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침탈(侵奪)

BC 28세기 요하문명의 濊貊族이 남하 하여 夏, 商, 周를 건국하면서 황하문명을 일구었으며, 鮮卑族이 秦, 漢, 隨, 唐을 건국했습니다. - 기본주제 참조

홍익인간·인류공영/3)韓族,가야,신라

<5>지배계급 유적 왜 없을까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 베일 벗다]

자연정화 2018. 7. 23. 10:55

[잊혀진 왕국, 청도 '이서국' 베일 벗다]

<5>지배계급 유적 왜 없을까

신라의 토착세력 초토화 보복…이서국 역사 흔적도 없이 소멸

 

출처 : 매일신문 2014. 12. 17. 청도 노진규 기자

 

팔조령에서 바라본 청도 남산. 청도읍, 화양읍 시가지가 운해에 잠겨 있다. 남산은 이서국 지배계층이 신라에 패하고 일본으로 가기 전 숨었다는 은왕봉 전설과 천왕샘, 금장들, 망바위 등 이서국 관련 지명을 품고 있다. (청도군 제공)

 

신라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는 유등연지. 이서국 왕성으로 전해지는 백곡토성 바로 옆에 있다.

 

청도 화양읍 진라리 유적 발굴 현장 모습. 청도의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생활주거지와 지석묘 유적지로 발굴조사됐다. (영남문화재연구원 제공)

 

청도지역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시대 대규모 취락시설과 출토 유물로 봤을 때 이서국은 상당한 세력의 정치체제가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한시대 진한, 변한이 자리했던 지역은 지배계급의 집단분묘가 존재하며, 지배자의 위세품이 출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청도에서는 이서국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볼 수 있는 대형 고고 유적이나 금동관 등 최고급 위세품이 발견되지 않는다. 신라 수도를 직접 공격할 정도로 강성한 세력을 유지했던 이서국의 지배계급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학계에서는 이서국의 지리적 입지와 신라의 복속지역 지배 방식으로 이유를 설명한다. 이서국을 가야국 통로로 중요시한 신라가 직접지배 정책을 펴며, 토착세력에 대한 정치적 특권을 배제했다는 것이다. 청도향토사학회는 이서국 멸망 당시 끈질기게 저항한 대가로 토착세력들에 대한 철저한 해체가 뒤따랐던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시대 소규모 고분군 추정

 

이서국 당시의 대형 고총`고분이 발굴된 자료는 아직 보고된 바 없다. 비슷한 시기에 이웃이었던 경산 압독국은 임당동 고분군과 신대리 유적 발굴을 통해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경까지 집단세력의 존재가 확인된다.

 

학계는 이서국 유적의 움집과 출토 유물이 경산 임당 유적, 대구 매호동 유적에서 나온 유물과 동일한 궤적을 보이고 있어 이서국과 간접 비교연구가 가능하다고 한다. 특히 청도지역에서 이서국 시기의 목관묘(널무덤)는 발굴되지 않았으나, 이 시기에 목관묘와 목곽묘(덧널무덤) 구조로 바뀌며 비약적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도 지역에 남아있는 고분군은 대체로 삼국시대 소규모 고분군으로 지표조사를 통해 모두 43곳이 확인됐다. 현재 남아있는 상당수 고분군은 봉분이 파괴되거나 도굴되면서 훼손된 흔적이 나타난다. 이 때문에 이서국의 총체적인 변천상이나 세력 동향을 살펴보기가 어렵다. 다만 지금까지 발굴된 고분의 변천 과정이 압독국 등 다른 지역과 크게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고분군은 청도 전역에서 고루 발견되고 있으나 화양읍과 이서면을 중심으로 한 청도천 유역에 집중분포하고 있다. 이는 이서국이 신라에 병합된 이후 이 지역이 중심지가 됐음을 반영한다.

