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고구려 왕자 윤공천황과 백제 근개루대왕
11장. 광개토호태왕의 대마도 정벌과 임나연정
廣開土好大王의 對馬島 征伐과 任那聯政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093
396년 백제를 정벌한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은 400년 백제와 왜국의 신라 침공을 격파한 후 대마도를 정벌하고 대마도 임나국을 중심으로 큐슈를 포함한 임나 연방 10국을 세워 고구려에 복속시켰다.
404년 백제와 왜국이 반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406년에 고구려가 일본 큐슈에 왕자 고진을 파견하여, 고구려 직할의 임나일본부를 설치하여 큐슈를 직접 통치하고, 419년에 고진왕자는 인덕천황을 살해하고, 432년에 인덕천황의 아들 이중천황도 살해하고, 오사카에 입성하여 윤공천황이 되었다.
서기 400년 전후의 일본 역사는 [일본서기/응신천황기]에 주로 기록되어있다.
391년부터 438년까지 기록된 [응신천황기]에서 응신천황은 근구수대왕과 침류대왕, 그리고 왜찬왕倭讚王이다. 이 세 사람의 전기를 한 분의 응신천황으로 [일본서기] 저자는 조작 편찬하였다.
[응신천황기] 즉위전기 중에서 태중에서 삼한왕이 된 응신천황은 진짜 응신천황인 근구수대왕의 아들 우지노화기로서 침류대왕이며 중국 송나라 고조 유유가 되었다. 또한 침류대왕의 아들로서 왜찬왕倭讚王이 있는데, 중국 사서에서 송나라에 대한 왜찬왕의 외교 기록으로 나타난다.
왜찬왕은 413년, 421년, 425년, 430년에 중국과 교류하였다.
[응신천황기] 즉위전기 기록에서, 응신천황이 각록角鹿에 가서 게히대신笥飯大神, 氣比大神을 만나서 서로 이름을 바꾸어 예전천황譽田天皇이 되어 돌아온 기록이 있다. 게히대신은 미케쯔御食津, 혹은 이사사화대신(伊奢沙和, 去來紗大神)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예전천황이 바꾸기 전 이름은 이자사去來紗 왕자가 된다. 이자사는 당시 지명으로 추정되며 후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383년 근구수대왕近仇首大王의 도일하고서 그를 귀수왕貴須王이라고도 했으므로, 이후로 일본을 귀국貴國이라 호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사기]에서 응신천황이 갑오년 394년에 서거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고분은 415m에 달하는 전방후원고분이다. 백제 땅에서 찾을 수 없는 근구수대왕릉이 일본 중심에 화려하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응신천황의 뒤를 잇는 왜왕은 왜기왕이었던 침류대왕, 즉 우치천황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침류대왕은 산동반도에서 귀국하여 부왕의 3년상을 치렀을 것이다. 이때 산동반도는 백제 장수 벽려혼의 지배 아래에 무사하였다.
그후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의 백제 침공을 다시 당하고서 침류대왕은 왜국을 인덕천황仁德天皇에게 맡기고 전장으로 다시 떠난 것으로 본다.
396년 광개토호태왕의 백제 침공으로 인하여 국토의 절반을 잃어버린 아신대왕은 근구수대왕의 큰아들인 인덕천황에게 백제 태자인 전지왕자腆支王子를 보내어 왜국의 군사를 얻었다.
아신대왕과 인덕천황은 부왕이 같으므로 [삼국사기]에는 인질로 보냈다고 하지만 이는 김부식이 왜곡된 [일본서기]를 잘못 참조한 것이다. 아신대왕이 형왕에게 아들을 인질로 보낸다는 것이 가당치 않은 것이다.
게다가 백제를 위한 399년 대고구려 보복전쟁을 백제와 일본의 상왕上王인 침류대왕이 직접 지휘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사기]와 응신천황 고분 기록에서 근구수대왕은 394년에 서거하였다.
그러나 [일본서기 응신천황기]에는 419년의 구이신왕의 백제대왕 찬탈과 왜찬왕의 425년의 중국 교류, 그리고 427년 전지대왕이 누이 신제도원新濟都媛을 반정천황에게 시집보낸 기록이 있다. 427년은 전지대왕이 양위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해이며 비유대왕의 즉위년이다.
