아있어서 구도신九度神과 팔번신八幡神, 주길대신住吉大神 등을 모시는데, 팔번신은 곧 침류대왕이다.

 

근초고대왕을 모시는 히라노平野神社에서 근구수대왕은 구도신九度神이라 하였다.

 

(주) 오오사까에는 백제 구수대왕의 후손이라는 3가의 신사가 있다. 오진大津신사와 가라쿠니辛國신사, 국분國分신사다. 여기서 오진大津신사는 오진應神천황과 관련되니 바로 구수대왕이었다. 응신應神을 오진이라고 읽는다.

 

오진大津신사의 기록; 特に百濟の貴須王の子孫と言われる葛井氏、船氏、津氏の三氏族が勢力を扶植していった。葛井氏は藤井寺市藤井寺の辛國神社、船氏は柏原市國分市場の國分神社、津氏は当社(=大津神社)とそれぞれ祖霊を祭っているようだが、明治以後であろうか素盞嗚尊や牛頭天王を祭る形になっている。

 

(주) 일본의 수많은 팔번신사八幡神社는 응신천황으로 잘못 알려진 침류대왕을 기리는 곳이다.

 

(주) 스미요시대사신대기住吉大社神代記에서 스미요시 대신과와 신공황후의 사통私通의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에서는 근구수대왕을 구수貴須라고 기록하였는데, 스미요시住吉 중의 뒷글자 길吉 한 글자 발음인 기사가 “貴地”와 같은 발음도 되거니와 吉을 기츠라고 읽을 수도 있다. 또 그 앞에 근(近; 큰-)을 구운炭의 의미로 적었다가 스미炭로 읽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근구수대왕을 위한 신사는 스미炭궁이어야 하는데, 같은 발음으로서 스미궁隅宮이라고 기록되었다. 응신천황, 즉 근구수대왕이 서거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는 오스미궁大隅宮은 본래 스미(炭, 隅) 요시(吉, 貴須), 즉 근구수대왕을 기린 궁이다.

 

 

2. 근구수대왕비 아이부인 신공황후

近仇首大王妃 阿爾夫人 神功皇后

 

[記]息長帶比賣命, 宮主矢河枝比賣 /[紀]氣長足姬尊, 宮主宅媛

 

왜여왕 일여의 후손으로서 성무천황의 후비가 되었던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는 미모가 뛰어나서 성무천황이 천황에서 쫓겨나자 백제 근구수태자인 응신천황을 모시고 아이부인이 되고, 근구수태자를 따라 백제로 가는 길에 신라 정벌을 구경하고 백제에서 침류대왕을 임신하여 일본으로 다시 돌아오다가 큐슈에서 출산을 한다.

응신천황에게 몸받쳤다는 뜻의 신공(神功) 황후의 격상은 이해되지만 신데렐라 신공황후의 독자적인 신라 정벌은 거짓이다.

신공황후神功皇后의 부친인 오키나가노숙녜息長宿彌命(321~384)는 개화천황開化天皇, 즉 왜여왕 일여壹與의 후손이다.

 

오키나가노숙녜의 딸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帶比賣命, 신공황후神功皇后는 혈통적으로 여제사장이 될 자격을 타고났다. 그녀의 기도에 답하고 그녀를 수호한 것이 결국 응신천황應神天皇, 즉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이다.

 

신공여황 고분 내의 명문 기록이 알려지지 않았고, 다만 조작된 [일본서기]

 

에 의한 능전陵前 기록만 있는데 289년부터 389년까지 101세나 살았다는 신화적 기록이다. 그러나 이는 아비인 오키나가노숙녜(321~384)보다 먼저 태어난 기록이라 타당하지 않고 중애천황仲哀天皇(328~379)이나 성무천황成務天皇(326~370)보다도 30여세나 많아서 그들의 황후가 될 수 없다. 신공황후의 조작된 연대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데 신공황후의 숨겨진 본신本身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 응신천황應神天皇(320~394)의 부인이 된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336~390)다. [일본서기]에서는 궁주택원宮主宅媛이라고 하였다.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도 그 근원이 와니씨和邇氏이고 오키나가씨息長氏도 그 근원이 와니씨和邇氏의 히코마쓰日子坐王으로서 똑같다.

궁주宮主는 본래 후비后妃를 의미하는 고어다. 이미 왕에게 시집간 여자다. 즉, 성무천황의 후비 신공황후에 해당한다.

 

야가하에矢河枝라는 이름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근구수대왕비 아이부인阿爾 夫人과 매우 비슷하다.