 

분포 숫자에 비해 고분 발굴 진행 상황도 미미한 편이다. 동창천 유역권은 운문면 순지리 고분군이 발굴됐고, 청도천 유역은 청도읍 원정리 고분군, 풍각면 송서리`성곡리 고분군 등이 주목을 받았다. 삼국시대 고분보다 앞선 이서국 시기의 고분군 발굴은 앞으로 청도군과 고고학계의 숙제로 남아있다. 청도군 문화관광과 관계자는 “현재 청도에 산재하는 고분군은 이서국이 신라에 통합되는 시기이거나 그 이후 시기의 고분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라의 이서국 지배 방식 영향

 

이서국에서 지배계급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 현상과 관련해 학계는 신라의 복속지역 지배 방법의 차이에 주목하고 있다.

 

신라는 당시 이서국을 통해 창녕지역과 낙동강 건너 고령, 함안 등 가야지역으로 진출하는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려 했다. 신라는 초기 영토 확장 단계에서 복속 지역을 병합한 다음 ▷의례적인 공납 등 예속에 따른 완전한 자치 허용 ▷지배세력을 신라에 맞게 재편하여 자치 허용 ▷복속지역 지배세력을 중앙으로 이주시켜 귀족화하고 원래 지역을 식읍 형태로 지급하여 지배 ▷토착세력을 완전히 없애거나 지배세력의 역할을 배제하고 직접지배하는 방식 등의 정책을 펼쳤다.

 

신라는 국력을 키우며 영토를 확장하던 단계에서는 대체로 지방세력의 자치와 권위를 인정하면서 일정한 간접지배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나 군사적 요충지이거나 신라의 지배에 심하게 저항하거나 반란을 일으킨 지역은 직접지배를 실시했다는 것이다.

 

신라는 경산 압독국의 경우 토착세력을 재편하여 자치를 허용하는 방법으로 지배했다. 임당 유적에 대형 고총고분이 있고, 신라에서 분여한 금동관이 출토되는 사례로 비추어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서국은 신라에 투항하지 않았다. 이서국은 자신들의 강한 청동기시대 배경을 믿고 신라에 비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신라 직접지배의 또 다른 배경은 이서국의 지정학적 위치와 교두보 역할 때문이다. 신라는 이서국을 병합한 이후 군대를 주둔시켜 직접지배하며, 지방의 정치적 특권이나 지배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배경이 이서국에서 대형 고총고분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로 추정된다.

 

◆정치적 단결 억제 위해 억압

 

청도향토사학회는 이서국의 고총고분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이서국 고분 파괴, 지배집단의 철저한 와해, 저항세력이 낙동강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등의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향토사학회 김태호 부회장은 이서국이 항복하지 않고 끈질기게 저항한 대가로 신라가 토착세력을 약화시키고 정치적 단결을 억제하기 위해 고분을 파괴했다는 정치적 역학관계에서 풀어보고 있다. 그는 “신라가 이서국을 병합하며 청도를 초토화하고, 고분 평탄화 작업을 했을 수도 있다”며 “당시 파헤친 고분 잔해로 추정되는 유적이 청도초교에서 청도천을 따라 뻗어 있는 능선에 3곳 정도 남아있다”고 했다.

 

향토사학회 강래업 회장은 이서국의 국력이 강력했기 때문에 신라에 복속 당시 압독국 등 다른 지역과 달리 더 철저한 지배집단의 와해로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이서국 역사가 소멸되는 아픔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대형고분이 지방 토호의 분묘라고 봤을 때 신라가 직접 거점 지배하던 이서국 지역은 토착세력의 고분을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서국이 신라와의 일전으로 멸망한 이후 지배계층이 청도 남산의 은왕봉으로 피신했다가 창녕 방면 가야에서 일본으로 갔거나, 밀양강을 따라 김해로 갔다가 일본으로 갔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은 20여 년 전 한 무리의 일본인들이 자기 조상들이 살았다는 '이사'를 찾아 청도를 방문하며 제기됐다. 일본인들은 '이사'를 신라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정하고 신라에 패한 이서국 지배층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수도 있다고 본다. 이는 문헌자료와 객관적 자료를 찾는 등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부분이다.