따라서 [일본서기]는 394년 이전의 근구수대왕, 응신천황의 기록과, 396년까지의 침류대왕 우치천황의 기록, 그리고 침류대왕의 아들인 왜찬왕倭讚王, 즉 [이중천황기]의 취주왕鷲住王, 즉 반정천황反正天皇(380~438)의 치세 기록을 [응신천황기] 하나로 묶은 것이다.
[응신천황기]의 기년起年은 신공황후(336~390)가 죽었다고 조작한 389년을 기년으로 한다. 단, 응신25년의 백제 구이신왕久爾新王의 즉위 기록은 419년의 일로서 응신원년이 395년이 기준이다. 본래 우치천황, 즉 침류대왕이 아직 살아있으므로 왜찬왕은 우치천황의 즉위년인 395년을 사용했다고 보여진다.
응신3년, 391년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의 백제 침공 때에 방어에 실패한 진사대왕에 대하여 근구수대왕은 왜국군을 보내어 백제를 도우면서 진사대왕을 잡아들였고, 대신에 근구수대왕의 막내아들인 아신대왕을 즉위시켰다.
[日本書紀] 是歲,百濟辰斯王立之,失禮於貴國天皇. 故遣紀角宿禰.羽田矢代宿彌.石川宿彌.木菟宿彌,嘖讓其無禮狀. 由是,百濟國殺辰斯王以謝之.紀角宿彌等便立阿花為王而歸.
396년, 응신8년, 아신대왕이 침미다례枕彌多禮와 동한東韓 등을 일본으로부터 뺏고, 전지왕자를 일본에 보냈다.
[百濟記] 阿花王立, 無禮於貴國. 故奪 我 枕彌多禮 及 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遣王子 直支 于天朝,
이때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은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략하여, 대동강의 평양 한성 등 58성을 빼앗고 백제왕자를 인질로 끌어갔다.
396년 [광개토왕비문]에서 고구려군이 이미 백제 왕성을 함락하였으나, 백제왕은 도망하여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려 하였다.
광개토호태왕이 진노하여 아리수를 건너고, 장수를 보내어 임시 백제 왕성인 성횡악성을 핍박하니 마침내 백제왕이 항복하고 남녀 천명과 세포 천필을 태왕에게 바치고 백제왕은 이제부터 영원히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제왕을 아량으로 용서하여 “앞서는 어리석었지만 차후로는 충성을 다할 것을 새기도록 하였다.
이때 백제의 오십팔 성과 칠백의 부락을 빼앗고 백제 장군인 백제왕의 동생과 백제의 대신 10인을 인질로 삼아 데리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廣開土好大王碑文] [][][]其國城 殘不服氣敢出[百]戰 王威赫怒 渡阿利水 遣刺迫 城橫[岳城] [百殘]便國城 而殘主因逼獻[上] 男女生口一千人 細布千匹 [歸]王, 自誓從 今以後永爲奴客 太王恩赦 先迷之愆 錄其後順之誠, 於是 取五十八城 村七百 將殘主弟 竝大臣十人 旋師還都
그러나 백제와 왜국은 반격을 하여 신라를 먼저 친다.
400년에 광개토호태왕은 보기병 오만병사를 보내어 왜군에 포위당한 신라를 구원하여도록 하였는데 남거성을 지나 신라도읍에 이르렀다. 왜구가 득실거렸으나 고구려군대는 왜적을 패퇴시켰다. 도망가는 왜구를 따라서 급히 추격하여 (대마도)의 임나가라국의 국성을 공략하니 임나가라는 항복하였다.....[중간 소멸]...
(이후 고구려 고주몽의 유신이었던 협보의 후예인) 안라인安羅人 사람으로 술병을 두어서 (큐슈를) 지키게 하였다.
[廣開土好大王碑文]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求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來背 急追之 任那加羅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於)新羅城 農城 倭寇○潰城○○○○○○○○○○○○○○○○○○○盡○(=更)隋來安羅人戌兵○○○○○其○○○○○○○言○○○○○○○○○○○○○○○○○○○○○辭○○○○○○○○○○○○潰○○○○安羅人戌兵
비문 중에 고구려 군사가 신라를 구원하고 대마도, 즉 임나가라를 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임나가라는 여러 가라 중의 임나가라로서 대마도를 가리키는데 부여 의라왕 숭신천황이 명명한 것이다.
