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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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장. 고구려 광개토호태왕 왕자 윤공천황 왜진왕

자연정화 2018. 7. 24. 21:34

13장. 고구려 광개토호태왕 왕자 윤공천황 왜진왕

高句麗 廣開土好大王 王子 允恭天皇 倭珍王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051

 

 

1. 인덕천황仁德天皇

 

[記] 大雀命 / [紀]大鷦鷯天皇

 

396년 침류대왕의 양위로 인덕천황이 즉위하였으나, 400년 고구려 광개토호태왕의 공격으로 대마도를 빼앗겼다. 404년 인덕천황은 복수하기 위해 고구려 본토와 신라를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큐슈를 임나연정에 빼앗긴다.

406년경 고구려에서 큐슈에 도래한 광개토호태왕의 왕자 윤공천황의 대대적 정벌에 의하여 419년 인덕천황은 시코쿠에서 옥새를 받치고 전사한다. 이후 인덕천황의 아들 이중천황이 즉위하였으나 실권이 없었고, 침류대왕의 아들 왜찬왕 반정천황이 대화를 다스렸다. 반정천황은 시코쿠를 탈환하여 찬기국조도 되고 425년, 430년에 송나라에 사자를 보냈다.

396년에 즉위한 오호사자키大雀命, 인덕천황仁德天皇(337~419)은 응신천황 근구수대왕의 서장자로서 396년에 동생 침류대왕, 우치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인덕천황의 모후는 나까즈히메中日賣命(320~386)로서 호무다노마와카品陀眞若王의 딸인데 호무다노마와카의 고분은 일본에서 발견되지 않았으니 대동강 평양 한산에 살다가 죽은 것이다.

 

백제의 중국 전쟁과 고구려 전쟁에 동원된 일본 국민들을 위해서 인덕천황은 3년간 과세를 면제하는 선정을 보였으나, 399년에는 다시 신라와의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참전으로 인하여 400년에는 신라에서 패퇴하고 대마도를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그후 큐슈마저도 고구려에 항복하여 임나연정에 속하게 되니 인덕천황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이중천황은 432년까지 살았지만 인덕천황 사후인 419년부터 424년까지 5년간 대화를 다스렸다. 그의 업적은 일본에서 가장 큰 고분인 인덕천황릉을 만든 것이며 전장全長 480m에 달한다.

 

그러나 이중천황은 즉위 당시에 황태자로서 자기 아들이 아닌 반정천황을 세워서 자신이 실권이 없는 것을 나타냈다.

 

대신에 평군목도숙녜平群木菟宿禰와 소하만치숙녜蘇賀滿治宿禰, 물부이거불 대련物部伊莒弗大連, 원대사주圓大使主 등이 조정의 국정을 맡아하였다.

 

424년경에 윤공천황과 전쟁을 치르다가 검도태자왕劍刀太子王에게 이중천황의 황후가 죽었다. 황후의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다.

 

검도태자왕劍刀太子王은 윤공천황의 태자인 목리경태자木梨輕太子(414~454)다. 이름자의 경輕이 카루로 읽고 이는 우리말 칼의 연음이 카루다.

 

이후에 윤공천황은 이중천황에게 고구려 여자를 황후로 주었다. [이중천황기]에는 황비 흑원黑媛이라고 했는데 구로히메黑媛(400~444)는 고구려의 여인이다. 구려히메句麗媛를 비슷한 발음의 구로히메黑媛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이미 인덕천황에게도 구려의 여자를 보내서 후비로 삼게 하여 역시 흑원黑媛(385~429)이라고 불렀는데 두 고구려 여인은 나이가 다르다.

 

424년부터는 이중천황이 은거하고 왜찬왕 반정천황이 직접 대화로 와서 시리궁柴籬宮에서 다스렸다.

 

425년, 왜찬왕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냈는데 큐슈의 고구려가 방해하였다. (응신37년)

427년에는 전지대왕이 누이동생인 도노랑都怒郞을 보내어 왜찬왕의 황부인으로 세우게 되었다.

 

마침내 고구려 고진왕자의 일본 대정벌이 있었다.

 

430년 왜찬왕이 보낸 송나라 사자는 돌아오다가 큐슈에 붙들려서 송나라가 보낸 4여인 중에 하나를 큐슈에 남기고 나머지 세 여자는 대화에 진입한 윤공천황에게 받쳤다.