또한 신공황후는 남장을 하고 활팔찌를 차고 다녔는데 당시 활팔찌를 아예阿叡라고 불렀으니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가 신공황후다.

 

응신천황이 일본에 와서 그녀를 만나고 미모를 치하하는 노래를 남겼다.

그 노래 중에 그녀의 뒷모습은 방패楯와 같다고 하였다. 後姿は 小楯ろかも

신공황후 고분의 이름이 방패楯이 들어간 “순열릉楯列陵”이다.

 

또한 아이부인阿爾夫人은 야가하에의 족성인 와니씨和邇氏를 의미한다. 와니씨는 우리 발음으로 와이가 된다.

 

362년경에, 성무천황의 황후로 간택된 26살의 오키나가타라시히메는 결혼후에 시가국으로 물러난 성무천황과 떨어져서 오사카의 본가에 돌아와 있었고, 그후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로 불린 것이다.

 

그녀는 성무천황의 대신이었던 타케우찌노숙녜建內宿禰(266~371)를 만나서 속죄의 방법을 물었는데, 362년에 근구수왕자近仇首王子가 일본으로 와서 응신천황應神天皇이 되었다.

 

근구수왕자-응신천황은 신공황후를 보자마자 미모에 반하여 부인으로 삼았고, [삼국사기]에 근구수대왕비이자 침류대왕 모후로서 아이부인阿爾夫人으로 기록되었다.

 

[삼국사기/백제기]에 모후가 기록된 것은 이례적인 것으로서 온조대왕의 모후 소서노召西努와 구이신왕의 모후 팔수부인八須夫人, 그리고 아이부인 단 셋이다. 아이부인과 팔수부인은 일본 출신이라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고사기]는 신공황후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를 만나서 따르게 된 것을 강신降神으로 기록해 놓았다.

 

신공황후는 성무천황이 가졌던 일본의 중심인 오사카大阪 대화大和의 영토를 다시 찾으려 하였으므로, 근구수왕자를 따라 백제로 가서 침류대왕枕流大王(363~422)을 임신하였다.

 

신공황후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던 길에 후쿠오까福岡에서 침류대왕을 낳았다.

그녀가 임신한 상태에서 혼자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것은 조작이다. [삼국사기]에서 363년경 “음력 여름 4월”에 신라에 왜병이 쳐들어왔지만 [신공황후기]는 겨울 10월에 공격하여 12월에 돌아와 출산했다.

 

여름夏과 겨울冬, 4월과 10월은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이다. 또 신라가 겨우 복병 1000명으로 물리치는 정도의 작은 침입이었다.

 

실제 가능한 사실은 응신천황인 근구수왕자가 4월에 동해안 항로를 이용하여 함흥의 백제 땅으로 귀환하는 길에 신라를 들리고 백제로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근구수왕자와 함께 백제로 갔다가 임신하여 혼자 12월에 규슈로 돌아온 것이다.

 

그녀가 출산한 곳은 규슈九州 후쿠오카福岡의 우미팔번궁신사宇美八幡宮神社 자리로서 일본의 팔번신八幡神이자 우치천황宇治天皇이 되었던 침류왕자를 출산하였다.

 

[일본서기] 저자 사인친왕은 363년에 있었던 응신천황의 신라 침입을 신공황후의 정벌로 조작하기 위해서 무려 백년전에 있었던 249년 신라 각간 우로 살해 고사와, 신공황후 죽은 후에 있었던 401년 미사흔 왕자 인질 제공 이야기를 모두 신공황후의 공적으로 편입시키고 후세에 믿으라고 했는데 치졸한 편찬이었다.

 

이때 신공황후는 침류대왕을 오데이왕男弟王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앞서 위대한 근초고대왕의 일본 이름이 오구나男具奈였다.

 

한편 오사카에는 중애천황의 아들들이 있었다. 중애천황과 오호나가쯔히메大中津比賣命(338~364)의 아들인 카고사카香坂王(357~386)과 오시쿠마忍熊王(360~387)가 가신들과 함께 신공황후의 오사카 입성을 방해하였다. 이들은 성무천황비인 신공황후에 반대하고 중애천황의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신공황후는 이 반란을 제압하여 두 왕자를 중애천황 곁으로 유폐보냈다.

 

363년 응신천황(320~394)의 탄생신화는 응신천황이 아니라 우치천황이 된 침류대왕(363~422)의 탄생신화다. 침류대왕은 신공황후의 뱃속에서부터 신라군과 전투를 치러서, 태어날 때에 천황의 팔뚝에 활팔찌革丙처럼 굳은 살인 륙宍이 돋아있었다고 했다. 이를 륙생완상宍生脘上이라 기록했다. 즉 굳은살 륙宍이 팔에 박혀서 침륙枕宍왕이라 했다가 뒤에 침류대왕枕流大王으로 비슷하게 고쳐진 것이다.

