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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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백제계 다지로대왕 반정천황 왜찬왕

자연정화 2018. 7. 24. 21:32

12장. 백제계 다지로대왕 반정천황 왜찬왕

百濟係 多支鹵大王 反正天皇 倭讚王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071

 

침류대왕의 양위로 즉위한 일본 인덕천황이 399년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400년에 고구려, 신라의 침공을 당하여 대마도를 빼앗긴다.

인덕천황은 404년 다시 고구려 본토를 공격하지만 또 실패하고, 인덕천황의 아들 이중천황이 큐슈를 고구려에 탈취당하니, 410년 중국으로부터 침류대왕의 아들 반정천황이 돌아와서, 북부 해안의 국진성을 중심으로 왜국 왕권을 다시 세우고, 길비로 진출하여 왜찬왕으로 즉위하여, 411년 다지로대왕검을 만들고 413년, 421년, 425년, 430년에 중국과 교류한다.

[응신천황기]에서 응신20년 408년에 아지사주阿知使主가 일본에 왔는데, 후한後漢 영제靈帝의 4세손이라니, 중국 동진에서 사자로 건너온 것이다.

 

당시 침류대왕이 399년에 동진의 장군 유유劉裕로 변신하여 405년에 환현桓玄의 반란을 제압하고, 동진東晋의 시중侍中이 되어서 동진의 실권을 장악하였었으니 일본에 사신으로 보낸 것이다.

 

이후 응신22년, 410년에 천황이 형원兄媛을 길비의 친정에 배를 태워 보낸다. 이는 중국에 나가 있는 침류대왕이 중국에서 길비吉備로 형원과 아들 미토모와케御友別, 카무와케鴨別 형제를 원정보낸 것이다.

 

와케別(=和氣)는 백제식으로 아기, 즉 왕자를 의미한다.

이들은 길비국에 도착해서 천도현川島縣 등을 스스로 가졌는데 [인덕천황기]에서 천도현이 규룡虬의 반란지역으로 나온다.

 

이 미토모와케御友別의 여동생은 이중천황과 결혼하였다.

이 미토모와케가 바로 반정천황反正天皇(380~438)이며 왜찬왕倭讚王이다.

 

즉, 408년에 아지사주阿知使主 등이 중국에서 와서 고구려 세력을 보고하니 침류대왕이 아들 왜찬왕을 보내서 410년에 길비吉備를 중심으로 일본을 장악해 나가도록 한 것이다.

 

이후로 [응신천황기]의 세번째 응신천황은 미토모와케御友別 왜찬왕倭讚王 자신인데 [응신천황기]는 도래인인 미토모와케를 마치 천황의 신하처럼 조작하여 기록하였다. 이는 [수인천황기]에서 도래인 가야왕자 천일창이 수인천황 본인이지만 각기 다른 사람인 것처럼 조작하여 기록한 수법과 같다.

 

이 미모토와케御友別가 반정천황反正天皇(380~438), 왜찬왕倭讚王이다.

 

그 증거는 첫째, 일본 천황들의 황후를 반정천황만 황부인皇夫人으로 기록한 것이다. 부인은 [일본서기]에 드물게 나오는 백제식 칭호이다.

 

근구수대왕의 황비였던 신공황후는 아이부인으로 [삼국사기/백제기]에 기록되었고 백제 개로대왕비는 [청령천황기]에서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기록되었다. 그외 개로대왕의 모니부인慕尼夫人 등의 기록이 있다.

 

둘째, 반정천황 황부인 이름이 [고사기/반정천황기]에서 쓰노이라쓰메노미코토都怒郞女命(394~438)였다. 이는 바로 [일본서기/응신천황기] 39년, 427년 백제에서 천황에게 시집온 전지왕의 누이 신제도원新濟都媛이다.

 

신제도원新濟都媛은 백제의 새수도, 즉 신제도新濟都에서 온 여자라는 뜻이다. [응신천황기]의 도원都媛을 [고사기/반정천황기]에서 도노랑都怒郞으로 바꾼 것뿐이니 동일인이다.

 

셋째, 반정천황은 다치히미스하와케천황多遲比瑞齒別天皇이라고도 했다.

 

다지多遲, 혹은 多治는 반정천황의 출신 지명이며, 이는 광개토호태왕에게 패하여 대동강 이북을 빼앗기고 남천한 아신대왕의 새로운 수도新濟都였던 황해도 예성강변(위례성강변) 평산平山 태백산성太白山城의 옛이름이다.

