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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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야 왕성 실체 드러낼 8.5m 높이 토성 확인

자연정화 2018. 7. 24. 09:40

아라가야 왕성 실체 드러낼 8.5m 높이 토성 확인

 

출처 : 연합뉴스 2018. 06. 07. 박상현 기자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함안 가야읍 가야리 발굴조사

건물터·암반 구덩이·5∼6세기 토기도 발견

 

함안 가야리에서 확인된 아라가야 토성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대가야·금관가야와 함께 가야 중심세력을 형성했고 신라·백제·왜와 교류했다는 고대 국가인 아라가야(阿羅加耶) 왕성 실체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아라가야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일본서기에 '아나가야'(阿那加耶), '아야가야'(阿耶伽耶), '안라'(安羅) 같은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하나 자체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사료 연구로는 한계가 뚜렷한 상황에서 아라가야의 토목기술과 방어체계, 생활문화를 구명할 획기적 고고학 자료가 나온 것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그간 문헌과 구전을 통해 아라가야 왕궁터로 지목된 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서 지난달 시작한 발굴조사를 통해 5∼6세기 축조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토성과 목책(木柵·울타리) 시설을 찾아냈다고 7일 밝혔다.

 

성벽 성토 다짐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이번에 확인한 토성 유적은 가야 권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고 축조기법이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토성 높이는 8.5m이고, 상부 폭은 20∼40m에 이른다. 조사 구역에서 드러난 성 길이는 약 40m다.

 

흙으로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나무기둥을 설치하고, 차곡차곡 흙을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성벽 상부에는 방어시설인 목책으로 짐작되는 2열 나무기둥이 조사됐다.

 

강동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동시기 가야 토성으로는 높이가 약 4m인 합천 성산토성, 양산 순지리토성과 높이 2.8m인 김해 봉황토성이 있다"며 "다른 가야 토성보다는 확실히 크다"고 강조했다.

 

백제 왕성으로 확실시되는 풍납토성 높이가 13m이고, 몽촌토성 높이가 6m라는 점을 고려하면 가야리 토성도 왕성급 유적이라는 것이 연구소 설명이다.

 

목책과 건물터 기둥 구멍.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토성 안에서는 목책과 함께 건물터·수혈(竪穴·구덩이)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발견됐다.

 

강동석 연구관은 "바닥이 지면보다 높은 고상(高床)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건물터는 기둥 구멍 배열이 불규칙적이어서 정확한 형태와 규모를 추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사각형 구덩이.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성내에서 확인된 유적 가운데 이목을 끄는 것은 기반암을 인위적으로 파서 만든 가로 5.2m, 세로 3.4m, 높이 0.5m 구덩이다.

 

구덩이 내부에는 아궁이 위에 솥을 거는 부뚜막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있는데, 무덤을 비롯한 의례 공간에서 출토되는 통형기대(筒形器臺·원통모양 그릇받침)와 손잡이가 달린 주발, 붉은색 연질토기도 나왔다.

 

이 구덩이에 대해 연구소는 "가야 문화권에서는 한 번도 발견되지 않은 유적"이라며 "특수한 목적으로 이용된 듯하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외에도 아라가야가 봉분을 높게 만든 무덤인 고총(高塚)을 조성하고 대외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한 전성기인 5세기 중반∼6세기 중반에 제작한 토기 조각들이 나왔다.

 

목책 건물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사 지역은 1587년 편찬한 조선시대 읍지 '함주지'(咸州誌)와 일제강점기 고적조사보고에 아라가야 왕궁 추정지로 기록됐고, '남문외고분군', '선왕고분군', '신읍'(臣邑)과 같은 지명이 전하는 곳이다.

 

연구소는 "이번에 나온 토성은 아라가야에 대규모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권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며 "그동안 아라가야 유적 발굴은 고분 중심으로 이뤄졌는데, 왕성 유적이 나오면서 최고지배층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다.

 

유적 전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제공]

 

 

 

아라가야, 토성 나왔지만 왕성 전모 파악은 장기 과제

 

출처 : 연합뉴스 2018. 06. 07. 박상현 기자

 

발굴 면적 1천300㎡ 불과…"장기계획 세워 조사해야"

 

(함안=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7일 함안 가야읍 가야리에서 개최한 발굴조사 설명회에서 공개된 토성 성벽.

 

(함안=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아라가야 왕성을 발견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조사 지역 일대가 왕궁터로 알려진 만큼 중장기 조사가 필요합니다."

 

강동석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그간 문헌과 구전을 통해 아라가야 왕궁터로 지목된 경남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289번지 일원에서 진행한 발굴조사 성과를 7일 발표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날 설명회에서는 5∼6세기에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8.5m, 폭 20∼40m인 성벽과 성벽 위에서 확인된 2열 나무기둥, 건물터, 구덩이 유구(遺構·건물의 자취)가 공개됐다.

 

성벽은 나뭇가지나 잎을 올리고 태운 목탄층을 만들고, 그 위에 차곡차곡 흙을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사용해 공들여 축조한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넓은 성벽에서는 방어시설인 목책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기둥 열이 나왔고, 구덩이 유구 안에서는 인근 말이산 고분군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사한 통형기대(筒形器臺·원통모양 그릇받침)를 비롯한 각종 토기가 출토됐다.

 

연구소 측은 지금까지 가야 권역에서 조사된 토성 높이가 2∼4m였고, 성벽 축조 과정에서 목탄층이 드러난 사례가 처음이라는 점에서 아라가야 왕성 실체를 드러낼 실마리를 찾았다고 역설했다.

 

게다가 아라가야 권역에서는 말이산 고분군 같은 무덤만 조사된 상황에서 생활유적을 발견한 이번 발굴은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함안=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가 7일 함안 가야읍 가야리에서 개최한 발굴조사 설명회에서 강동석(오른쪽)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이 토기를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조사는 지난달 11일 시작해 이달 말에 종료하고, 조사 면적도 1천300㎡에 불과하다. 연구소는 건물터와 구덩이 유구 옆에 있는 미발굴 지역을 추가로 조사한다는 방침이지만, 큰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분위기다.

 

이런 측면에서 토성과 건물터 유구만으로 아라가야 왕성 실체를 확인했다고 알리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삼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장은 조사 지역 남쪽에 있는 마을을 가리키며 "저쪽에 왕궁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조사 범위를 확장하면 더 좋은 유구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목책 나무기둥 열의 연결 관계와 성벽 길이, 유구 분포 상황을 알려면 추가 조사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제는 이번 조사 지역을 포함한 주변 지역 대부분이 사유지라는 점. 연구소는 성벽 일대가 매장문화재 유존지역이어서 개발이 쉽지 않다고 설명하면서 김해 봉황동 유적처럼 연차조사를 시행하겠다는 목표를 드러냈다.

 

다만 학계에서는 문화재 당국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국정과제가 된 가야사 문화권 조사·정비에 매달려 눈앞의 성과를 내는 데 급급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고고학을 전공한 한 학자는 "아라가야 왕성 전모를 파악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며 "장기계획을 세워서 차근차근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