 

침류대왕이 날 때부터 팔에 굳은 살이 박힌 원인은, 신공황후 오기나가息長帶比賣가 전투복 차림으로 활팔찌를 차고 다닌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활팔찌는 활을 쏠 때에 왼팔에 차는 가죽 보호대다.

 

당시 활팔찌를 아예阿叡라고 불렀으니, 아예를 차고다닌 신공황후를 백제에서 아이부인阿爾婦人이라고 부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활팔찌와 같은 굳은살을 차고 나온 천황을 활팔찌를 토모革丙라고도 불러, 침류대왕을 오오토모大革丙 천황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오오토모大革丙는 그의 본 이름인 오오토男弟에서 유래되었을 수도 있다.

 

신공황후가 태자를 위해 술을 빚었다고 하는 [주락가酒樂歌]가 있다. [주락가]에서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 상세의 소어신常世小御神이 술을 내렸다고 표현했는데, 이는 백제의 근구수황태자를 가리킨다.

 

수구나미가미須久那美迦微는 수구나須久那의 어신御神으로 분석되며 수구나須久那는 초고대왕 이래의 함경도 함흥 주변 속고速古(=須久) 땅이 된다.

 

신공황후는 임신한 채로 일본에 돌아오는데 천황이 태내에 있을 때에, 천신天神이 삼한三韓의 통치권을 주었다.

 

일본에서는 한韓을 “가라”라고 읽어왔다. 그러므로 여기서 삼한三韓이란 삼가라三加羅로서 대마도다. 인위가라仁位加羅, 좌호가라佐護加羅, 계지가라鷄知加羅 삼국이다. 대마도 북도의 서북에 좌호천佐護川이 있고 대마도 북도의 남쪽에 인위천仁位川이 있고 대마도 남도의 동북에 계지천鷄知川이 있다.

 

즉, 근초고대왕과 근구수태자는 태중의 침류대왕에게 대마도를 분봉한 것이다.

 

근초고대왕은 침류대왕의 소식을 듣고 칠지도七枝刀를 만들어 보내며 왜왕 기奇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왜왕의 수호신, 혹은 임명장으로서, 백제 근초고대왕이 367년에 하사한 칠지도七枝刀가 일본에 남아있다.

 

칠지도의 명문은 아래와 같다.

 

태화 4년 [6]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강철을 백번 담금질하여 칠지도를 만들다. 능히 백병을 물리친다. 마땅히 후왕[기?]께 받치기 위해 [][][]이 만들었다. 선세이래 이런 칼은 없었다.

백자?의 세자 기奇가 태어나 (총명하게) 성음을 말하므로 (기 왕자를) 왜왕으로 봉하고, 성지를 내려 칠지도를 만들어 주셨으니 후세에게 전하라.

 

泰和 四年 [六]月十六日 丙午 正陽 造 百練(鋼)七支刀

(下)僻百兵 宜供供 侯王奇 [][][]作

先世以來 未有此刀 百慈[?]世[] 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

 

몇월인지가 정확히 판독되지 않았는데 고대 문귀 상식으로는 가장 화기火氣가 극성한 5월 병오일이 맞다. 그러면 362년이 된다.

 

그러나, 태화 원년이 되는 359년은 백제가 태화로 개원할 명분이 적다. 그러나, 364년은 60년에 한번인 갑자년甲子年이라서 개원 원년의 명분이 된다. 이렇게 추정하면 367년 6월 15일이 백제 태화 4년 6월 병오일이 된다.

 

또한 갑자년 364년에 백제 사신이 탁순국卓淳國을 통해 왜국으로 오다가 억류되어 신라로 압송된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그래서 수년 후에 백제와 왜국이 연합하여 탁순국을 비롯한 가야를 쳐서 복속시키고 새로운 교통길로 삼는다.

 

칠지도의 주인인 왜왕 기奇는 칠지도의 상감 문자에 드러난 백자국百慈國의 세자世子다. 백자국은 시가현滋賀縣이다. 백자신사白髭神社가 일본 전국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본원은 시가현에 있다.

 

신공황후의 또다른 이름인 오키나가타라시히메息長帶比賣와 관련하여, 식장천息長川은 시가현滋賀縣에 있었으니 지금의 천야천天野川이다.

 

滋賀縣坂田郡天野川(息長川)流域

즉 백자국 위치는 시가현滋賀縣이 된다.

