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 백제,왜,일본

16장. 고구려계 웅략천황의 몰락과 백제 개로대왕의 일본통일

자연정화 2018. 7. 24. 21:40

16장. 고구려계 웅략천황의 몰락과 백제 개로대왕의 일본통일

高句麗係 雄略天皇의 沒落과 百濟 蓋鹵大王 日本統一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016

 

456년 신라왕자 안강천황이 암살되어 고구려 웅략왕자가 대화의 천황으로 즉위했다.

438년 국진성에서 반정천황이 죽자, 백제에서 건너온 개로왕자는 왜제왕이 되는데 동북 지방을 정벌하고 큐슈를 정벌하는 등의 맹활약을 하다가, 453년 백제로 돌아와 개로대왕이 되었다. 458년 웅략천황이 개로대왕의 딸을 불태워 죽이니 개로대왕이 다시 일본에 친정을 나와서 웅략천황을 사로잡고, 일본을 다시 통일하여 왜국의 국호를 아기쯔시마로 바꾼다.

그리고 중국 산동반도에 진출하여 세 장군이 송나라에서 태수를 받았다. 중국 강좌에 백제 거점을 만든 것이다.

 

윤공천황의 아들이자 광개토호태왕의 손자인 목리경태자로부터 신라 내물왕의 왕자 안강천황安康天皇(416~456)이 일본 대화(오사카)의 천황을 빼앗았으나, 인덕천황의 아들 오호쿠사카황자를 죽인 것이 화근이 되어서 오호쿠사카의 아들 미륜왕眉輪王에게 3년만에 암살당했다.

 

그러자 윤공천황의 아들이자 광개토호태왕의 손자인 웅략천황雄略天皇(418~479)이 456년에 즉위하였다. 웅략천황은 잔인하여 다른 형들을 다 죽이고 즉위하였다.

 

개로대왕과 웅략천황 시대

 

이때 454년 왜제왕 개로대왕은 백제로 돌아가고, 비유대왕이 교토京都에 들어와 있을 때, 인덕천황의 손자로서 이중천황의 아들인 이치베노오시와왕市邊忍鹵王이 근강近江의 시베궁市邊宮에 있었는데 북쪽 백제계와 남쪽 고구려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웅략천황은 즉위 직후 458년 3월에, 시가현滋賀縣의 근강近江으로 이치베노오시와왕市邊忍鹵王을 찾아갔다. 목적은 사냥이라고 하였다.

 

아침 운동 삼아 사냥을 권하여 함께 말을 타고 나가서 웅략천황은 이치베노오시와왕을 쏘아 죽였다. 그때 생긴 임시 고분이 시가현滋賀県 팔일시 八日市 시시베정市市辺町에 남아있다.

그리고 이치베노오시와왕의 동생인 어마왕御馬王도 8월에 잡아 죽였다.

교토의 동부를 웅략천황이 계략으로 탈취한 것이다.

 

이치베노오시와왕의 아들들, 인현천황과 현종천황은 놀라서 도망하였다. 그러나 백제계 영역인 교토로 가서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했으니, 이중천황과 그 아들 시변압반왕은 백제계와도 소원하였던 것이다.

 

이어서 백제 개로대왕에게 사신을 보내서 청하여 시집온 백제 공주를 457년에 나무에 달아서 불태웠다.

 

458년, 개로대왕은 딸이 웅략천황에게 극형으로 죽었으니 분노하였다.

개로대왕은 즉시 친정親征에 나서서 백제에서 달려왔다.

미야쯔宮津 해안에서 교토京都를 거쳐 순식간에 대화大和로 진격하였다.

나라현奈良縣 갈성산葛城山으로 도망치던 웅략천황을 협곡에서 포위하여 끝내 마주하였다.

웅략이 화살로 반격하였으나 15살의 어린 곤지왕자가 나서서 토벌하였다.

 

이 사실을 “등에虻가 개로천황의 팔을 물고, 잠자리蜻蛉가 날아와 등에를 잡았다”고 시가詩歌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등에虻는 웅략천황이고 잠자리蜻蛉는 개로대왕의 동생인 곤지왕昆支王으로서 뒤에 왜흥왕倭興王이 되었고, 청령천황淸寧天皇(=蜻蛉)(444~484)이라고 하였다.

 

시가는 매우 어렵다. 끝의 일부만 해석한다.