(주) [일본서기/숭신천황기]에서 임나의 위치는 분명하게 큐슈와 신라 사이에 있는 섬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대마도다. 任那國遣蘇那曷叱知,令朝貢也. 任那者,去筑紫國二千餘禮,北阻海以在雞林之西南.
그중에서도 대마도 남도의 계지천 주변의 미진美津이 임나부 국미성 위치다.
[신찬성씨록]에서 숭신천황 때의 임나왕은 임나의 동북쪽에 사방 300리의 섬이 있고 삼기문三己汶이 있다고 하였으니 기문도己汶島가 대마도 북도다.
[계체천황기]에서 백제가 공격한 대마도 남도를 사쓰도沙都島라고 하였다. 남도인 사쓰도沙都島가 쓰시마對馬島의 중심인 것이다.
[한단고기/고구려본기]에서도 임나는 원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치소가 있었는데 국미성이라 한다. 동서에 각각 마을이 있었다.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任那에 통제되었다.
任那者 本對馬島 西北界 北阻海有治曰國尾城 東西各有落或貢或叛後對馬二島 遂爲任那所制
400년에 삼가라三加羅가 모두 고구려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모든 왜인들은 모두 임나에 통제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고구려에 직속하여 고구려황제의 칙명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 永樂十年 三加羅 盡歸我 自是海陸諸倭 悉統於任那分治十國 號爲聯政 然直割於高句麗 非烈帝所命 不得自專也
(주) 삼가라三加羅는 고구려에 속한 인위가라仁位加羅, 신라에 속한 좌호가라佐護加羅, 그리고 백제에 속했던 계지가라鷄知加羅인데 인위가라는 대마도 북도 인위천仁位川 지역이었다. 좌호가라는 대마도 북도의 북부 좌호천佐護川 지역이었다. 계지가라는 대마도 남도의 북부 계지천鷄知川 지역이는데 임나국성 국미성이 있었다. 광개토호태왕은 대마도 남도의 임나국을 취하여 10개의 왜국 분국을 연정으로 다스렸다.
고구려 임나일본부 지도
(큐슈의) 다파라국多婆羅國은 고구려인 협보狹父가 홀본에서 떠나와 마한에 살다가 패수(마한의 패수, 즉 요양시 태자하다.)를 따라 내려와서 해포에서 바다로 나아가서 큐슈 아소산阿蘇山까지 와서 정착한 곳이다.
협보를 다라파국多婆羅國의 시조라고 했다. 훗날 임나연정에 병합되었다.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육지에 있다. 다파라국을 다라한국多羅韓國이라고도 하며, 본래 홀본忽本에서 왔었고 안라국安羅國과 이웃하며 성姓이 같다고 하였다. 웅습성熊襲城을 갖고 있는데 지금의 구마모토熊本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당시 일본(지금 일본이 아니라 큐슈를 가리킨다)에는 이도국伊(都)國(후쿠오카福岡)이 있었다. 이세伊勢라고도 한다. 왜국倭國(큐슈 동쪽의 일본)과 이웃하였다. 이도국은 축자筑紫에 있었으며 곧 일향국이다.
여기서부터 동쪽은 왜倭에 속하며 그 남동은 안라安羅에 속한다.
안라는 본래 홀본忽本 사람이다. 북쪽에 아소산이 있다. 안라는 뒤에 임나(연정)에 들어갔는데 고구려와 친교를 맺었다.
[한단고기/대진국본기]日本舊有伊國 亦曰伊勢與倭同隣 伊都國在筑紫亦卽日向國也 自是以東屬於倭 其南東屬於安羅 本忽本人也 北有阿蘇山 安羅後入任那 與高句麗早己定親
윗 글을 보면 큐슈에서 후쿠오카의 이도국은 왜국의 속국이었고 이도국 외의 큐슈 여러 나라는 안라국의 속국이었다. 이 안라국이 바로 임나의 일국이었다. 다음은 같은 책에 소개된 안라국의 속국들이다.
말로국末盧國(사가현佐賀縣 북부)
남쪽에 대우국大隅國(가고시마鹿兒島)이 있다.
시라군始羅郡은 본래 남옥저인이다.(야스히로시八代市 저노국姐奴國)
남만南蠻은 중국 남부에서 온 자들이고,
비자화본比自火本(비국肥國, 화국火國, 큐슈 서북부 나가사키현長崎縣)은 변진비사벌인이다.
