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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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백제 개로대왕 왜제왕

자연정화 2018. 7. 24. 21:38

15장. 백제 개로대왕 왜제왕

百濟 蓋鹵大王 倭濟王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032

 

438년 윤공천황이 대화에서 왜진왕이 되어서 송나라에 국서를 보내 백제의 주인을 자처하니, 439년 백제 비유대왕의 아들 개로왕자는 일본 미야쯔시에 건너와서 왜제왕이 되었다.

일본 동북 지방 55국을 정벌하고, 일본 서부 66국을 정벌하여 일본을 백제계로 통일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등지의 해북 95국을 정벌하였다. 한편 453년 비유대왕이 양위하니, 개로대왕이 백제대왕으로 즉위했다.

백제 전지대왕腆支大王의 서자인 비유대왕毗有大王(412~465)은 427년에 15세로 즉위하였는데, 5년후 일본에서 출가했던 부왕이 432년에 오사카에서 고구려 왕자인 윤공천황에게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그러나 비유대왕은 431년 송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백제왕 진동장군을 제수받았고 [송서] 450년조에는, 백제 비유왕毗有王의 신하로 서하태수西河太守 풍야부馮野夫가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던 기록이 있다.

 

서하태수의 서하군西河郡은 대동강 평양 서쪽 해안에 있던 군명이니 비유왕 때 백제의 국경이 최소한 청천강까지 올라간 것이며, 455년에는 한산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평양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한편 434년에 비유대왕은 신라에 사절을 보내어 말과 매를 선물로 보내 동맹을 시도하였다. 이는 15년 뒤에 신라가 고구려를 배반하는 초석이 된다.

 

또한 비유대왕은 부왕의 복수를 위해서도 왜국에도 진출을 멈추지 않았으니 [신찬성씨록]에 비유대왕의 후손으로 불파련不破連이 있고, 비조호조飛鳥戸造가 있는데 비조호조는 비유대왕의 아들이자 개로대왕의 동생인 곤지왕의 후예이다.

 

윤공천황이 438년 4월에 대화에 있으면서 백제를 포함한 6국제군사를 자처하며 외교하였다.

그해 438년 7월에 백제계 반정천황反正天皇이 교토 북쪽 미야쯔宮津에서 서거하였다.

이때 백제 비유대왕의 태자 개로왕자蓋鹵王子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그후 개로대왕은 스스로 왜제왕倭濟王이라고 칭하면서 즉위하였다.

 

(주) [일본서기/웅략천황기]에서 기사년己巳年(429년) 개로대왕의 즉위 때에 미녀를 청하여 모니부인의 딸 적계여랑適稽女郞을 데려왔다고 하였다.

 

427년은 비유대왕이 백제대왕이 되었으니 기사년은 도무지 틀린 것이고 기묘년己卯年 439년으로 교정해서 보면 왜찬왕 반정천황의 서거 다음 해이므로 왜제왕倭濟王인 개로대왕의 즉위년이 된다. 왜제왕은 443년에 중국 송나라로 사자를 보냈다.

 

왜제왕이 개로대왕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뒤에 밝혀지는 왜무왕倭武王(462~523)이 시마왕斯麻王, 즉 백제 무령대왕武寧大王인데, 그가 일본에서 왜무왕 자격으로 478년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 증거가 들어있다.

 

국서 중에서 자신의 부왕이 개로대왕인데 이를 왜 제濟왕이라고 기록하였고, 동시에 475년 고구려에 참살당한 개로대왕의 죽음을 奄喪 父兄, 부왕과 형들의 죽음으로 기록하였다. 즉 왜제왕이 개로대왕과 동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宋書] 臣亡考 濟……奄喪 父兄……申父兄之志……

 

개로대왕의 업적에 대해서도 같은 국서에 나와있다.

 

自昔祖禰,躬擐甲冑,跋涉山川,不遑寧處.東征毛人五十五國,西服衆夷六十六國,渡平海北九十五國,

 

즉 개로대왕 때에 동정을 통해서 후쿠이현으로부터 일본 동북부의 모인국 55국을 정벌하고, 일본 중심인 서부 왜국 66국을 정벌하고, 해북, 즉 가야의 95국을 정벌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이衆夷 정벌은 일본 통일의 의미가 있다. 개로대왕의 업적인데 이는 훗날의 일로서 [웅략천황기]에서 다룬다.

 

(주) 송서에서 조녜祖禰란 부왕이 살았을 때는 부왕이라 하고, 돌아가시면 고왕이라고 하는데 사당에 모시게 되면 녜禰라고 하였다. 生稱 父, 死稱 考,入廟稱 禰.

 

개로왕자의 왜제왕 재위시에 [삼국사기]를 보면 눌지왕 때인 444년에 신라 경주를 포위한 대대적 공격이 있었다.

 

개로대왕 왜제왕은 일본 동북방의 모인국 55국을 정벌할 때에 후쿠이현福井縣에 있었다. [계체천황기]에 계체천황의 부왕이 그곳 후쿠이현 삼미국三尾國 별업別業에서 진부인振夫人의 미색을 전해 듣고 초대하여 계체천황을 낳았다. 그후 버림받은 진부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계체천황을 길렀다.

 

진히메振比賣(434~485)의 고분에 쓰인 석곽은 배 모양(舟形) 석곽으로서 매우 크고 특이한데 후쿠이현의 족우산足羽山 산정고분에 남아 있다.

