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장. 신라 왕자 김무 안강천황
新羅 王子 金武 安康天皇
출처 : 일본사 X-file http://blog.daum.net/daangoon/13305041
431년, 고구려 윤공천황의 신하였던 신라 내물왕의 왕자 김무는 큐슈를 지키는 일본부 안라라국왕이 되었다. 그런데 450년 신라와 고구려가 신라 본토에서 분쟁이 일어나니 신라는 임나일본부에 군사를 청하고, 큐슈의 임나일본부왕 신라왕자 김무는 3명의 장군을 보내어 신라를 도와 고구려를 격파하여 고구려와 불편해진다.
그러자 곧바로 451년 백제 개로왕자의 장수들이 큐슈를 침공하지만 김무는 어렵게 이를 물리친다. 453년 오사카의 고구려계 윤공천황이 암살되니, 김무는 큐슈로부터 조문단을 위장한 신라군으로 오사카에 상륙하여 윤공천황의 태자였던 목리경황자를 죽이고, 김무 스스로 일본의 안강천황이 된다.
윤공천황은 431년경에 큐슈의 관문인 사가현의 환하국晥夏國을 신라왕자 김무金武에게 맡겨 안라라국安羅羅國이라고 하였다.
[고사기]에 의하면 김무는 본래 신라의 사자로서 건너왔으나 의술에 능하여 윤공천황의 지병을 고쳐주기도 했으므로 그를 양자養子로 삼았다.
환하국晥夏國은 신라 4대왕 석탈해의 출신지로서, 신라인들이 큐슈로 들어오던 통로다.
400년부터 고구려가 임나를 지배할 때에 이곳에 살고있던 신라인들은 본국에서처럼 고구려에 자발적으로 협조하였을 것이니, [한단고기]에서 환하국이 고구려 속노라고 한 것은 바로 신라인 거점인 것을 드러낸 것이다.
신라왕자 김무金武의 안라라국 도읍은 후쿠오카福岡市 서남방의 사와라구早良區 김무金武라는 마을의 도지都地 위치다. 김무성金武城이라고도 한다.
김무의 현재 발음은 카나타케Kanatake다.
도지都地의 북변 길무고목유적지吉武古木遺蹟地에서는 청동검 11자루와 철도 등 초기 철기시대 유물 고분이 다량 발굴되어 환하국이 고대에 큐슈 제일의 왕도였음을 알려준다. 환하국 유물은 http://inoues.net/ruins/yoshitake.html에 사진이 잘 나와 있다.
김무의 서쪽에서는 5세기 고분이 발굴되었고 신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길무고목유적지 바로 북쪽에 이이모리산(반성산飯盛山)이 있고 이이모리신사飯盛神社가 있다. 이곳이 고대 완하국성이고, 새로운 김무성은 바로 그 남쪽인 것이다.
[신찬성씨록]은 이 큐슈 신라를 안라라국安羅羅國이라고 하였다. 지금 이름도 사와라早良區다. 곧 신라斯羅다.
사와라에 흐르는 물 이름은 지미가와窒見川, 즉 실미천이다.
신라왕자 김무는 훗날 안강천황安康天皇(416~456)이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아나호穴穗 왕자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환하후晥夏侯라고 하였을 것인데 소리나는 대로 아나호천황穴穗天皇이라고 하였다.
김무는 416년에 태어난 신라왕자이므로 눌지왕訥祗王의 아들로 생각된다. 16세인 431년경에 신라 군대를 이끌고 도일하여, 고구려계 윤공천황의 백제계 반정천황 격퇴와 이중천황 살해 및 대화大和 입성에 앞장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눌지왕 당시 신라는 고구려에 복속하고 있었고, 417년에는 박제상을 파견하여 일본의 백제계 반정천황에게 잡혀 있던 인질 미사흔 왕자를 반정천황에게서 구출해왔다.