 

 

2. 광개토호태왕 왕자 윤공천황 왜진왕 현유 고진

廣開土好大王 王子 允恭天皇 倭珍王 賢遺 高珍

 

[記] 男淺津間若子宿禰 / [紀] 雄朝津間稚子宿禰天皇

 

431년 겨울에 윤공천황이 오사카에 입성하여 왜진왕이 되어 이중천황과 백제 전지대왕을 살해한다. 윤공천황은 438년에 송나라에 왜국과 백제, 신라를 다스리는 6국제군사겸 안동대장군을 청하였으나 송나라는 안동장군 왜국왕으로 격하하였다. 패전한 반정천황의 백제 세력은 일본 북부 해안 미야쯔시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퇴각하게 되니 일본은 남북 2국이 된다.

윤공천황允恭天皇(393~453)은 고구려에서 큐슈에 온지 20여년만에 마침내 대화에 입성하였다.

 

431년에 겨울에 오사카를 점령하여 왜찬왕을 북부 해안 지방으로 몰아내고 왜진왕倭珍王이자 윤공천황이 된 것이다. 윤공천황의 침입으로 이중천황이 나라현 갈성葛城 와카사쿠라궁若櫻宮에서 432년 1월에 죽었다.

 

꼭 한달 후 432년 2월에는 갈성의 치은사置恩寺에 출가해 있던 백제 전지대왕도 살해당했다. 그는 윤공천황 황후의 오빠였다.

 

이중천황의 능은 360m에 달하는 전방후원고분이다. 전지대왕릉인 전지총은 60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432년, 왜찬왕의 백제 세력은 오사카 대화에서 북쪽 해안으로 퇴각하여 미야쯔시宮津市로 후퇴하였다. 해부씨海部氏가 있던 곳이다.

 

이후로 일본은 고구려계와 백제계의 남북 2국 정부 시대가 된다.

윤공천황의 대화 궁성은 원비조궁遠飛鳥宮이라고 하였다.

 

인덕 12년에 윤공천황, 사가노고리가 소백수조小泊瀨造의 선조가 되었다고 하는데, 대백수천황大泊瀨天皇이었던 그의 아들 웅략천황雄略天皇과 대비되는 이름이다.

 

윤공천황의 소백수小泊瀨, 웅략천왕의 대백수大泊瀨에서 백수泊瀨의 어원은 고구려어高句麗語로서 고구려 대왕을 칭하던 백수百殊에서 유래한다.

 

대백수大泊瀨는 현재 백산신사白山神社 위치로서 윤공천황의 아들인 웅략천황의 궁터로서 명일촌明日村에 있다.

 

소백수小泊瀨 혹은 백수는 윤공천황의 궁터 원비조궁은 아직까지 일본에서 밝혀내지 못했으나 이제는 찾을 수 있다.

 

인덕 50년(431년 추정, 인덕천황이 죽은 후다.), 왜국에 기러기雁가 알을 낳았다는 기사가 있다. 왜국에서 알을 낳은 기러기 안雁은 광개토호태왕의 이름 안安에서 유래된다. 광개토호태왕의 이름은 고안高安으로 396년, 398년에 중국의 [양서梁書]와 [진서晉書]에 기록되었다.

 

[고사기]에서 기러기가 새끼를 낳은 후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도노키兎村河의 거목이 서쪽으로 고안산高安山을 비추는 것이다. 즉 고안산 이름이 처음 생겨난 것을 의미한다.

윤공천황이 큐슈로부터 대화에 영토를 확장해 들어왔다는 것이다.

 

고안산高安山은 [고사기] 전체에서 오로지 이곳에만 기록되었다.

고안산高安山은 물론 광개토호태왕의 이름 고안高安에서 비롯되어 오사카大阪와 나라현奈良縣의 경계 지역, 나라현 생구군生駒郡 서남쪽에 명명된 산이름이다.

 

고안산 뒤에는 생구산生駒山이 있고, 생구군生駒郡에는, 고안정高安町, 반구정斑鳩町이라는 지명도 남겼다.

바로 이 생구군生駒郡 이름에서 고구려의 구駒가 그 땅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신찬성씨록]에서 고안하촌주高安下村主는 고구려 사람 대령高麗國人大鈴의 후예라고 했다.

역시 [신찬성씨록]에는 광개토호태왕의 아들이 일본에 존재해 있었음을 기록했다.

 

[신찬성씨록] 難波連 出自 高麗國 好太王也

 

이는 일본의 난파련難波連이라는 씨족이 광개토호태왕으로부터 갈라져왔다는 것이니 광개토호태왕의 아들의 후손이라는 뜻이고, 그 광개토호태왕 아들이 윤공천황이다. 난파는 오사카의 항구 이름이다.