환하晥夏는 고구려 속노屬奴다.
왜인은 큐슈의 각 지역에 산재하여 백여국이 사는데 그중 구사한국狗邪韓國(가고시마鹿兒島 남부)이 최대이고, 구사본국인狗邪本國人들이 다스렸다. (구사본국은 거제도의 구사가야를 가리킨다.)
末盧國之南曰大隅國 有始羅郡本南沃沮人 所聚 南蠻 屠彌 晥夏 比自火本之屬皆貢焉 南蠻九黎遺種自山越來者也 比自火本弁辰比斯伐人之聚落也 晥夏高句麗屬奴也 時倭人分居山島各有百有餘國 其中 狗邪韓國最大 本狗邪本國人所治也
환하국晥夏國은 신라 4대왕 석탈해의 출신지로서, [삼국유사]에서는 완하국玩夏國이라고 하였다.
고구려에서 온 윤공천황이 큐슈에 정착하였다가 병이 들었을 때 그의 병을 치료해 준 신라 왕자 김무에게 봉해준 땅이다. 그는 아나호천황穴穗天皇 김무金武가 되었고, 봉지는 안라라국安羅羅國이라고도 하였다.
본래 신라 4대왕인 탈해왕의 출신지이니만큼 신라와 교류가 오래전부터 있었을 것이고, 고구려가 임나를 지배할 때에 이곳 신라인들은 자발적으로 협조하였을 것이니 완하국이 고구려 속노라고 한 것은 바로 신라인 거점인 것을 드러낸 것이다.
완하국 위치는 후쿠오카福岡市 서쪽 사와라구早良區 김무金武라는 마을의 도지都地 위치다. 북변에서 청동검 11자루와 철도 등 초기 철기시대 유물 고분이 다량 발굴되어 고대에 큐슈 제일의 왕도였음을 알려준다.
훗날 신라와 고구려인들이 자주 왕래하다가 거주하던 곳이며 안라국과 구별하여 안라라국安羅羅國, 혹은 신량국新良國이라고도 하였다. 지금 이름은 사와라早良區 구다. 사와라가 곧 신라 분국이다.
(주) 광개토호태왕이 설치한 임나연정 10국은 [흠명천황기]에 나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임나십국은 ①가라국加羅國(김해金海 금관가야金官伽倻), ②아라국安羅國(함안咸安 아나가야阿那伽倻), ③사이기국斯二岐國(일기도一岐島), ④다라국多羅國(합천陜川 대가야大伽倻), ⑤졸마국卒麻國(진해鎭海 탁순국卓淳國), ⑥고차국高嵯國(고성固城), ⑦자타국子他國(창녕昌寧 비자호국比自㶱國), ⑧산반하국散半下國(진주晋州 반성班城), ⑨걸손국乞飡國(큐슈九州 웅본熊本), ⑩임라국稔禮國(임나=대마도) 등 합해서 10국이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바다에 3국이 있었으니 ⑩대마도의 임례국, ③일기도의 사이기국, ⑨큐슈의 걸손국 등 3국이고
①김해의 가라국, ⑤진해의 졸마국, ②함안의 아라국 ④합천의 다라국, ⑦창녕의 자타국, ⑧진주의 산반하국 ⑥고성의 고차국이 한반도의 7국이다.
(주) [흠명천황기]는 임나국을 임례국으로 고쳤고, 큐슈의 심장이었던 안라국을 외인들에게 치욕적으로 점령당했기 때문에 걸손국이라 비하하여 바꾸었다.
졸마국은 [신공황후기]에서 진해의 탁순국인데 태첩왜성과 자마왜성이 있으며 자마왜성이 졸마국에서 비롯된 것이다.
창녕의 비자호국은 자타국으로 썼다.
고성은 본래 고차국이다. 녹국㖨國이었던 거제도가 고차국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가라는 김해의 금관가야국이고,
다라는 합천의 대가야국이고 아라는 함안의 아나가야다.
산반하국散半下國은 진주의 반성班城으로 추정된다.
백제와 일본이 광개토호태왕의 400년 대마도 침공 단한번에 굴복당할 수는 없었다. 4년 뒤, [광개토호태왕비문]에서 404년 백제와 왜국 연합군의 고구려 대방 경계 침공이 있었다. 대방 경계는 만주 위에 있다.