[웅략천황기] 웅략 8년의 기사는 450년의 신라 기사로서 웅략천황 때가 아니라 윤공천황 때 기록이다.
그 기사에서 [삼국사기]에서 450년에 일어난 신라와 고구려의 분쟁 기록이다. 고구려의 장수가 실직주悉直州(강원도 삼척三陟)에서 사냥을 하는데 신라인들이 습격하여 죽인 것이다.
이때 고구려인이 보복으로 신라로 쳐들어오자 [삼국사기]에서는 신라 눌지왕이 사죄하고 물러나게 하였다.
그런데 [웅략천황기]에서는 이 사건을 신라왕이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신라에 남아있는 고구려인을 일부러 죽인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고구려인이 쳐들어오니 신라왕이 임나왕任那王을 통하여 일본부日本府의 장군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일본부는 세 명의 장수를 보내 고구려와 싸우도록 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일본부日本府”인데, 임나연정의 한 부분을 일본부라 한 것이고 이는 큐슈안라국에 해당한다. 훗날 안라일본부安羅日本府라고도 했다. 따라서 일본의 어원이 고구려의 일륜사와 관련되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는 본래 대마도와 큐슈를 다스리기 위해 고구려가 만든 것으로서, 안라인, 신라인이 운영하던 것이니 일본인들의 한반도 통치기구는 될 수 없는 것이다.
즉 450년 당시에 큐슈는 고구려가 세웠던 임나 10연방국 중의 하나인 안라일본부의 지배에 있었고, 그 일본부의 왕은 아나호왕자穴穗皇子 김무金武였다.
이 안라국에 큐슈의 거의 모든 소국들, 말로국이나 저노국, 화국, 등등이 속해 있었다.
즉 신라 내물왕의 왕자인 김무가 안라일본부의 수장으로서 신라본국 부왕父王의 요청에 따라서 큐슈에 있던 일본부의 장수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치고 신라를 도운 것이다.
由是任那王 勸 膳臣斑鳩、吉備臣小梨 難波吉士赤目子, 往救新羅
위 귀절에 의하면 임나왕이 세 장수를 보냈으니 김무가 임나왕도 겸직하였다. 세 장수는 고구려군을 신라 땅에서 유인 섬멸하였고 이후로 신라와 고구려가 상반相反하였다.
450년에 신라와 고구려가 등을 졌는데 안라일본부의 아나호 김무왕자는 고구려계 윤공천황을 배반한 것이니 장차 윤공천황을 계속 속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이듬해 451년에 왜제왕倭濟王인 개로왕자는 미야쯔시宮津市로부터 큐슈의 안라일본부를 정벌하였다.
[웅략천황기] 9년 기사인데, 고구려 윤공천황은 신라의 지원이 없으면 오사카의 고구려 왜국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배반했던 큐슈임나일본부를 차마 처벌할 수가 없었다.
[웅략천황기] 9년에 천황, 즉 왜제왕인 개로왕자가 큐슈를 친정하려고 했더니 신하들이 친정을 말리고 4인의 장수가 나섰는데, 장수 이름이 기소궁숙녜紀小弓宿禰、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禰、대반담련大伴談連、소록화숙녜小鹿火宿禰 등이었으니 모두 백제 신하들인 것이다.
천황(왜제왕)은 말하기를 “신라가 신하로서 조공을 위반하고 몸이 대마도 밖까지 나와서 쥐새끼같은 발자국을 잡라匝羅에까지 드러내고 백제의 성을 뺏었으니...천벌을 가하라!”는 것이다.
新羅自居西土,累葉稱臣,朝聘無違,貢職允濟.逮乎朕之王天下,投身對馬之外,竄跡匝羅之表,阻高麗之貢,吞百濟之城.況復朝聘既闕,貢職莫脩.狼子野心飽飛,飢附.以汝四卿,拜為大將.宜以王師薄伐,天罰龔行
큐슈 정벌 사유에 신라가 백제의 성을 뺏은 것이 들었으니, 이 교지를 내린 사람은 고구려계 윤공천황이니 웅략천황이 아니라 일본 북부의 왜제왕인 백제계 개로왕자인 것이 확실하다.