 

윤공천황의 궁성은 원-비조궁,遠-飛鳥宮이라 했는데, 어리석게도 아스까飛鳥에서 먼 곳에서 궁터를 찾으니, 아직까지 궁터를 밝혀지지 못했다.

그러나 원비조는 “먼 아스까”가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새”의 궁이라는 뜻이다. 즉 멀리서 날아온 새, 기러기, 고구려를 의미한다.

 

반대로 근비조궁近飛鳥宮은 현종천황顯宗天皇이 세웠는데 가까운 데, 즉 백제서 날아온 새의 궁이 된다.

윤공천황의 원비조궁은 고안산高安山 동쪽이며, 생구산生駒山의 동남쪽인 생구군生駒郡 반구정斑鳩町의 법륭사法隆寺 터다.

 

성덕태자聖德太子가 원비조궁터에 법륭사法隆寺를 만들어서 지금 원비조궁의 궁적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의 고구려 궁터였던 법륭사에 고구려승 담징曇徵(579∼631)이 초청되어 가서 유명한 금당벽화金堂壁畵를 남겼다. 벽화는 1949년 불타고 지금은 모사품이 남아있다.

 

윤공천황은 대화 즉위 5년, 436년경에 왜국의 귀족들을 숙청肅淸하기 위하여 탐탕探湯하였는데, 이는 일본 대화大和의 숙청 과정에서 거행한 일이다.

 

탐탕을 시행한 곳은 감견좌신사甘樫坐神社다.

신사에 거석을 세워놓고 그 앞에서 끓는 물의 심판을 하였는데, 감견좌甘樫坐 거석은 우리 전래의 단군좌檀君坐가 와전된 것으로 고려된다. 단檀이 달 감甘 자로 바뀌는 일이 많다.

 

그후 438년에 윤공천황은 왜진왕倭珍王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윤공천황은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모한 등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의 봉호를 달라고 청한다.

 

都督 倭 百濟 新羅 任那 秦韓 慕韓 六國 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

 

여기서 임나는 대마도와 큐슈, 경남 해안이고 진한秦韓은 지리산 남쪽 광주光州 부근으로 고려되고, 모한慕韓은 지리산 북쪽인 익산益山 부근으로 고려된다. 변한弁韓은 변산邊山 부근의 부안扶安이었다.

 

왜진왕 직함에 감히 백제가 관할로 포함되어 들어간 것은 그가 백제계가 아니라는 반증이며 고구려인이기에 배포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백제와 혈연인 송나라는 고구려계 왜진왕에게 왜국 이외 5국에 대하여는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고 왜국왕만 내려주었다.

 

윤공천황에게는 본비로서 아신대왕의 딸인 오시카노오나가쯔히메한테서 기나시노카루태자木梨輕太子(414~454)와 웅략천황雄略天皇(418~479) 등의 아들이 있었다.

 

윤공천황은 오시카노오나가쯔히메의 동생인 타이노나가즈히메田井中比賣도 부인으로 삼았고, 또 막내동생인 후지하라노코토후시노이라쯔매藤原之琴節郞女도 부인으로 삼았다. 다른 말로 소도오시노이라쓰메衣通郞姬라고 하였는데 옷밖으로 미모가 비쳐나오는 여자였다. 당나라 때에 보이던 얇은 비단 옷을 즐겨입은 모양이다.

 

그런데 기나시노카루태자木梨輕太子가 불륜을 저질렀다.

 

태자는 자신의 이모이고 윤공천황이 가장 아끼는 후궁인 소도오시노이라쓰메依通郞姬와 사통하였다. [일본서기]에서 내란內亂이라고 기록했는데, 부왕의 첩을 건드리는 것을 중국고사에서 내란이라고 한다. [고사기]에서 동부동모同父同母 상간相姦으로 위장했지만 그들은 동부동모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윤공천황은 목리경태자에 의해 독살되었다. 마지막 기사가 천황이 먹는 국이 굳은 것인데 독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신하들은 그가 태자이므로 어쩌지 못하였다. 수나라 양제가 부왕인 문제의 애첩 때문에 문제를 목졸라 죽이고 즉위했을 때와 같은 경우다.

 

소도오시노이라쓰메依通郞姬는 윤공천황의 빈소를 지키며 곡哭을 하여야 했으나 신하들은 그녀를 시코쿠四國島의 온천으로 떠나보냈다.

목리경태자는 곧 천황이 될테니 그때까지 건강하게 잘 있으라고 위로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