영락14년 404년 갑진년에 이르러, 왜국이 반역하여 배를 타고 와서 대방 땅을 침범하여 ○○○○○, 석성 등을 공격하였다.
왜적은 백제군과 연합하였다. ○○은 수군 병사들을 이끌고 평양(대동강)에 이르러 선봉군이 고구려군과 만났다. 태왕의 군사가 격퇴시켜서 왜구는 궤멸하고 무수히 죽었다.
[廣開土好大王碑文]十四年甲辰 而倭 不軌 侵入 帶方界 ○○○,○○, 石城 [爲]連船[百殘]○○率[水軍至]平穰 [倭寇先]鋒相遇 王幢 要截 湯刺 倭寇潰敗 斬煞無數
404년 이 전쟁에서 또 고구려가 이기고 백제 아신대왕阿莘大王은 또다시 퇴위되었다. 아신대왕의 고분으로 파악된 가즈라기성葛城 야시기야마屋敷山의 전방후원고분에서 424년에 서거했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아신대왕의 시호인 와카누케후타마왕若沼毛二股王 이름에서, 이고二股는 두갈래라는 말인데 눈물이 두 번, 두 줄기로 흘러내렸다는 뜻이다. 즉 진사왕의 반란 때에 이어서 두번이나 퇴위당한 이중고二重苦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응신16년, 404년에 일본에 있던 전지왕자가 백제로 복귀하여 전지대왕이 되었다. 이때 동한東韓(원산元山 추정)의 지배권을 전지왕자에게 주었고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학문을 가르치러 왔다.
역시 응신16년 백제로부터 진한秦韓의 후예인 궁월군弓月君이 인솔했던 120현민縣民을 데리고 왔다. 진한秦韓은 만주 요하遼河 하구에 있었고, 고구려의 점령 때문에 404년에 만주에서 피난해온 백제인들이다.
뒤이어서 광개토호태왕은 일본을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406년에 왕자 고진高珍을 일본 큐슈에 보내어 큐슈에 고구려 분국을 세우고 장차 윤공천황이 된다. 큐슈 임나의 안정을 위해서 407년에 광개토왕의 백제 침공이 다시 있었다.
영락17년 407년에 태왕은 보기병 오만 병사와 수군을 보내어 백제를 징벌하였다. 갑옷 일만개와 군수물자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뺏어왔다. 돌아오는 길에 사구성과 루성 나○성 등을 다시 빼앗았다.
[廣開土好大王碑文]十七年丁未 敎遣 步騎 五萬○○○○○ ○○○○師○○合戰 斬煞蕩盡 所獲 鎖鉀 一萬餘 領軍資器械 不可稱數 還破 沙溝城, 婁城, ○佳城,○○○○○○, 那○城,
이제 고구려에서 일본에 와서 윤공천황允恭天皇(393~453)이 된 광개토호태왕 왕자 고진高珍을 추적해 밝힌다.
우선 [신찬성씨록]에서 광개토호태왕의 아들이 일본에 존재해 있었음을 기록했다.
[신찬성씨록] 難波連 出自 高麗國 好太王也
이는 일본의 난파련難波連이라는 씨족이 일본에 온 광개토호태왕으로부터 갈라져왔다는 것이니, 광개토호태왕의 아들의 후손이라는 뜻이고, 그 광개토호태왕 아들이 윤공천황이다. 난파는 오사카의 항구 이름이다.
인덕12년 407년에 고구려는 인덕천황에게 사신을 보내어 철방패鐵盾와 철과녁鐵的을 보내고, 고구려인의 전통적인 활쏨시를 자랑하며 무력 시위를 하였다. 인덕천황은 이날 고구려 사신 중에서 소백수조小泊瀨造의 선조인 숙녜신宿禰臣을 보고 현유신賢遺臣이라고 불렀다. 이 현유를 사가노고리左舸能莒里로 읽으라고 기록했다.
현유신賢遺臣, 사가노고리左舸能莒里 그가 바로 고구려에서 온 윤공천황이다.
사가노고리의 사가左舸는 현賢의 고대 발음이면서, 큐슈 서북 사가현佐賀縣을 의미한다. 고리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따라서 사가의 고구려신이 된다.