이때 451년에 신라 본토가 왜국에게 피침당한 기록은 [삼국사기/신라기]에 당연히 없다.
위 글에서 대마도 밖에 있던 잡라는 큐슈의 다라국多羅國, 안라국安羅國을 통칭한다. 큐슈의 구마모토 북부 구루메시久留米市에 다라국이 있었고 안라국은 그 남쪽 녹천綠川의 일성군溢城郡에 있었고, 김무의 아나호국穴穗國은 후쿠오카 서부 사와라에 있었다.
451년 왜제왕인 개로왕자의 4인의 장수들은 신라 큐슈의 여러 군을 약탈하고, 깊숙히 들어가서 녹지㖨地까지 점령하였다.
녹국㖨國은 본래 한반도 거제도의 구사가야狗邪伽倻지만, 이 글의 녹지㖨地는 큐슈에 세운 구록口彔(=㖨), 즉 구려句麗, 고구려를 의미하며, 구마모토시 남쪽 녹천綠川의 익성益城과 관련된다. 익성은 윤공천황 아들들의 일성溢城, 즉 이리성이었고 아소산을 낀 안라국지였다.
이때 개로왕자의 정벌에서 신라왕 김무는 녹지에서 겨우 살아서 도망하였다. 안라라국왕이라고도 했던 아나호왕 김무가 패주한 것이다. 그러나 남은 큐슈의 병사들이 깊숙이 진격한 왜제왕의 4인의 장수를 다 물리쳤다. 4인의 장수 중에 두 명이 죽고 일부 땅을 뺏었다.
[웅략천황기]에서는 이때 백제왕(바로 일본에 있던 개로대왕이다.)이 패전하고, 살아남은 장수들을 불러서 장수들의 불화를 풀어주려고 장수들의 봉지를 확인해서 보여주겠으니 돌아오라고 했다.
於是, 百濟王 聞日本諸將 緣小事有隙, 欲觀國界. 請(=命의 조작)垂降臨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에 큐슈에서 전사한 기소궁숙녜紀小弓宿禰의 아들인 기대반숙녜紀大磐宿禰는 소아한자숙녜蘇我韓子宿禰를 죽였다. 결국 개로왕자, 왜제왕의 큐슈 탈환은 거의 실패하였다.
신라왕자 김무가 안라일본부의 왕으로서 입장이 모호한 이때에 마침 453년 1월 윤공천황이 독살되었다.
[윤공천황기] 24년 기록에 천황의 국물이 응어리졌다고 하였다.
御膳羹汁凝以作冰
윤공천황이 먹는 국물 속에 독이 들었던 것이다.
453년 1월 윤공천황이 죽자, 신라에서는 80척의 선단으로 조문사를 파견하였다. 신라에서 천황 조문사를 보내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들은 대마도에서부터 곡哭을 하였고, 큐슈에서도 곡을 하였고 오사카의 난파항에 도착할 때는 상복喪服으로 갈아입었다.
그러나, 이들의 상복 작전은 철저한 위장이었다. 방심하고 있던 목리경태자를 습격한 것이다. 이때 목리경태자의 군대는 카루-화살輕括箭이라는 구리촉의 화살을 사용했고 신라인들의 조문 대표인 안강천황은 아나호화살穴穗括箭을 사용했는데 철촉이었고 이후로 일본에서는 아나호화살이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신라의 김무 왕자는 제위 찬탈을 위해서 철저히 준비한 것이었다.
목리경태자는 김무 왕자의 조문 위장 습격을 당하여 신하의 집으로 숨었으나 김무 왕자는 추격하여 포위하였다.