 

황해도 평산은 고구려 대곡군이었는데 고구려 멸망 때에 대곡군에 한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서 서기 668년 고구려 평양성 함락 직전에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이 충청도 부여땅으로부터 대동강으로 북진하면서 대곡口한성大谷口漢城 등 2군12성을 항복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평양으로 갔다. 口가 군郡으로 추정되는데, 따라서 대곡이 있던 평산에 한성漢城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성강의 어원도 위례성강이다. 그런데 그 대곡군의 옛이름이 또한 다지홀多知忽이었다.

 

[삼국사기지리지] 大谷郡 一云 多知忽

 

인현천황仁賢天皇과 현종천황顯宗天皇의 부친父王인 이치베노오시와市邊忍齒王(416~458)의 출신지 고향이였던 시변市邊은 황해도 평산에서 예성강 건너 서쪽 토산군兎山郡에 시변리市邊里로 그 이름이 남아있다.

 

토산군은 오시함달현烏斯含達이라고도 했는데 오시烏斯는 일본에서 압押에 해당하고 달達은 반磐에 해당한다. 이치베오시와市邊忍齒王를 市邊押磐王이라고도 썼는데 토산현의 옛이름 오시함달押磐의 시변리市邊와 앞 뒤로 다 일치하니 우연이 아니다.

 

넷째 일본 동경 북쪽 사이다마현埼玉縣 도하산稲荷山의 고분古墳에서 발굴된 다지로대왕의 철검에서 보면 반정천황은 411년 신해년에 동경도東京都를 점령하고서 백련검百練刀을 만들어 왕권을 강화하였다.

 

고분에서 발견된 철검의 명분은 다음과 같다. 앞면과 뒷면에 명문이 가득 적혀 있다.

 

왜찬왕, 반정천황, 다지로 대왕의 장검과 명문 해석문

 

앞면 辛亥年七月中記乎獲居臣上祖名意冨比垝其児多加利足尼其児名弖巳加利獲居

其児名多加披次獲居其児名多沙鬼獲居其児名半弖比

뒷면 其児名加差披余其児名乎獲居臣世世為杖刀人首奉事來至今獲加多支鹵大王寺

在斯鬼宮時吾左治天下令作此百練利刀記吾奉根原也

 

위 명문의 주요 내용은 411년7월, 호카獲加-다지로多支鹵 대왕이 시키궁斯鬼宮 대왕사大王寺에 계시면서 세세에 전할 장검을 만들어서 받들어 모시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시키궁斯鬼宮은 동경도東京都 신내천현神奈川縣의 대기성산大磯城山으로 추정된다. 시키斯鬼가 기성磯城이다.

 

410년에 시작하여 411년까지 일본의 동서를 다 복속시키고, 잠시 기성산磯城山에 자리잡았던 것이 된다.

또한 이때 왜왕도 백제처럼 대왕이라 칭한 것을 알 수 있다. [신찬성씨록]의 속고대왕에서 보듯이 백제도 대왕을 칭했고 고구려도 대왕이라 하다가 태왕太王으로 한 급을 올렸다.

 

다지로대왕은 그 이름에서 나타난 것처럼 당연히 다치히미스하와케천황多遲比瑞齒別天皇이라고 했던 반정천황이다.

그리고 그가 410년에 일본에 와서 신해년 411년에 일본에서 이미 왕권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로 왜찬왕倭讚王이다.

 

다섯째, 아름다운 이빨이라는 반정천황의 수식어 서치瑞齒는 [고사기]에서 수치水齒로 기록했는데 결국 뜻이 아니라 “수치”라는 발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니, [이중천황기]에서 이중천황 후비의 오빠이면서, 길비吉備에 거주하며 괴력을 소유했던 찬기국조讚岐國祖 취주왕鷲住王을 의미한다.

 

취鷲는 “수리”라는 새를 의미하는데 이 수리왕이 수치水齒, 서치瑞齒 등으로 기록된 것이다.

동경東京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대기성산大磯城山의 서쪽에 응취산鷹取山이 있다. 순우리말로 “수리치”라는 산이었을 것이며 취주왕과 관련된다.

 

여섯째, 그가 시코쿠四國島의 찬기국조讚岐國祖 시조라 한 것은 그가 바로 왜찬왕倭讚王이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일본 혼슈와 시코쿠까지 차지한 것을 의미한다. 왜찬왕倭讚王은 찬기국讚岐國과 아파국阿波國 등의 시조가 되었다.