 

363년 침류대왕 탄생과 신라 정벌, 364년 백제의 태화 개원, 그후 태화 4년 367년에 침류대왕을 왜왕으로 임명하기 위한 칠지도 제작이 맞아 떨어진다.

 

이는 다음의 증거로 다시 확인된다.

 

383년 일본의 사마숙녜斯馬宿禰가 백동 거울인 인물화상경을 만들어서 침류대왕자인 남제왕男弟王에게 바쳤다. 일본 기이국紀伊國의 유물인 우전팔번인물화상경隅田八幡人物畵像鏡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계미년 8월일, 16왕년 남제男弟왕께서 의자사가궁(오오사까)에 계시는데,

사마斯麻가 남제왕께 길이 충성하는 마음으로 개중비치와 예인금주리 2인 등을 보내어 백상동 200근을 모아 이 거울을 만들어 바칩니다.

 

癸未年 八月日 十六王年, 男弟王 在 意紫沙加宮時

斯麻 念 長奉 遣 開中費直 穢人今州利 二人等

取 白上同 二百旱 作 此竟

 

사마斯麻는 [일본서기]에서 신공황후 46년(366년)에 나오는 왜국의 신하, 사마숙녜斯摩宿禰다. 따라서 계미년은 383년이다.

16왕년은 거울 속의 남제왕의 왕 16년, 즉 즉위 16년이며 계미년이다.

 

한편 이 기록은 왜국인 사마斯麻에 의해서 왜국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남제왕男弟王은 일본식으로 읽어서 “우데”로 읽어야 하는데,

응신천황과 미야누시야가하에히메宮主矢河枝比賣의 태자는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郞子(367~396, 교정 363~422)라고 기록하였다.

 

우지宇遲의 본래 글자가 남제男弟였던 것이고 남제男弟의 차자다.

[고사기] 등에서 우지노와케宇遲能和氣는 바로 야가하에矢河枝比賣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응신천황의 부인이 신공황후인 야가하에矢河枝比賣이고 그 아들이 우지노와케인 것이다.

 

한편 [풍토기風土記]에서는 우지노와케를 우치천황宇治天皇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지노와케 석관에 기록된 367년에서 396년까지의 나이는 왜왕으로서의 재위 연대로 보면 맞는다.

 

성무천황이 천황위에서 쫓겨난 것이 362년이고, 그후 1년 뒤에 신공황후 몸에서 태어났으면 363년이 적정하다. 363년에 태어나서 367년에 칠지도를 받아서 왜왕으로 즉위하고 383년에 근구수대왕과 왜왕위를 바꾼 것이다.

 

왕자 이름 기奇에 대해서 일본의 훈독이 をか-し 오카시가 있다. 이후 일본 천황과 황자 이름에 와케(和氣)가 들어간다.

 

또한 383년 계미년에는 즉위 16년을 맞아서 우전팔번인물화상경에서 왕16년이라고 기록했다. 즉 367년에 즉위한 것이되는데, 칠지도에서 기奇를 왜왕으로 임명한 해가 태화 4년으로서 367년이었다.

 

383년 이때가 침류대왕의 나이로는 20세였으니 약관弱冠의 나이를 맞아서 사마숙녜가 선물을 올린 것이다. 혹은 일본에서 태어나 백제대왕으로 부임하게 되는 장도壯途에 오를 때에 선물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383년에 근구수대왕은 일본의 응신천황이 되고 그 아들 왜왕기는 백제의 침류대왕이 되었다.

 

(주) 화상경을 만들어 받친 사마가 응신천황의 신하였던 사마숙녜斯摩宿禰인데 백제의 사마왕인 무령왕武寧王(재위 501~523)으로 착각하고, 남제왕을 506년 즉위한 계체천황男大迹天皇으로 곡해하고 보면, 계미년은 계체천황 즉위 3년전인 503년이라서 맞지 않다. 계체천황은 오로지 응신천황이었던 근구수대왕의 5대손일 뿐이다.

 

한편 신공황후였던 미야누시야가하에는 이로도야타노와키이라쯔메妹八田若郞女(373~426)와 메토이女鳥王(376~411)을 낳았다. 370년에 성무천황이 죽었으므로, 이는 신공황후가 일본에 돌아간 이후로도 다시 백제를 왕래하였던 것이 된다.

 

응신천황은 미녀 카미나가히메髪長比賣命(378~424)를 취하려다가 아들인 인덕천황에게 주었다. 카미나가히메를 취할 때의 여자 나이가 15세는 되어야하니 393년경이 되고 이때 근구수대왕은 73세 무렵이니 거의 죽을 때였다.

 

근구수대왕과 신공황후의 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