[고사기]에서 당시 안강천황은 우박이 떨어질 때에 신하의 집에 도착하여 말했다.
“숙녜宿禰들아, 가나金가 바다 건너 왔다”
須久泥賀, 加那 斗加宜...하략下略
(須久泥=宿禰) (加那=金) (斗加宜=渡海)
두가이斗加宜는 도해渡海의 발음과 똑같다.
그러자 목리경태자를 보호하던 신하가 나와서 손을 들고 무릎을 꿇고서 몸짓儛으로 가나詞那에게 뜻을 전했다.
擧手打膝 “儛 詞那(金) 傳” ....하략下略
신하들은 다음날 안강천황에게 투항하였다. 목리경태자를 죽였는지 고구려로 보냈는지는 알수 없는데 의통랑희가 먼저 떠났던 시코쿠四國島의 아이메현愛媛県松山市姫原에 있는 카루노신사輕之神社의 전설에는 목리경태자와 의통랑희가 함께 바다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때 신라의 조문사는 대화에 무려 10개월을 머물렀다. 일본내 고구려계 도읍지에서 신라인 안강천황의 보위 승계 임무와 호위를 마치고, 10개월 후에 80척의 신라군이 돌아가면서 우네미산畝傍山(일본 천황 고분이 많이 있는 곳)에 들려서 새 소리를 듣고 노래를 하였다.
“우니미-하야, 미미-하야 / 宇泥咩-巴椰, 彌彌-巴椰”
우는 소리가 참 좋다! 귀에(耳耳=彌彌) (듣기) 좋다!巴椰(=好也)는 뜻이다.
윤공천황 아들인 웅략천황이 이 노래를 듣고 이들 신라인을 잡아다가 황실의 우네미采女를 몰래 건드리지 않았냐고 시비하여 고문하고 돌려보냈다.
안강천황은 신라 군대의 호위 없이 왜국을 다스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데, 오오쿠사카 황자大草香皇子(408~454)를 죽이고 부인을 빼앗아 황후로 세웠다.
오오쿠사카 황자는 인덕천황의 막내아들이었고, 그의 부인은 윤공천황의 장녀로서 오사다노오이라쓰메長田大郞皇女(418~462)였다.
또 죽은 오오쿠사카 황자의 딸은 웅략천황에게 시집보냈다.
윤공천황의 장녀를 김무의 황후로 세운 것은 윤공천황의 아들인 웅략천황과 윤공천황 신하들의 지지가 김무 왕권유지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강천황은 바로 그 오오쿠사카 왕자의 어린 아들에 의해 3년만에 암살당했다.
안강천황의 후예는 공왕부수孔王部首라 하였는데 그 뒤는 알 수 없다.
[신찬성씨록] 孔王部首 穴穂天皇[謚安康]之後也
그러나 안강천황의 동생이 미에현三重縣에 남아있었다.
[신찬성시록] 竹原連 新羅國 阿羅羅國主弟 伊賀都君之後也
그리고 큐슈 사와라의 김무성金武城에 그 후손들이 전해져왔다.
윤공천황의 시노산市野山 고분은 230m의 전방후원릉이고, 안강천황의 고분은 모호한 상태이나 제사는 봉래신사蓬萊神社에 모셔져 있다. 안강천황 묘비는 최근에 사이다마현埼玉縣 관원고성菅原古城에서 나왔다.
그런데 최근에 주인을 알수 없던 330m 길이의 하내대총산河内大塚山 고분에서 윤공천황의 묘지문이 발견되었다.
따라서 하내대총산 고분이 본래 윤공천황릉이 되고, 이제까지 윤공천황릉으로 알려진 고분은 안강천황릉으로 고려된다. 현재 윤공천황릉은 시노산市野山고분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 읽으면 시야산 고분이고 신라산이 되니 이는 신라 눌지왕의 왕자 김무 안강천황 신라산 고분이 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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