 

일곱째, [응신천황기] 410년의 미모토와케御友別는 432년의 미즈하와케瑞齒別, 瑞齒와 발음이 비슷하다.

 

따라서 미모토와케御友別, 왜찬왕倭讚王, 찬기국조讚岐國祖, 취주왕鷲住王, 다지로대왕多支鹵大王, 다치히미스하와케천황多遲比瑞齒別天皇, 반정천황反正天皇(380~438)이 동일인이 되는 것이다.

 

그의 출생년이 380년이고 중국에서 왔으므로, 반정천황은 침류대왕의 아들로 보여진다.

410년에 일본을 장악한 반정천황은, 411년에 다지로대왕검을 만들어 일본국인들을 복속시키고 413년에는 왜찬왕 이름으로 동진에 사자를 보내어 교류하였다.[양서梁書]

 

그가 하필 반정을 일으킨 반정천황인 이유는 인덕천황의 천하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응신28년, 416년에는, 큐슈 고구려의 윤공천황이 교서敎書를 보냈는데, 왜찬왕은 이를 찢어버렸으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417년에는 신라가 박제상을 파견하여 일본에 있던 인질 미사흔 왕자를 구출하였다. 이는 반정천황의 치세에 일어난 일인데, 이 기록은 엉뚱하게 [신공황후기] 5년에 들어있다. 왜국 장수는 박제상을 죽이고 신라의 구사라성草羅城을 정복하고 돌아왔다. 부산시 초량동일 것으로 고려된다.

 

419년 인덕천황이 시코쿠四國島에서 윤공천황의 고구려군에게 살해당하고 옥새를 빼앗겼다.

반정천황 왜찬왕은 421년에 이복형왕인 침류대왕의 송나라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기도 하였다.

 

응신37년 425년에도 중국 송나라에 아지사주 등을 사자를 보냈다. 이는 중국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응신39년 427년에 백제 전지대왕腆支大王은 누이 신제도원新濟都媛(백제 새 수도, 즉 황해도 평산 한성)을 천황에게 보냈다고 기록했다.

 

응신41년 마지막 기록인 429년 기록에 응신천황이 서거했다. 이는 430년 중국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왜찬왕의 사자와 맞물려서 429년말이나 430년 초에 길비를 윤공천황에게 뺏기고 대화로 후퇴한 것으로 고려된다.

 

큐슈와 길비를 잃어버린 이후에 왜찬왕이 중국과 교류하는 것은 뱃길이 막혀서 매우 어렵게 되었다.

 

290m에 달하는 전방후원고분인 오사카 니산자이 고분에서 발견된 반정천황 묘비에서는 그가 438년 7월까지 살았다.

그런데 이는 현재 반정천황릉으로 알려진 148m의 반정천황릉 고분이 아니라 그동안 주인이 알려지지 않은 대형 고분이었다.

 

432년, 이중천황과 전지대왕이 죽을 때에 반정천황은 대화에서 밀려나 일본의 북쪽 해안인 미야쯔시宮津市로 후퇴했다.

 

미야쯔시는 초고대왕의 막내 왕자인 해신海神이 있던 곳이다.

미야쯔시 만의 북쪽에 있는 농신사籠神社는 해부씨海部氏의 중심인데 해부씨의 선조는 또한 취주왕鷲住王이니, 즉 반정천황이 그 시조다.

 

교토(京都)에 세워진 귀선신사貴船神社는 반정천황 때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그외 몇개의 대형 전방후원분이 미야쯔시에 존재한다.

 

한편 응신천황이 서거한 곳이 오스미궁大隅宮과 아끼라궁明宮 두 군데가 나오는데 오스미궁은 구수대왕, 즉 진짜 응신천황이 서거한 곳이고, 아끼라궁은 반정천황이 윤공천황에게 쫓겨난 곳이 된다.

 

윤공천황의 궁성은 원비조궁遠飛鳥宮이라고 했는데 그와 대비되는 근비조궁近飛鳥宮이 바로 명궁明宮이며 이 곳은 훗날 윤공천황의 아들 웅략천황에게 주어졌다.

 

430년에 반정천황이 중국에 보낸 사신이 돌아와서는 왜찬왕을 못보고 대신에 새로운 천황을 보게 되는데 중국 사서에 왜진왕倭珍王으로 기록된 윤공천황允恭天皇이다. 중국에서 온 형원兄媛 등은 윤공천황의 포로가 되었다.