고리莒里는 일본에서 현재 호로胡虜를 의미하는데 오랑캐라는 것이니 당시 고구려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숙녜신宿禰臣을 “사가의 고구려신”이라 부른 것이다.
본래 윤공천황의 시호 윤공允恭이라는 한자어는 본래 윤공狁恭, 즉 오랑캐狁인 고구려狁를 섬긴恭 천황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윤공천황의 이름 앞에 들어가는 출신지명 웅조진雄朝津과 그의 아들 웅략천황雄略天皇의 웅雄이 역시 고구려를 상징한다.
인덕 50년(431년 추정, 인덕천황이 죽은 후다.) 왜국에 기러기雁가 알을 낳았다는 기사가 있다. 기러기는 시베리아에서 번식하고 겨울을 나러 내려오는 철새로서 일본에서 알을 낳지 않는다.
그런데 왜국에서 알을 낳은 기러기 안雁은 광개토호태왕의 이름 안安에서 유래된다. 광개토호태왕의 이름은 고안高安으로 396년, 398년에 중국의 [양서梁書]와 [진서晉書]에 기록되었다. 그러면 광개토호태왕을 가리키는 기러기의 알은 마와구고숙녜間稚子宿禰, 즉 윤공천황이 된다.
기러기 안雁을 일본에서 간間으로 발음하니, 원래 그의 이름은 안치자雁稚子, 즉 기러기 새끼였을 것이다. 그런데 안雁을 일본에서 같은 발음인 간間으로 바꿔치기 한 것이다.
안치자雁-稚子는 고안高安 광개토호태왕의 어린 왕자라는 뜻이다.
윤공천황은 스스로 왜진왕倭珍王이라고 했으니 그 이름이 고진高珍이다.
윤공천황이 일본 땅에 상륙한 곳은 고구려 민족들이 먼저와서 살던 큐슈의 사가현 남부였다. 본래 고주몽의 신하였던 협보狹父가 유리왕 때에 떠나와 살던 큐슈의 다라국지多羅國地다. 훗날의 상치리上哆唎다.
현재 지명으로는 구루메시久留米市 고우라산高良山이다.
고우라산 신궁은 이중천황 원년에 지어졌다고 전한다. 대략 400년이다. 그러나 이때 이미 이중천황은 이곳에서 거지부민車持部民과 함께 밀려났다.
이중천황이 다시 반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것이 이중천황 6년에 큐슈에 거지군車持君을 보내 거지부민車持部民을 찾으려다가, 큐슈의 3신神으로부터 질책을 받았다. 거지부는 이후에 일본 동북 후쿠이현福井縣으로 옮겨졌다.
윤공천황은 큐슈 구루메시久留米市의 다라국多羅國을 고우라국高良國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큐슈에 고구려를 개국하였다.
구루메시久留米市 고량대사高良大社의 비기秘記인 [고우라사대축구기발서高良社大祝旧記抜書]에 의하면(1702년 元祿十五年 成立)
“고량대사를 세운 옥수명玉垂命은 아홉명의 아들을 낳았고
장남 사례하지斯礼賀志命는 조정朝廷의 신이 되고
차남 조일풍성朝日豊盛命이 고우라산 고무라高良山高牟礼에서 축자筑紫, 즉 큐슈를 수호하였다. 그후 누대를 상속하였다.
長男斯礼賀志命は朝廷に臣として仕え、次男朝日豊盛命は高良山高牟礼で筑紫を守護
옥수玉垂는 왜진왕 진珍, 윤공천황 고진의 진珍의 고대 일본 발음 우스宇圖를 차자借字하여 옥수玉垂로 기록한 것이다.
즉 큐슈의 구루메시 고우라대사가 윤공천황의 첫 도성이었다.
윤공천황의 장남 사례하지斯礼賀志는 [신찬성씨록]에서 대박련大狛連의 선조로서 고구려사람 이리사사례사伊利斯沙礼斯로 기록되어 있다. 동시에 한자로 일사복귀왕溢士福貴王이라고도 하였다. 윤공천황의 장자長子가 되니 태자이며 또 왕인 것이다.
[신찬성씨록]大狛連 ; 出自高麗國人 伊利斯沙礼斯也
大狛連 ; 出自高麗國 溢士福貴王也
여기서 대박련大狛連의 박狛이 동물 “이리”다. 그래서 “이리”가 박狛으로도 쓰이고 이리伊利, 혹은 일溢로도 기록된 것이다.