 

“고구려 웅략의 깃발을 쫓아와서, 마침내 만났는데 곤지왕자가 빨랐구나

은국隱國 일본 위에 나의 어검이 거침없이 아름답다.

왜국이라는 말이 오래되었으니 아기쯔시마로 국호를 바꾸노라.“

 

(원문) 다고모량이多古牟郞爾(=다카무라高牟良=雄川=許母理=koma) ; 고구려

 

아모가기도기阿牟加岐都岐(阿牟=幼武=雄略) ; 유무(웅략)의 깃발(牙旗)을 쫓아와서

회노아모원 會能阿牟袁 ; 유무를 마침내 만나니

아기두파야구비 阿岐豆(=昆支=蜻蛉)波夜具(=速)比 ; 곤지가 빨랐구나.

가구노기도加具能碁登 ; 숨은(隱) 나라터(碁=은국隱國=일본) 위에

나이오가모도那爾淤波牟登 ; 나의 어검御矛도

소라미도蘇良美都 ; 거침없이 아름답다.

야마도노구이표夜麻登能久爾表 ; 왜라는 이름이 오래되었으니

아기두지마도포阿岐豆志麻登布 ; 아기쯔시마(청령도)로 국호를 바꾸노라.

 

웅략천황은 개로대왕 앞에 무릎꿇고 빌었다. “누구이신지?”

“현인신現人神이다. 네 이름을 먼저 말하라.”

여기서 현인신은 현신現神을 의미하고 현신은 아기쓰카미로 발음한다.

 

이 아기쓰는 잠자리의 한자인 청령蜻蛉과 같은 발음이니 고대로부터 일본 열도 모습을 형상한 말이다. 일본 열도가 잠자리처럼 생겼기에 왜국을 아기쓰시마蜻蛉島라고 불렀었다.

 

즉, 청령도의 신이라고 한 것이니 개로대왕은 스스로 일본 열도의 왕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이에 웅략천황은 “저는 와카무幼武라고 합니다.”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였다.

웅략천황의 이름은 고무高武인데 반대말인 유무幼武로 낮춘 것이다.

 

“나는 히토코노누시一言主神다.” 개로대왕 일언주신一言主神은 일사주신一事主神이라고도 하였는데 말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뜻이다.

 

히토코노누시는 계체천황의 부왕인 히코누시彦主人과 동일인이다. [일본석기日本釋記/ 상궁기上宮記]에서는 한사왕汗斯王 이라고도 하였다. 한왕漢王, 또는 한성왕漢城王이라는 뜻이다. 개로대왕의 도읍은 대동강의 한성이었다.

 

[고사기]에서 웅략천황과 그의 백관은 이때 천황 복식과 관복을 벗기우고 무기를 받쳤다고 하였다. 확실하게 항복한 것이다. 즉, 왜국이 개로대왕을 섬긴다는 뜻이고 웅략천황이 왜국을 받쳤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본을 완전히 발 아래에 둔 개로대왕은 그 존호를 높여서 근개루대왕近蓋婁大王이라고도 한 것이다.

 

한편 고구려계 마지막 왕이었던 웅략雄略이라는 시호의 의미는 웅조雄朝, 고구려 왕계가 이제 끝略이 났다는 뜻이다.

 

웅략 4년 이후에 [웅략천황기]의 천황은 더이상 웅략천황이 아니니 백제계 천황이다. [웅략천황기]의 일부인 7년, 8년, 9년 기사는 개로대왕의 기록이고, 그후로는 개로대왕의 동생 곤지왕자 청령천황(444~484)의 기록이다.

 

개로대왕의 [인릉忍陵 비문]에 의하면 458년에 일본을 떠난 것이 된다.

이때 개로대왕은 곤지왕자를 데리고 귀국하였고, 이중천황의 딸인 반풍황녀飯豊皇女(~483)도 평양으로 데려갔던 것으로 추정된다.

 

461년에 곤지왕자를 일본 왜흥왕으로 내보냈는데, 이때 개로대왕의 아들인 무령대왕을 임신한 부인이 일본으로 따라왔다. 바로 반풍황녀다.

그녀는 딱 한 번 남자와 교합하여 여자의 도를 알았고, 그 한번에 임신하여 이상했지만, 이후로 평생 남자와 교합을 원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