 

한편 404년 즉위한 백제 전지대왕腆支大王(391~432)은 일본에서 대랑자大郞子 혹은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이라고 하였다. 의부부저왕이 아신대왕의 아들이자 계체천황의 증조할아버지이기 때문에 전지대왕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전지대왕의 일본인 후예는 삼국군三國君, 파다군波多君, 식장판군息長坂君, 주인군酒人君, 산도군山道君, 축자미다군筑紫米多君, 포세군布勢君 등이 있다.

 

그외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임련林連도 전지대왕의 후손이다.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의 이름 뜻은 앞의 의부意富가 크다는 뜻의 대大를 나타내며 뒤의 부저富杵는 우리말로 보시布施 혹은 부처다. 그는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생전에 보시를 많이 하였던 것이다.

 

일본에서는 그를 전지대왕 대신에 직지왕直支王이라고도 불렀다. 그 이유는 그가 일본에 세운 절 이름인 치은사置恩寺와도 관련되고 직지直旨라는 불교 용어도 있다.

 

갈성葛城의 치은사는 의왕산醫王山, 혹은 포시산布施山이라고 부르던 곳에 있으며 치은사는 포시씨布施氏(전지대왕의 후예인 포세군布勢君과 동일)에 의하여 현재까지 1600년간 관리되어 전해내려왔다.

 

치은사 북쪽에 있는 이총고분二塚古墳이 바로 전지대왕의 고분이다. 전장 60m의 전방후원고분이며 현지에서 별명이 전취총銭取塚이다.

 

전지대왕의 이름이 붙어서 전지총銭取塚으로 아직도 고분 주인 이름이 전해오고 있는데 지금 아무도 그 전지총의 유래를 모른다. 하지만 고분의 묘비문에 나타난 의부부저왕意富富杵王이 백제 전지대왕이라는 것은 더이상 의심할 바 없으며, 비유대왕의 부왕이고 개로대왕의 조부이며 계체천황의 증조부가 된다.

 

불교에 심취한 전지대왕은 왕비가 바람이 나서 왕권을 뺏기는 수모를 당했다. [삼국사기]에서는 419년에 전지대왕이 물러나고, 구이신왕久爾辛王이 즉위하였는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419년경에 백제 장수인 목만치木滿致(木劦滿致)가 백제의 국정을 어지럽혔다.

 

목만치는 382년 왜국에 있던 침류대왕의 신하로서 신라를 쳤던 목라근자木羅斤子의 아들이다. 목만치는 전지대왕의 왕비인 팔수부인八須夫人과 통정通情까지 하였다.

 

이에 423년경에 왜찬왕, 반정천황이 목만치를 왜국으로 소환하여 백제의 혁명적 사태를 수습하였다. 구이신왕은 도주하였는데 웅략 11년(469년)에 백제에서 도망쳐온 귀신貴信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전지대왕腆支大王은 [삼국사기]와 다르게 419년에 죽지 않고, 423년경에 백제왕위에 복위復位하였다.

 

[송서宋書]의 424, 425년조에 전지대왕이 아직 살아서 백제대왕으로서 중국과 친서親書를 교환하고 있으니 복위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425년에는 침류대왕의 아들인 송나라 문제로부터 백제왕이자 진동대장군으로 승진 책명을 받았다. 같은해 왜찬왕倭讚王은 오히려 한 급 아래인 안동장군을 책명받았다.

 

따라서 427년에 전지대왕이 왜찬왕, 즉 반정천황에게 누이 신제도원新濟都媛을 시집보낼 수 있었다. 427년에 비유대왕毗有大王(412~465)이 15세로 즉위하였다.

 

윤공천황의 황후 오시카노오호나가쓰히메忍坂大中津比賣命(394~458)도 역시 전지대왕의 누이로서 반정천황의 부인이 된 신제도원과 출생년이 394년으로서 같다.

 

그러나 신제도원이 427년에 시집온 반면에 오시카노오호나가쓰히메는 418년에 웅략천황(418~479)을 출산하였다. 즉 417년 이전에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404년 고구려가 백제를 다시 정벌하였을 때에 강화를 통해서 393년생인 윤공천황에게 오시카노오호나가쓰가 백제로부터 헌납되었을 것으로 고려된다. 윤공천황은 418년에 오시카노오호나가쓰히메의 두 여동생까지 취하여 아신대왕의 세 딸을 거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