[고사기/윤공천황기]에서 고우라신사의 [구기발서]와 [신찬성씨록]을 합친 추론이 사실인 것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윤공천황의 장자인 목리경태자木梨輕太子는 시가詩歌에서 이려형왕伊呂兄王이라고 지칭되었다. 이려伊呂는 이리伊利와 마찬가지로 박狛인 것이고 대박련은 바로 목리경태자의 후예들인 것이다.
지금 오사카 백원시柏原市에 남아있는 대박신사大狛神社는 바로 윤공천황의 장자인 목리경태자의 태자궁太子宮이었다. 대박신사는 본래 구수왕의 후비이자 천손 니니기의 부인으로서 신무천황을 낳았던 고노하나노루木花之流姬의 신사였으니, 거기에다 태자궁을 짓고서는 이리사례태자에서 목리경태자로 칭호가 바뀐 것이다.
대박신사를 오오구마신사라고 부른다. 대고구려 신사라는 뜻이다.
구마모토熊本, 구마가와球磨川 등의 지명과, 훗날 성덕태자가 고구려왕들을 위해 세워준 고마신사許麻神社에 그 이름이 전해진다. 고마신사도 고구려 후예인 대박련大狛連 씨족의 신사가 되었는데 고려왕령신高麗王靈神을 제사지낸다. 즉 윤공천황이 모셔진 것이다. 성덕태자는 윤공천황의 궁터에다가 법륭사를 짓고 그 부근에 거처하여 살면서, 그 대신에 고안산 서쪽에 고구려왕 윤공천황의 신사인 고마신사를 세워줬던 것이다.
윤공천황의 둘째 아들은 구루메시의 왕이 되었고 고우라산高良山 신사에 그 차남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방후원고분이 남아있다.
[고사기]에 기록된 목리경태자의 마지막 노래에 고모리구노許母理久能 하쓰세波都勢라는 지명이 반복된다. 고우라산高良山의 고모라高牟礼와 고모리許母理가 같은 말인데, 일본에서는 구마라고도 하였고 구마가와, 구마모토 등의 지명을 낳았다.
구마모토熊本 동쪽에 익성益城이 남아있는데 큐슈에 윤공천황이 있을 때 만들어진 태자성으로서 이리성溢城이었을 것이다.
그외 윤공천황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중 이즈모出雲에 진출한 이리수사주伊利須使主가 후예를 많이 남겼다.
[출운풍토기]에 의하면 일치조日置造는 이즈모出雲에 뿌리내렸다.
일치조日置造; 出自高麗國人 이리수오미(오미=臣)伊利須意弥也
; 出自高麗國人 이리수사주伊利須使主[一名伊和須]
조정숙녜鳥井宿禰, 伊利須使主之後也
영정숙녜榮井宿禰, 伊利須使主男 麻弖臣之後也
길정숙녜吉井宿禰, 伊利須使主之後也
화조和造 伊利須使主之後也
도본島本 高麗國人伊理和須使主之後也
그외 일치창인日置倉人(伊利須使主兄許呂使主之後也)이 윤공천황의 중간 아들인 고리사주許呂使主의 후손이었다.
고우라신사 기록에 의하면 윤공천황은 인덕 78년에 죽고(=큐슈를 떠나 오사카로 가서 천황이 된 것이다.) 이후로 그의 장남은 대화大和의 수도로 따라가고 차남이 고량산 고려국의 제후가 된 것이다.
고구려 고진 왕자, 윤공천황允恭天皇(393~453)의 큐슈 도래 시기는 404년 백제 정벌 직후인 서기 406년이다. 윤공 14년에 인덕천황을 살해하는데 이때가 419년이므로 역산한 것이다.
그러나 윤공천황은 412년에 고구려로 다시 돌아가서 광개토대왕의 3년 국상國喪을 치르고 돌아왔다. 오고가고 5년이 걸렸으므로 그의 즉위기에서 전왕의 빈소를 5년간 차려두었다고 하였다.
고우라산 아래 일륜사日輪寺가 광개토호태왕의 빈소였을 것이다. 그 안에서 전장 50m의 전방후원고분이 발굴되었다. 석실에는 동심원同心圓의 문양이 있었다. 이 동심원, 일륜日輪이 곧 일본日本이라는 이름의 근원과 같다.