 

[삼국사기]에서 개로대왕은 여자를 많이 밝혀서 도미都彌 부인을 빼앗기 위해 신하인 도미를 괴롭혔다. [삼국사기]에서 도미부인 이야기에서는 도미 부인이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그래서 도미가 화를 입고 눈이 뽑혀서 배를 타고 떠났고, 도미 부인도 배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갔다가 고구려로 갔는데 이 천성도에 대해서 [삼국사기]에서는 알 수 없는 지명이라고 했다. 천성도泉城島는 바로 오사카에 있는 지명이다.

 

웅략천황의 고분이 천성도에 있다.

 

[웅략천황기] 7년의 기사에서 예의 도미부인은 다사田狹라는 장수의 부인이었는데 다사의 부인 자랑으로 그 미모가 알려졌다.

 

천황이 듣고 다사를 대마도의 관리인 임나국사로 보내고 부인을 뺐었다.

 

단 임나국사 문제에 있어서, 실제 상황은 왜제왕인 개로대왕이 다사에게 오사카의 고구려를 치라는 것인데, 다사가 오사카 천성도에 가다가 개로대왕이 부인을 뺏었다는 만행 소식을 듣고 고구려에 귀순하고, 천성도의 고구려왕(웅략천황)으로부터 신라땅인 대마도의 관리로 임명된 것이다.

 

다사부인, 즉 백제 도미부인은 결국 개로왕자의 아들을 낳았는데, 성천황자星川皇子였다.

 

성천황자는 개로대왕의 동생인 곤지대왕 청령천황의 부임에 앞서서 선수치고 왜왕으로 즉위하려다가 곤지대왕에게 제거당했다. 즉 다사부인은 개로대왕의 후비였고 웅략천황의 후비가 아니었다.

 

다사는 이미 도미 부인에게서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천황(개로대왕)은 다사의 작은 아들 제군弟君에게 다사가 있는 신라의 대마도를 치고 백제로 가는 길을 열도록 하였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대도大島(야마구치현山口縣 있는 대도로 고려한다.)에 머물며 신라의 대마도를 치는 것을 포기하고 왜제왕 앞으로 돌아와서 결국 암살당한다.

 

즉 개로대왕의 도미부인 이야기는 [웅략천황기]의 다사 부인과 같은 이야기고 결론은 [웅략천황기]에는 개로대왕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웅략천황기]기사에서 451년 개로대왕의 큐슈정벌이 나온다. 이는 안강천황편에 있는데 결론은 백제의 큐슈 남부 일부 회복이었다.

 

이 때 왜제왕의 일본 북부 수복의 공적이 송나라에 보고되니, 송나라는 451년에 왜제왕에게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등 6국 제군사 안동장군 왜국왕의 책명을 내려주었다.

 

[일본석기日本釋記/ 상궁기上宮記]에서 개로대왕의 어머니는 모의도국조 牟義都國造인 이사모라군왕名伊斯牟良君女의 딸인 구류히메久留比賣命라고 하였다.

 

모의도국은 황해도 예성강의 우잠군牛岑郡에 해당하고, 이사모라는 이천伊川에 해당하니, 지금 지명은 금천군金川郡 우봉면牛峰面이고, 이사모라는 그 동북쪽 이천군伊川郡을 말하는데 토산군도 포함된다. 고구려 이진매현伊珍買縣이었고 토산군에 속했었다. 토산군의 서쪽에 예성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임진강臨津江이 흐른다. 임진강이 고대 이천伊川이었다.

 

개로대왕이 고구려 장수대왕의 군대에게 비명횡사하였는데, 일본에서 개로대왕릉을 만들었다. 인릉忍陵이라고 하는데, 오사카大阪府 사조철시四條畷市에서 발굴되었다. 전장 87m의 전방후원고분이다.

 

묘비에 429년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고 백제로 돌아간 것은 458년인데 이 해가 웅략천황을 굴복시킨 해이다.

 

일본에서는 백제 비유대왕을 우비왕宇斐王(412~465)으로 기록하였다. 비유왕을 뒤집은 것이다. 우비왕의 비문은 석절신사石切神社에서 발견되었으므로, 그곳에서 비유대왕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유대왕의 능을 일본에 만들지는 않았으니, 개로대왕이 평양 지방에 거대한 비유왕릉을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 욱리하, 즉 위례하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석곽石槨을 만들었는데 일본에서는 당시에 석곽이 흔한 일이었다. 욱리하는 비류강이라고도 부르는 대동강 상류다.

 

비유왕은 453년에 개로대왕에게 양위하였는데 그후 비유대왕은 교토京都에 건너와서 몇 년간 살다가 돌아간 흔적으로서 교토 동북에 비예산比叡山이라는 산 이름이 남아있다.

 

즉, 개로대왕은 백제로 복귀하기 전에 동북 지방을 정벌했고 교토京都를 차지하였다.

다만 대화大和인 오사카는 아직도 신라인과 고구려인의 세상이었다.

 

457년, 개로대왕 때에 중국 송나라에 보내졌던 백제 좌현왕左賢王 여곤餘昆이 있다. 청령천황이 된 개로대왕의 동생 곤지왕자와 동일인물로 고려된다. 453년, 개로대왕의 백제대왕 즉위 직후에 좌현왕, 우현왕 등이 이미 존재하는데 여기서 좌현왕은 일본을, 우현왕은 중국을 정벌하고 지배하는 대백제 연합체제로 추정된다.

 

개로대왕은 엄청난 정력가였던 것 같고, 변강쇠라고도 일컬어지는 가루지기전은 개로대왕의 이름자가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으로 고려된다. 가루지기전의 상대인 옹녀도 개로대왕의 백제 수도였던 평양 출생이다.

 

개로나 가루는 칼의 고어 발음이다.

개로대왕 후손 일본천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