윤공천황은 416년에 다시 와서 왜찬왕倭讚王에게 교서敎書를 보내서 전쟁을 선언하고, 419년에 시코쿠四國島에서 결전을 치러서 인덕천황을 죽여서 시코쿠를 점령했다.
인덕 17년 406년(추정)에 천황은 현유신賢遺臣을 통해서 신라로부터 81척의 공물을 받았다고 하는데, 고구려 왕자 현유신, 즉 윤공천황이 신라로부터 받은 것이며 인덕천황이 받은 것이 아니다. 큐슈의 고구려분국 건국 기념 사절단인 것이다. [고사기]에 윤공천황은 신라에서 온 대사大使 파진찬 김기무金紀武에 의해서 공물도 받고 신병을 치료받았다.
此時新良國主 貢進御調八十一搜 爾御調之大使名云 金波鎮漢紀武
인덕 35년 407년(추정)에 황비 이스노히메磐之媛命(352~407)가 죽고, 그녀의 이복여동생인 야타황녀八田皇女(373~426)가 황후가 되었다.
이후 인덕천황은 숫사슴이 서리에 덮히는 불길한 꿈을 꾸었는데, 이는 사냥을 당하여 숫사슴이 소금이 발라져 통구이가 되는 꿈이라고 해석했다.
인덕 40년 411년에 근구수대왕의 딸인 자조황녀雌鳥皇女(376~411)와 준별황자隼別皇子(376~411)가 사형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 죽은 묘비에 그들이 죽은 해 간지가 기록되어 인덕천황기의 편년 해석에 확실한 기준점이 된다.
인덕 58년 416년(추정)에 고구려와 중국 동진의 사신이 왔다. 응신28년 기사와 같은 416년, 전쟁 개시 교서로 해석된다.
[윤공천황기]에서 윤공 7년에 황후가 웅략천황雄略天皇(418~479)을 낳는데, 이는 418년이다. 이때 윤공천황은 이미 황후의 두 여동생까지 후비로 삼았다. 백제 아신대왕은 404년에 패전과 동시에 퇴위하여 424년까지 살았는데, 이미 아신대왕의 세 딸을 윤공에게 포로로 잡힌지 오래였던 것이다.
인덕 65년 즉 인덕천황이 서거한 419년에 비탄국飛驒國의 숙난宿儺이 난을 일으켰다. 숙난宿儺은 활을 잘 쏘는 두 얼굴의 네 팔 달린 괴물이었다.
그러나 숙난宿儺은 오금이 없었다고 하는데 윤공천황의 신병身病으로 고려된다. 윤공천황은 잘 걷지 못하는 중병에 걸렸는데 신라의 사자가 와서 고쳐주었다. 아무튼 숙난宿儺의 난難은 비탄悲嘆스러운 숙녜宿禰 윤공천황의 난難을 의미한다.
광개토호태왕의 왕자 “사카의 고려인 현유賢遺”, 윤공천황允恭天皇 마와구고숙녜間稚子宿禰에 의해 인덕천황이 419년에 살해당한 것이다.
이를 [윤공천황기]에서는 윤공 14년에 기록하였다.
윤공천황이 담로도淡路島로 사냥가서 오호사자키男狹磯를 죽이고 진주眞珠를 얻었다. 즉 인덕천황이 가졌던 옥새玉璽를 빼앗아온 것이다. 인덕천황의 별명인 오호사자키大雀命가 윤공천황이 죽인 오호사자키男狹磯와 동일인이다.
419년 인덕천황의 사후에 대화大和에서는 이중천황履中天皇(369~432)이 즉위하였다. 당시 묵강중진왕墨江中津王(375~419)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반정천황反正天皇 (=왜찬왕倭讚王, 380~438)에게 제압되어 토평되었다.
하지만 반정천황은 대화를 이중천황에게 다시 넘겨주고, 시코쿠四國島를 수복하였다. 그리하여 반정천황의 후예가 남아서 찬기국讚岐國造과 아파국阿波國脚咋別 등의 시조가 되었다.
윤공천황은 이때 전쟁중에 병을 얻었을 수도 있다. 십여년간 큐슈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다가, 432년에 오사카에 진출하여 이중천황을 죽이고 왜진왕倭珍王, 윤공천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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